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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과학의 황홀한 만남을 통한 미래예측의 가능성
"역사와 과학의 황홀한 만남을 통한 미래예측의 가능성" 내용보기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은 다양하다. ‘재미있었다’거나 ‘감동적이었다’는 게 보통의 반응인데 그 경우 자칫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오해될 개연성이 있다. 너무 상투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의미했다’거나 심지어 ‘시간낭비였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순전히 ‘선택’과 ‘이해도’의 문제로 봐야 한다.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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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뒤의 느낌은 다양하다. ‘재미있었다’거나 ‘감동적이었다’는 게 보통의 반응인데 그 경우 자칫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오해될 개연성이 있다. 너무 상투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무의미했다’거나 심지어 ‘시간낭비였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순전히 ‘선택’과 ‘이해도’의 문제로 봐야 한다.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한편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커다란 산을 넘어 선 것’과 같은 벅찬 자부심이 드는 경우도 있다. 읽는 과정 중에 끊임없이 시험받았을 인내심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탓일 수 있다. 하물며 상상력과 사유를 곁들이며 정독했을 때라야... 나는 언제나 그런 느낌을 기대하며 유령처럼 서점가를 떠돌고, 또 무수한 낮과 밤을 책과 씨름하며 지낸다. 마크 뷰케넌의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 격변하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과학>(마크 뷰캐넌 저 /김희봉 역 | 지호 간 | 2004년 09월)을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앞서 언급한 대로 ‘과학계의 큰 산 하나를 정복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의 과학자들, 역사를 무작위 패턴으로 이해하다 “역사의 전형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사물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첫 번째 가능성은 헤겔과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으로, 역사는 원리적으로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어떤 성숙하고 안정된 종점을 향해 단순히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역사가 종말에 가까워져서 안정된 사회로 접근할수록 전쟁이나 사회적 사건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아놀드 토인비가 제시했듯이, 역사는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순환적이라는 것이다. 토인비는 문명의 발흥과 쇠퇴를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과정으로 보았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활동이 주기적으로 순환된다고 믿으며, 몇몇 정치과학자들은 이런 순환이 똑같이 주기적인 리듬으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의심한다. 세 번째 가능성은, 역사는 완전히 무작위여서 인지 가능한 패턴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역사가들이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공통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이 목록은 완전하지 않다. 사물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질문은 원리적으로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학의 문제이다.” (290p) 과거의 과학자들은 역사에 대한 세 번째 가능성, 즉 무작위 패턴(random walk)에 무게를 둬왔다. 그러나 최근의 과학계는 사물의 변화는 물론 우리 인간사의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들 속에도 일정한 패턴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작위로 진행되는 각종 사회현상과 우주적 변화에서 일정한 패턴을 읽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수고는 도로에 불과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과학계뿐만 아니라 역사학계 역시 역사를 예측하는 일에 회의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구스타프 플로베르는 한때 “역사를 쓰는 것은 대양大洋을 마시고 한 줌의 오줌을 싸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역사학의 한계를 언급했다(284p, 리처드 에번스 <역사에 대한 변론>에서 인용). 저자 역시 역사가들은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만 그것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비꼬았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생은 뒤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 가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14p) 한마디로 인간의 능력으로 역사 혹은 우주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인가.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대지진으로 인해 수천의 인명이 죽어가고 거대한 산불로 엄청난 규모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데 말이다. 혹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러한 변화의 과정에 대해 분석하고 더 나아가 변화의 기본원리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복잡계 물리학이라 불리는 ‘비평형계 과학’이다. 즉 평형상태에 있는 물질의 변화는 기존의 물리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평형이 깨진 상태의 물질의 변화는 예측하기 힘들고 그에 작용하는 갖가지 변수들을 파악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도 분명한 패턴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구나 그 패턴은 의외로 단순하다. 어쩌면 이것을 통해 역사의 변화와 다양한 자연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20세기말 과학계 전반에 확산되기 시작한 새로운 과학관이다. 창의적인 실험이 역사와 자연현상의 패턴을 발견하게 해준다. 복잡계 과학, 즉 비평형계 과학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실험들은 다양하고 광범위 하다. 그중 주요한 개념이 바로 제임스 글리크의 ‘카오스 이론’이나 로저 르윈의 ‘복잡성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세상의 변화를 읽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자는 이 역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네트워크 과학’의 중요성과 발전가능성을 제시한다. 또한 네트워크 과학의 핵심 고리로서 ‘임계상태(critical state)’에서 나타나는 ‘격변이론’과 그에 수반되는 ‘멱함수법칙’을 원용하고 있다. 1987년 물리학자 백, 탕, 위젠필드의 ‘모래더미 게임’이 임계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작은 시발점이었다. 탁자 위에 모래알을 한 개씩 뿌려보면 모래더미가 형성된다. 이 모래더미는 점점 쌓이다가 경사가 가팔라지면 모래알은 경사면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게 된다. 어느 순간 모래알 하나에도 모래산은 와르르 무너져 더 낮은 상태가 되는데, 이런 현상은 끝없이 반복된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원인에도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 격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임계상태’(critical state)라 한다. 임계상태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혹은 격변)해 버리는 현상은 자연과 인간의 삶 곳곳에 깔려 있다고 저자는 갈파하고 있다. 임계상태를 나타내는 현상들은 놀랍게도 지구상의 갖가지 현상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진, 전쟁, 산불, 태풍, 대량 멸종, 교통 체증, 주가 폭락, 심지어 논문인용패턴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것은 다양한 과학실험에서도 똑 같은 패턴으로 나타난다. 자석의 비평형 상태에서의 자장변화, 얼린 감자를 내던져 튀어나오는 조각들의 크기 패턴 등등. 비평형 과학의 키워드 : 카오스, 프랙탈, 임계상태, 격변, 멱함수 패턴의 동일성을 설명하는 핵심어는 바로 ‘멱함수 법칙’이다. 구텐베르크-리히터의 지진발생 빈도와 규모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진 멱함수 법칙은 이후 실시한 각종 실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멱함수란 일테면 어떤 현상의 규모와 발생빈도 간에는 일정한 반비례의 패턴이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가령 규모가 2배로 큰 지진은 작은 지진이 발생할 확률보다 정확하게 4배씩 줄어든다는 게 바로 멱함수 법칙이다. 이는 얼린 감자의 감자를 벽에 던져 깨진 감자조각 크기를 조사했을 때도 그대로 적용되며, 학생 1000명 혹은 500명의 성적분포를 나타내는 정규분포에서도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나타나는 자연현상 및 사회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법칙인 것이다. 이를 좀더 확장시켜 이해하려고 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프랙탈(“어떤 현상의 전체는 부분과 같은 패턴으로 발전해 간다” 만델브로트에 의해 발견) 개념과 만나게 된다. 저자는 시종 이러한 멱함수 법칙이 적용되는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패턴은 임계상태에 있는 자연과 사회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임을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바야흐로 21세기의 과학은 역사의 변화와 자연현상의 변화가 임계상태라는 동일한 조건 하에 놓여 있다면 그 변화의 패턴을 읽는 데는 각종 구성요소들의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임계상태의 변화패턴을 읽는 것으로 역사 및 자연현상의 변화를 읽어낼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변화를 이끄는 촉매 혹은 계기가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아, 세상은 얼마나 단순한가. 복잡하고 난해하게만 보이던 각종 사회현상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멱함수와 프랙탈, 나아가 임계상태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세상사 변화의 패턴을 읽는 지름길인 것이다.
y****y 2004.12.13. 신고 공감 6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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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상태의 보편성은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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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상태에 주목하기 시작한 지 몇 개월 되었다. 관련 자료와 사례를 보면 너무나 반갑다. 이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보고 바로 구입했다. 임계 상태는 변화에 민감하다. 임계점은 질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분기점이 된다. 변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사물의 임계점이나 임계 상태라는 개념에도 주목하게 된다. 주변에서 임계 상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책에서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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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상태에 주목하기 시작한 지 몇 개월 되었다. 관련 자료와 사례를 보면 너무나 반갑다. 이 책에 대한 서평 기사를 보고 바로 구입했다. 임계 상태는 변화에 민감하다. 임계점은 질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분기점이 된다. 변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사물의 임계점이나 임계 상태라는 개념에도 주목하게 된다. 주변에서 임계 상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듯이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관통하는 보편 현상의 하나인 것 같다. 책을 읽는 나의 관심은 과연 개인의 삶에서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임계 상태'가 어느 정도 유의미한가 였다. 완독 후 나의 결론은 여전히 '나의 몫'으로 남아있다는 것. 아무튼 좋은 책이다. 나의 문제 의식을 확인시켜준, 그러나 과제를 여전히 남겨준 책이다.
h*****k 2004.12.31. 신고 공감 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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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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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지며 아름다운 책이다. 흔히 얘기되는 "카오스", "복잡성", "복잡계 물리학"(카오스는 옛날에 유행한 말이고 요즘에는 복잡계 물리학에 자리를 내준 듯 하다)의 핵심을 설명하고, 이를 이용해서 역사 속에서 격변(Catastrophe)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임계상태(말하자면, 극도록 민감한 생태)는 도처에 발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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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지며 아름다운 책이다. 흔히 얘기되는 "카오스", "복잡성", "복잡계 물리학"(카오스는 옛날에 유행한 말이고 요즘에는 복잡계 물리학에 자리를 내준 듯 하다)의 핵심을 설명하고, 이를 이용해서 역사 속에서 격변(Catastrophe)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이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임계상태(말하자면, 극도록 민감한 생태)는 도처에 발견되며 그러한 임계상태에서는 일상적인 조그만 변화가 큰 파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사소한 원인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의 매력은, 전달하는 개념이 너무나 단순하고 그 단순함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다.
h****0 2005.07.20.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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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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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왜 역사는 따분하지 않은가? 역사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현재의 경향이 계속된다고 볼 수도 없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흥미로운 이유이다.”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기에 재미있다. 그러나 역사가 우연이기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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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책을 쓰게 된 이유이다. “왜 역사는 따분하지 않은가? 역사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현재의 경향이 계속된다고 볼 수도 없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흥미로운 이유이다.”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기에 재미있다. 그러나 역사가 우연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그리 재미있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역사는 우연적이면서 규칙적이기에 재미있다.

