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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는 사회 공동체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보편적인 도덕과 윤리가 존재했으나, 최근 몇 년 동안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무언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위험하고 불편한 일이 되고 말았다. 어떤 사건과 사회 현상에 대해서 '이렇다'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그것은 너의 정치적 입장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반격이 돌아온다. 인류의 오랜 보편적 상식에 기대어 판단해도 진보와 보수라는 필터링 앞에서는 그 모든 가치가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다는 모호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이처럼 보편적 가치가 흔들리다 보니, 내가 그동안 믿고 따른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확실하게 믿고 따를 절대적 가치가 무너져가는 시대에 일관성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참된 가치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시시각각 흔들리는 나를 다잡기 위해 이 책 [지혜의 쓸모]를 선택했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글을 처음 접한 때는 1990년대였다. 도덕군자들의 뻔한 문장들 속에서 그라시안의 글은 다소 삐딱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그는 삶의 지혜를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때로 얄팍한 처세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 책의 표지를 채운 문구들을 접하면서 발타사르 그라시안이 왜 그처럼 '속된' 가르침을 전파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유럽을 휩쓸고 구교(가톨릭)와 신교(개신교)가 대립하는 가운데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종교 재판과 이단 심문을 강화하며 종교적 억압을 이어갔다. 이런 세태 속에서 민중이 따라야 할 도덕과 윤리란 힘을 가진 지배자가 추구하는 통치 원리와 다를 바 없었다. 피지배층의 순종을 끌어내는 일종의 규율이었던 것이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은 가톨릭 사제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이상향을 내세우기보다는 힘겨운 일상을 극복할 현실적 지혜를 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자 그동안 재기발랄한 작가라고 여겨지던 그라시안의 이미지가 다소 거룩하게 다가오게 되었다. 말년에 이르러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친숙하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친숙하다는 의미는 이 책에 담긴 가르침이 한 번쯤은 나 역시 고민해보았던 문제들이라는 것이고, 낯설다는 의미는 그럼에도 전혀 생각지 못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에나 부지불식간에 맞닥뜨리게 될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선명하고 명징하게 길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여러 번 '아, 그렇지.'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1990년대에 반짝 읽혔던 그라시안의 글이 2020년대에 이르러 다시금 주목받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수상하고 불안하며,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새길 문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읽고 지나가는 그런 책이 아니라, 여기저기 포스트잇을 붙여서 가끔씩 꺼내보며 곱씹어도 좋을 내용이 많다.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한국어판이 많이 출간되어 있으나, 다른 책에 비해 깊이가 있기에 [지혜의 쓸모]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