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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당한 집 생각해 본다. 1시간 동안 온전히 가르칠 수 있는 지역, 도시가 내겐 있는지 애정하고 언제고 한번 오래 머무르고 싶은 '제주'는 꽤 많은 시간을 내어 수업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주소가 나오게 출력하면 두 장이 훌쩍 넘는 등초본이 말해주는 것처럼 이사를 많이 다녀서인지, 서울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보령이라 말하고 학교를 오래도록 다닌 곳은 수원이라서 인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을 마땅히 찾을 수 없다. 수원? 그렇지 수원이야 뭐 서너 시간 할 수 있을 테지 '광주', '경주'를 생각해 본다. 그곳에 어떤 연고를 두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름 지리를 전공하고 살아온 시간이 꽤 되니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한데, 책을 읽고는 생각을 고쳤다. '광주', '경주'에 대해 수업이 가능할 정도의 이야기를 한번 품어봐야겠다. 작가님은 이 두 곳에 어떤 인연을 대고 있을까? 아무 연고 없이 진정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세상을 살피는 눈'으로 지금 이 소설의 무대인 광주와 경주를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작가님이 나 대신 우리 아이들 지리를 좀 가르쳐주시면 아이들 좀 덜 잠에 빠질 텐데... 그뿐 아니라 광주 민주화 운동, 세월호 참사, 월성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물처리장 등 재난을 겪은, 또 엄청난 재난을 몰고 올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으며, 이를 예술과 기록을 통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미래 세대에게 어찌 생각하면 좋을지를 한 권의 책 속에 여러 이야기로 풀어내주고 있다. 점거당한 집 사실 자의든 타의든 감금당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희망을 언급해 준다. 빛이 새어들고 밖으로 통하는 곳에서 펼쳐지는 아마추어들의 연극, 미술관에서 그리고 생활공간을 잇는 CCTV 그리고 잠행을 하는 행위 예술?이라고 해도 될는지, 그리고 무덤이라는 폐쇄된 공간 즉 지하 위에 건설된 도시에서의 화두까지 온전히 이 소설에서 작가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런 잠금, 감금, 폐쇄 속에서도 역경은 극복되는 것이고 그러한 시도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아닌가 싶다. 사형수마저도 물웅덩이를 밟지 않고 건너는 일처럼 온전한 의식 속에서 말이다. 이러한 시도는 예술과 기록 그리고 일상의 행동에서 미래 세대에 그대로 귀하게 전해질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글을 적었습니다. #점거당한집 #박지리문학상수상작 #최수진 #소설 #책추천 #책스타그램 #사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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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이다. 상 이름만으로 작품에 설렌다. 완전히 길을 잃어도 좋다고 하니... 좋다. 어디서라도 잠시 나를, 혹은 무언가를 잃고 싶은 시간이다. 길을 잃어도 한 장씩 넘겨 읽다보면 안전하게 현실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니... 참 좋다. ![]() “그러니까 물건이 아니라 공간을 훔칠 방법은 없을까.” 문자들 속에서 길을 완전히 잃었다. 난독증을 두려워하며 두 번 읽는 도중에 기분이 좀 편해졌다. 어디에서 언제 내가 장소성을 잃었는지, 혹은 문학이 아닌 현실의 장소성이 흐려진 건지 생각하며, 작품 속 시공간을 짚어가며 문장 속을 걸어 다녔다. ![]()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미래(다른 장소의 이미 현재)가 있고 - 원전사고와 기후재난, 그 시공간은 과거의 폭력들과 이어져있다. 등허리가 서늘하다 뜨겁다하며 작품 속 기후와 변하지 않은 인류의 생활방식에 반응했다. 되풀이되는 폭력이 소설 속에서도 지긋지긋했다.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감정적 반응은 내 시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 탓인지도 모른다. 이제 확신도 희망도 기대도 없는, 실은 오래 전에 포기하고 실망한 것들, 은밀하게 좌절하고 무심해진 것들이 내 속에서 부대끼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 작가의 글은 현대설치미술 공간에 들어간 것처럼 낯선 체험을 하게 한다.
“자기의 감각에 따라 전시된 예술과 현실을 만나게 할 어떤 접점을.”