“우리는 필연적인 일보다는 끝없는 조사와 숙고로만 원인을 알 수 있는 것에 감동한다. 이에 비해 양극단에 있는 뚜렷한 법칙에 의해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상황과 완전히 마구잡이인 상황은 대개 우리의 마음을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대상들이 역사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며, 역사를 능동적으로 바꿀 방법조차 없이 꼭두각시처럼 끌려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발성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우리는 개별 사건의 인과적인 힘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든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화고 논쟁한다. 그 사소한 일들 모두가 각자 거대한 변화의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발성은 즉각적인 사건이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왕국은 말굽에 박을 못이 부족해서 망할 수도 잇다.” (스티븐 제이 굴드, 저자의 인용)

역사는 왜 우발적이면서 규칙적인가? 이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역사가 과학이 될 수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이다.

저자는 과학으로서 역사의 모델을 비평형 통계물리학에서 찾는다. “이런 시스템에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개별적인 사건들의 무질서 속에는 심오한 규칙성이 들어 있고 아주 간단한 통계법칙에 지배되는 경우도 많다.”

간단한 통계법칙의 대표적인 예는 멱함수(power law) 관계이다.


“모래알을 하나씩 계속 떨어트리면 넓은 모래산이 점점 높이 쌓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잘 쌓이지는 않는다. 모래더미가 커지면서 경사가 점점 가팔라져 나중에는 모래알이 경사면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게 된다. 조그만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때 모래알은 아래로 미끄러져서 더 평평한 곳으로 가고 모래산은 더 낮아진다. 이렇게 해서 모래산은 커지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그 들쭉날쭉한 윤곽은 영원히 요동친다.”

복잡계를 설명할 때 거의 반드시 나오는 예이다. 이 실험을 고안한 백, 탕, 위젠필드는 모래산이 쌓이고 무너지는 리듬을 이해하려고 했다. “사태의 ‘전형적인’ 크기는 얼마인가? 다시 말해 다음 사태는 얼마나 클 것으로 기대되는가?” 그들의 질문이다. 그들은 컴퓨터 상에서 수천개의 모래더미를 만들고 수백만번의 사태를 일으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답은 없었다: ’전형적인’ 사태 따위는 없었다.

