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다. 남에 잘못된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고사성어이다. " 성깔있는 개"를 읽는 내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단어이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남을 통해서 여러가지를 배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앞으로 살아갈 삶의 지표를 얻고,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지식의 지표를 얻게 된다. 그리고 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사회를 살아가게 되는 지표를 얻게 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통해서 잘못된 행동과 옳은 행동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된다. "성깔 있는 개"의 작중화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기르는 개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고, 그러한 비교를 통해서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 이 소설의 재미는 우리가 일상에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존재를 통해서 무언가를 느낄수 있고, 그것에서 감동을 얻을수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어린시절부터 강아지를 길러 왔지만, 이 소설을 읽기전까지는 우리주변에 있는 사소한 사물을 통해서 작가가 찾아낸 "타산지석"의 모습을 간과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미처 생각하고 있지 못했었다. 하지만 "성깔 있는 개"를 읽은 이후부터는 내 주변에 대해서 좀더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어졌고, 아무리 사소한것이라고 무언가 진리가 숨어 있지 않나 탐구해 보게 되었다. 단순히 제목만을 보고 "성깔 있는 개"가 유머러스한 내용의 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물론 작품 전반에는 있는 해학적인 문체가 담겨져 있고, 그 해학성 속에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의 계기가 될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
| 내가 책을 사기전에 꼭하는게 있다. 이 책은 과연 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여부를 가려내는 일이다. 작가, 내용, 독자들의 반응 등등 모두 중요하지만, 이러한 모든것을 뛰어넘는 가치가 바로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여부이다. 그러한 판단은 나 자신이 내리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일수 밖에 없는데, 이 책을 서점에서 보고 선뜻 구매를 하게된 이유는 내용이 좋아서도 아니고, 작가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것도 아닌, 바로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구매하게 된 책이다. "성깔 있는 개" 나는 이 제목을 보고, 여러 생각을 했다. 흔히 충성과 복종의 상징인 개를 두고, 성깔 있다는 표현을 쓴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었고,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에 대한 이미지와는 정반대 되거나, 설혹 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무언가 통념에 반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물론 나에 이러한 생각은 반은 맞았지만 반을 틀린것이 되었지만, 책의 내용을 잘 시사해 주는 제목이라고 생각이 된다.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여러 애완동물들을 길러보았을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애완동물들을 길러보면서 이 책에서 나오는 강아지와 같은 (물론 작중 인물의 시선에 투영된 강아지에 대한 시선이겠지만) 행동을 보고 왜 전에 강아지를 보고 작가와 같은 생각을 해본적이 없을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단순히 지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역활만 하는것이 아니라, 작중 인물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강아지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지 못했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작가의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마주칠수 있는 상황(예를 들어 강아지를 기르다든지하는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잊고 있었던 우리의 지치고 좌절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마라이의 다른 소설 "열정"은 "성깔있는 개"를 읽기 전에 읽어보았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본 탓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느꼈던 감동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 책은 나에게 상당히 유쾌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
| 무척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기존의 산도르 마라이 작품들과는 다소 다르지만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고 생각 할 수 있게 하는 작가의 힘은 여전하다. 1932년 작품인 이 책의 시작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다. 별 생각없이 주인공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추토라 라는 개를 구입하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주인공인 작가 자신, 부인인 롤라, 그리고 개 추토리 그들의 이야기가 펼처진다. 성깔있는 개 추토리가 등장하면서 구두, 책 등을 등 집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심지어 우편 배달부의 다리도 성하게 놔두지 않는 망나니 같다. 그런 개 추토리와 저널리스트인 신사의 농담들이 재미있게 펼처진다. 기존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반항아나, 사랑, 열정 등에서 보여준 자아성찰과 더불어 결코 무겁지 않으면서 생각할 수 았게 만들어주는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제가 빛을 발하면서 이 책을 흥미롭게 읽게 해 준다. 책의 제목인 '성깔있는 개'와 정말 잘 어울리는 추토라와 그런 개의 성장을 하나 하나 옆에서 지켜보면서 작가는 주변의 작은 것들에 대해서 곰곰히 관찰하게 되며, 자신의 삶을 투영하게 된다. 작가 자신의 젊음시절과 지금 현재의 노년을 비교하고, 이웃과 가족간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성찰의 기회를 갖는 동기가 되는 중요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성질만 사나운 개 추토리는 적어도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바깥으로 마음껏 분출을 하지만 사람이게는, 혹은 작가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대담함이나 용기가 없다. 정열을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작가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나.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주변의 작은 것들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또한 작가는 그 성깔있는 개 추토리로 인해서 시인에게 풍부한 창작열과 소재를 얻기도 한다.. 어린 개에게서 세계상이 형성이 되고, 시인은 이 세계상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들과 태도, 희망과 소원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며 창작의 욕구가솟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매우 유머러스하고 풍자적이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현학적인 느낌까지 있으면서 슬픈 여운이 남는 책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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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한 발, 한 발 걸어왔을 것이다.
