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도 작가의 유년시절처럼 풍족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살았기 때문인 듯 하다. 게다가 연재처럼 그렇게 일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내가 막내였던 탓일 것이다. 우리 큰언니만 해도 아기인 동생들 돌보느라 학교를 9살에 들어갔고 바쁜 농번기 철에는 학교를 부지기수로 빠졌다고 하니까. |
저자 황선미하면 먼저 떠오르는 책이 바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었다. 이 책은 한번 읽는것에서 벗어나 소유하고 싶은 책으로 읽을때마다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곤 했었다. 그렇기에 신작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작가를 믿고 쉽게 선택할수 있었다. 사계절에서 출간된 청소년 소설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과 [열 여섯살 베이비시터]라는 책을 딸을 위해 구입했다. |
<나쁜 어린이표>,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황선미 작가의 청소년을 위한 소설<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을 읽으며 떠오른 이야기속 풍경과 나의 어린시절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잘 살아 보자고 팔을 걷어 부치고 너도나도 새마을 운동에 동참하자던 경제계발에 열을 올리던 모습이 마치 그당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식구는 많고 집안은 가난해 겨우 방 한칸 얻어 더부살이하던 친구가 자연스레 셍각난다. 그 친군 밀린 육성회비 때문에 선생님께 꾸중 들어도 늘 씩씩했고, 가난해서 엄마가 학교에 한번도 찾아오지 못해도 전교 일등을 도맡아하는 똑똑한 오빠를 둔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놀고 싶어도 집안일과 동생들 때문에 재미난 놀이도 포기할 줄 아는 착한 아이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말다툼 끝에 미안하단 말 한마디도, 잘가란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작가의 유년시절이 그녀의 글의 자양분이 되었다며 쓴 자신의 어릴적 이야기가 담긴 자전적 이야기여서 일까, 글귀마다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다. 소설은 열한살 소녀 연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리고 있다. 70년대 경기도 평택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시대의 아픔과 산업화로 인한 변화의 물결, 그와중에 집과 가족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외삼촌의 빚보증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올 수 밖에 없었던 연재네는 평택에서 단칸방 객사리를 살게 된다. 생선 행상을 나가는 엄마와 막일꾼으로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버지,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오빠와 밑으로 여동생 셋이 있는 연재는 맏딸이기에 어린 나이에도 집안 살림을 맡아하며 젖먹이 막내를 돌봐야만 한다. 가족의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안아 동갑내기 외사촌 재순이가 사는 외숙모네 다 쓰러져가는 초가의 방 한 칸을 겨우 얻어 이사하게 된다. 재순이의 텃새와 이웃 아이들이 따돌림으로 외톨이가 된 연재는 고향이 그립고 이런 상황을 만든 부모님이 그져 원망스럽기만하다.
새마을 운동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마을 길도 넓히고, 화투와 지게, 초가지붕 없애기 등 잘 살기위한 운동이라는 군수님의 말씀을 듣고 노래기가 줄줄 내려오고 비도 새는 집을 번듯한 집으로 바꿔 주겠다니 집주인보다 친척보다 더 좋은 사람임에 분명하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하굣길에 불타고 있는 자기네집 초가지붕을 보게된 연재는 번듯한 초가집과 바뀌기능 커녕 하루 아침에 비 오면 비를 피하고, 식구들의 물건을 들여놓고, 추운 밤에 다 같이 잠드는 집을 잃게 되었음을 알게된다. 친구들 집은 그대로인데 초가집인 연재네 집만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이다.
목수인 외삼촌이 반나절 만에 엉성하게나마 처마를 잇대어 판잣집 하나를 뚝딱 만들어 연재네와 재순네 임시 살 곳을 만들지만 도랑 때문에 각목으로 받쳐놓아 키만 껑충하니 큰 게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꺽다리 집'은 위태롭기만 하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게 바람에 떠는 그 집은 연재네 가족과도 같다. 겨우 판자로 가린 공간은 불어오는 바람에 오히려 더 춥기만 하다. 그래서 가족들은 어두운 밤, 각자 잘 곳을 찾아 뿔뿔이 흝어져야만 했다. 낮에 흩어졌다가도 밤이면 한집에서 모여 자는 게 가족인데 연재네 식구에게는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국 근대화의 원대한 꿈 앞에 덩그만히 남은 초라한 꺽다리 집과 추운 밤에 잠자리에서 쫓겨난 가족을 보며 연재는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려면 초가지붕을 개량해야 한다던 높은 분들이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들과 근대화에 분노한다.