“어떤 때는 모래알 하나가 구르는 것으로 끝나기도 했고, 백 개 또는 천 개가 한꺼번에 구르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수백만개의 모래알이 한꺼번에 굴러내려 더미 전체가 무너지는 ‘격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왜 그럴까? 모래더미가 언제나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모래더미가 ‘악마 같은 불안정성’에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민감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물리학에선 ‘임계상태(critical state)’라 부른다.

임계상태에 있는 모래더미가 어떻게 무너질 것인가는 ‘역사’가 결정한다. 임계상태에 있는 ‘계’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이고 프랜시스 크릭이 말한 ‘얼어붙은 우연(frozen accidnets)’에 민감하다. 모래더미 게임에서 모래알은 무작위로 여기저기에 떨어진다. 더미가 자라면서 모래알은 떨어진 곳에 그대로 ‘얼어붙고’ 그 모래알의 영향은 영원히 그 자리에 고착된다.”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를 발견한 크릭은 ‘얼어붙은 우연을 진화의 본질적 요소라 말했다. 생물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거의 항상 생물의 생존과 생식 능력을 저하시키고, 따라서 돌연변이를 일으킨 변종은 대개 멸종한다. 그러나 어쩌다 드물게 돌연변이가 적응성을 높여서 집단 전체로 퍼질 수 잇다. 그러면 그 우연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그 뒤로 일어나는 그 종의 모든 진화는 이 새로운 도약대에서 시작하게 된다. 진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누적된다. 역사는 얼어붙은 우연이 만든 구불구불한 경로를 따라 진행되며 이 얼어붙은 우연이 바로 역사적 우발성이 구체화된 것이다.”

물리법칙이 얼어붙은 우연을 허용하지 않으면 세계는 평형상태가 되어 모든 것은 풍선 속의기체처럼 균일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법칙이 한 장소에 고착되는 결과를 허용하면 거기에 따라서 미해가 진행되는 바탕이 변경된다. 물리법칙이 역사의 존재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개입하는 임계상태에선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 즉 가역적인 ‘평형’ 상태에 있지 않다. 비가역적인 비평형 상태에 있을 때 그 계를 복잡계라 부르며 그러한 계를 연구하는 물리학을 비평형 물리학 또는 복잡계 물리학이라 부른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은 비평형 물리학에서 찾아야 한다. 비평형 물리학의 개념들은 역사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특별히 조율된 것이다.”

저자는 폴 케네디의 ‘제국의 흥망’을 그 예로 든다. “국가의 경제력은 자연스럽게 줄었다 늘었다 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어떤 국가의 경제적 기반은 점점 약화되고 어떤 국가는 새로운 경제적 기반을 얻지만 기존의 상황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서 쌓인 스트레스는 대개 무력 충돌의 형태로 방출되며 충돌이 벌어진 뒤에는 각각의 국가들이 진정한 경제력에 따라 대략 균형을 찾는다.

지각에 스트레스가 서서히 쌓였다가 갑작스런 지진으로 방출되거나 모래더미에서 경사가 점점 급해져서 계속 불안정성이 높아지다가 사태가 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케네디의 설명과 비슷하게 들린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다. 전쟁은 실제로 지진이나 모래더미 게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통계적 패턴을 보인다.”

비시간적인 즉 가역적인 평형 또는 균형이 지배하는 평형계에선 법칙에 따른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얼어붙은 우연에 의해,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 지배하기 때문에 복잡계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왜 복잡계는 예측이 불가능한가? 그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복잡계의 이벤트는 ‘전형성’이 없기 때문이다.

전형성이 없다는 것은 정규분포를 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규분포는 수학에서 가장 유명한 곡선이다. 계의 이벤트들이 종모양의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것은 평균값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평균값에서 크게 벗어날수록 그런 이벤트는 더 드물어진다. “120킬로그램인 사람은 몇 명쯤 있겠지만 200킬로그램이 넘는 사람은 아주 예외적이다. 2000킬로그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계의 이벤트들이 정규분포를 그린다면 이벤트가 대략 어느 정도의 값을 갖는다는 기대값(평균의 다른 이름)을 갖는다.

그러면 지진은 어떨까? “지진이 방출하는 에너지가 두배 커지면 지진의 빈도는 4배 작아진다.” 이런 관계를 멱함수 법칙(power law)라 한다. 계가 멱함수 관계에 있을 때 그 계의 이벤트들은 규모불변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냉동감자를 벽에 던져 만들어진 조각을 센다고 하자. 감자 파편의 무게와 개수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조각의 무게가 두배가 될 때마다 조각의 수는 6배로 줄어든다.

“몸집을 마으대로 줄일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런 능력이 있다면 감자 조각을 검사하는데 편리할 것이다. 몸을 콩알만하게 줄엿다고 하자. 이 크기에서 보이는 풍경에 대한 느낌을 얻는다. 여기에서 대략 콩알만한 조각들을 보고 얼마간 크거나 작은 것들도 본다. 그런 다음 몸을 더 줄여서 열배 작은 규모를 조사한다. 이 규모에서도 풍경은 거의 비슷하다. 콩알만한 그키였을 때 자신의 무게와 비슷한 모든 조각에 대해서 그 절반 무게의 조각들은 대략 6배 많다. 몸의 크기를 줄여도 항상 그 전과 같은 풍경을 볼 것이다. 어떤 규모에서도 풍경은 정확하게 똑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이것이 멱함수 패턴의 의미이다. 이 관계에 있는 감자 조각에는 “특별히 ‘선호’되는 크기가 없다. 멱함수 패턴이 나왔다는 것은 정상적이거나 전형적인 파편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감자 조각의 무더기가 규모 불변성을 보인다는 것은 큰 조각과 작은 조각은 단지 크기만 다를 뿐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지진은 멱함수 패턴을 따른다. 그러므로 “큰 지진이라고 해서 작은 지진과 특별히 다른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거대한 지진은 아무 이유없이 그런 규모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진 예측은 불가능하다.

