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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통치 방식은 간교하기 이를데 없었다. 3.1운동 뒤 일본은 조선을 이간책을 통한 분리지배방식으로 그 통치 방법을 변화시키는데, 한인 단체들을 이용해 그 역할을 수행하게 한 것이다. 특히 해외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많았던 만주지역에서는 경학사나 부민단같은 교육과 독립운동을 응원하는 단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친일행각을 벌였던 이주 한인단체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노골적인 친일행각에는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일본은 지원금과 의결 등을 통해 만주 친일단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입장에서는 조선인 단체들을 이용하는 것이 저비용 고효율이었다. 조선인들이 품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저항감을 감안할 때, 이런 저항을 피하고 조선인을 전면에 내세우며 이한제한(以韓制韓)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선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에서 안전하게 자리잡게 하는 것은 훗날 일본인들의 이주공간을 확보하는데 중요했다. 그 뿐이 아니라 만주 지역에서 항일독립운동이 확산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들 단체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주 조선인들로선 치안이나 안전을 위해서 조선인단체가 필요했고 또한 재정이나 친목, 교육, 상조 등 생존과 생활을 위해 조선인 단체의 지원을 원했다.
'만주지역 친일단체'에서는 서간도와 북간도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그곳의 친일단체를 소개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북간도 쪽의 간도 특설대였다. 일찍이 독립군 잡는 단체로 그 악명을 익히 듣고 있었던 바라, 유심히 읽었는데, 일단 명칭에서부터 다른 단체와 구별이 됐다. 회나 조합, 단이 아닌 특설대. 그도 그럴 것이 간도특설대는 설립에서부터 군인등이 관여했던 전문무장조직이었던 것이다. 해방되기까지 존속했던 이 단체는 애국지사들을 살해하거나 체포한 것이 100여건에 이를 정도였다. 심지어 가혹한 고문과 민간인 살상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가히 독립지사 탄압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간도 지역에선 만주보민회가 눈에 띄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는 배정자가 활약했던 만주보민회는 일본인이 되기를 지향하는 단체였다는 점에서 친일을 넘어섰다.
만주지역 친일단체는 지역의 특성에 감안해서 활동을 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조선이주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을 차단하고,항일근거지를 무력화 시키는 것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조했다. 때론 독립운동가를 색출했고, 독립운동단체와 대립각을 세우는가 하면 선전을 통해 독립군의 귀순활동에 앞장섰다. 심지어 귀순해온 독립운동가들을 재교육시켜서 독립군 토벌에 참여시키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 밀정까지 투입했다. 만주지역 친일단체들이 이렇게 일제에게 적극 협력하게 되면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은 막대한 지장을 입었던 것이다. 일제로선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랄까.
친일 단체와 관련해서는 경악스러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임원 중에 항일운동가 출신이 상당수였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독립군체포에 놀라운 실적을 올렸던 간도특설대의 경우에는 그 대원 상당수가 국군 창립과정에 참여하고, 한국군의 중추역할을 했다고 하니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독립군을 살해해서 피를 묻힌 손인데 어떻게 국군창설에 관여하게 된건지, 정말 친일파들이 제대로 심판 받은 분야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양이다.
이주 조선인들이 단체를 설립하게 된 배경에는 이주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교육과 치안 등 이주한인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취지는 빛을 잃었다. 이주 조선인의 보호보다는 일제가 이주 한인들을 통치하는데 첨병이 되면서 급격히 친일, 어용화 돼버린 것이었다. 아니..정확하게 말하자면 취지는 어디까지나 눈속임이었고 출범할 때부터 명백하게 어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들 단체를 독립군들과 조선인들을 차단하고, 조선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더는데 활용했다. 그 방법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일제 입장에선 친일단체들은 어디까지나 저비용 고효율의 조선인 통치 도구였기에 단체에 들어가는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게 되거나 지역의 상황이 변하게 되면 그 단체들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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