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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 지식인의 모습을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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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연암 박지원이 쓴 양반전이 떠오르기도 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겹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양반이나 사대부하면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들다가도, 선비 하면 조금은 고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며 시를 짓거나,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선비들의 모습이 생각나서일 게다. 이 책은 그런 선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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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연암 박지원이 쓴 양반전이 떠오르기도 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이 겹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양반이나 사대부하면 왠지 부정적인 느낌이 들다가도, 선비 하면 조금은 고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며 시를 짓거나,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선비들의 모습이 생각나서일 게다. 이 책은 그런 선비들의 생활이 실제로는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중국 고대선비들을 살펴보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사에서 우리의 전통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모든 면에서 중국 선비들을 본받고, 그들과 일체가 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비는 유생이나 문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고대 중국의 지식인에 대한 호칭으로 볼 수가 있다. 저자는 먼저 선비들의 일상사를 살펴보기 전에, 선비들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분봉제와 선비등급제가 있어, 선비들이 끊임없이 확충되기는 했지만 자주성이 부족하고 신분도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 선비는 독립된 계급이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사이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격렬한 사회변혁으로 분봉제와 등급제가 느슨하게 되자 비로소 선비들은 독립적인 지식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백가쟁명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그리고 한무제의 독존유술은 이러한 선비들에 대한 규제의 일부라고 한다. 결국 춘추전국시대 분출되기 시작한 선비들의 자유로운 목소리와 위상은 전국이 통일되고 혼란이 사라지는 진한시대 이후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중국고대 선비들의 일상사를 분야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그들에게 독서와 벼슬길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그들의 의식주는 어떠했는지 등, 일상을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세세히 그려내고 있다.

 

먼저, 선비와 책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비 하면 고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아마 이 탓 일 게다. 선비들이 책을 읽는 목적은 제각기 달랐지만 공리적인 면이 강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여긴 그들은, 자신의 그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여 벼슬길에 나가야 가능했다. 다시 말해 선비들의 자아실현을 위한 단 하나의 길은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서는 것이었다. 고대의 종법제도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무너지자, 새로운 관리선발제도가 생겨났고, 이것은 선비들에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된다는 것은 세금과 요역이 면제되는 특권뿐만이 아니라, 규정된 봉록으로 부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벼슬을 하면 높은 지위와 부귀해 진다는 것은 선비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했고, 선비들은 공부를 해서 관리가 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벼슬길은 고통의 길이기도 했다. 수많은 무리 가운데 극소수의 행운아만이 최종적으로 합격했을 뿐이다. 사정이 이렇기에 독서는, 책은 선비들의 삶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과거에 집착해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공명의 꿈을 접고 자유로운 삶을 살거나, 불가에 귀의하기도 했다. 그들이 이처럼 끝없이 책을 읽었던 것은 독서가 처세, 즉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거니와, 독서가 번뇌를 없애고 생활을 더욱 충실하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부연한다.

 

저자는 이어서 선비들의 의식주를 살펴보고 있다. 중국고대 사회의 복식은 추위를 막아주고 피부를 보호하는 본래의 목적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을 아름답게 하고, 사회계급까지 표시하는 특별한 작용을 하였다. 관복과 평민들이 입는 옷은 옷감의 질이나 스타일 그리고 색깔까지 모두 달랐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이 입는 복장을 유복이라 불렀으며, 이들의 복장은 넓고 헐렁한 것이 특징이었다. 머리에 쓰는 관 역시 사회의 계급관계가 집중적으로 반영되었으며, 선비들은 두건(한나라), 복건(당송시대), 유건(명나라)을 썼으며, 청대에 들어와서는 모자를 썼다고 한다. 음식의 경우는 선비와 평민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수많은 선비들은 검소한 생활을 나타내는 변변치 않은 음식에 대해서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엮어갔으며, 몇몇 선비들은 갖가지 요리방법을 연구하여 중국의 음식문화에 이바지 하기도 했다. 이처럼 선비들은 일상생활 속에서의 음식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술에 대해서는 음식과 달랐다. 선비들은 술을 자주 접하였으며, 그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도 각각 이었다. 우수와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근심이나 화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들은 술을 이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마시기도 했으며, 창작을 위한 도구, 즉 영감을 얻는 방법으로 마시기도 했다. 차 역시 술과 마찬가지로 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한 식품이었다. 정신을 맑게 하고, 지혜를 새롭게 한다 하여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차를 마시면서 마음의 평화를 통한 생활의 멋을 찾았고, 정신적인 해탈에 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집은 거주에 필요한 것이지만 의복과 마찬가지로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거주할 수 있는 집의 규격은 엄격한 등급기준을 지켜야 했다. 선비들은 자연가까이에서 살기를 좋아했고 또 원했다. 그들은 집을 지으면서도 서재만은 공들여 설계하기도 했다. 아마 독서가 중요한 일과였기 때문일 게다. 고위관료들과 명문가들은 원림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자연을 좋아한다고 해도, 깊은 산골자기나 숲 속에서 생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옮긴 원림을 지은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중국고대 선비들의 의식주를 살펴보면서 이와 관련된 일화나 시들을 많이 소개하기도 한다. 두부를 발명한 유안, 만두의 제갈량, 동파육, 동파갱을 발명한 소식의 이야기와 술과 얽힌 도연명, 구양수, 두보, 이백 등의 시를 싣고 해설을 곁들이고 있다.

