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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 딸의 죽음 그외 자신을 둘러싼 그 누구의 죽음이라도 죽음을 대면하게 되는 사람은
그 죽음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일상의 풍경속에서 무심한듯
일어나는 일에 속한다.
우리의 삶은 살아 있음으로 해서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고, 죽지 못해 사는 비극적 삶도 있기에
삶의 그 오묘한 얼굴 바꿈에 섬뜩한 공포심을 갖게된다.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일본 사람들은 삶의 희망을 밀봉해버린 듯한 고통속의 나날들을 살아야
하는데, 그외의 사람들, 일본,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죽음'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고
아니 잊은채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일상의 고단함, 삶의 단조로움,,등등을 토로해내며 우리는 현실을 온전히 죽음으로부터 배제한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죽음'은 삶과 항상 이웃하고 있는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 존재를
잊고 사는것은 '영겁의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무(無)의 세계가 아니다.
즉 사람이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삶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공명, 감정의 공명은
또다른 삶의 기적을 낳기도 하며 구원에 대한 사상적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맹목적적인 종교의 믿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구원관이 아니라 현실적 종교의 역할을 새롭게 생각
해 보아야 할 부분까지 밀도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는데 방점을 찍어두고 싶은 책이다.
자이니치로 일컬어지는 재일 한국인으로 재난문학을 새롭게 들려주고 있고,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
하는데 이념보다는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방법과 살아야 하는 이유를 그 답으로 밝히고 있어 마음의
존재는 인생 여행길의 희망을 찾아나선 기록과 같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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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14년 4월 16일 배가 바다에서 침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생때같은 목숨 수백 명이 속절없이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구조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 수백 명의 귀한 목숨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본 그날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 죽음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유족들은 차마 돌아가신 이의 유품을 치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고,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으로 이어가기도 한다. 동조 단식이 이어지고 있고, 주말이면 진상 규명과 특별법 요구를 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월호 죽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월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해야 속절없이 간 넋들을 위로하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 강상중 선생의 이번 소설은 개인의 죽음과 집단의 죽음이 한꺼번에 나온다. 대학교 2학년인 주인공 나오히로가 겪은 친구 요지로의 죽음과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2만여 명의 집단 죽음, 그리고 강상중 선생이 겪은 아들의 죽음이 곧 그것이다. 이들 죽음은 서로 관계가 없는 듯하지만 실상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설은 죽음 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관계,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의 혼란, 자연과 개발에 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질문과 답을 모색한다. 거기에다가 소설에는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 내용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중층적인 구조에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문제의 실마리는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만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서점에서 저자 사인회를 하는 강상중 선생에게 대학생 나오히로가 불쑥 편지를 건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편지는 친구 요지로의 너무 이른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요지로의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강상중 선생은 며칠 동안 나오히로를 생각하면서도 막상 답장을 쓰지 못한다. 그러다가 답을 할 거라면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진심어린 답장을 한다. 과거는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친구의 과거로서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요지로는 분명히 그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생이 내준 물음에 답했을 것이라며 친구의 죽음은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와 같이 소설은 대학생 나오히로의 질문에 대학 교수 강상중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오히로는 그렇다면 ‘과거’가 ‘있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냐며 다시 묻는다. 선생은 이에 대해서도 모래시계를 예로 들어 ‘현재’는 미래의 ‘없음’과 과거의 ‘존재’를 이어 주는 경계면이자,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의 것으로 바꿀 기회를 부여한다고 답한다. 이렇게 시작된 나오히로와 강상중 선생의 편지는 나오히로와 친구 요지로의 죽음, 두 친구와 모에코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의 혼란, 자기 자신이라는 건 무언지에 대한 정체성 찾기,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을 합쳐 2만 명 정도의 희생자를 낸 동일본 대지진의 집단 죽음, 거기에 포함된 연극부 동료 부모님의 죽음,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위해 시작한 시신 인양 자원봉사, 극한 체험을 통해 얻은 나오히로의 깨달음 들을 담고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어디 있나.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 돌아가신 분들에게서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깨닫고 나서는 제가 하는 일은 돌아가신 분들의 뜻을 받아 살아갈 힘으로 살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가는 힘’을 얻었을 때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도 빛나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빛나는 듯한 ‘영원’이 되는 것이라고. (240쪽) 나오히로가 친구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까지 혼란스러워하다가 위와 같은 인식을 할 정도로 성장하는 과정이 소설의 졸가리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오히로는 짝사랑하던 모에코를 품에 안게 되기도 한다. 부채감으로 작용하던 친구의 죽음에 정면 대결을 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사랑을 동시에 찾게 된 것이다. 만약 나오히로가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껴 자신 속으로 자꾸 침잠해 들어갔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오히로는 자신이 존경하는 생면부지의 선생에게 직접 다가가 죽음의 의미를 캐묻고, 집단 죽음의 현장에서 적나라한 죽음을 직접 체험했으며, 짝사랑하던 모에코에게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 우리는 나오히로의 행동을 통해 세월호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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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인 강상중의 소설 [마음]은 최근 세월호 사건을 겪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과 느낌을 준 소설이다.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자와 세상에 남아 있는 자가 겪어야 할 관계의 소통과 마음의 자세를 정리해보는 시간이었다.