지진은 단층의 마찰력이 단층의 토막들에 쌓이고 마찰력이 쌓인 토막들에 누적된 스트레스가 방출되면 단층이 미끄지면서 지진이 일어난다. 이때 지층 토막이 방출하는 스트레스는 이웃한 토막으로도 전달되어 그 토막의 스트레스를 높인다. 큰 지진과 작은 지진은 처음 스트레스를 방출한 토막이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우연히 토막들의 네트웤의 중심에 있어서 네트웤 전체에 스트레스를 방출할 수 있는 토막이 진앙이었다면 네트웤 전체가 흔들려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지진이 예측 불가능한 이유이고 무시무시한 격변이 아무 경고 없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얼마나 커질지는 지진 자신도 모른다. 지진 자신이 모른다면 우리도 모른다.”

“임계상태에 사는 것들은 엇비슷하게 조직되는 경향이 있고 이 조직은 계의 세부적인 성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계의 기하학적 구조(멱함수 패턴과 프랙탈 패턴)에만 관계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임계상태라면, 계의 세부적인 성질들을 거의 무시하면서도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임계상태에 잇으면 인간세계 역시 마찬가지라 말한다. “불행히도 역사가들은 오로지 사건들의 연쇄만을 서술할 수 있고 그 배후에 잇는 심오한 역사적 과정을 잡아내지 못한다. 이 서사는 다만 역사의 변덕스러운 우발성에 존경을 표할 따름이다. 왜 모든 사태가 작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없다. 왜 모래 한 알이 파국을 일으킬 수 잇는지 이해ㅗ하기 위해서는 모래더미의 세부적인 구조를 작은 지역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것을 통해 불안정성이 파급될 수 있는 범위를 알아내야 한다.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만 역사가들은 역사를 훨씬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의 역사에 어떻게 복잡계 물리학을 적용할 수 있는지 쿤의 과학혁명을 예로 든다. 쿤의 논리를 요약하면 정상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벤트들이 누적되면 정상과학의 개념들의 네트워크에 ‘부적응’이란 스트레스가 쌓인다. 부적응의 임계상태에 있는 것이다. “부적응이 어떤 문턱에 이르면 그 조직과 거기에 기초한 정상과학은 무너진다.” 저자는 과학혁명과 지진의 역학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정상과학의 연구는 대륙판의 느린 이동과 비슷하고 과학혁명은 지진과 비슷하다. 지진에는 전형적인 크기가 없다. 과학혁명도 마찬가지일까?” 쿤 자신이 그렇다고 말한다. 과학혁명은 “큰 변화일 필요가 없고 그 집단 밖에서도 혁명적으로 보일 필요가 없으며 어쩌면 25명 이하의 소규모 집단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쿤의 논의는 전형적인 크기의 혁명은 없다는 말이다. 과학의 변동은 규모 불변일 수 있고 패러다임의 개념 네트웤은 지국의 지각처럼 임계상태일 수 잇다.”

그렇다면 복잡계는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세계 역시 예측불가능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 관련된 대상에서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서 나타나는 통계적 패턴이다. 그런 법칙은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서사의 일반적인 성질을 잡아내며 사건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역사적 과정의 심오한 성격을 반영한다.”

평점 4.5
리뷰 총점 종이책
과학적 시각으로 본 복잡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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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도 너무나 복잡한 현대에 살고 있어서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라는 책 제목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더군다나 부제가 |격변하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역사|라고 적힌 것을 보고 역사와 과학을 어떻게 융합하고 절충해서 글을썼는지 궁금증과 의구심을 증폭시켜 책을 열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내 궁금증과 의구심을 비웃듯 기대 이상으로 작가는 역사와 과학을 연관시켜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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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도 너무나 복잡한 현대에 살고 있어서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라는 책 제목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더군다나 부제가 |격변하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역사|라고 적힌 것을 보고 역사와 과학을 어떻게 융합하고 절충해서 글을썼는지 궁금증과 의구심을 증폭시켜 책을 열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내 궁금증과 의구심을 비웃듯 기대 이상으로 작가는 역사와 과학을 연관시켜 하나씩 풀어 설명하고 있었다. 이책의 작가는 탁자 위에 모래알을 뿌리고 모래산이 점점 쌓이다가 경사가 가팔라지면 모래알은 경사면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게 되고 어느 순간 모래알 하나에도 모래산은 와르르 무너져 더 낮은 상태가 되고 이러한 현상은 끝없이 반복되는 모래더미 게임으로 임계상태를 설명 하려 한다. 이처럼 별 것 아닌 원인에도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 격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임계상태|라 한다. 그리고 이책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서술하면서 서두가 시작된다. 19세기 후반 유럽은 어느 누구 한명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만큼 평화로웠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모래알들이 한알씩 쌓이고 있었고 결국 오스트리아가 점화를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모래더미 게임으로 임계상태를 서술하면서 작가는 사태가 일어나는 횟수와 크기를 측정해보면 오른쪽 아래로 향하는 비스듬한 그래프가 나온다는것을 보여준다.그리고 그 그래프를 '멱함수 법칙'이라고 부른다. 지진, 산불, 부서진 냉동감자, 사람의 심장박동을 예를 들며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멱함수 법칙으로서 주변의 복잡한 현상들이 비슷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저자는 전쟁, 거지와 부자이야기 등을 이야기하면서 과학적 이론인 |임계상태|를 이용하여 역사를 해부하려 한다. |결정화되는 눈송이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역사 전개의 완벽한 예|라고 저자가 말할 때, 그것은 비평형 물리학이 역사 전개까지 설명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냥 복잡하고 혼란하다고 생각한 사회를 저자는 과학적으로 막힘없이 설명을 한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다. 지금 현대사회를 살면서 꼭 한번은 읽어 볼 만한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현대사회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y***s 2004.12.05.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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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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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런 책이 이해되기 시작하더니 점점 재미있어졌다. 이 책은 읽은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 머리 속에는 잘 적은 책으로 기억된다.   실험을 통해서 발견되는 사실은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해석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발견이 시작되고, 결국 패러다임의 전환까지 생기는 연역적인 전개방식이 맘에 든다. 게다가 참 쉽게 적었다.   공학적인 내용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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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런 책이 이해되기 시작하더니 점점 재미있어졌다.