 

또한 저자는 선비들의 회합과 결사, 그리고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일상사 즉, 금기서화琴棋書畵를 다루고 있다. 중국고대 선비들은 독서와 벼슬길에 매달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물질이 주는 즐거움을 멀리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전통도 가지고 있었다. 회합會合은 고대 선비들이 정을 나누고, 우정을 증진시키는 방법의 하나였고, 결사結社는 생각이 같고 서로 지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맺어진 문화활동 단체였다. 그런가 하면 금기서화는 선비들의 특수한 문화적 소양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생활양식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거문고()는 고대 중국의 가장 중요한 악기이자, 일반적으로 음악을 가리키기도 했다. 선비들은 생활 속에서 서로 마음을 통하는데 음악을 매개로 했으며, 바둑()은 선비들이 침묵가운데 깊은 생각에 빠져 감정을 조절하고 지혜를 추구하는데 사용되었다. 한편, 회화()는 일반 선비들이 기분을 전환하고 감정을 조절하며,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아름다움을 맛보고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서예()는 중국 고대문화의 보물이라 칭할 수 있으며, 선비들에게 있어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고대 선비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거문고를 타며, 바둑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준이 높지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글씨를 잘못 쓰면 체면과 위상은 물론 과거시험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책을 읽었고, 또 글씨를 썼을 것이다.

 

우리는 또 심심찮게 고대선비들이 기생과 얽힌 이야기를 접한다. 청루靑樓여자란 일반적으로 창기를 뜻한다. 원래 청루라는 말은 권문세가를 가리켰으나, 당대 이후 기녀들이 사는 곳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대선비들이 기녀와 놀았다는 것은 성관계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마음을 주고 받은 사귐이었다. 문화적 소양이 높아 금기서화에도 능했던 기녀와 선비 사이에 오간 사랑과 이별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위진시대 선비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있다. 이 시기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풍모가 중국고대 선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고 한다. 하나는 유가의 영향을 받아 군자의 인격을 추구한 것으로, 이를 위하여 수신제가한 후, 벼슬살이를 통한 치국평천하를 실현하여 인생의 이상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중국 전통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도가에서 말하는 자연주의적 인격을 추구한 것이다. 이들은 자연에 은거하며 속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연적인 인격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중국고대에서 이러한 두 가지 삶들은 충돌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면서 선비들의 정신세계가 평형을 이루도록 했다고 한다. 저자는 강렬한 참여의식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했던 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귀적의貴適意라고 말한다. 귀적의란 문제를 생각하고 일을 결정함에 있어 자신의 간절한 뜻에 맞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주저없이 다른 계획을 세운다는 것으로, 이는 제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그들 인생의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정신적인 자유와 문화적인 품위를 중시했는지도 모른다.

 

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를 보면서 흡사 우리의 전통시대 선비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그들과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이 흡사했기 때문이다. 전통시대 지식인의 삶을 통하여 그들이 가졌던 품격을 하나하나 더듬어 보면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본다. 과연 우리는 그들의 삶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있는지를..

k*****1 2014.09.05. 신고 공감 11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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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품격 , 고대 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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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는 선비에 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품격, 의식주, 행동방식, 그들의 회합, 즐겼던 예술, 취미 등 생활 전반에 관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어, 선비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이 책을 찾아보면 될 정도다.    책을 다 읽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선비는 문화다' 였다. 이제 그 생각을 뼈대로 감상을 써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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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는 선비에 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선비들이 갖추어야 할 품격, 의식주, 행동방식, 그들의 회합, 즐겼던 예술, 취미 등 생활 전반에 관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어, 선비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이 책을 찾아보면 될 정도다.