"죽음이라는 건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이야"
책의 구성은 대부분이 편지글의 왕래이다.
편지를 통해 주인공의 심리와 배경, 성격 등을 파악하고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관찰해볼 수 있다.
20대의 팔딱 팔딱 뛰는 젊음과 싱그러움을 간직한 청년들의 이야기,
나오히로군은 절친인 요지로군의 갑작스런 발병과 죽음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강선생님께 편지로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 후 이메일로 교류를 하는 두 사람,
나오히로군이 고민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이다. 서로 끌리는 일과 서로 반발하는 일, 관계가 생기는 일과 사랑과 우정과 배신과 양심의 문제들,
그리고 그 집합체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에 대한 무거움에 그는 시시콜콜해 보이는 문제들까지도 글로 상담을 요청한다.
강선생님은 글 중간 중간 죽은 아들에 대한 아련한 마음으로 더욱 더 애착을 가지고 그를 위한 답변을 해나간다.
때로는 먼저 이메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제안한 해결책을 그가 어떻게 적용했으지 궁금해한다.
두 친구와 그 사이의 여인 모에코,
그리고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더욱 더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오히로군, 그러면서도 모에코에 대한 감정은 절제가 되지 않는다.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그에게 대지진과 쓰나미의 재앙으로 그는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 죽음을
느껴 보려 애쓴다.
"기묘하게도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늘어날수록 우리의 감성은 점차 마비되어 죽음의 리얼함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바로 묻히고 숨겨집니다." (p171)
나오히로군은 death saving을 통해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일을 했다. 삶은 죽음과 이웃하고 죽음과 양면의 동전임을 그는 그 일을 통해 깨닫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 강선생님은 죽은 아들에 대해 언급을 한다. 나오히로군과 죽은 아들의 공통점은 진지함이었다고 말하면서 결국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되고 마음이라는 폴더에 저장을 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오랜만에 인생에 있어서 죽음과 삶, 자연적으로 사는 것, 친화력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던,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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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올해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 200여명의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침몰하는 세월호에 갇혀 바다에 수장되었고, 우리에게 친근한 연예인들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현재의 삶과 분리된 세계다. 죽음을 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겁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져놓게 된다. 얼마전에 참가한 생명사랑 밤길걷기 대회에 참가하여 밤새 걸으며 힘들었지만 37분마다 1명씩 자살한다고 하는데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요즘 이런저런 문제와 연결된 듯한 이 책은 주로 강상중(저자, 대학교수) 교수와 대학생 간의 이메일 서신으로 오가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출판기념 사인회에서 저자는 한 대학생으로부터 봉투에 넣은 편지를 받게 된다. 2부로 나뉘는 이 내용들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죽음을 성찰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에게 죽음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듯 해도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죽음이 언제든 찾아오리란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는가가 그 사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근데 정작 우리 사회에 생명경시풍조는 없을까? 몇 주전에 한 지하철역에서 80대 노인이 지하철을 타려다가 전동차와 스크린 도어에 끼여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그 노인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건지 어느 승객은 출발이 정채되자 "빨리 출발하라"고 했다던데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정확하게는 우린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죽음도 일상이 되버리는 듯 별 느낌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던한 사람이 되버렸다. 저자가 겪었다는 동일본대지진에서 2~3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죽음 앞에 사람은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 인간은 초라하기만 하다. 우리 사회 또한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집단 무기력증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허탈함과 분노를 넘어 가슴 아프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에 관한 성찰을 진지하게 되묻는 이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마음에 짙게 드리운 상처로부터도 벗어났으면 좋겠다. 잔잔하게 써내려간 저자의 이 소설은 우리에게 먼저 떠난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생각하고 남겨야 하는지를 서신 형식의 글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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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지난 4월을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잔인한 4월이다. 그리고 좀처럼 잔인했던 봄날 내 마음에 비수같이 꽂힌
소식 화살을 아직도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이 화살을 뽑아내면 몸에 응어리진 한이
터져 나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육신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용기있게 그 시절을 되살리는 글로, 노래로 옮긴다는 것은 보통의 마음가짐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에릭 클랩튼이라는 가수가 아들을 잃고 비통함을 못이겨 술과 마약에 빠져 살다 헤어나기 위해
부른 Tear's In Heaven이란 노래가 있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통해 노래를 듣는 사람들 모두
한마음으로 자녀를 잃은 아빠의 마음에 간접적으로라도 동감하게 된다.