따돌림과 멸시, 부당한 현실에 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기만하던 연재는 소풍날 그린 그림으로 받은 열두 가지색 사인펜으로 아이들에게 인형 그려주며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손에 쥐게 된 기분을 느끼는 연재를 보며 가슴이 저릿해져 온다. 작은 것 하나에도 기뻐하던 예전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찬곳에서 주무시던 아버지의 입이 돌아가 발음도 어눌해지고 일조차 나갈수 없게 된다. 연재와 오빠는 아버지를 위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 가지를 구하러 온 동네를 돌아다니고, 자신을 구박하고 앙숙이던 재순이를 비롯한 마을 아이들도 연재를 돕기위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 가지를 구하러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빠 친구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치료를 받게 되고, 오빠를 양자 보내라고 했던 숙이네의 도움으로 임시로나마 연재네는 따뜻한 잠자리를 갖게된다.
고향을 떠나옴으로 집을 잃고 변해 버린 식구들의 모습과 부당한 현실은 비단 연재네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적인 이유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가족이 해체되는 위기를 겪는 사람들이 단지 과거의 일일까. 오히려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보다 가족간의 대화의 부재가 더 심각한 가족의 와해 불러 일으킨다. 문제는 집이 아니란 생각이든다. 요즘은 가족수는 줄었어도 큰집에 사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각자의 방을 갖게 되었지만 방 한칸에 온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자던 예전의 살가움은 덜하다. 먹고 쉬고 놀고 부데끼며 사랑하는 온 가족이 꿈꾸던 집,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라야 비로소 집은 살아있는 공간이 된다. 집은 가족이 있어 모든 걸 다독여주고 보듬어주며 지친 심신이 쉴 공간이자 내일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개발과 산업화로 점점 횡폐해져가는 삶속에 이 책은 가족의 의미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정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아름답고 커다란 집을 꿈꾸기보단 따뜻함과 위로가 있는집, 서로를 위하는 가족과 좋은 꿈을 꾸며 살면 집이야 넓지 않은들 어떠리... |
개발이 절대 명제였던 시절,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아는가. 공장굴뚝의 시커먼 연기가 앞으로 다가올 보랏빛 미래를 상징하고, 아무리 열악한 노동환경이라도 참고 견디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시절, 전체의 그림판위에 개인이 말살되어버리고, 해서 나보다는 우리가 더 우선이던 시절, 희생은 당연하게 느껴야 하고 있는 것, 가진 것보단 없는 것이 더 친숙했던 그 시절 말이다. 어쩌면 개발이라는 명제 아래 박탈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마음과 몸 속에 스며들어야 했던 그 암울한 시절, 이 소설은 그때의 그 이야기이다. 그것도 의무만 있고 권리따위는 있을리 없던 열한살 소녀의 이야기이다. |
![]() 14년도 더 된 오래된 책을 찾았다. 도서관 직원에게 부탁했다.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 주셨다.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오래된 책을 보관하고 있는 곳인 것 같다. 오래되었다는 기준은 잘 모르겠다. 서고에 고이 잠들고 있는 책들 '서고 붙임 딱지'가 붙어 있다. 누가 봐도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명이 다하기 전에 읽고 싶었다. 폐기되는 절차를 밟기 전에. 최근에 우연찮게 황선미 작가의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를 만났다. 그 이후에 황선미 작가의 책들을 찾아내 읽고 있다. 이번에 어렵게 만난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도 어른이 읽는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자서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참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내신 것 같다. 읽는 내내 나도 어릴 적 시절이 생각났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에 살았었다. 연탄 한 장이 없어 차가운 겨울에 이불에 의지해서 지냈다. 찬 밥에 물을 말아 식사를 대신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어머니는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그때 그 시절을 상기하며 안타까워하신다. 그때 잘 못 먹여서 삐쩍 말랐다고 미안해하신다. 사실 그때 그 시절에는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살았다. 다만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우리 집은 더 가난했다. 바람이 지나갈 정도로 엉성하게 지은 집을 꺽다리 집이라고 부른 것 같다. 초가집이 강제로 철거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판자때기로 지은 꺽다리 집에서 육 남매를 키워야 했던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다시 생각해 보는 소설이다. 애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지만 소설을 읽으며 생생하게 장면 장면들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소설의 힘이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메말랐던 감정이 촉촉해진다. 요즘 살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하면 참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이 말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꺽다리 집보다 백배 천배 좋은 집이라고. |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 황선미 지음 사계절