 

 책을 다 읽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선비는 문화다' 였다.

이제 그 생각을 뼈대로 감상을 써보려 한다. 


 

***

 

  선비()는 고대 중국 지식인에 대한 호칭으로 유생 또는 문인을 뜻한다.

그들은 역사에 대한 사명감과 우환정신(민족과 국가 또는 인류가 처한 곤경에 대한 인식 및 걱정), 이상적인 인격을 갖추는 것을 품격이라 생각했고 물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비들의 생활방식에 대한 철학, 선비들이 추구하는 의식주, 선비들이 즐기는 예술, 이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적,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조금도 꾸밈 없는 생동감 있는 생활 태도를 가졌다 .

특히 귀적의(貴適意-문제를 생각하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기의 간절한 뜻에 맞는지부터 출발하여 일단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다른 계획을 세운다는 뜻)의 생활관은 출세에 대한 욕구보다 개인적인 자족(自足)이 더 높이 생각한다는 의미로, 생활에서의 품위를 늘 염두에 두고 각자의 생활을 개성화하고 다양화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의식주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의식주가 사회를 선도하는 문화로 자리매김을 하는데,

 

 먼저 선비들의 음식 문화,

그들은 음식을 먹기만 한 것이 아니고, 직접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음식을 대하는 태도까지 책으로 만들어, 오늘 날에도 사랑받는 음식, 음식에 대하는 예절로 이어지고 있다.

 

선비들이 살던 집, 원림,

선비들은 자연에 가까운 환경에 살기를 좋아했다.

원림은 봉건제도아래에서 인격의 상대적인 독립 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선비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대로 설계하고, 형편에 맞게 개성을 발휘하여 만들었으며, 선비들의 원림이 가진 독특하고 색다른 조형과 그 안에 내포된 깊은 의미는 중국 원림 예술에 광채를 더했다.

 

선비들의 의복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품이 넓고 헐렁한 옷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고 소탈하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모습으로 내재한 인격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이 즐겼던 술과 차, 거문고, 바둑, 서예, 회화, 산천유람 등은 다음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주는 수많은 일화와 예술을 낳았다.

 

특히 선비들이 추구했던 지식에 대한 존중과 목마름은 선비들의 독서 생활을 통해 볼 수 있었는데

선비들은 생활이 순조로울 때도, 역경에 처했을 때도 타락하지 않고  작품을 계속 썼고, 수많은 걸작이 이들의 손에서 나왔고 오늘날 우리에게 감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650페이지에 달하는 고대 중국 선비의 행적을 그린 글과 그들이 지은 시를 집대성한 결과물 이었다.

 

선비도, 반상의 차별도 없어진 오늘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모습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모습의 사람에게 가장 부러움을 느끼는가 

나열해 봤더니

출세 때문에 자기가 가졌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

문학을 사랑하고 책을 소중히 하는 사람.

예술을 존중하고 즐기는 사람.

명품 보다는 개성이 있는 옷차림을 할 줄 아는 사람.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자연 친화적으로 꾸며진 집에 사는 사람.

결국 고대 선비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었다.

지금 사는 세상이 현대라고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이 달라지겠는가 

 

인간은 누구보다도 자기를 소중히 여긴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보다 나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인격도야에 힘쓰고, 자신 만의 멋을 추구하며, 자기방식을 존중받기 원한다.

바로 고대선비들의 '귀적의 사상'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인간의 삶에 선비이야기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이기만 하겠는가!

 

요즘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대단하다.

그런 연유로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설명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하지만, ‘사과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사과 맛을 알 수 있을까.

한입 베어 먹는 게 맞지 않은가. 그 맛을 알려면 말이다.

인문학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말고 소설, 고전들, 역사서, 또는 이런 연구서를 직접 읽어보는 것이 인문학을 즐기는 제대로 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많은 역사서에서 혹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적 인물들의 한시를 읽으며 은은한 인격의 향기에 취하게 하고, 진정한 인문학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 라면,

독서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지식과 감성의 바다'임을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m***8 2014.09.15. 신고 공감 8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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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정신적 모티브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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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선비로서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이요?” TV의 사극에서 가끔 들을 수 있는 대사이다. 이 대사로 미뤄 볼 때 선비란 공부하는 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사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본인이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고 예禮와 의義를 지키는 이를 말한다. 선비라는 말이 어느 한 계층을 지칭하는 말로 시용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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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선비로서 어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이요?”