글쓴이 이름이 낯익다. 옮긴 이도 그렇고...
일본어로 책을 쓴 한국인 ... 그리고 그 글을 한국말로 옮긴 한국인...
자녀를 잃은 필자가 살아있다면 대화를 나누는 청년과 비슷한 나이또래였을 잃은 아이를 기억하며
한 줄 한 줄 피흘리며 써내려간 소설 ..
중간 이후 쯤에 아비의 마음을 그대로 녹여 이 책을 쓰게 된 필자의 글쓰기 동기를 알게 되고,
끄적 끄적 유투브를 뒤져 노래를 듣게 된다.
팽나무 그늘에 앉아 쉬게 했다 해서 전해내려오는 팽목 ..
이 책을 읽는 내내 쉬지 못하고 밤새 소름끼지는 악몽을 꾸며 아직도 건지지 못한 우리 아이
열명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아비 어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너무 깊이 들어갔다. 그래도 아비된 자로 아이 잃은 아픔을 달래며 그 마음을 돌이켜 귀한
책을 남겨준 강상준 선생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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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 세이빙' '죽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면 '삶'의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은폐하고 이 세상 구석으로 쫓아버린 패 '삶'만을 칭송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라이프'뿐만 아니라 '데스'도 건져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요. P173 죽음이라는 건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이야. 재일 한국인으로 삶 전체에 걸쳐 자기 정체성에 고민하며 살아온, 누구보다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죽음과 삶은 등지고 맞잡은 손과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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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삶. 불의의 사고로 소중한 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이들의 슬픔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차라리 시간이 멎으면 좋으련만 살아 있다는 이유로 잔인하지만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타인의 위로도 소용없다.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적으로 앓고 있다. 4월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수많은 생명의 불이 꺼졌고, 서로를 향한 신뢰의 불빛도 사그라졌다. 운이 좋게도 주변에 직접적인 희생자는 없었지만 내가 아니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어서 불안에 떤다. 다시는 이와 같은 아픔이 없어야 할진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과연 있기는 한가. 우리보다 조금 더 앞선 시기에 일본 역시 대참사를 경험했다. 그 아픔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2만 명이라는 숫자는 가히 상상조차도 버거울 지경이다. 이제는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건만 그 놈의 ‘내려놓기’는 왜 그리도 어려운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이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이었다. 하지만 현실과의 강한 유착이 소설을 소설 아닌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저자의 이름조차 실명으로 등장한다. 내가 읽은 글의 장르는 대체 무엇인걸까. 갑자기 찾아온 한 청년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나는 저자가 이야기하려 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한가운데엔 우리가 그토록 피하고파 안달을 내곤 하던 화두인 ‘죽음’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그렇다고 즐기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죽음.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니, 죽는 순간 이미 죽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므로 죽음을 온전히 끌어안아야 하는 건 산 자의 몫일 수도 있다. 너무도 해맑게 죽음을 받아들인 요지로와는 다르게 저자의 지인은 끝끝내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두 눈을 부릅떠가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큰 상처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편지를 통해 왜 죽음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찾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고,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파헤치려 든다. 더 이상 미래는 기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곧 소멸이라 말해도 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은 일종의 허무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아무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이기에 청년에게 전달된 답장을 정답이라 우리는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청년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이 땅에서 더 살아온 저자는 애정을 담아 정답에 가까운 결론을 내 보려 안간힘을 쓴다. 