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미소의 적대적 공생관계, 해방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미소의 적대적 공생관계, 해방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내용보기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광복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그 때까지, 미군정청과의 갈등 그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것이 전부인양 알고 있기도 하다. 또한 반탁운동과 미소공위의 결렬, 그리고 유엔이 총회에서 결의한 남북한 총선거에 대해, 일방의 주장만이 진실이고 전부인양 배워왔
"미소의 적대적 공생관계, 해방의 의미를 잃어버리다." 내용보기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 광복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그 때까지, 미군정청과의 갈등 그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것이 전부인양 알고 있기도 하다. 또한 반탁운동과 미소공위의 결렬, 그리고 유엔이 총회에서 결의한 남북한 총선거에 대해, 일방의 주장만이 진실이고 전부인양 배워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1945 8월 해방 전후부터 시작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 8월까지, 해방 후 3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여덟 번째 책으로 1947 9월부터 그 해 연말까지를 담고 있다.

 

1947 10 30,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남북총선거를 위한 유엔감시위원회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결의 하였고, 마침내 11 14일 미국이 제안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유엔총회에서 가결되었다. 이제 조선의 건국은 미소공위를 떠나 유엔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1947 5월 미소공위가 재개되고, 미소 양국이 진지하게 회담에 임하면서 통일건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었다. 그러나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극우파의 극렬한 저항과 중간파로 미소공위를 주도하고 있던 여운형의 암살, 그리고 미국측의 태도변화는 끝내 미소공위가 결렬되게 만들었다. 미국은 9월이 들어서면서 조선문제를 미소공위가 아닌, 자신들이 확실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으로 옮기는 것을 확정했고, 마침내 10 22일 소련대표단이 서울을 떠남으로써 조선 독립건국의 통로로 여겨지던 미소공위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소련과의 타협대신 조정이 가능한 유엔총회로 조선문제를 가져갔고, 내용은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 없이 총선거를 치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은 미국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이라도 미국이 밀어 부치면 가능했다. 그러나 평화와 안보에 관한 것은 안보리를 거치게 되어 있었고, 이 경우 소련의 거부권을 의식한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이 유엔의 안전보장 기능을 위협하는 조치임에도 불구하고 총회상정이라는 수를 택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이남만이라도 확실한 자기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했다면, 소련의 대응방식 역시 이북만이라도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겠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소련도 내심으로는 분단건국을 바라고 있었으며, 이는 미국과 소련이 조선문제에 있어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948 8월 분단건국 후, 남북은 각기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괴뢰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은 정통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선전했으며, 이는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 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유엔에 회원가입이 안되었기에 유엔의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국내정치 세력 중 이런 분단건국을 가장 반긴 것은 바로 극우세력이었다.

 

해방 후, 조선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세력은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세 갈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탁통치 반대와 좌익을 극도로 배척하는 극우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민족주의 이념을 지키는 정상적인 극우는 김구뿐이었다고 한다. 한민당은 친일지주들이 주축이 된 반동적인 이익집단이었고, 이승만은 권력만을 노리는 정상배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동기는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였다. 해방이전 확보한 기득권을 지키고 미국의 비호아래 더 키워 나가려는 한민당에 기회주의적 정상배들이 반공을 핑계로 손 잡은 것이다. 유엔총회의 유엔감시하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가결을 계기로 이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민당과 이승만은 이미 분단건국을 기정사실화 했기 때문에, 유엔감시조차 필요 없다며 빨리 실시하자고 미군정을 압박했고, 김구는 남북총선거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회담 후, 그는 돌연 남조선만의 총선거를 지지하기에 이른다. 분단건국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김구의 행보에 대해 저자는, 김구가 민족주의 이념보다는 전략적 득실에 따라 입장을 선택했다고 보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이후 김구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든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탁운동이 시작될 때는 김구의 도움이 필요했고, 김구는 임정추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했었으나, 1947년 이후 이승만 등 단정세력에게 김구의 매력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면서 주로 건국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 당시 국민들의 생활에 대한 면은 소홀한 감이 있지만,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미군정은 경찰을 전위로 하여 점령지를 유지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의 조선은 경찰국가의 면모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경찰의 숫자는 일제강점기보다 갑절이 더 많았고, 이는 미군정 통치가 일본의 식민통치보다도 더 억압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더욱이 경찰은 자신들의 충성대상이 조선인 사회가 아니라, 미군정이라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표방하고 있었으니,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우리가 그 때의 일들을 살펴보는 까닭은 과거를 한탄하고,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일기를 읽으면서 알아가는 사실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그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얼마나 왜곡되고 편파적으로 알아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분단건국이 완성되는 1948년이 시작되었다. 9권과 10권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k*****1 2014.09.01. 신고 공감 8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