TV의 사극에서 가끔 들을 수 있는 대사이다. 이 대사로 미뤄 볼 때 선비란 공부하는 자를 지칭한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사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본인이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고 예와 의를 지키는 이를 말한다. 선비라는 말이 어느 한 계층을 지칭하는 말로 시용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선비를 아우르는 사대부(士大夫)라는 용어가 일상화 된 것은 조선시대이다. 선비라는 용어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고대 사회에 그 신분층이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서민 등 5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중 천자와 제후는 황제 및 왕을 뜻하여 이들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와 사가 지배계급이었으며, 피지배자인 서민과 구분되는 계층이었다. 이런 계급사회는 통일국가인 한()나라에 이르러 사와 서민의 구별은 없어졌으나 새로이 관리와 백성이라는 구별이 생기고, 관리의 지위가 세습화하자 사족(士族)이라 불리어 육조(六朝)를 중심으로 한 귀족정치시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송()나라 때부터는 세습귀족(世襲貴族)이 몰락하고 대신 과거(科擧)에 의한 관료계급이 형성되어 이들을 사대부(士大夫독서인(讀書人)이라 불렀다. 이 사대부사회에서는 학문과 더불어 고아(高雅)한 취미가 숭상되어 그들이 여기(餘技)로서 그리는 그림은 사대부화(士大夫畵:文人畵)라 지칭하여 직업화가의 그림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때 귀족 외의 높은 벼슬아치나 문벌이 높은 사람을 지칭하였고, 그 가문을 사대부(士大夫) 집안, 그 가족을 사족이라 해서 일반인과 구별하였다. 고려 말에 정치 정상에서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낸 사대부(士大夫)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주로 현·전직의 관리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지식계급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후로 사대부(士大夫)라는 말은 관직을 맞은 귀족층을 일컫는 용어가 되었다. 이들을 우리는 선비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비들의 정신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중요한 사상적 모티브였다. 선비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대쪽처럼 곧은 성격을 떠올리게 된다. 대의를 위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임금에게 직언 상소를 올리는 엄청난 용기와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선비이다. 사회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비의 전통은 근대에 와서는 3.1독립운동 및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각종 독립운동과 나라가 국난에 처했을 때 의병활등을 통해 이어져왔다. 이 정신은 현대에 그대로 계승되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 책은 한국의 사대부(士大夫)와 선비정신의 모태가 되는 중국의 선비들의 생활사를 엿본 작품이다. 저자인 쑨리췬은 멀리 선진시기부터 가까이는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옛 선비들의 갖가지 생활 모습을 역사적인 사료를 근거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중국에서 선비도 공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초기 의미로부터 시작해 한나라의 한 무제에 이르러 유교가 국교 화되면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한나라 이후 당대까지는 이른바 훈고학(訓詁學)이 성행했다. ()이란 경전에 서술된 말을 난해한 것은 쉽게, 옛날의 용어는 현대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 언어를 연구하여 고전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훈고학의 발생에는 진시황의 분서사건도 한몫한 셈이다. 당태종의 명으로 공영달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함으로써 여러 유파의 해석을 통일했는데, 과거제의 시행과 더불어 일종의 국정교과서로 채택되면서 유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는 신유학, 즉 성리학(性理學)이 발생했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흡수함으로써 훈고학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와 기()의 개념을 중심축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을 설명하고,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 · 정이 형제의 사상을 계승하여 사서집주를 편찬함으로써 성리학을 완성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회를 아우르는 학문의 변화로 인해 선비들의 성향도 달라졌다. 이 책은 총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장은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자유와 아울러 문화적인 품위를 자못 높이 보였던 중국선비들의 자세한 생활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책을 가까이 하며 공부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문화근간을 이루었던 유교의 교리에 입각한 훈고학이 지식의 근간이 되면서 단순히 외워서 과거를 치루는 풍토로 인해 학문의 새로운 발전을 저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시대적인 여건 탓에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룬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해 평생을 과거공부로 세월을 허비하는 선비들의 모습과 그 모든 것을 벗어나 시와 풍류에 취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선비들의 모습도 소개한다. 네 번째 장은 선비의 의와 식을 다루었다. 선비들의 복식과 그들이 즐겨하던 음식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술과 차를 즐기고 장수를 위해 약을 복용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술은 많은 선비들이 즐겨했다. 문학적인 향취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아픈 현실을 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때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기 위한 핑계거리로 삼기도 했다. 약은 장수와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약의 독성으로 건강을 해친 이들이 많았다. 다섯 번째 장에서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했던 선비들의 주거와 행동을 보여준다. 자연을 동경하는 그들의 염원은 개인 원림(園林)을 가꾸는 풍토를 나았다. 자연 속에 귀의해서 살고 싶은 그들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원림(園林)을 가꾸고 그 속에 정자를 짓고 친분이 있는 선비들과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즐겼다. 여섯 번째 장은 선비들의 회합과 결사를 보여주는 장이다. 풍광이 좋은 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적인 향취를 즐기는 장면들이 소개된다.