이는 마치 잃어버린 제 아들을 보듬는 태도와도 같았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청년에게서 처음부터 저자는 아들의 모습을 읽어냈다. 행여나 그가 자신의 아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기도 하면서 해줄 수 있는 게 응원밖에 없기에 그리 행동했다. 라이브 세이빙. 저자는 삶을 건져 올려야 하는 작업과 죽음을 일직선 상에 배치한다.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에서 시신을 찾기 위해 행하는 잠수는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길 따름이다. 곱게 단장된 채 누워 있는 시신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이가 훼손될 대로 훼손된 시신을 직접 건져 올리면서 겪게 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조차도 삶의 일부분으로 간직하겠노라고 청년은 고백한다. 나오히로의 그와 같은 다짐에는 요지로를 향한 죄책감이나 모에코에 대한 미심쩍음도 녹아있다.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을 다하면 제 삶의 일부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요구되는 태도이다. 결국 살아 있는 자는 끝까지 살아내야만 하는 법이며, 주어진 소명을 실천할 수 있느냐 여부는 마음에 달려 있다. 대지진 이야기였지만 아들을 잃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였으며, 동시에 젊음을 상실한 우리 사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것들을 향한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대개는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회한이지 싶다. 하지만 그조차도 곱게 간직한 채 살다보면 삶이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렸고, 살아냈노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마음을 잘 다독여야만 한다. |
![]() 9.11 의 야외극이 열리고 두달 쯤 지난 11월 청년에게서 모에코가 독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우울한 어조로 시작된 편지의 내용을 보고 강선생님이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한히 옮겨놓은
p 248부터의 내용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부정보다는 자신을 떠난 모에코에 대한 생각들을
차분히 적은 나오히로의 일기와도 비슷한 느낌의 편지였다.
그가 강선생님한테는 시시한 얘기일지라도 물어볼 사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충분히
지각할 수 있는 장문의 편지였다. 이 때, 이 편지를 보고 강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도 같이 고민해 볼수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시간이였다.
![]() p. 151 해녀편도 관심이 매우 갔던 내용이였다.
뭐에 씐것만 같은 나오히로의 시신 수습에 관한 편지의 내용은 매우 무섭고 섬득한 생각이
들정도로 독자들의 거침없는 상상력을 실험해보는 것과 같았다.
강선생님도 이 부분이 리얼하다고 말씀하신걸 보니 정말 훼손된 시신이 동물의 먹이가
될수도 있고, 그런 시신들을 마주하는 가족들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했다. 과연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치듯이 하게 되었다.
6월 중순 우기에 접어들면서 우울함을 예상한 강선생님의 예견과 다르게 심오한 나오히로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매우 인상깊히 뇌리에 박혔다.
p. 165중에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은 모르겟찌만,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죽음'가운데에는
인생의 '기억'이 있고, 그사람의 '과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죽음'에 의해서
그 사람은 영원이 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같은 망르 하고 있는건지 확신은 없습니다만,
시신을 한구 한구 인양하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죽음과 마주하는 동안, 어쨌든 '난 살아야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야해.
또한, 모처럼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의미 없이 살아서는 안된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도 되었습니다."
난 이부분이 참 좋았다. 앞서 머리말에서 강작가님이 말씀하신 부분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그부분말이다.
사람은 죽는다고 다 끝난것이 아니라고 했던 그말이 왜이리도 공감이 갔는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을 4월에 겪고 난 우리 나라의 현실은 지금 어떠한가? 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면서
이러한 국면을 마주하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삶을 살아야 하나? 이런 생각도 해보고,
동시에 난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고, 죽음이 내 삶의 이웃하고 있다는걸 언제쯤 알게 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이 책이 주는 메세지는 비단, 죽음뿐 아니라 삶에 대한 애정과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발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것 같다.