작은 공간들이, ‘공공성’을 간신히 소유한 곳들이 인류의 ‘방주’, 아니 누군가의 방주가 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 인간은 어딘가로 들어가서 살아야 하지만, 구명을 위해 자신을 가둔 물질적/비물질적 공간을 나와야할 때도 있다. 아는 과거가 아닌 모르는 미래를 보는 방법을 배워야할 때도 있다.
“선물을 내던진 그 한순간의 몸짓에서 한일이 작품 안에 머물고, 스스로를 연출하다, 바깥으로 나가는 법을 익힌 인간임을 목격했다고, 나는 쓴다.”
어릴 적 나는 건축공간이라 거의 영속하는 존재라고 느끼고 믿었다. 어설픈 어른이 된 나는(그저 나이 먹은 나는) 문득 내가 사는 공간이 내 집인지 의심을 품는다. 여전히 유령처럼 오랜 질문들과 허공을 떠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까……. 도착과 뿌리내리기에 실패할 것만 같은 현생을 느낀다.
실은 시공간에 대한 고민은 허망하기도 하다. 할 수 있는 게 뭐란 말인가. 현재라고 불리는 순간을 살아갈 뿐, 살아남을 뿐. 점점 더 낡아가는 물질적 공간에서 점점 더 좁아지는 정신적 공간을 애써 지키며 살아갈 뿐. 지금, 여기, 우리. 오늘을 살라는 뜻…….
이 책을 만나기 전에도 나는 책을 공간으로 삼아 의지하고 살았다. 대피소이자 피난처로 책보다 안전한 공간은 없었다. 펼치기만 하면 이동할 수 있는 기적같은 예술, 물성을 가진 종이책.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그 실체를 꽉 잡고 잠시 위안을 얻는다.
소설은 장소다.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른 기능을 하는. 천변만화하는 고유한 장소이다. 그러니 나의 모든 오독에도 너그러울지 모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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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지원 도서
『점거당한 집』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최초 단편 수상! 색다른 실험적 예술 문학_최수진 소설/사계절 그래도 책을 조금 읽기보다는 자주 읽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여행은 자주 가지 않아도 도서를 통해 떠나는 여행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책을 하나의 통로였다.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닿게 해주는, 눈으로 보이는 글자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연결해주는 그런 존재였다. 손에 잡고 있으면서도 좀 처럼 구체화되지 않는 존재, 글로 적혀 있으면서도 시선에 닿는 글자 이상의 것을 담고 있는 것, 한 장의 종이에 그것보다 무겁고도 가벼운, 깊으면서도 측정할 수 없는 확장의 장소, 그것이 책이었다. 특히,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 도서 '점거당하 집'을 읽으며, 다 읽기 전에 읽으며 그 생각의 오만함을 느꼈다. 한 마디로, 이런 도서 자체가 처음이었다. 어떤 장르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어려운, 익숙하지는 않지만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새롭고 특이했다. 읽으며, 내가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도서의 세계가 너무 좁았다는 것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어려우면서도 작품에 담긴 의미와 저자의 시선이 궁금해서 수상 소감과 문학상에 대한 내용까지도 읽어가게 된다. 색다른 실험적 예술 문학, 이런 도서는 처음이었다.
