| 요 몇일 동안 홍사중의 《나의 논어》를 읽었습니다. 선배의 칼럼을 보고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재미있다고 해서 마음이 쉽게 동(動)하지는 않는데, 일전에 비록 문고판이기는 하지만 《맹자》와 《순자》를 읽고서 재미를 넘어 신선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어 주저없이 샀습니다.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지하철에서 오며 가며 읽기에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만 책값이 후회되지 않을만큼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홍사중의 글을 신문이 아닌 책으로 본 것은 처음입니다. 신문으로 봐도 직접 내돈 주고 산 적이 없는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니 거의 접한 적도 없고, 보더라도 처음부터 삐딱한 눈으로 봤던 게 사실입니다.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예전에 3당 야합을 할 때에도 '역사에 어느 일이나 그것이 일어날만한 까닭이 반드시 있다. 아무리 보수 합당이 불합리하고 엉뚱하게 보여도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고 얘기하면서 그 합당으로 득을 보는 건 결국 국민이라는 논조를 보고 끼워맞추기식 궤변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 이후에 그가 어떤 글을 썼는지 잘은 모르지만 여전히 김대중, 류근일과 함께 조선일보 트로이카로 불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이 책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홍사중의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홍사중의 글쓰기에서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압권은 단연 제1장 <공자를 말한다>입니다. 성인 공자가 아닌 '인간 공자'에 대해 이토록 실감있게 표현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이런 표현은 책 좀 많이 본 분들이 쓰는 말이지만 딱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두루 잡기를 익히며 생활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인 모습들 - 특히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자로로부터 쓴소리를 듣는 장면들을 보면서, 공자에 대해 논어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이 한꺼번에 허물어짐을 느꼈습니다. 2장에서 7장까지는 '지식, 군자와 소인, 처세술, 리더십, 천명과 부귀, 공자 학원과 제자들'이라는 주제로 논어와 여러 고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공자 曰 …" 이렇게 시작되는 여느 고전 해석본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자가 이해하는 공자와 논어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면서 <논어>를 인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공자와 논어, 나아가 중국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을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글은 재미있습니다. 어쩌다 길바닥에서 엿들은 것을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남에게 말하는(道聽途說) 얼치기의 허투룬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 대학 1학년 때 중국고전독해를 1년동안이나 들었고, 학점도 괜찮게 받았던 기억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 제 기억 속에는 당시 배웠던 고전의 글귀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면, 3가지 정도일 겁니다. 으뜸은 응당 저의 게으름 탓입니다. 버금은 가뜩이나 어려운 고전을 더할 나위 없이 고리타분하게 가르쳤던 교수님의 교수법도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고전의 글귀를 써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제 무식의 세 번째 원인에 대해 『나의 논어』의 저자 홍사중은 이렇게 변호(?)해 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자를 몰라도 얼마든지 유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히려 4서 5경에 통달한 유학자는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도학자일 뿐 지식인이 아니라고까지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는 도덕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면 지식인이 된다. 그러나 <논어>에 나오는 똑같은 말을 인용하면 지식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서양에 치우쳐있었다. 우리는 서구화가 바로 근대화이며 전통적인 것은 모두 근대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에 앞서 저자는 자신의 무식(?)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60세가 될 때까지 『논어』를 제대로 통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지식인이라고 자처해 왔다. 내 전공이 서양사회사상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와 같은 반성과 성찰로부터 비롯되는 책이 바로 『나의 논어』입니다. 그럼 '홍사중식 논어'의 세계는 어떨까요. 총 7장으로 구성된 『나의 논어』에서 저자는 우선 '인간 공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자를 둘러싸고 있는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공자를 너무 높은 곳에 올려놓고 추앙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저나 숱한 민초들의 무식은 순전히 그네들만의 잘못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공자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유교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대단히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철저한 신분주의를 표방한 유교로 인해 양반,상놈을 나누고 적출·서얼을 구분해 핍박하는 철저한 신분사회가 되었다는 등등... 그러나 공자가 생각했던 사대부니 군자니 현인이니 하는 것들은 그런 경직된 신분주의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단지 공자의 사상을 오독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잘못이었을 뿐입니다. 공자 자신이 서출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사생아에 가깝습니다. 공자 부모의 나이차이는 무려 40세가 넘습니다. 공자의 모는 부의 세 번째 부인이기도 합니다. 첫째부인에게서 딸만 얻고, 둘째부인에게서 불구의 아들을 얻은 공자의 부가 마지못해 들인 셋째부인이 공자의 모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공자는 어린시절을 어렵게 보내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삶의 방편이 될만한 이런저런 기술을 연마하며 자랐던 것입니다. 이 대목을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五少也賤 故多能鄙事 ['나는 젊었을 때에는 신분이 낮았다. 그래서 하찮은 일들까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孔子(기원전 552~479년. 명은 丘, 자는 仲尼). 노나라 수도(지금의 산동성) 曲阜시 昌平鄕에서 태어남. 1989년 인민일보가 공자의 생일을 '9월 28일'로 발표해 공식화됨.]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공자가 태어나 활동했던 시기가 바로 동서양의 성자와 현자들이 대거 출몰했던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공자가 기원전 552년에 태어났다면 그것은 석가가 태어난 지 13년 뒤의 일이다. 서양 최초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태어난 것은 공자가 죽은 지 10년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공자가 70세 때에 석가가 입멸했다.