그리고, '데스 세이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다시금 알게 되었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게
매우 신기하면서 라이프뿐만 아니라 데스에 대해서도 인생의 증거로 확실하게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죽음가운데 삶이 포함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오히로군의 편지로 많은것을 깨닫고 있다는 답장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남의 삶을 통해서 내 삶을 되돌아 보고, 더불어 죽음에 대한 금기시된 고정관념을
조금을 뜯어 고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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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후미에 마음에 대한 다섯가랫길이라는 해석편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다섯가지 갈랫길이란 다음과 같다. 1. 삶의 의미 2. 공명하는 마음 3. 죽은자의 구원 4. 재해문학과 재일교포문학 5. 비관적 낙관주의라는 삶의 방법과 '마음의 힘'
사람의 진정어린 마음에 대한 유치할 만큼 우직한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삶의 여행길에서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삶을 어쩔수없이 져버리고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탄식, 그리고 삶의 소중함과 더불어 세월호 사건, 일본의 비극적인 지진 사건들이 불러온 인명피해에 대한 공포감과 안타까움이 함께했던 고뇌에 가득찬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이 빨리 해결되고, 떠난 사람들이 죽음으로 끝난것이 아니라는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이 책 마음을 통해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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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리. 죽음을 기억하라. 데쓰세이빙. 친화력 그리고 자연. 이 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이자 그 자체가 주제다.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위치를 그대로 등장시킨 소설 마음은 대놓고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이런 구성의 소설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 독자와 함께 저자도 치유를 받고 있구나 하는 기운이 들었다. 절친 요지로를 잃은 나오히로는 무작정 강상중 교수에게 편지를 전해준다. 친구의 죽음이 너무 헛되지 않았냐고, 그렇게 일찍 세상을 등질꺼라면 애초에 그의 탄생과 삶 전부가 무의미 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온다. 젊은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친구들의 죽음을 전해 들을 때 난 한번도 그들의 삶 자체가 무의미 했던게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못했다. 그들은 살아있었고 더 살지못한, 어차피 더 산다고 행복과 행운의 미래가 손내미는 것도 아닌데 그러지 못한 것에 아쉬움과 살아남은 나는 그나마 운이 좋구나 하는 어느정도의 이기적인 생각만 들었던 것이다. 살면서 삶은 무엇인지, 의미있는 삶 혹은 가치있는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하고 혹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것만 같은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삶은 무엇이냐고. 반대로 죽음은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다. 다만 죽음 너머 영혼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을 뿐 죽음 그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이야기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인의 죽음은 그대로 전해져 열심히 살아야지, 그들의 몫까지 혹은 그들의 바람까지 살아야겠다 다짐하고 이 또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소멸해버리곤 했다. 이야기 초반에 친구 요지로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나오히로의 편지들은 마치 내가 쓴듯한 착각에 빠지고, 이 편지에 답장을 쓰는 강교수의 답변에 위로를 받았던 것은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나오히로가 대지진 이후 그곳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자원봉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오히로와 보통의 나는 극명하게 갈린다. 죽음을 마주할 용기를 가진 나오히로와 죽음은 숭고하지만 그 이상은 알고 싶지 않은 비겁하고 초라한 내가 남는것이다. 만약 나오히로가 나와 같은 성격이었다면 소설 마음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나오히로처럼 죽음의 의미를 정면으로 맞딱들일 수 있는 용기와 기회가 주어지진 못한다. 교수는 마치 그런 우리를 안타깝게 바라보듯 그리고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목적으로 마음을 집필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단순히 죽음과 삶만을 철학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괴테의 친화력이라는 작품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온다. 나오히로는 대학 연극부에 속해있고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짝사랑하는 모에코에게 들려줌으로써 친화력을 각색한 한편의 극을 탄생시킨다. 모에코는 죽은 요지로에게도 연정의 대상이었다. 요지로요 죽기 직전 모에코에 대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나오히로에게 부탁했지만 요는 편지를 전달해주지 못한 일로 더욱더 괴로워 한다. 하나의 작품이 극화로 각색되어 가는 과정은 읽으면서도 상당히 놀라웠다. 1차적으로 현대극으로 옮겼을 때 보다 대지진이라는 사건과 결합하여 실제 무대로 올려지는 과정은 작가의 필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정말 무심하면서도 이렇듯 핵심을 제대로 보고 있는 이 사람은 마치 모든 것을 알면서도 상처받고 그 상처속에 자신이 치유받을 수 있음도 꿰뚫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소설속에서는 나오히로가 치유되는 과정이 주가 되고 마지막에야 비로소 작가가 먼저 간 아들로 인해 받은 상처와 그로인해 피폐해진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결국 이 한편의 소설자체가 그의 마음속에서 떠오른것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무엇일까.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리 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 단어와 함께 데쓰세이빙이란 단어도 반복된다. 죽음을 걷어올리는 것. 살아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잊는 것도 절절하게 상기시켜 생채기를 내는 것도 아닌 자연 그대로 모든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양분으로 더욱 힘차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코 죽음과 삶은 반대의 뜻도 아니고 어느것이 선한것도 옳은 것도 아닌 함께 가는 것, 더이상 삶을 중시하고 죽음은 무섭고 두렵고 더러우니 구석으로 치워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동안 죽음만을 떠올린다. 마치 주문처럼 죽음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하지만 거듭말하지만 단순히 이것만을 말하는 작품은 아니다. 더 큰 것을 혹은 이외의 이야기를 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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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김상중의 소설 『마음』은 죽음에 대한 작가의 성찰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그리고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건, 이러한 죽음 앞에 죽음의 의미는 무엇이고,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작가는 찾아간다.