돈을 벌어다 주던 아빠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외숙모집으로 이사가게 된 연재네 가족. 그러나 연재는 자신을 이유없이 미워하는 재순이 때문에 항상 외톨이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오빠 연후가 웅변대회에서 군수상을 받는다. 연재는 모든 집 지붕을 철제지붕으로 고칠거라는 면장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만 고치기 위해 초가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리자 연재는 소녀들이 원하는 것은 발전, 개발이 아닌 가족들이 함께 살 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풍날이 되어 재순이와 아이들, 그리고 반장이 오빠는 소풍을 가지만 연재는 맏언니라는 이유로 집에서 애들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다가 마법같이 막내 삼촌이 나타나고 연재는 소풍에 참가는 못하지만 삼촌이 준 돈으로 산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 상을 사인펜을 받는다. 그 후로 연재는 사인펜으로 옷을 그려주면서 인형놀이를 만들어서 인기를 얻지만 재순이는 점점 외로워짐을 느낀다. 말싸움을 하다가 연재는 재순이가 자신의 스웨터 끈을 뺏어간 걸 느끼고 달려가지만,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정신을 잃고, 그 때 연재는 시체를 본다. 다시 깨어난 연재는 자신에게 죽지 말라고 소리친 사람이 바로 재순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재순이와 화해하게 된다. 이 책은 연재네 가족이 숙이네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마무리된다. 처음 읽을 때는 재미없고 지루해서 끊겼는데 , 다시 맘먹고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되고 소설 안에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쓴 황선미 작가가 쓴 책이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청소년 소설이라기 보다는 동화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성장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생각을 담은, 자전적인 소설인 듯하다. 2011.10.26. 이지우(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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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의 신화를 이뤄낸 황선미 작가의 청소년소설이다. |
황선미 작가님의 책을 읽고 후회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초등학생들과 늘 함께하는 나의 직업상 아동문학을 많이 접하고 있지만 그 중 최고를 뽑으라면 늘 베스트 3안에 드는 마당을 나온 암탉의 작가. 그 분이 청소년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자 바로 구매하게 되었다.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 제목부터 신선하다. 늦은 저녁 읽기 시작해 딱 스무장만 읽고 자려고 했는데 어느덧 더 이상의 글이 쓰여져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책장을 덮게 한 그런 마력의 소설이었다. 역시 그녀였고 역시 그녀의 작품이었다. 20대 후반인 나 또한 여기에 나온 시대상은 읽어 알고, 들어 알고 있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공감할 수 있고 느낄 수 있었던 건 군더더기 없이도 묘사할 건 다 해내는 작가의 마술이랄밖에.
소설을 읽으며 밑줄을 잘 긋지 않으려는 나이건만 너무도 참을 수 없음에 옮겨 적고 되뇌이는 아름다운 표현들... 허술한 집을 보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꺽다리 집'으로 표현해낸다. 서글프고 시리도록 아픈 환경이지만 아이들의 이 표현 하나로 서글픔은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 동화 속 나라처럼 느껴진다. 흔들리는 자신의 집을 보며 '집에도 뿌리가 있나 보다'라고 하는 연재. 매섭게 집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가난한 가족이 웅크린 채 붙어 잠을 청하는데도 계속해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느끼며 '바람에게도 집이 필요한 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연재. 아~ 아이들은 흉내낼 수 없는 시인이 아니던가. 어느순간, 이 글이 작가가 아닌 어린 소녀 연재가 써 내려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아이의 눈으로, 아이의 입을 통해 작가는 순수하리 만치 아름답게 어렵고 힘들고 서글픈 상황을 빛나게 그려나간다.