이 책은 읽은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 머리 속에는 잘 적은 책으로 기억된다.

 

실험을 통해서 발견되는 사실은 다른 누군가는 다르게 해석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발견이 시작되고, 결국 패러다임의 전환까지 생기는

연역적인 전개방식이 맘에 든다. 게다가 참 쉽게 적었다.

 

공학적인 내용을 이렇게 쉽게 적었다는 것이 번역자의 탁월한 능력이 아닐까 쉽다.

이런 능력이 부럽다.

 

끝부분 조금 남았는데, 오늘 마자 다 읽어야 겠다.^^

 

d*****r 2009.01.31.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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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세상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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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론들을 한참 읽었다. 복잡계 이론이라고 하더니 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데 딱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책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책의 재목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처럼. 이 책의 내용도 생각보다 단순하다. 세상의 에측 불가능한 듯한 변화무쌍한 변화도 사실 단순한 원리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리만 파악하면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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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론들을 한참 읽었다. 복잡계 이론이라고 하더니 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데 딱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책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책의 재목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처럼. 이 책의 내용도 생각보다 단순하다. 세상의 에측 불가능한 듯한 변화무쌍한 변화도 사실 단순한 원리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리만 파악하면 충분히 예측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복잡한 이론이 없어도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미래가 예측가능하다는 추정을 하기 때문이다. 미래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려는 노력을 하겠는가. 이 복잡한 책의 이론은 단지 오늘날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예측활동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복잡한 시도일 뿐이다.
s***g 2005.11.29.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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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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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단순한 책은 아닌 것 같다. 혹은 내 머리가 단순하든가. '세상을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지만 말 그대로 '과학적'으로 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은 기계의 움직임에나 적용될 것이라 생각했던 물리학의 법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적어도 나에게는)을 알려준다. 임계상태는 마치 서커스의 줄타기를 보듯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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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단순한 책은 아닌 것 같다. 혹은 내 머리가 단순하든가. '세상을 과학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본다는 뜻도 있지만 말 그대로 '과학적'으로 보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책은 기계의 움직임에나 적용될 것이라 생각했던 물리학의 법칙을 통해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적어도 나에게는)을 알려준다. 임계상태는 마치 서커스의 줄타기를 보듯 아슬아슬하다. 단 1초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 확률은 반반이다. 떨어지거나, 무사하거나. '재앙'으로까지 불릴 만큼 참담한 동남아시아의 지진에도 마크 뷰캐넌의 이론이 적용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처럼 단순하기 짝이 없는 원인의 결과라고 하기엔 무서울 정도로 거대하다. 무엇이든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은 과학자들은 수많은 이론을 만들어내 우리를 피곤하게도 하지만, 그만큼 세상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던 일들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책.
c*****i 2004.12.31.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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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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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자유"나 "의지"가 도대체 뭘 뜻하는지 생각해 볼 수록 모르겠다. 그건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공포의 본능이 언어로 번역된 것이 아닌지도 의심된다(가령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는 것에는 수많은 신체 내부와 외부, 혹은 내가 속한 군집과 나를 이루는 군집의 영향들이 얽혀있으며 그 의지의 영향은 다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나에게 돌아온다. 그 의지의 근원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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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자유"나 "의지"가 도대체 뭘 뜻하는지 생각해 볼 수록 모르겠다. 그건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공포의 본능이 언어로 번역된 것이 아닌지도 의심된다(가령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는 것에는 수많은 신체 내부와 외부, 혹은 내가 속한 군집과 나를 이루는 군집의 영향들이 얽혀있으며 그 의지의 영향은 다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나에게 돌아온다. 그 의지의 근원을 끝까지 추적해보면 내가 가장 자주 발견한 감정은 공포였다). 어쨌든 이 책에서 말하듯 원소는 또다른 원소의 자기닮음꼴(프랙탈) 군집이며, 군집은 또다른 군집의 자기닮음꼴 원소다(그리고 상위 범주와 하위 범주는 나비효과로써 극적으로 연결된다; 온갖 종교들에서 말하듯 "나는 곧 우주와 하나"다). "나"라는 것 또한 물리적, 생물적, 사회적, 정신적, 그 밖의 어떤 면에서도 원소이자 군집이다. 이걸 동양의 "천인상응"이나 "음양 안에 음양이 있다"와 연결시키는 건 요새 동양철학 좋아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아전인수 격 과장일 테지만, 어쨌든 대상보다 관계를, 원소에 소속된 절대적 특징보다 전체 세계에서 상대적 위치로서 정해지는 개념을 우선하여 보는 그러한 동양적 관점은 현대과학에도 통찰력을 줄 수 있다. 앞으로는 경제학(나는 경제학이 아직 수학으로 점을 치는 수준이며 관대하게 보아도 정상과학의 범주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그 예측력조차 떨어진다고 보는데, 일단 주류경제학 교과서 첫장에 나오는 가정들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들이다)이나 생물학이나 지구물리학이나 천체물리학이나 학문하는 이들은 뭐든 임계점을 이해하기 위해 복잡계 이론을 공부할 것이며, 자신들이 정작 어떤 대상을 연구하기 위해 그것을 공부하는지도 잊을 정도로 대상과는 관계없는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물론 이 말 그대로 하진 않는다 - 그리고 그것들을 공부한 후에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대상과 관계없는, 관계 변화 자체에 관한 탐구"는 분명 동양에서 오래 전부터 해온 것이며,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서구가 각 사물에 영원히 배속된 특징이 있어 그것을 분석하다보면 불변의 원소 혹은 법칙을 구할 수 있다고 고대부터 생각해 온 데 비해(이는 언어적으로도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서 드러난다), 동양은 사물에 본질적 특징이 소속된다기보다 사물의 개념적이고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개념이 정의되며 불변의 원소를 부정하고 변화 자체를 궁극의 위치에 놓았다. 따라서 동양은 물의 성질이 어떻고 나무의 성질이 어떻고 그것을 쪼개면 뭐가 되고 하기 전에 먼저 인식에서의 이분법적 틀을 음양이나 오행 등으로 명시하고 사물들의 관계와 상대적 위치에 따라 그 개념과 변화를 추상적으로 탐구하였다. 이는 분명 서양과학의 특징이 아니며, 그래서 서양에서 오행을 오원소설로 오해하고 목토금화수에 배속된 "영원한 특징"이 너무 모호하다며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 나오는 복잡계 이론의 보편성은 기존의 대상 중심과 세분화의 흐름에 따르는 과학적 방법론을 수학으로써 부수고 있는데, 동양에서 수 천년간 추상적인 수(number), 상(image), 개념을 제한하려는 논리적 시도들을 넘어서려는 다양한 자기 수양들이 개별 대상에 대한 정밀한 분석에 우선한 것과 비교해볼만한 일이다. 수는 그 숫자가 생겨난 기원이 된 모양들(싹이 돋아난다든지, 순환한다든지, 나눈다는지 등)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어떤 특정한 현실적 실체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기수의 쓰임에 가깝다)와 변화(서수의 쓰임에 가깝다)를 나타내기 위한 매우 추상적인 언어다. 가장 가리키기 힘든 것을 가리키려는 수(number)라는 기호는 지금껏 과학에서는 변화 대신 대상의 "양"을 측정하는 한정된 용도로만 쓰인 것인데, 대상을 떠나 순수하게 수로써 만물의 변화를 나타내려는 시도가 고대 동양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수들이다.