그 방식은 절친의 죽음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학생 나오히로 군이 꽤나 인지도 높은 대학교수 김상중(소설 속에서의 주인공 역시 김상중이다)에게 직접 전해준 편지 상담 요청으로 인해, 여기에 김상중이 대답하며,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는 가운데, 죽음에 대해 풀어나간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게 되고, 그 엄청난 사건 이후 나오히로 군은 “라이프 세이빙” 봉사활동을 하게 되는데, 바다에서 시신들을 건져 내는 가운데 또 다른 정신적 충격과 죽음에 대한 또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아울러, 나오히로는 자신이 활동하는 연극부의 공연, “친화력”이라는 작품을 통해,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을 하게 된다.
절친의 죽음, 그리고 상상키 어려운 엄청난 대규모 자연재해를 통한 무작위 다수의 죽음, 그리고 연극을 통해, 괴테의 『친화력』에 대한 재해석.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저자는 상중과 나오히로 군의 주고 받는 메일을 통해, 죽음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
이 소설에서는 괴테의 『친화력』이 큰 역할을 감당한다. 극중의 상중은 『친화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주인공 네 사람 간의 사랑과 애증보다는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비극적 삶에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마음』을 통해 강조하는 바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드러난 ‘개발’의 맹점에 대한 고발이다. 이것이 바로 삶과 죽음이라는 주요 주제 뒤편에 감춰진 또 하나의 메시지이다.
동일본대지진의 참사를 통해, 세계는 원자력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린 이런 세계적 흐름과 반대되게 정부차원에서 원자력 개발을 강행하며, 이로 인해 지역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국민들의 ‘마음’을 서로 나뉘게 하고 있다. 자연의 엄청난 경고 앞에서도 우리가 배우지 못한다면, 무엇을 통해 배울 수 있을까? 괴테의 『친화력』을 통해 감춰진 경고를 들을 수 있을까? 아님, 이 책 『마음』을 통해,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극중 연극 대사를 통한 질문, “도대체 우리들, 어디서 잘못된 걸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저자가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결론 격은 청년 나오히로 군의 말을 통해 밝혀진다. 죽음은 결국 삶을 빛나게 해준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을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고민하는 이유는 죽음 앞에 정의도 없고, 죽음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진행되기에 허무함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의 부당함(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정론이라고 말한다)을 고발하고자 함도 아니다.
물론,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기에, 그리고 누군가는 맑고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감에도 부당한 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죽음 앞의 우리 인생은 허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허무함을 말한다 할지라도, 우린 죽음 앞에 인생은 허무하기에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번 주어지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며, 행복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며, 긍정적 인생을 살아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허무주의는 ‘부정적 허무주의’가 아닌 되려 ‘긍정적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 『마음』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죽음에 대한 성찰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누구도 그 시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언제일지 모를 나의 끝 날을 예비하며,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길 촉구하는 것. 이것이 죽음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아닐까?
또한 대중매체들을 통한 죽음의 접근에 대해서도 저자의 도발이 느껴진다. 죽음의 참혹함, 직접적인 그 슬픔의 울림은 외면한 채, 그저 통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숫자상의 죽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린 올해 “세월호”라는 엄청난 슬픔을 경험하였다. “세월호” 사건 앞에서 방송매체들의 문제점이 얼마나 많이 드러났는가? 게다가, 그 슬픔을 우린 어떻게 기억하나? 우리 역시 그저 숫자상의 죽음,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뽑혀버린 남은 자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도 외경의 마음도 없다.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소견에 의해 비인격적인 비방과 섣부른 이용만이 있을 뿐 아닌가! 어느 누구도 엄청난 죽음의 사건에 책임지지 않는 사회, 이 사회는 과연,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괴물인지 궁금하다.
『마음』이란 이 소설, 표지 디자인이 썩 손이 가는 디자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알맹이는 참 좋다. 죽음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옥에 티가 있는데, 그건 나오히로 군의 컴퓨터가 고장 나서, 친구의 컴퓨터를 통해, 친구의 메일계정으로 이메일을 보낸다는 설정인데, 이는 작가의 착각에 의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이메일계정이란 것이 자신의 컴퓨터를 통해서만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느 컴퓨터를 통해서도 자신의 메일계정을 사용할 수 있음을 작가가 몰랐던 것일까? 이런 설정이 옥에 티라면 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의 성찰을 깎아 내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