 

  선비와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에 대한 소양은 선비가 선비일수 있는 바탕이었기에 옛 선비들은 금기서화를 연마했으며 이른 통해 심신을 수련했다. 일곱 번째 장에는 선비와 금기서화(琴棋書畵)에 얽힌 일화를 통해 중국문화의 면면을 흐르는 선비들의 예술적 소양을 알 수 있다. 금기서화(琴棋書畵)란 거문고, 바둑, 서예, 문인화 등을 말한다. 거문고는 혜강과 박거이를, 바둑은 명나라 말기의 과백련을, 서예는 진나라의 이사와 동진의 왕희지를 최고로 쳤다. 여덟 번째는 선비와 청루의 여자를 다뤘다. 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금기서화에서 능했던 기녀와 선비 사이에 오간 사랑과 이별의 대목은 단순히 남녀간의 육체적인 관계가 아닌 문화적 코드가 통하는 동반자로서의 관계였다. 마지막 장은 중국 고대 선비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위 진시대의 선비의 모습을 다루었다. 위진 시대에는 유가의 이상은 현실과 심하게 어긋났다. 이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 도가 사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학 사조이다. 선비로서 현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현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유학과 현학을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정치투쟁의 격화로 선비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열정은 약해졌다. 이러한 풍토는 선비들이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 눈길이 이동하게 했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고 삶과 죽음에 맞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죽음의 존재를 깨닫고 짧은 삶속에서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원하게 되었다. 기존의 유교의 교리에 붙잡혀 형식에 치우치던 선비문화에서 벗어나 도교를 기반으로 하는 변형된 선비문화를 보여준다. 원림 조성이나 자연에 귀의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성찰과 자기수양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오르고자 했던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이가 바로 도연명이었다. 이렇듯 후대에 올수록 선비문화는 자기 뜻대로 사는 삶이 멋지다는 위진 시대 선비들의 삶에 대한 방식에서 일어나는 자아의식의 각성을 엿볼 수 있으며, 동시에 삶에 대한 이런 생각이 선비들의 생활을 다양화시킴은 물론 개성적으로 만들었다.

 

  중국의 선비문화의 변천과정은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과거공부 중심의 학문과 독서에만 열중하던 선비들은 그 성취를 이루고 나서는 삶에 대한 회의에 빠져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나중에는 자기성찰을 위해 자연에 귀의하거나 술과 책과 여자와 어울려 즐기는 삶을 살아가기도 했다. 또한 인성을 속박하는 유가의 도덕은 미워했으나, 노장의 자연스럽고 꾸밈이 없는 인격은 숭상했다. 젊었을 때는 성취를 위해 누구나가 바라는 권력과 지식에 심취하지만 나이를 먹어서는 삶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조용히 침착하여 자기성찰을 꾀하는 삶으로 바뀌는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우리 역사에서 선비문화는 사대부(士大夫)라는 단어와 함께 고루한 전근대적 사상으로 취급되었다. 물론 형식에 치우친 선비문화가 우리 역사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성리학의 논리에 갇혀 수많은 논쟁과 이어지는 당쟁으로 역사의 발전에 장애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선비문화는 오늘날 우리의 유구한 문화 속에 고스란히 전파되었다. 시대가 어렵거나 나라가 국난에 닥쳤을 때 분연히 일어선 것도 선비정신이었다. 또한 선비들에게는 변절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일편단심이었다. 이들은 예의로 행동을 규제하고 염치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단속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두 가지 덕목을 제대로 가진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치를 할 때에는 절대로 사리사욕을 채워서는 안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청렴(淸廉)을 실천해야 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즐겨야 했다. 따라서 경제생활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니까 선비는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보아서도 안 되었다. 이 때문에 간혹 선비의 생활이 지나치게 비세속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이렇게 살다가 정치에서 물러나면 그 다음에는 대중 속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황이나 이이등이 향약(鄕約)’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돕고, 착한 것은 권하고, 악한 것은 징계하게한 것은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긍정적인 면인 많은 우리의 선비정신은 조선의 멸망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면서 고루한 사상으로 치부되어 외면당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런 선비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세상의 그릇된 일에도 그르다고 외치는 자가 없다. 그저 자본주의의 논리에 갇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편과 손해는 모른 척 하는 형식론자들만 있을 뿐이다.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권력에 빌붙어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 그저 미약한 지식으로 호롱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요직하나라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네 선비들은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권세도 마다하고, 허름한 토굴에서 끼니를 굶고 살지언정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선비들은 안빈낙도와 청렴을 실천하였으며 도덕적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다. 또한 전방위 지식이었다. 세속적 이재를 멀리하고 예와 의를 지키려 했다.