알수는 없지만 혼란한 상황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게, 유치하지 않게, 촘촘히 연결지어 가며 화해와 용서,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그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연재가 결코 애처롭지 않은 건, 훗날 연재가 성장한 후, 이 시절을 얼마나 소중히 추억할 지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정이 가지고, 아타깝지도 않았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내는 연재가 얼마나 큰 거름을 흡수하고 있는지 나는 알 것 같기 때문이다.
황선미 작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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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청소년기를 겪고 있는 딸아이가 있다. 책 읽기를 즐기는 편이지만, 유독 성장소설이나 청소년소설에 관심이 많은 것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내가 살았던 청소년기와 너무도 다른 청소년기를 겪고 있는 지금 아이들의 속 내가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출간된 청소년소설이나, 나름 여러 곳에서 필독서로 지정된 청소년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공감이 가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우선 국내 작가의 작품보다 대부분 번역작품이 많아 지금 우리나라 청소년기 아이들의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경우다. 아마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다면 쉽게 발견하지 힘든 부분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학교 교육의 시스템이 아이들 하루 하루의 일상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많아 이질감이 느껴졌다.
지금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 사춘기를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참 자아를 고민할 청소년기에는 학교와 가정에서 입시로 짜여진 매일을 반복하면서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전혀 그 쪽으로 고민 할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정작 대학생이 되어서야 힘든 사춘기를 겪는 다는 것이다. 많은 부분 걱정이 되면서 또한 공감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아이들에 비하면 오히려 이 책의 저자인 '황성미'님이나, 지금 중년에 접어든 내가 사춘기를 겪었던 그때가 자기 내면을 돌아보고,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통해 나를 발견하기에는 더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
70년대말 80년대 초는 나에게도 사춘기를 겪는 시기였다. <바람이 사는 꺽다리집>은 마흔 중반의 내게 그래서 너무도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글이었고, 과거로의 따뜻한 여행이었다. 작가가 쓴 첫 번째 청소년 소설이자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아마 그 또래에 청소년기를 겪은 대부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 아이들에게 너무 공감이 가지 않는,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성장했고, 지금 그렇게 성장해온 우리의 손에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세대의 삶을 아이들이 들여다보며 공감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부모는 정말 힘들게 우리를 길러냈고, 우리는 다시 그 나이의 부모가 되어 우리 아이들을 기르고 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 판자를 여기저기 대충 붙여 만든 그런 집, 그래도 그 집에 가족이 모두 한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며 희망의 싹을 품어온 내 소중한 집이었던 것이다.
'나는 남의 기와집 처마에 애걸하듯 매달인 판잣집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색이 다른 판자를 이리저리 이어 붙인 누더기 같은 집이 불쌍하고 그 속에서 밥 먹고 자는 식구들이 불쌍하고 판자집 밑에서 먼지바람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살림살이들이 불쌍하고 점점 더 처량해지는 나 자신이 불쌍했다. '( p. 100 )
'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들의 집. 한낮에도 서리가 녹지 않고 어두워지면 식구들보다 바람이 먼저 스며들어와 웅크리는 집. 그래도 가끔 햇살에 반짝이는 서리가 눈부시게 예쁠 때 있고, 식구들이 모여서 밥도 먹고 어쩌다 웃기도 하는 집. ' ( p.177 )
참 많이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 정말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고 가족 중에 몇 명은 다른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했던 그 시절. 바로 2~3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다. 다시 그 시절이 그립고 아련하게 추억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래도 그 때는 지금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따뜻한 가족들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요즘 가정의 모습은 서로 각자의 다른 섬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가끔은 나 또한 공감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점점 풍요로워지는 사이에 우리에게 그 풍요로움 만큼 무엇인가 쑥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청소년기의 아이들의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공감하느냐의 문제보다,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성장해왔음을 한 번 살짝이나마 들여다 보기에 더 할수 없이 좋은 책이다. 아이들 눈에 너무도 비참했을 것 같은 그때도 희망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고,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있었음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