사실 상 빛의 방멱이 무슨 상관이냐는 거였다. 중요한 것은 끔찍하도록 눈부셨던 그것이 남겨진 우리에게 미친 에두르는 빛, 잔상, 연액한 미광이라고. "그러니까 이 전당 자체가 방주인거군요. 여기에 탄 우리들 또한 앞날은 모르고. 빛의 장벽은 번쩍 황홀했다가 사라진 계시고. 떠돌아다니며 사라진 길과 희망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고." (46p)
그렇게 비밀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방치된 이 집을 집이라고 할 수 있나. 청소하며 한일은 생각했다. 집이란 마땅히 딱 들어맞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80p)
작가란 우리 삶의 거울과 거울 사이를 오가며 끝없이 메아리치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형상들이다. 그 끝없는 반사광 틈에서 잠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들은 언제나 문 안의 우리에게 손짓한다. 우리를 멈춰 세우려는지 이리 오라고 부르는지 헷갈리게끔. 이 전시는 어느 편에 속하는가? 선물을 내던지 그 한순간의 몸짓에서 한일이 작품 안에 머물고, 스스로를 연출하다, 바깥으로 나가는 법을 익힌 인간임을 목격했다고, 나는 쓴다. (119p) 특이하다. 특히, 세 편의 단편은 마치 하나의 장편 소설처럼 시대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원전사고 이후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 그런데 단순히 재난 소설이라고 소개할 책이 아니다. 게다가 그 보다도 '예술'이라는 연결고리이자 관통하는 선은 그 형태와 장면이 다른 듯하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책 속의 상황과 그 가운데 뒤섞인 공간 그 실제와 허구 사이에 인무들의 시선과 대사를 읽어간다. 독특한 전개는 단순히 예술이 나와서가 아닌 그 전개의 과정까지도 그 흐름마저도 저자가 예술을 도서에 담으며 전하려 했던 의미를 담아내는 하나의 세밀한 자치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백남준아트센터, 경주처럼 실제 장소가 등장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묘하게 흐려진다. 그것이 어쩌면, 작품에 시선을 두며 읽어가는 과정에서 더 생각해 보게 되고 다시 살피며 읽게 되는 부분이 되어주기도 하기에 단순한 장소가 아닌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가며 질문하게 되는 그 독자의 시선까지도 담아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재난이 지나간 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록하며, 예술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읽기 편한 서사와 명확한 결말을 기대한다면 낯설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한 소설의 형식에서 벗어나 문학과 예술, 공간과 기억의 관계를 탐험하는 독서를 좋아한다면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 될 책이다. 책 속의 상황과 사건은 단순히 기발한 사건이 아니다. 누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가, 예술은 어떤 규격 안에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스토리를 빠르게 파악하며 쉽게 읽히는 도서는 아니다. 두꺼운 두께가 아님에도 쉽게 읽으려 펼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색다른 문학적 경험과 그 도서 안의 의미를 다시금 사유하며 독특한 듯 의미있는 도서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신 분께 소개드리고 싶은 책이다. #박지리문학상, #점거당한집, #사계절출판사, #사계절, #최수진, #책추천, #서평단, #협찬, #지원도서, #독서, #독서아카이브, #실험적예술문학, #박지리문학상수상작, #점거당한집리뷰, #도서리뷰, #책서평, #서평, #추천, #도서추천, #예술가, #신간도서, #예술문학, #점거당한집서평, #문학상수상작, #30대도서추천, #20대도서추천, #책읽기, #책소개, #책소통, #북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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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찾았다면서. / p.63 읽다 보면 자동으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소설들이 있다. 파트릭 모디아노 작가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버지니아 울프 작가의 <댈러웨이 부인>처럼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장면을 붙잡아 두는 스토리 그렇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습관이 있는 독자로서, 이런 작품 앞에서는 손이 멈춘다. 이런 소설의 리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렇다고 물음표 하나로 시작하고 마지막까지도 물음표 끝낼 수는 없지 않을까. 예술을 아예 소재로 삼은 물음표 같은 이 책은 최수진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이다. 출판사 SNS를 통해 박지리문학상이 올해를 끝으로 마무리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적어도 나에게 박지리문학상은 금 난해한 문학상처럼 느껴졌다. 자주 시청하는 북 크리에이터님의 월말 정산 영상에서 현호정 작가님의 <단명소녀 투쟁기>에 관심이 갔지만, 단요 작가님의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는 어려웠다. 이번에 접한 작품 역시 걱정을 안고 시작했다. 소설은 총 세 편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근 미래인 2031년 원전 사고를 겪은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첫 번째 작품인 <길 위의 희망>은 2036년에 광주광역시의 국아시아문화전당에서 화자가 시위대와 함께한 이야기를 다룬다. 두 번째 작품인 <점거당한 집>은 2044년 백남준아트센터가 있는 용인에서 예술가 남매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다. 마지막 <금일의 경주>는 2044년 원전이 있는 경주가 무대로 한다. 너무 어렵게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세 편이 예술가의 이야기라는 점 외에는 세 편의 공통점이 와닿지 않았다. 