2. 음양오행은 분명히 과학이 아니며, 정밀하게 축적된 데이터도 없어서 그저 그걸 믿거나 안 믿거나의 선택지 밖에 없다는 점에서 종교에 가깝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음양오행은 어떠한 현실적 실체도 가리키지 않으며 그보다 변화 자체에 대해 지독하리만치 천착하여 탐구한 추상적 산물이기 때문에 어떤 현실적 발견으로 인해 부정될 수가 없으므로 반증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기반이 매우 다르고 쓰는 개념의 의미가 너무나 달라서, "개종"시키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아예 세계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대상을 감각할 때, 대상 자체의 특징을 먼저 보는가, 대상이 관계 속에 놓인 상대적 위치를 먼저 보는가. EBS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온 바 있지만 동양인과 서양인은 코끼리 그림을 보아도 먼저 보는 부분이 다르다고 한다. 어쩌면 유목민과 농경민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러한 거의 본능적인 문화적 차이는 형이상학적 차이를 낳았고, 비록 현대 동양인들은 서양의 대상 중심적 사고방식에 익숙하고 더욱 그렇게 되고 있지만 분명 음양오행 등을 처음 생각한 사람들은 세계를 많이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동양의 추상적 개념들과 한의학의 경혈 등이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 그러니까 다수의 사람들이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식으로 감각하거나 사고력이 뛰어나 세계를 대상 중심이 아닌 정말로 변화 중심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거의 모두 발명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물론 후대의 다수의 사람들은 그 개념을 자기 멋대로 상상하여 논리적으로 "오염"시키곤 했다). 변화 중심으로 본다는 것이 현상을 보며 억지로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체의 흐름을 보듯, 변화, 혹은 세계를 채우고 있다는 "기"라는 것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감각"할 수 있는 이들이 그런 것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사이비 종교처럼 들리겠지만, 언어 논리에 젖어있는 사람들로서는 그것을 통하지 않고 개념화되기 이전의 사물과 공간화되기 이전의 변화가 어떻게 감각되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바깥의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평범하게 언어 속에서 사고하는 사람이 대상과 불변의 원소들의 개념을 그냥 무시하고 처음부터 음양이니 태극이니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그렇게 확신을 갖고 말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종교를 믿더라도 그냥 말과 글을 보며 신이나 절대자를 상상하는 수준과 어떤 극적인 체험을 통해 믿는 수준은 다르며 전자는 후자를 죽어도 이해할 수 없다(요새는 통계학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있으므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비정상'이나 '정신병'이라고 정의하면 그만이다). 맹인은 맹인이 아닌 이에게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빨간 색"을 "정열과 뜨거움, 생명력과 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색"이라는 텍스트로 이해하며 전혀 엉뚱한 것을 상상할 것이다. 동양의 추상적 개념들, '기', '음양', '도', '관', '불성', '연기' 등도 고서에서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파악하라는 말이 전혀 없고 모두 그것을 "체험"하고 "실천"하라고 쓰여있다. 논리는 기본적으로 대상을 나의 인식과 그 배경에서 떼어내어 잘게 쪼개는 "칼"의 일이며 변화를 죽여버리고 시간을 공간화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따라서 "변화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기존의 논리적 사고로는 불가능하며 포맷과 운영체제를 다시 설치하는 대대적인 작업이 필요하고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의식으로 돌아가는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과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나머지 다수는 그들로부터 전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들을 붙잡고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복잡계 이론에서 수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데이터를 모으는 것을 보면 예수가 말한 "너희는 보고서야 믿느냐"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한 데이터를 이용한 증명은 위에서처럼 포맷을 할 수가 없는 다수를 위한, 변화 자체로 나아가는 돌아가는 길이며 사실 그 길이 길 수록 오해와 오용의 소지가 커진다. 어쨌든 음양오행의 투박한 상과 수가 현대 과학에 기여할 바는 별로 없어보이지만(그런데 또 복잡계 이론에서 필요한 조건이 극히 적은 것이나 우리의 인식 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관계의 한계 등을 생각해보면 그런 면에서도 얻을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 근본적인 관점에 대해 고찰하는 데에는 많은 통찰을 줄 것이다. 그 관점에 관한 건 과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적 세부적 분과 과학은 다시 수학과 철학에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3. 책에서도 인용되었듯이, 정확히 말하면 과학은 세계 그대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라기보다 세계를 묘사하는 (언어로 된) 모형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리를 닮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호기심"이라는 말 뒤에 있는 무의식적인 목적이다. 그걸 만들어서 무얼 얻고자 하는가? 무엇이 두려워 그런 것을 남기려 하는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4. 요소들 간의 자기조직화와 임계점에서의 격변이 모두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생명의 출현과 진화와 대멸종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대지진이나 대공황이나 전쟁도 모두 딱히 찝어 말할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만한" 일임과 동시에 그 발단이 수많은 작은 변화들과 마찬가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기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양면성은 사실 동양철학에서는 양면성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큰 변화라고 큰 원인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음양은 그 안에 무수한 음양을 담고 있으며 음양 또한 사실 상대적 개념이기에 언제든 반전되고 순환한다(마치 임계점에서 군집들이 순식간에 반전하듯). 어떤 대상은 군집이자 원소이기에 그 대상에게 큰 일도 상위 범주에게는 전혀 큰 일이 아닐 수 있다(장자 소요유 첫 머리가 한 번 날으면 구만리를 가는 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은 변화와 연기의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지진이나 모래알 하나 떨어지는 것이나 그 현상을 보지 않고 변화 자체를 먼저 보면 같은 일이다. 변화 자체가 그렇게 일어난 것을 가지고 굳이 "신의 뜻"이라거나 "하늘의 뜻"이라 하여(과학 법칙은 우리가 인식해왔던 현상들을 설명할 모형을 우연히 발"명"한 데에 크게 힘입은 것이며, 그것이 변화 자체의 모습이라거나 그것에 의해 우주가 프로그램되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윤리적 관점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고(이게 역사 상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해왔던 정신활동이다), 또 그것이 맞지도 않다. 변화 자체는 창조자나 세계를 관장하는 절대자를 굳이 상정하지 않고도 그저 요소들끼리 뭉쳐 임의적인 모양으로, 그러나 변화 자체는 필연적으로 언젠가 일어날 수 있다(정확히는 변화는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변화 자체를 절대자 위에 궁극의 자리에 놓는다는 말의 의미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느낄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고서에 쓴 사람들은 그렇게 느꼈거나 그렇게 굳게 믿었나보다. 변화 자체에 굳이 이유가 필요하진 않다.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가 이유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간다고 궁극적 이유를 만나거나 하진 않는다. 사람들이 불평등한 것은 누군가는 원숭이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개미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가 개미로 태어났기 때문에 개미인 것이지 그런 개미가 원래부터 태어나기로 예약된 것은 아니다. 내가 무엇으로 태어났으면 무엇답게 살라고, 괜히 불변하는 무엇인가를 찾으려 헛고생하지 말라고 이런 관점에서는 조언한다(불평등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니, 어디서부터 나이고 어디서부터 남인가. 이것도 생각해 볼 수록 모르게 되는 문제다.
 

