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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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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 혹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의 자유- 오쇼 라즈니쉬, 『반야심경』       <반야심경>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줄임말이다. ‘반야바라밀’은 6바라밀 중 지혜바라밀에 해당된다. 6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가리킨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수행하는 6바라밀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이 가야 할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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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은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의 자유

- 오쇼 라즈니쉬, 『반야심경』

 

 

 

반야심경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줄임말이다. ‘반야바라밀6바라밀 중 지혜바라밀에 해당된다. 6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가리킨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수행하는 6바라밀은 깨달음을 얻은 보살들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반야(般若)’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이다. 이 반야화(般若花)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면의 철저한 침묵 안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 안에 숨겨 있는 것이 현현(顯現)되도록 허용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34)라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지식이 많다고 반야바라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지 않고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은 에고에 얽매이지만, 지혜는 에고를 넘어서 고요한 참나에 이른다.

 

반야심경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니,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들이 나온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 말을 풀지만, 사실 이 말들에 내포된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는 오직 깨달은 사람뿐이다. 지식 논리로 따지면,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모순이 이 말들에는 스며들어 있다. 요컨대 자구 상으로만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는 이 말의 참뜻을 알 수 없다. 논리를 따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구를 중시한다. 물론 논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가능하다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대상에 새겨진 말=의미를 해체하고 또 해체하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것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하다는 논리를 편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을 모두 논리라는 칼로 난도질하는 경우라고 할까.

 

깨달음을 얻은 부처를 이러한 논리주의자들은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들은 부처의 청정심(淸淨心)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부처를 모독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부처는 부동심을 잃지 않았다. 부처는 논리주의자들을 논리로 대하지 않았다. 논리에 논리를 들이대면 싸움이 일어난다. 상대 논리를 완벽하게 무찌를 논리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논리를 가지고 싸우면 그래서 결과는 언제나 찜찜하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흔적들이 자꾸만 논리 싸움에서 진 사람을 괴롭힌다. 논리에 집착하는 사람은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에고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개념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개념은 현실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개념은 지식으로 축적된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개념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논리와 개념이 같은 성격을 지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에고는 항상 목적을 지향한다. 에고는 언제나 탐욕을 부리고 붙잡으려 한다. 에고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추구한다. 에고는 더 많이라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에고는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큰 집을 원한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원한다. 에고는 항상 를 원한다. 에고는 언제나 굶주려 있다. (……)

목적이란 무엇인가? ‘나는 저기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저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저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욕망이다. 에고는 현재 안에 살지 못한다. 그럴 수가 없다. 현재는 실재인데 에고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에고는 결코 만나지 못한다. 과거는 허구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현재였을 때에는 에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 사라져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에고가 그 순간을 붙잡고 축적하기 시작한다. 에고는 오로지 죽은 것만을 쌓아 둔다. 에고는 공동묘지다. 이미 시체가 된 것들을 수집한다. (67~68)

 

에고는 목적을 지향한다. 목적을 이상(理想)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다. 라즈니쉬는 열반(涅槃)이라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 우리는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열반은 목적지가 아니다. 목적지는 에고가 설정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상을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 너머라는 이상 세계로 가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저 너머는 따로 저쪽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곳이 있고, 저 너머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라즈니쉬는 이야기한다. <반야심경에 잘 나오는 말인 무()와 공()은 저 너머를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은 결코 이를 수 없는 세계이다. 텅 빈 마음은 순수한 현존(pure presence)이다. 이 순수한 현존 안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계 전체가 이 순수 현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103) 무와 공은 텅 빈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 되어야 색과 공이 하나인 이치를 알 수 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 경험 속에서 이 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만 하다.

 

에고는 언제나 우리를 습관으로 길들이려 한다. 습관은 낯익은 것이다. 우리는 왜 낯선 것들을 두려워하는가? 낯선 것은 습관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통념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통념은 마음의 습관이다. 지금까지 마음에 쌓은 지식으로 우리는 사회적 통념을 만든다. 통념을 지키는 사람들은 통념을 어기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너는 왜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고 나무란다. 말이 안 통하면 폭력을 사용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왜 저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일까? 사람들은 통념이 마음의 습관에 불과하다는 걸 모른다. 돌려 말하면 마음의 습관은 에고의 논리일 뿐이다. 에고가 무너지면 쉽게 사라질 논리. 라즈니쉬는 두려움과 분노는 똑같은 에너지의 두 가지 측면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두려움과 분노는 에고가 만든 통념에 집착할 때 나온다. 통념에 빠진 사람들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고만 한다. 창조성이 없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명상은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평화에는 고유의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힘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다. 마찰에서 비롯된 힘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이며 남성적이다. 그러나 평화에서 나온 힘은나는 달리 마땅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 (power)’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평화에서 나온 힘은 여성적이다. 이 힘에는 우아함이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힘이다. 하나의 수용성이며 개방성이다. 이것은 마찰에서 나온 힘이 아니다. 그러므로 폭력적이지 않다. (255~256)