세 편을 단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연결성이 보였지만, 하나의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관계가 너무 느슨하게 느껴졌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파악해야만 하는지 당최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박지리문학상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공간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광주광역시의 아시아문화전당은 시민의 문화 공간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소설 속 아시아문화전당은 시위대의 생활 터전이 되고, 백남준아트센터는 남매의 서사와 어울리면서 단순한 예술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역사적 건물이 많은 경주는 원전 사고로 폐허가 되었는데 내가 머릿속에 그려 왔던 장소들이 다르게 그려진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마치 예술의 기법 중 하나인 모자이크를 활자로 표현한 듯한 작품을 만났다. 처음으로 페이지를 덮고 나니 물음표가 떠올랐고, 두 번째 덮고 나니 그 물음표가 두 배가 되었다. 온전히 작품을 이해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드는 것은 덤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이 머물렀던 공간만큼은 머물렀던 공간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매일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공간들을 조금은 낯설게 바라보게 된다. |
![]() 제4회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았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무서운 신인이 나타났구나!!! 싶은 소리없는 탄성이 가슴속에서 터져나왔다. 작가는 익숙한것을 낯설고 새롭게 보여주는데 천재적인 감각이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정교하게 직조해 만든 태피스트리 같은 작품이 독자를 단번에 끌어들인다. 작가가 세운 멋진 이야기의 집에서 한번더 머물고싶다. 이 책은 절대 한번만 읽고 끝낼작품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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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로 빚어낸 진실이다. 어디선가 듣고 읽은 듯한 문장으로 소설에 대해 범박하게 쓰자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허구이다. 삶의 진실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담았더라도 소설 그 자체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허구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작품과 작가마다 다르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허구를 짜내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실제의 역사 기록을 재료로 허구를 짜내기도 한다. 최수진 작가의 《점거당한 집》은 이 가운데 독특한 방식을 택한다. 작가 자신이 허구로 만들어낸 기록을 바탕으로 또다른 허구를 짜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2024년인 지금으로부터 8~20여 년이 지난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SF소설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월성고리원전의 사건으로 인해 폐허가 된 경주와 빛의 장벽이라는 신비로운 현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경미한 광주의 묘사 등에서 디스토피아 장르로 이 소설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설정에도 이 소설을 SF로 잘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 소설이 예술과 예술가를 중심으로 다룬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에 여전히 활발히 논의 중인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 등 현실의 문제가 두텁게 칠해진다. 이 이야기가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로 읽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흔히 메타소설이라 말하는 이 같은 방법론을 작가가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흥미 이상의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작가 스스로 작품에 적었듯이 역사가 늘 나쁜 쪽으로 되풀이 되는 것 같은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지금 이곳의 문제에서 근미래라는 상상 속 시간의 거리두기를 통해 암울하리라 예상되는 미래 속에서도 한줄기 긍정의 빛을 찾으려는 노력이 메타소설이라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제자리걸음이라도 걷고 있으니까 다행인 걸까요?"(169쪽)라고, 마찬가지로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의 입을 통해 하는 이 말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 완전한 제자리걸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제자리걸음이라도 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보이는 디스토피아의 근미래에도, 현실보다 더 암울해진 그 미래의 현실에서도 희망을 읽어낼 수 있는 까닭은 이 제자리걸음의 역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출판사에서 책을 받아 읽고 썼습니다. #박지리문학상 #점거당한집 #최수진작가 #사계절출판사 |