5. 궁극적으로, 임계점, 거기서의 자기조직화와 자기닮음꼴은 왜 나타나는가. 뭐 변화 자체가 그런 모양이니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만물을 끊임없이 자기 생성 및 자기 파괴하며 변화하도록 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인 것 같다. 자기조직화와 닮음꼴로 인해 어떤 개체는 군집이자 동시에 요소가 되며 그 개체가 매우 안정되며 성장 일로에 있어 임계점과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일정 크기가 되면 그 영향력으로 인해 하위범주의 개체나 상위범주의 개체에 임계점이 찾아오게 되고 이는 곧 안정상태의 개체에게도 영향을 끼쳐 임계점이 찾아오며 변화가 전염된다. 즉 한 개체의 변화는 하위범주의 개체에게는 환경의 변화이며 상위범주의 개체에게는 요소의 변화이고 자기조직화로 인해 모든 개체가 상위와 하위, 좌우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모든 우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며 이는 그 관계의 변화에 의해, 마치 선분 하나를 옮기면 이어지지 않는 도형이 되거나 동전 하나를 빼면 무너지는 동전탑처럼,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체의 개별적인 관계를 그 특성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전체 계, 전체 우주의 변화를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그 불균형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뭐 그걸 어떻게 하는지는 차치하고). 임계점이 아니면 우리가 지금껏 발견하고 경험적으로 쌓아온 지식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으며 온건한 변화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개체는 사실 개체가 아니라 군집이자 요소이기에 그 상위든 하위든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범주에서 항상 일어나는 변화가 언제 임계점에 다다라서 다른 범주,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범주로 급격한 변화를 전염시킬지는 알 수 없다(자신의 변화는 그 요소와 환경에 영향을 끼쳐 결국 자기 자신에게 또다시 영향을 미친다. 사실 "자기 자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요소와 환경의 어느 단계의 총합의 개념적이고 편의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이건 영향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주 전체가 변화해서 개체의 경계선을 바꾸는 것이다). 만약 임계점에서의 자기조직화와 자기닮음꼴이 없는 개체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개체는 최초의 개체로서 고립되어 지속적인 성장 혹은 쇠퇴할 것이며 그러한 움직임을 반전할 힘은 하위범주에도 상위범주에도 없기에 변화하지 않으며 우리가 관측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관측 또한 관계의 일종이다). 주역에서 계속 성장하는 양 가운데에도 음의 싹이 돋아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계속 순환하는 것을 "도"라 하는 건 이러한 자기조직화와 반복적인 임계점의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기조직화와 임계점만이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함과 그것의 소멸을 순환적으로 일어나도록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시스템이 살아있도록 할 수 있는 법칙이다(아마도 이러한 사유에서 현대물리학을 전혀 몰랐던 고대인들이 이러한 순환과 생멸의 개념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거 외에는 이런 우주를 돌릴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그걸 누가 프로그래밍 했는지는 위에서도 썼듯이 쓸모없는 질문이다.
 