 

지혜바라밀은 통념에 빠진 사람은 이를 수 없는 길이다. 통념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려고 한다. 싸워서 이기려고 한다. 이기지 못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불안하냐고? 논리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기 통념이 무너진다고 이 사람들을 생각한다. 한국사회를 관류하는 진영 논리를 보라. 보수(실제로는 극우) 집단은 빨갱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사회 혁신을 바라는 사람들을 비난(비판이 아니다)한다. ‘빨갱이의 기준은 오로지 그 사람들 머릿속에 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빨갱이다. 이들의 마음속은 빨갱이들을 향한 증오로 들끓는다. 빨갱이들만 없어지면 이 세상이 참으로 맑아질 거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진보 진영에서 보면, 빨갱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전혀 없는 미치광이일 뿐이다. 라즈니쉬는 명상은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명상은 텅 빈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가리킨다. 자기 바깥에 세운 논리로 타인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일수록 명상은 한없이 필요하다.

 

명상 속에서는 이원성이 사라진다.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주체와 객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라는 이원성이 힘을 잃는다. ()와 공()은 비이원적이다. 그래서 무와 공은 충만하다. 절대적으로 충만하다. 이 충만함은 다듬어질 수도 없고 추가될 수 없다. 또한 이 공()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빼앗길 것도 없다. 이 공()에는 아무것도 덧붙일 수 없다. 전적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이다.”(267)라는 라즈니쉬의 말을 되새겨 보라. 진영 논리에 빠져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우리들이 정작 생각해야 할 것은 이분법에 갇힐수록 서로를 향한 증오만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분법에 갇힌 사람은 에고의 논리를 철저히 따른다. 에고는 다른 에고를 무찔러야 할 적으로 생각한다. 에고와 에고가 맞붙는 광장에는 평화가 없다. 언제나 전쟁 상태이다. 이겨야만 살아남는 게임으로서 전쟁. 마음속이 전쟁으로 들끓으니 사회도, 개인도 편안할 리 없다.

 

라즈니쉬는 “‘가 많을수록 지옥이 그만큼 더 커지고, ‘가 적을수록 천국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최후의 집에 당도한 것이다.”(279)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지만 라즈니쉬는 열반을 저 너머에 따로 떨어져 있는 목적이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지식이 아니라 지성을 중시한다. 지성은 현재 안에 존재하는 능력이다.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안에 존재할 때 우리는 열반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다고 라즈니쉬는 강조한다. 과거에 매여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를 부정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사건일 뿐이다. 과거는 현재를 규정하지 못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과거로 현재를 재단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집에 불이 났다고 생각해 보라. 당장 불난 집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위태롭다. 그 순간에 우리가 과연 과거를 생각하고, 이념을 생각하겠는가? 태극기를 흔들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겠는가? 삼십 년 전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불난 집에 있겠는가? 불이 난 순간, 그리고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즉시 집을 뛰쳐나온다. 라즈니쉬는 이것을 즉각성(卽刻性)이라고 부른다. 찰나의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이니, 에고가 끼어들 틈이 어디에 있는가. <반야심경은 무엇보다 참나의 이러한 즉각성을 표현한다. 부처는 이것을 열반이라고 했고, 그리스도는 이것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다. 드 샤르뎅의 오메가 포인트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반야심경은 깨달은 이들이 갖추어야 할 무심한 경지를 노래한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주문으로 반야심경은 끝난다. 깨달은 이는 무심을 통해 저 언덕으로 넘어간다. 저 언덕을 이곳과 대비되는 이원성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저 언덕은 저 언덕일 뿐이다. 무심에 이른 이는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을 경험한다. ()와 공()에는 언제라도 이원성이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o*****s 2019.03.22.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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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좋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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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의 책들을 40~50권은 읽은듯하다... 그 책들중에서 맘에 드는 책은 많지만 이책이 손이 자주간다.. 읽어도 읽어도 새롭다... 부분부분들마다 가슴에 다가오는 말들....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안에는 형상도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그러므로''는 논리의 일부이다. 그런데 붓다는 아무런 명제나 논증의 절차도 없이 갑자기 ''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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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의 책들을 40~50권은 읽은듯하다... 그 책들중에서 맘에 드는 책은 많지만 이책이 손이 자주간다.. 읽어도 읽어도 새롭다... 부분부분들마다 가슴에 다가오는 말들.... 그러므로 오, 사리푸트라여, 공안에는 형상도없고, 느낌도 없고, 지각도 없고, ''그러므로''는 논리의 일부이다. 그런데 붓다는 아무런 명제나 논증의 절차도 없이 갑자기 ''그러므로'' 하고 말한다. 왜 그럴까? 학자들은 이것을 이해할수없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논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의 눈과 사리푸트라의 눈 사이에는 대화가 있었다 이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리푸트라의 눈을 들여다보고 붓다는 사리푸트라가 이해했음을 느꼈다. 이제 심도 있는 설법을 펼칠수있게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논의나 토론도 없었다. 그러나 대화가 있었다. 둘사이의 에너지에 대화가 잇었다. 그들은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 합일의 순간에 사리푸트라는 붓다의 공(비어있음)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붓다는 사리푸트라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보았다. 사리푸트라여. 이제 나는 더 깊이, 더 상세하게 들어갈수있다. 전에는 불가능했던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수있게 되었다." 며칠전 어느날 갑자기 이 부분이 읽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서 읽었었다. 좋았다. 여러분도 같이 느꼈으면 합니다.