![]()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최수진 작가의《점거당한 집》을 만나보았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을 읽고 정말 멋진 작품을, 정말 뛰어난 작가를 만났다는 설렘에 즐거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얼마 후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너무나 허망했던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 흐려지는 기억을 매년 박지리문학상으로 붙잡고 있다. 올해 허망했던 기억을 달래줄 작품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연작 형식을 띈 단편소설 세 편이다. 「길 위의 희망」 「점거당한 집 」 「금일의 경주 」 세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은 독특하다, 색다르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새롭다는 느낌이다. 시간적인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듯싶지만 현재의 '점거'는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고 또 미래와 연결된다. 미래에 발생한 원전 사고 전후의 이야기가 세 편의 작품들의 주요 흐름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원전 사고가 중심이 아니라 예술가(춤, 미술, 소설)들의 삶이 중심이다. 아마추어 춤꾼부터 작은 전시회를 연 미술가 그리고 박물관의 작은방을 차지한 소설가까지. 故 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은 지금까지 만나본 소설 중에서 몇 안 되는 강렬한 첫인상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번에 수상한 작품《점거당한 집》에서는 그런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새롭다는 느낌은 확실했다. 실제 하는 지명(광주, 용인, 경주)가 주는 익숙함이 낯선 예술적인 무언가로 변화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개인적인 삶이 '점거'라는 사회적인 행동을 통해서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지 보여주고 있는듯하다.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다. 스토리보다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 기기 버거운 소설이다. 하지만 짧은 스토리 속에서 이렇게 많은 그리고 이토록 깊은 생각을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만나보아야 할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사계절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점거당한집 #최수진 #사계절 #제4회박지리문학상수상작품 #소설추천 #책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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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 그 동안 읽은 한국 소설에서 손꼽는 작품 중 하나가 박지리 작가의 <다윈 영과 악의 기원>이다. 안타깝게 요절한 이 작가를 기리는 문학상이 벌써 네번째다. 매회 발표 때마다 수상작들을 읽고 있는데 늘 예상 밖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번 수상작 <점거당한 집>도 그랬다. 얕은 독자로서는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새롭다는 면에서 색다른 독서 체험을 시켜준 작품이다. 총 세편의 단편이 묶여있다. 연작의 형태로 각각 다른 공간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길 위의 희망'은 광주의 국립 아시아 문화 전당이 배경이다. 두번째 '점거당한 집'은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를, 마지막 작품인 '금일의 경주'는 경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예술 퍼포먼스와도 같은 형식이 상당히 낯설다. 서사가 있긴 한데 익숙한 구조로 짜여져 있지 않다. 또 세 군데의 공간은 실재하는 장소라 읽으면서 그 장소를 체험한 기억을 소환시키기도 한다.(경주가 그랬다.) 한편 소설들의 시간적 배경은 2033년 이후의 근미래다. 공통적으로 월성원전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는 설정이 있는데, 이는 실재하지 않은 사건이지만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복잡 미묘한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장소가 가장 도드라진다. 하지만 소설은 오히려 그 안의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들이 마음에 들었다. 말랑말랑해서 삼키기 쉬운 소설에 익숙하다면 어렵게 느껴질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의 새로운 시도를 접하고자 한다면 기대에 부응할 작품이다. 최수진 작가님의 이후 작품도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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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기다리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요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이다. 도파민이 넘쳐 흐르는 세상 속에서 잠시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수상작들. 올해는 휴가 일정 때문에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읽고 휴가 가려는 욕심..) 점거당한 집은 2031년 원전사고 이후 살아가는 세 도시의 이야기가 세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길 위의 희망>에서는 2036년 5월의 광주를 만날 수 있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점거한 시위대와 찬란은 그 안에서 연극을 만든다. 시위대는 지방에서 벌어진 사고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차별에 불만을 품고 항의의 표시로 점거를 시작했다. 분명 2036년이 배경이지만 현재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전개였다. 약 10년 뒤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사회라니, 악한 역사는 왜 자꾸 되풀이되는걸까. 두번째 단편 <점거당한 집>은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가 배경이다. 어린 시절 남매의 놀이터였던 아트센터는 2033년 누나 박하니가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2044년 동생 박한일이 누나의 회고전을 열기도 하는 공간이다. 하니의 전시를 떠올리면 마치 집이지만 집이 아닌 것 같고 전시장이지만 전시장이 아닌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남매가 각각 준비한 선물은 무엇일까도 궁금해진다. 