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에 대한 찬사는 오랫동안 듣고 있다가 미국에 있을 때 시립도서관에서 빌려다가 보았을 때 왜 그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명작이며 수도 셀 수 없는 영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꼭 한번은 보아야 될 영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날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촬영되었으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sixth sense'를 능가하는 반전과 부처님이 오래전에 말씀하신 뭐에는 뭐만 보인다는 진리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삼인삼색이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은 각자가 만들어내는 자신만의 신기루니까 말이다. 미국의 전형적 영화 패턴에 길들여져 있다면- 영웅, 해피엔딩, 권선징악, 엄청나게 큰 배경음악 등 - 이 영화가 별로겠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를 찾는다면 이영화를 꼭 볼 것을 권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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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아름답다라고 본 이유는 전에 오페라 dvd를 어느정도 봤기때문이다.
라쇼몽은 여러장면에서 발레와 오페라 무대 비슷하다. 예를들면 사무라이 죽음장면, 사무라이는 대사가 없어서도 거기서 푸치니의 비극적인 음악이나올것 같다. 지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무라이가 죽음을 택하는 장면이다.이 영화가 그리도 훌륭한 예술성을 띈 작품이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미장센,미학의 뜻도 모르고(지금까지 헤어제품 브랜드로 가장 알뿐,그런곳에 관심이없다.) 이 영화는 아름답다고 말할수 밖에없다. 산적이 숲 안 위쪽에서 아래 햇빛속 혼자 있는 여인을 내려다 볼때는 밤과 낮 같이 과장되었다고 보일정도로 조명에 신경을 쓴것 같다. 아름다움의 연속이다. 계속 여인을 놀리다가 결국 그녀를 차지하게 되는 키스 장면도 절정이다. 이럴때 오페라에선 ~~~음악이 최고조로 흘러나오곤 했다. 거기까지 전개와 아름다움이 가장 인상적이다. 成, 라쇼몽(외곽 정문) 산적은 숲속의 목신이 어느 오후 심심해서 하품을 하며 요정들을 발견하고 쫓아다니던 것 비슷하다. 현실로 생각하면 이 산적은 너무 너무 나쁜 가정 파괴범이지만 ....그리스 신화에도 신들이 나쁘고 짖궂고 연인들을 파괴 했듯이 너무 신화에 비유한 이야기가 되지만. 폴짝거리는 것이 에너지 넘치는 장난꾸러기 꼬마 고양이 비슷할 정도이다. 특히 산적과 여인의 의상도 아름답다.. 지금 가장 좋은 장면은 사무라이의 결심 장면이다. 이 장면이 가장 발레와 오페라 같다. 아마도 그때까지의 목불인견과 홀로 남겨진 사무라이의 처지가 동정이가서이다.( 몇 장면에서 라벨의 볼레로가 일본풍 편곡으로 나온다.처음엔 금방 모르다가 좀 있으면 아는데 시나리오 쓰실때 여주인공 에피소드 쓸때 떠오르셨다고,구로사와 영화는 음악도 거의 모든 작품이 좋다.) 한 진실을 두고 각각 입장에 따라 여러 소리를 하니 보고나서 헷갈리지만 나뭇군의 마지막 폐허의 난생문에서 진짜 마지막 회상이 진실에 가까운것 같다. 그렇다면 혼령조차 거짓말을 하는것이 되어서 씁쓸하다. 한편의 추리와 예술이 함께 있다. 라쇼몽, 예전에 프랑스 영화라고 여길만큼 발음에서 이국적이다. 보기전에는 동양권에서 말만 들으면 그렇다.일어 발음이 몬일수도 있고 몽일수 있는데 들리기로는 더 몽으로 ,몽이 많이 한자로 꿈이니 어떤 한낮의 꿈이라는 뜻인줄 알았다. 그러니 말에서 여러가지 느낌도 준다. 이런것도 미국과 유럽에서 신선하다. 여러 촬영 방법,신선한 내용등으로 당시는 물론 수십년뒤 베니스 영화제 50주년에 역대 그랑프리 중 그랑프리로 뽑혔다고 한다.1952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도 받았다.(이랬다고 좋은것은 아니다.내가 보고 안좋으면 안좋은것이다.이렇게 유명한작품을 지금 본것 보시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오스카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스필버그에게서 소개받고 이런 저런 수상으로 라쇼몽이라고 해외 토픽이나 소개로 밖에 알지못하던 사람이 결국 너무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할수 밖에 없다. 한 사건을 두고 각자 시점으로 이야기한다고 줄거리만 보면 대단한 작품 같지가 않다. 실제 연극같은 작품이고 등장인물도 몇명에 스펙타클이나 시간도 하루 오후이기에 거창함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소개글을 보고 섣불리 보지말고 우연히 자신과 인연이 되어 어느날 보게될때 보라고 하고 싶다. 그때 까지는 그냥 기억만 하시라. 난생문 셋트가 아주 웅장하다. 영화를 만들기위해 제작했다는데 진짜 오래된것 처럼 보인다.
비극을 보다가 배우들의 쾌활한 일상 사진은 참 흐뭇하다. 남편역의 배우는 우리나라 정승호씨?이름을 정확히 모르지만 닮았다. 아주 무더운 여름 숲속에서 의상과 분장등 촬영한다고 고생했겠다.