 

  지금 이 시대는 사라져버린 선비정신의 부활을 원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행보에 앞장서고, 사회가 어지러울 때는 올바른 목소리를 내어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선비,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옳은 목소리를 내어 우리 모두를 일깨워주는 이들, 노기어린 얼굴로 대한민국을 향해 일갈을 가하는 선비가 지금 꼭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혼탁한 사회에는 이런 비세속적이지만 고결한 분들이 필요하다. 이재(理財)만 밝히는 현대 사회에서 선비는 분명 그리운 분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옛 중국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통해서 오늘날 혼탁해진 세상의 지식인들이 가야할 바른 길을 보여준다. 물론 그 속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우리 또한 그 길에서 예외는 아니다.

 

 

 

YES마니아 : 로얄 h*****o 2014.09.17. 신고 공감 7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우리 모두도 이 시대의 선비이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우리 모두도 이 시대의 선비이다." 내용보기
선비라는 단어의 느낌은 왠지 수수하다.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고 세속적 삶과 떨어져 자신의 길을 가는 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선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막연히 책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을 가지고 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책 제목을 보면 그렇게 묻혀 사는 이들의 생활사가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 두툼한 책 속에는 내 견문을 넓혀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우리 모두도 이 시대의 선비이다." 내용보기

선비라는 단어의 느낌은 왠지 수수하다.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고 세속적 삶과 떨어져 자신의 길을 가는 자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선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막연히 책을 통해 전해지는 느낌을 가지고 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책 제목을 보면 그렇게 묻혀 사는 이들의 생활사가 뭐 그리 특별한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이 두툼한 책 속에는 내 견문을 넓혀 주는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항상 인간사랑 출판사의 책들을 읽다 보면 책이 가지고 있는 깊이에 놀라곤 한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선비들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선비의 정의를 보면 ‘젊은 남자’, ‘무장한 병사’, ‘각급 귀족에 대한 통칭’으로 굉장히 포괄적이다. 평범한 농민이나 천민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을 선비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이렇게 포괄적이라 함은 선비의 활동 범위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넓었고, 보다 현실적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수없이 많은 전란과 통일이 반복된 중국 역사처럼 우리네 역사도 그러했고 그 중심에 선비들이 있었음에,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별반 차이가 없을 듯하다. 