세번째 <금일의 경주>는 소설가 금일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다. 2044년의 화자는 금일이 썼던 소설을 읽고 경주시에서 운영하는 ‘작가의 방’에도 다녀온다.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를 읽고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에 가서 ‘작가의 방’을 보고온 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소설 속 작가의 방은 금일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이들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2023년의 나와 2044년의 화자는 비슷한 방식으로 작가를 기억한다. (덕질의 정석인가..)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한 사람들이 모두 예술가였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고, 낯설지 않은 지명들이 등장해서 미래의 일이지만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이나 나의 경험과 연결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역시 올해도 기대 이상인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을 수 있어 좋은 작품이었고 다음 소설도 매우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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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당한집 #최수진 #박지리문학상 #사계절 제4회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품이다. 앞선 작품들과 달리 경장편이 아닌 단편 3편이 한 편으로 엮인 연작소설이다. 세 편의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겠다. 길위의 희망ㅡ광주 편 시위대로 잠입한지 보름 만에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쫓겨난다. 취재기자로서는 초조한데 전당에 머무는 입장으로는 묘하게 느긋해진 내가 만난 찬란 씨는 시카고 출신 한인 2세로 스트리트 댄서다. 대사관을 통해 귀국하는 대신 28인치 트렁크를 끌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어리벙벙한 나의 취재 배낭도 정작 새벽에 기습적으로 진압이 이루어져 둘 다 짐을 챙기지 못한다. 진압대는 효율적으로 제압되어야 할 물건 더미처럼 다룬다. 대외적 리더인 눈 씨, 최초 점거자 하마 씨와 딱새 씨 남매. 쌍둥이 자매 빵 씨와 장미 씨 모두를. 눈 씨는 광주 시민들의 억울한 역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희망을 품었다. 취재기자인 나는 재난을 고발해야 했으나 전당에 머무는 그 고발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잃는다. 돌아갈 마땅한 집이 없는 시위대 동료들과의 짧은 만남이다. 1980년대를 떠올리는 2031년 원전 사고 이후 이야기는 어째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서 보낸 과거의 이야기같다. 2036년에도 BTS는 영원하길.. 점거당한 집ㅡ용인 편 누나가 전화를 받지 않자 어머니가 가보라고 시킨다. 누나는 며칠 전까지 백남준아트센터에서의 전시를 마무리한 차였다. 2033년 6월 한낮 최고기온이 43도에 달하는데 한일은 하니의 집을 찾는다. 경찰은 어제까지 백남준아트센터 내 카페에서 카드와 핸드폰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니는 2031년 5월 광주비엔날레에 신진작가로 초청받아 전시할 예정이었다가 월성원전사고로 중지되었다. 난장판이 된 집을 치우며 한일은 누나를 떠올린다. 이 집은 비밀이 무성하게 방치된 집이다. 한일은 숨겨진 위장카메라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내 닦아서 식탁위에 올려 놓는다. 자신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전시공간에 숨어든 누나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줄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다. 하니는 무엇을 준비했을까? 미술관에 칩거한 누나를 만난다. <점거당한 집-2044>는 한일이 하니의 전시를 재해석한 전시공간이 된다. 금일의 경주ㅡ경주 편 작가 금일의 첫 성공작 집필은 경주에 들어가서 시작됐다. 금일은 글을 잘 쓰는 작가가 아니라 산만하고 장황해서 오히려 빈약해 보이는 글쓰기를 한참 고수했다. 경주 근현대사박물관 3층 구석의 열람실에 전시된 낡은 일기가 그 이유다. 일기에서 전해지는 것은 우울이다. 복잡한 연애사와 약물중독 문제도 겹쳐 금일은 자신이 줄곧 어루만지던 소설적 주제를 파악하는 데 꽤나 오래 걸렸다. 2034년 경주는 파괴된 역사 도시가 아닌 역사가 파괴된 폐허였다. 이주 지원 비용으로 받은 돈의 반은 식비로, 반은 책을 구입하는데 썼다. 결국 경주 생활은 금일에게 날개나 밧줄이 아닌 두 발만 지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재인식시켰다. 어떤 이들은 이때부터 죽음이라는 주제에 끌렸으리라 추론한다. 내가 2044년 근현대사박물관을 찾아 '작가의 방'에 남은 금일의 흔적을 보려한다. 경주시를 대표하는 작가라지만 금일의 방은 넓지 않다. 문화예술전시관을 나눠 써야 해서 그렇다. 그래도 터무니없는 소품에 유난히 생경하다. 청년 작가로 박물관에 전시된 건 관계자들 중 아무도 금일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설처럼 실제로 읽지 않고서도 아는 척하기 쉬운 매체도 드무니까. 천년의 도시 경주가 폐허가 되고 금일은 경주시의 재개발로 쫓겨난 이들을 조직해 항의시위를 계획했다. 금일을 비롯해 두 명의 여성을 더 살해한 남자는 그냥 아무 동기도 없었다고 한다. 금일이 나를 위한 글을 썼다. 나는 금일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점거 시위로 노숙의 장이 되고, 집은 영상 포퍼먼스 작업의 무대가 된 반면 미술관은 생활의 장이 된다. 박물관의 작가의 방은 생전의 금일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방이다. 소설이란 근본적으로 난잡한 장소인 것이다. 소설과 장소가 동종의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데 맞나? 작가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세 편의 주인공들이 예술가라는 점과 미래 시점에서 쓰인 소설로 과거를 애도하는 점이 특이하다. 박지리문학상 수장작품의 면모가 확실한 작품이다. 속되게 지리다는 표현을 쓰고 싶은 책이다. 최수진 작가의 색깔이 드러난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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