허나 누군가가 내 삶으로 들어온 순간을 돌이켜보면
늘 풍덩하고 뛰어든 것 같은 커다란 흔적으로 기억된다.
내게 있어 이젠 버릴 수 없는 그 소중함들..
첨 마주친 순간부터 그렇게 되리라 예상했던 적이 얼마나 될까.
추토라가 개가 아니라 여인이었다면
대단한 연애소설로 기억될 책이다.
추토라가 그저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그런 개였다면
이 책은 쓰여지지도 않았을 것같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토록 가슴이 아릿해지지도 않았을 것같다.
결국 헤어짐의 원인이 된 것도 그 '성깔'탓이지만,
화자의 가슴에 범상치않은 감정으로 남게 된 것도 그 때문일거다.
줄거리로만 누군가에게 설명해준다면
그다지 별나지않은 얘기일 이 책이
읽은 사람에겐 왜 이렇게 먹먹함으로 각인된걸까.
그 줄거리를 표현해낸 사람이
산도르 마라이이기 때문일 거다.
이젠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되어버린 이 사람을 떠올릴때면
당연한 듯, 추토라도 함게 기억될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작가들에게 개 소설말고 다른 의무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는 암울한 표정의 선지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11 추토라는 기진맥진하여 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스러운 젊음, 힘을 제대로 분배할 줄 모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상의 모든 자극을 게걸스럽게 받아들이는 젊음의 단순한 피로이다. ‥온 세상이 빙빙 돌아도 이렇게 깊이 잠에 취할 수 있다니. 175 아주 괴로웠던 체험도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추억이 된다. 182 크고 작은 세계를 다 보고서 자신의 방식대로 판단을 내린 듯이 절뚝거리며 조용히 문을 나선다.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다. 276 추토라를 생각하면, 그 동물에 대한 기념으로 집안 식구들 모두의 손에 흉터가 남아 있는데도 그리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저려온다. 신사는 추토라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 온순하고 매력적인 킹 지미의 모든 장점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은밀히 의심한다. 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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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산도르 마라이님의 책을 찾았다. 가끔씩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를 때, 산도르 마라이님을 만나면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쇠고랑이 서서히 풀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조금씩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으로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번 소설 <성깔 있는 개>에서는 한 신사가 등장한다. 부유하지 않은 소시민이며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는 마라이님의 자전적인 소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추토라와의 만남을 신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같이 지내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개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그야말로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56p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아가나 그 자유속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어떤 규율의 틀 안에 갇혀 있거나, 그 규율을 지키려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때가 많다. 신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랜시간 지켜오던 규율이 있고, 그것을 깨는 것은 쉽지 않다. 허나 이렇게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추토라라는 존재로 인해 신사의 규율은 깨지고 만다. 어쩌면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추토라의 모습에 자극을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사는 추토라를 위한 노력의 시간에 서서히 한계가 오기 시작한다. 추토라는 사람을 무는것을 시작으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본색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표현해야 할 듯. 신사는 추토라의 입장이 되어 이해해보려 노력했고 받아들여 보려했지만, 종국에는 사생결단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시간까지 가게 된다. 초반의 넘김은 매끄럽게 넘어가지가 않는다. 헌데 사건의 발단이 시작되고 클라이막스 부분으로 가면서 감정이 고조되고, 아린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그래서 한동안 어린시절부터 함께하고 있는 우리집 강아지 앞에 앉아 아무말 없이 눈을 쳐다보고는 했다.