이 책은 특히나 춘추전국시대의 선비들을 조명해 보고 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아이러니하게도 인재들은 제각기 능력을 펼친다. 신 동준 선생님이 그의 저서 ‘왜 지금 한비자인가’에서 말했듯 격렬한 사회 변혁의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온갖 책략들과 지혜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비들은 현실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를 했다. 그 결과 정치, 군사, 사상, 문학 등 다방면에서 역사에 전해질 뛰어난 업적들이 일궈졌다. 그 시대 선비들의 기저에는 역사에 대한 사명감과 우환의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공명정대한 재상의 역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전략가, 만인을 걱정하는 사상가와 교육자 등 나라의 해결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과거를 조명하는 일은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타파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사람들이 과거를 되짚어 보기에 굉장히 적절한 시기이다. 이 시대의 지도자라는 이들이 사명감이나 우환의식을 갖고 행동한다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선정하고 평가하는 주체로서 이상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동양의 사상들을 살펴보고 자신의 이상을 좇아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도 배울 수 있을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 속에는 그 시대 선비들의 치부도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 시기에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했고, 그들의 정치 참여 의지에는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우리가 춘향전을 통해서 이미 접했던 장원 급제처럼 춘추전국시대에도 벼슬을 한다는 것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대로 수요는 적은데 공급이 넘쳐나니 온갖 편법과 청탁과 같은 부조리한 사건들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것을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때문이라 봐야 할 지, 자본이 존재하는 사회의 근본적 구조의 문제라 해야 할 지 참 씁쓸하기만 하다. 여전히 실존하는, 아니 더 심화된 당면 문제이니 말이다. 고시제도가 떠올랐다. 국가고시 패스를 위해 수 년을 참고 공부하는 이들이 있었고, 과거엔 분명 고지에 올라선 자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쥐어졌다. 지금은 개천에서 용나기 힘들다고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되는 시대도 지나갔고, 선택이 되어도 인맥, 학연 등 소위 말하는 백이 없으면 그 내부 조직에서도 도태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구조에서 설령 용이 나온들 그 용은 이무기가 되지 않으면 뜻을 펴기 어렵다. 독버섯처럼 퍼져나가 전체가 썩어 문드러져 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선비들에게 배울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다. 책이 벗이자 생명처럼 귀한 존재로 여겼다는 독서사랑법은 현대인들도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이니 책이 무척 귀했을 것이다. 몇 천 권에 달하는 책을 베꼈다는 그들의 방식은 현재에는 필요가 없어졌지만, 책을 아끼고 공리적인 독서와 즐기기 위한 독서에 매진하여 독서를 삶 자체로 만들어 버린 점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다독과 반복적인 재독, 필사 등 현재에도 좋다고 추천되는 독서법은 그들의 일상이었다. 벼슬길에 오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선택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의도가 어떠했든 그 책들은 선비들의 이상을 실천할 디딤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 선비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벼슬을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고 말이다. 현대 정치에 참여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책을 읽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내 생각엔 대부분은 거의 읽지 않을 듯하다.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책 내용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기란 쉽지 않음을 알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양심은 만들어졌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사랑하는 정치인들, 국민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면 조금 더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 속에는 그 외에도 선비들의 의식주, 행동, 금기서화나 회합(토론)과 같은 문화 활동 등에 대해서도 흥미롭게 풀어내었다. 보고 있노라니 이 시대의 모든 이들이 이 나라의 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와 명예만을 좇다가 옳지 못한 길로 빠져 드는 이도 있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도 나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학업에 매진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이들도 있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여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또 각자의 자리에서 소박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각자의 철학을 가지고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음에 우리는 선비다. 역사적인 사명감 우환의식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남을 배려하고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들을 가진다면 그 시대의 선비들처럼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a*****0 2014.09.16. 신고 공감 4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14-38] 중국 옛 선비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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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비[士]인가?   춘추(春秋) 시대 이전 사(士)는  군(君)/경(卿)/대부(大夫)/사(士)로 이루어진 체제의 최말단 지배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선비’하면 떠올리는 양반이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시민(市民)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이들 사(士)는 “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하거나 하급관리, 경대부의 가재(家宰)나 읍재(邑宰) 노릇을 하는 등 다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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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선비[]인가?

 

춘추(春秋) 시대 이전 사()  ()/()/대부(大夫)/()로 이루어진 체제의 최말단 지배층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선비’하면 떠올리는 양반이라기 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시민(市民)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이들 사()직접 농업생산에 종사하거나 하급관리, 경대부의 가재(家宰)나 읍재(邑宰) 노릇을 하는 등 다양한 존재형태를 보(였지만 이들) 모두가 전쟁에 참가하는 전사(戰士)로서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1)그래서 국인(國人)이라고도 했다.

, 이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시민들처럼 전사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함께 전투참여 자체를 특권이자 당연한 의무2)로 여겼던 존재였다.

 

하지만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혼란기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교육을 실시한다.’는 원칙을 세워 원래는 귀족들만이 독차지했던 문화와 지식을 민간에도 전하여 독립된 지식인의 형성을 촉진3)한 공자(孔子)의 공로가 컸다.

 

어쨌든 이렇게 형성된 선비[]들은자기의 정치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오늘은 이 나라, 내일은 저 나라로 바쁘게 다니며 뜻에 맞으면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났다. 그들은 도의를 굳게 지켰으며 개성이 분명했고 임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은 물론 권세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4)

물론 이러한 자세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이 가진 이중적 지위, 다시 말하면 민()에 대한 치자(治者)이면서 동시에 군주[皇帝 혹은 王]에 대한 피치자(被治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못지않은 전환기는 수() 문제(文帝)의 과거제(科擧制) 실시를 통해 찾아왔다. 왜냐하면 저자가 중국 고대 선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표하는 정신적인 풍모를 드러냈다고 주장하는 위진(魏晉) 시대와 달리 평민들도 과거(科擧)라는 발판을 딛고 지배층에 편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추천에 의한 문벌귀족(門閥貴族) 사회에서 시험을 통한 사대부(士大夫)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전기(傳奇)침중기(枕中記의 주인공인 노생(盧生)이나구당서(舊唐書)>에 언급된 위지고(魏知古, 647~715)처럼 평민출신이나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각각 연국공(燕國公), 양국공(梁國公)에 봉해진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선비[]’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가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科擧), 이상의 실현과 현실의 족쇄