[인상깊은구절]
오, 사리푸트라여 여기에서는 형상은 공이며, 공은 형상이다. 이것은 가장중요한 선언중의 하나이다. 불교의 방법론 전체가 이 한마디에 의존하고 있다. 현현된것은 현현되지 않은것이다. 형상은 공자체의 형상에 지나지 않으며, 공또한 형상외에 다른것이 아니다공은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형상이다. 이 말은 분명히 비논리적이며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린다. ....
j*****m 2006.01.0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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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가 읽은 오쇼의 반야심경..
"초보자가 읽은 오쇼의 반야심경.." 내용보기
불교입문 책을 읽고 바로 이 책을 읽었다. 네이버에 이 책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사람이 있어서 오쇼의 이름값도 있고 해서 읽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이 과연 "불자"였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교양서적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의 책이다. 오쇼가 서양철학에 정통하다 보니 서양철학의 맹점과 비교하여 반야심경의 뛰어난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쉽게 다가
"초보자가 읽은 오쇼의 반야심경.." 내용보기
불교입문 책을 읽고 바로 이 책을 읽었다. 네이버에 이 책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사람이 있어서 오쇼의 이름값도 있고 해서 읽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이 과연 "불자"였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교양서적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수준의 책이다. 오쇼가 서양철학에 정통하다 보니 서양철학의 맹점과 비교하여 반야심경의 뛰어난 점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 하지만 정말 본격적으로 불교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후회하리라 생각한다. 요는 너무나 오쇼의 생각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윗님 말씀처럼 도올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오쇼는 참선과 명상으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읽기에 오쇼는 소승불교, 정말 지극히 개인의 행복과 구원을 너무나 강조하였기 때문에, 우리와는 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책 여기저기에서 산야신(구도자)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데, 오쇼가 만든 단체에서 수행하는 이들을 말한다. 또한 영어식 표현도 자주 등장하여 좀 어색한 느낌도 있다. 물론 읽을 때는 몰랐으나, 요즘 금강경(오쇼 것이 아닌..) 해설서를 읽고 있는 지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책도 좋다. 하지만 읽은 후에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반야심경 해설서 또한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붓다는 이 공(空)은 경험도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그대가 공(空)을 겸험한다면, 이것은 공(空)을 경험하는 '나'가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대가 바로 공(空)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공(空)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오직 그대가 아닌 것만을 경험할 수 있다. - p267
c*******n 2004.10.2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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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오시오? 김용오쇼?
"오쇼? 오시오? 김용오쇼?" 내용보기
오쇼라즈니쉬라는 이름이 필자에게 그렇게 친숙하거나,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물론 필자는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라즈니쉬가 쓴 이책의 내용에서는 상당한 자기 어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거물이고 대단한 사람이라서 딴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이지만...쫌 김용옥스런 냄새가 많다.
"오쇼? 오시오? 김용오쇼?" 내용보기
오쇼라즈니쉬라는 이름이 필자에게 그렇게 친숙하거나,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물론 필자는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라즈니쉬가 쓴 이책의 내용에서는 상당한 자기 어필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거물이고 대단한 사람이라서 딴 사람들이 알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해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이지만...쫌 김용옥스런 냄새가 많다. 좀더 속되게 말해 구리다 는 말과 동일 할 것인지도... ㅡㅡ; 일단 유창한 말빨과 잡스러워 보이기 까지하는 사고의 깊은(?) 전개는, 불교계의 또다른 김용옥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런지... 반야심경은 일반인들에게는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경(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짧기는 해도, 어지간한 불교도가 아니고서는 외는 사람을 만나기도 드물다. 그래서 그만큼 압축적이고도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른다. 하지만, 반야심경에 대한 국내서들은 대체로 學적이다. 역사를 따지고, 근본과 출발 그리고 개념이 어떻게 다르며, 누가누가는 어떻게 해석했다는 거창한 말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라즈니쉬의 반야심경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보면 자연스레 메이드인유에쓰에이 라고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그래서 오히려, 그런 자연스런 미국인의 일상에 반정도 밖에 파묻히지 못한 한국인들, 특히 극동북아의 사상적 지주로 자부심을 느끼는 한국인들에게는 감동의 칼날이 무디어지게 와 닿는다...혹시 아는가? 무딘 칼날에 깊이 베이기 마련이니, 더 큰 상처를 받아 성불할련지...
YES마니아 : 로얄 i******8 2003.03.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