6.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는 개체나 원소들의 모임이 아니라 불균형 혹은 차이 그 자체('차연(Differance)'이나 '빈칸'이 생각나는데, 현대철학은 과학에 앞서 이런 문제를 어렴풋하게 고찰한 듯 하다)이며 개체나 원소는 어느 범주에서 관찰되는 그 차이의 순간적 결과일 뿐이다(이 "우주"에는 인간 "의지"의 산물인 문명과 개념들도 물론 포함된다). 즉 우리가 순간적으로 고정된 입자를 보려고 하기에 입자가 보이는 것이며 우리가 책상을 보려고 하기에 책상이 보이는 것이다(책상은 원자들과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는 또다시 작은 입자들과 텅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작은 입자는 역시 텅 빈 공간과 무엇인가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감각하는 것들은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작은 입자들의 잔상이거나 변화 자체의 잔상(혹은 기억)이다(이런 식으로라면 우주는 겉보기에는 가득 차 있어도 실은 이름이라는 "상징" 뿐인(히틀러가 2차대전의 원인이 아닌 상징이듯; "2차대전은 히틀러가 일으켰다"는 설명은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은 "2차대전이 일어났다" 뿐이며 그 원인이 히틀러인지, 히틀러 내면의 어떤 개념의 변화 때문인지, 그 개념 안의 어떤 무의식적인 변화 때문인지, 히틀러 주변의 정치적 무리들 때문인지, 독일 국민 정서 때문인지, 세계 경제 불균형 때문인지, 어느날 러시아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부부싸움 때문인지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다) 칸토르 집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은 아무 실체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언어를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 자체를 감각하는 것을 연습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라는 잔상 속에서 살게 된다(이건 사이비 종교 같은 말이지만 어쨌든 그러하고 고서들은 이런 식의 가르침으로 끝난다).
 

7. 통합이론으로서의 음양오행 등 변화 중심 관점은(실천과 감각을 중시하는 이것을 논리적 완결성을 중시하는 서양철학의 "이론"과 같은 범주로 놓아야 할지도 의문이나) 동양의 제반 학문을 강력히 통솔하여서 의학, 천문학, 역사학, 윤리학, 법학 등에서 모두 "무엇이 차면 반드시 그 안에서 기울고 썩어 새 것이 싹튼다"는 식의 묘사가 나타난다. 즉 관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음양 자체 뿐 아니라 동양의 제반 응용 학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주역은 순전히 임계점에 관하여 서술한 책에 가깝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철의 임계점은 770도 이상의 뜨거움과 770도 이하의 차가움의 경계다. 세계가 물리적이든 사회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떤 범주, 어떤 대상이든 음과 양으로 나뉠 수 있는 불균형 상태이며 따라서 그 경계에서 임계점에서 일어나는 자기조직화와 자기닮음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예측할 수 없는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이 주역의 줄거리 아니던가. 태초에 불균형(다름)이 있으니 음과 양이 나와 그 사이에서 만물을 생성했다는 의미는 이런 것에 가깝다. 물론 첫 아이디어는 역시 생물학적 임계점과 자기닮음꼴 자기조직화의 한 예인 성관계와 출산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임계점이 곧 변화이고 현재이다.
   "변화를 이해하고 감각하며 따른다"는 동양철학 사상들의 궁극적 목표는 그 변화에 거스르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물리적으로 변화에 저항하다 더 큰 격변을 불러오는 것이 관성과 마찰력이듯, 인간의 개념 네트워크는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느 정도 고정된 채 저항하는데 나는 이를 전에 똑같이 '관성', 혹은 변화를 두려워하며 엉덩이를 빼고 다수와 제도와 고정관념 속에 묻혀 책임지기 싫어하는 '무임승차'라고 부른 적이 있다. 법, 제도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인식구조조차도 흔히 "고정관념"이라 부르는 것들에 매여 잘 바뀌지 않으며 그 속을 계속 파면 한 개념 안에서도 그 의미의 변천사가 의식과 무의식에 걸쳐 계속 쪼개진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은 어느 부르주아의 무의식 속 개념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인간의 언어적 개념적 인식과 현실의 괴리가 어느 정도 커질 때 미끄러지면서 진동을 일으키며 이것이 때로는 역사적 비극으로 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변화 중심적 사고에서 올바른 삶이란 항상 자신의 고정관념과 인식 틀을 반성하고(아집을 버리고) 마음을 상이라 관조하며(불교의 관이나 정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격물치지), 실천하는 것이다. 개념의 지배에서 벗어나 개념을 도구로써만 이용하는 것이다. 이분법, 음양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반전하며 그 안에 또다른 음양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책에서 말하듯 사회의 변혁이 모래더미에 모래알이 떨어져 일어나는 모래사태와 비슷하다면, 사회의 변혁이 한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일어난다고 믿는 것은 위대한 모래알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도가나 불가에서는 사회를 변혁할 위대한 사람을 궁극적 목적으로 꼽지 않고 단지 변화를 아는 사람, "나"라는 틀을 잊고 개념에서 해방된 사람을 목적으로 한다(유가는 초기에는 그런 면이 있었으나 후대에는 좀더 정치적으로 변했다). 나의 목표는 어릴 때는 훌륭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도가나 불가의 목적에 가깝다. 그러한 모래알이 때마침 떨어질 때의 우연으로서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변화시키려면 우선 "나"라는 틀을 벗어야 한다. 상위범주와 하위범주의 모든 변화를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n********7 2012.03.2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순환하다: 인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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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원제의 영어는 ubiquity로 편재성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싶다 어느곳에서나 있다 존재한다라고 해석하면 무난할것 같다 과학이나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복잡하게 엮어져 있지만 실재론 멱함수로 풀어내고 있다 큰사건과 큰사건의 발생빈도는 거듭제곱 또는 세제곱의 마이너스로 비례한다는 것이다 즉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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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원제의 영어는 ubiquity로 편재성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싶다

어느곳에서나 있다 존재한다라고 해석하면 무난할것 같다

과학이나 사회생활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복잡하게 엮어져 있지만

실재론 멱함수로 풀어내고 있다

큰사건과 큰사건의 발생빈도는 거듭제곱 또는 세제곱의 마이너스로

비례한다는 것이다

즉 작은사건은 숱하게 많이 발생하지만 큰사건은 빈도수와 발생년수가

간헐적이다란 얘기이다

 

세상을 물리학에서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을 인간사에 대입시킨것은

복잡계로 명명된 과학의 업직이리고 생각한다

임계상태,복잡계,네트워크및 멱함수로 키워드로 복잡한 사회나 자연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이치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이해시켜 준다

 

특히 마지막장에서 인간과 역사와 관계설정이 대단하게 끝을 맺는다

카오스이란 복잡한 현상에 대한 원인이 단순하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관인 흥망성쇠가 주기적으로 <순환>

한다란 명구에 사회현상을 결부시켰어면 하는 나름대로의

사회를 보는 나의 견해에 추과하고 싶다

 

k*******n 2010.06.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