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활약한 것은 공자가 20대에 들어섰을 때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은 공자가 56세 때였다. 이렇게 세계의 4대 성인 가운데 세 사람이 모두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한 100년 사이에 등장했다는 것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다.” (『나의 논어』19p) 이 부분에 대해 2년전 출간돼 화제가 됐던 『예수는 神話다』(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共著, 동아일보사 刊)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 역사상 위대한 천재가 출현할 때에는 항상 집단으로 대거 출현했다 -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승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만이 5, 6세기 늦게 홀로 출현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예수 이야기는 기원전 5, 6세기에 등장하는 신화들의 연장선”일 뿐이다. 즉, “예수 혹은 예수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단지 그 보다 500년 전에 동·서양의 도처에 출현했던 공자나 노자, 석가, 피타고라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날줄과 씨줄로 해서 새롭게 엮은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 아무튼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공자의 삶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비천한 신분을 벗어나 말단 관직에 진출하는 게 52세 때의 일입니다. 이후로도 풀리지 않아 14년에 걸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년에야 귀국해서 학원을 운영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장에 이어 2장에서 7장까지가 비로소 본격적인 논어 풀이입니다. 저널적 글쓰기에 단련된 저자는 논어의 여러 경구들을 매우 현실감 있게 풀이해주고 있다. '2장 지식을 말한다', '3장 군자와 소인을 말한다', '4장 처세술을 말한다', '5장 리더십을 말한다', '6장 천명과 부귀를 말한다', 그리고 '7장 공자 학원과 제자들'까지. 서구를 넘어 이미 전 세계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예수 이야기가 단지 신화였거나 조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위기에 처한 반면 동양사상의 뿌리라 할 공자의 삶과 사상은 나날이 새롭게 조명되며 각광받고 있습니다. 묘한 대비가 아닐 수 없는데 우리네 범인들이 그에 과도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공자든 예수든, 그것이 신화면 어떻고 역사적 사실이면 어떻습니까. 예수나 공자의 삶이나 생각이 범인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가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성인들의 삶과 생각 속에서 우리네 삶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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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약속이 있어 광화문 부근에 갔다가 잠시 짬을 내어 교보문고에 들러 오랜만에 실컷 책구경을 했다. 그때 눈에 뜨인 책 중의 하나가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었다. "꼭 마흔이 되어야 <논어>를 읽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백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이땅에서는 수 만명의 청소년과 성인들이 <논어>와 사서삼경을 읽었을텐데' 하면서...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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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어의 리뷰입니다. 인문고전 읽기가 붐인 요즘 논어 또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공자와 논어에서 느낄 수 있는 고전의 향기와 시간과 시대를 넘어 지금 현재까지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논어라는 텍스트 그자체를 해설하기 보다 작가가 스스로 잡은 기준을 통해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저술한 책입니다. 과거의 인물인 공자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한번 읽어보면 어떠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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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올의 논어를 읽고-아직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유교에 대한 반감때문에 알고 싶지도 않아했던 인간공자에 대해 충격을 받고 새로움을 느꼈습니다. 중세기독교가 예수를 배신한것처럼 국가권력이 된 어떤 사상도 인간을 억압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는것은 마찬가지인거 같습니다.
이책을 선택한 이유는 논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싶은 마음과 도올의 해석이 빠진-저는 도올을 존경합니다만 -그냥 논어를 읽는것이 우선인거같아서였습니다. 솔직히 우리나라 기득권세력을 싫어합니다만 제도권교육을 충실히 받고 메이저로 활동하는 사람이면 그사람의 주장에는 동조할수 없어도 고전독해는 깊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저의 편견이 있었던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이책은 도올의 책 보다 더 홍사중 개인의 사상에따라 재편집된것입니다. 책순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논어의 순서를 따라가는것이 아니라 소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논어에 나온말뿐만 아니라 다른책들에 나온 공자의 말,제자들의 말, 공자학단외의 사람들의 말들이 근거로 나와있습니다.
전 이글을 읽고 역시 홍사중은 홍사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페이지에 한번씩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비난하는글이 나오지 않은적이 없습니다. 정치인비판이 나쁘다는것은 아니지만 논어를 읽으면서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엽전은안되'라는 식으로 읽혔다면 제가 지나친걸까요. 독재시절 양비론으로 정권을 비난하는듯하면서 결국은 옹호했던 많은 언론인들의 모습이 자꾸 겹쳤습니다. 게다가 '패거리정치'등 보수언론들이 쓰는 수사어가 종종 등장했습니다. 초판일을 보니 2004년이더군요.
제가 보기엔 논어의 이름을 빌린 홍사중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글인거 같습니다.
우리세대인들은 유교의폐해때문에 공자왈 맹자왈 이야기는 듣기도 싫어한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알게되면 감동하는 것이구요. 이책에서 괜찮은 부분은 1장 공자를 말한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위대한 인간의 향기때문일것입니다. [인상깊은구절] 또 하나 공자에게 묻고 싶은것이 있다. 권력의 등 뒤에 숨어서,또는 권력에 앞장서서 과격한 불법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법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소리 높여 파괴적인 구호를 외친다면 그런 것을 무슨 용기라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P.247 요즈음 유행어에 '코드가 맞는다'는 것이 있다... 중략.. 그러나 만약에 그 코드가 도저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코드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면? 또 자기네들끼리만 통하는 코드에 맞춰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완전히 따돌리는 정치를 한다면? 그러면 그것은 패거리의 똘마니 정치에 지나지 않게 되며, 권위주의의 위험한 함정에 나라를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p.141~1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