이그림도 아주 좋다. 한 사람이 분리된 모습이 한 사실을 두고 여러 이야기 함을 잘 표현했다. 진실은 하나다. 하지만 사람이 다르게 말한다. 영화를 보고 나는 안그러도록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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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를 구입해서 본 흑백영화. 일본 산골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무라이와 그의 아내가 산길을 가다가 산적을 만납니다. 남편을 죽임을 아내는 겁탈을 당합니다. 그 장면을 나무꾼이 훔쳐보게 되고 관가에 신고를 합니다. 그러나 아내, 사무라이(무당이 대신함), 산적의 진술이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나무꾼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엇갈린 진술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던 스님.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그의 한마디가 뇌리에 남더군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저는 관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약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나약함마저 감쌀 수 있어야 어머니의 인(仁)에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어머니 간병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시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제가 인간의 나약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진실을 봤지만 그 진실 때문에 삶이 불편해졌기에 진실을 아예 모르는 것만도 못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염오(厭惡)의 관문을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한데 방법을 몰라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극의 성격상 랴소몽은 영화보다는 이전에 봤던 연극이 좀 더 실감났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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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사이트.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쓴 리뷰가 날아가버렸다. 다시 쓰지 않겠다, 아니 쓸 수가 없다... 대충... ;;;;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 타인? 아니다, 나 자신을 믿어도 되나? 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던직 만드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라쇼몽이다.
후반부 나무꾼이 감추어 두었던 진실과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법에서 그렇게도 외쳐대는 실체적 진실이 없다라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본성은 과연 추악한가? 희망이 있는가? 라는 물음까지 던지게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서로가 가진 다른 기억으로 인해 다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나에게 유리하다면 자기 자신의 기억마저도 왜곡시켜 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챙기는 것 또한 인간의 이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선한 본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의 모습만을 가진 단편적인 존재가 아니라 복잡하고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진 존재이다.
대사도 큰 감정 연기도 별로 없지만 툭툭 던지는 예리한 지적으로 영화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 되는 비를 피하는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 羅生門 위에 앉아있던 악마도 인간의 추악함에 도망가버렸다더라. "
허나. 비겁하고 도둑질을 했지만 6명의 아이가 있다고 아이 하나 더 데려가도 문제없다는 나무꾼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같다.
" 인간은 추악함 뿐 아니라 희망도 가지고 있다. "
- 08.09.19 11:15 벽소령 산장 앞에 서 있는 고사목을 차고 날아오르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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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감기가 안 낫는다. 노트북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꿈과 현실을 오가는 것 같았다. 소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지만, 화자가 바뀌면서 사건의 내용이 밝혀지는 과정은 영화와 비슷한 것 같다. 기본 뼈대는 무너뜨리지 않았다. 소설과 다른 각색은 영화는 영화답게, 소설은 소설답게 장르에 맞는 변환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 흑백필름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형식이 전혀 옛스럽지 않았다. 소설 <라쇼몽>은 세기말적 암울함이 저변에 흐르는데, 영화도 그것을 나타내는 거대한 라쇼몽의 허물어진 모습이 상징적이다. 뿐만 아니라 암울함 속에서 망가지는 인간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허물어지지 않은 한 쪽에서 비를 피하는 것으로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둔 듯하다.
영화 <라쇼몽>은 많은 영화평론가, 철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텍스트다. 그들의 시각이 아니라 내 느낌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카메라 움직임이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달리 동적 힘이 느껴지고, 사건전개가 지루하지 않고, 주제에 동서양,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성이 느껴졌다. 원작의 힘이겠지만, 화자에 따른 다른 이야기 방식은 다분히 포스트 모던하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각자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다”는 의미의 대사처럼 영화는 같은 사건을 대하는 각기 다른 화자의 이야기 전달이 중심을 이룬다. 무엇이 진실인지 끝끝내 모르겠지만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기 바쁘다.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찾기에 바빠 보인다. 대체로 근거는 자신이 좀 괜찮은 인간이다로 포장되고 있다.
결국 그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연히 보게 된 나무꾼의 관점에서 영화는 정리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찌질하다. 특히 ‘타조마루’라는 산적과 여자의 남편이 싸우는 장면은 싸움을 피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맞붙게 되어 뒤로 빼는 형국이었다. 칼을 피하다가 너절하게 몸싸움을 하는 모습이라니 코웃음이 나왔다. 인간은 그렇게 비루하다.
이기적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렇지만 아기를 안은 스님의 모습에서 내면의 갈등이 느껴졌고 그 역시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었을 까 혼자 생각해 봤다. 나무꾼이 “아이가 여섯이든 일곱이든 키우는 건 모두 힘들다”며 데려가지 않았다면, 스님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스님은 구도자이니깐 버려진 아이를 키우는 게 당연해서 그가 하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란 말인가.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일 수 있겠다. <라쇼몽>을 보고 난 뒤 하나의 진실 혹은 절대적 진실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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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사무라이에 나온 배우가 또 나온 것 같다. 단도 훔쳐간 사람으로 나온 배우가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무라이 대장으로 나온 사람 같은데...
그 당시에는 참신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보니 그저 그렇다.
별 느낌이 없다고 해야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