서로 다른 개체가 만나 서로 융화되는 과정에서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결코 그것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향한 마음이 크기게 더 서로를 강렬하게 물어 뜯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를 물어 뜯고 피 흘리는 과정에서 오버랩되는 일들.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 추토라와 피를 흘리며 그것을 바라보는 신사를 볼 때, 어쩐지 내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서서히 경험을 쌓고,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실망을 대가로 배우면서, 우리가 보통 아름답고 선하고 고결한 것만이 아니라 억눌리고 완전하지 못하고 분노에 차 이를 갈며 싸우는 것, 풍습과 화의가 아니라 오점과 항의를 뜻하는 것도 사랑하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대단한 교훈은 아니다. 그러나 친애하는 독자여, 예술에서도 삶에서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여하튼 개에게 한번쯤 물려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278p
소설의 끝자락에 나오는 구절이다. 읽은지 좀 지났는데도 여운이 남는 책.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살아간다는 것에 위로가 되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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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한 삶을 살며 자유에 투항하는 <성깔 있는 개>의 신사는 저자 ‘산도르 마라이’ 의 의식이 전적으로 투영되어 있는 듯 보인다. 작가의 경험담이 녹아있다고 해서 모든 실제적인 사실을 바탕을 두고 썼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글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임에도 너무나 자기의식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어 자전적 에세이로 여겨도 무방할 듯 하다. 마지막의 삶을 자살로 마감하면서 죽음조차도 개인의 자유에 맡긴다는 스스로의 슬로건이 있기에 <성깔 있는 개>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개인의 삶에서 자유가 빠지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미국산 개 빌리에 반항하며 계급투쟁을 했던 추토라처럼 신사 역시 어느 것에 귀속된 삶을 살기를 거부한 듯 보인다. 지배 계층의 세련된 옷차림에 동조할 수 없는, 무엇으로부터라도 귀속된 삶의 거부, 망명의 연속 속에서 고독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사적인 경험들을 ‘개’ 라는 존재에 빗대어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추토라의 일생은 모든 억압에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고 있다. 흉측한 사슬에 얽매이지 않고, 똥도 완벽하게 가려내는 강대국 미국개보다 더욱 스스로의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개에게 자아를 찾는 것이 다소 난해한 관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근사한 피조물’ 이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신사의 말처럼 이 글의 주인공 추토라는 세상 어느 개 보다 더욱 자의식이 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책 소개란에 이 책이 유머러스하다고 표현했는데, 나에게는 전혀 유머러스하지가 않아 유감이다. <성깔 있는 개> 는 ‘인간’이라는 신사와 추토라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개’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개를 다룬 소설들을 많이 보아오진 못했지만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니만큼 대략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듯한데, 개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파헤치는 소설을 보기는 굉장히 드물다. 개와 인간의 관계에서 어떤 돌출된 사색을 요구하면서 이어지는 진지한 삶의 모습을 내다보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계급투쟁이 개에게는 그 어떤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온순하던 개의 반란도 인간에게는 가벼운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현실. 신사 스스로 추토라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끝내 굴복시킬 수 없듯이 인간과 개 사이에는 더 가까워 질수도 떨어질 수도 없는 끈끈함이 베어있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건 혹은 그 이상이건 간에 개인이 다른 개인을 무력화 시키며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 마지막 장 ‘너를 좋아하지만 굴복시키련다.’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굴복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대인관계의 메커니즘은 파멸을 맺게 되는 것이다. 억압된 성적 충동으로 추토라의 쿠데타가 정의시 되는 듯 했지만, 보다 더 깊은 내면의 돌출적인 성격의 표현이 그의 자유를 갈망했던 게 아닐까. 성깔 있는 개와 그 개 주인의 모습이 너무도 닮아 있어 이 책이 주는 고요한 슬픔이 더욱 깊다. [인상깊은구절] 신사는 추토라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 온순하고 매력적인 킹 지미의 모든 장점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은밀하게 의심한다. 살아가면서 서서히 경험을 쌓고,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실망을 대가로 배우면서, 우리가 보통 아름답고 선하고 고결한 것만이 아니라 억눌리고 완전하지 못하고 분노에 차 이를 갈며 싸우는 것, 풍습과 화의가 아니라 오점과 항의를 뜻하는 것도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2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