 

저자가 말하는 고대(古代), 즉 전근대(前近代) 사회의 선비[]에 있어서 인생 최대의 바람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는 것이요 인생 최고의 실의는 과거에 낙방하는 것이었으니, 과거가 선비들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따라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유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벼슬길에 나서는 선비[]에 있어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역사상 504명에 불과했다는 장원급제자 못지않게 가문의 영광이고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유림외사(儒林外史)>에서 54세의 늙은 수험생 범진(范進)1차 시험인 향시(鄕試)에 합격하자,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너무 기뻐서 한 마디 외치고 쓰러져  죽는 일이 발생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단지 향시(鄕試)에 합격해서 거인(擧人)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퇴직 知縣은 즉시 그를 초대하여 큰 집과 당장 쓸 용돈을 조금 주었다. 뒤이어 그 지역의 小民들은 범진에게 자기 토지의 일부나 상점의 이익 배당분을 주었고, 아예 자신을 노복으로 바치기도 하였다.6)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송()의 진종(眞宗)이 지은 유명한 “권학문(勸學文)”이다.

富家不用買良   (부유해지기 위해 기름진 밭을 사지 말라.)

書中自有千種   (책 속에 저절로 천종(千種)의 봉록이 있다.)

安居不用架高堂   (편안히 살고자 큰 집을 짓지 마라.)

書中自有黃金   (책 속에 저절로 화려한 집이 있다.)

出門莫恨無人隨   (문을 나설 때 수행원이 없음을 한탄 마라.)

書中車馬多如   (책 속에 수레와 말이 떨기처럼 많다.)

取妻莫恨無良媒   (장가들 때 좋은 매파 없음을 한탄 마라.)

書中有女顔如   (책 속에 얼굴이 옥 같은 미녀가 있다.)

이렇게 책 속에 모든 것이 있다고 하니 모두 눈에 불을 키고 독서를 할 수 밖에.

 

하지만 이 모든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비판적인 사고와 상대적 독립성을 버려야 했다. 특히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익혀야 했던 팔고문(八股文)은 뜻있는 학자들로부터 또 하나의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악평(惡評)을 받을 정도였다.

 

 

선비의 삶

 

흔히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의()/()/() 가운데 의복과 집은 신분과 지위를 밖으로 드러나기 쉬운 요소였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의복의 기본적인 기능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의복은 그것을 몸에 걸치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명확히 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지배계급에서는 의복의 색과 모양이 그 개인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송대(宋代) 초기인 10세기 말에는 3품 이상은 보라색, 5품 이상은 주홍색, 7품 이상은 초록색, 9품 이상은 파란색이었다. 검정색과 흰색의 의복은 관직이 없는 사람이 입었다..7)

머리에 쓰는 관()이나 두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의 경우에도 의복처럼 엄격한 등급기준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수많은 선비들은 호화롭고 위엄 넘치는 당당한 집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박하면서도 깨끗하고 우아한 집을 원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고결한 사상과 속되지 않은 인격을 드러내려고 했다.8)나아가 자연과 일체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은거를 하지 않는 이상 그런 삶을 누리기가 힘들다. 여기서 탄생한 것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옮긴 원림(園林)9)이다. 오늘날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쑤저우[蘇州]의 유명한 정원인 졸정원(拙政園), 사자림(獅子林), 유원(留園), 망사원(網師園) 등은 바로 이러한 선비[]들의 욕구가 빚어낸 걸작들이다.

 

이러한 원림(園林)에는 선비들이 봉건 전제 제도 아래에서 자신의 인격의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취한 일종의 수단10)이라는 의미도 담겨있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했던 선비[]들은 금기서화(琴棋書畵)를 즐겼을 뿐 아니라 이에 능한 기녀들과의 풍류도 즐겼다. 그 결과 수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예컨대, <왕괴(王魁)>라는 소설에 나오듯이 사랑하는 사람을 조강지처(糟糠之妻)처럼 뒷바라지 했으나 버림받는 기녀 교계영(桂英)과 같은 경우나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은 기녀 이향군(李香君)처럼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선비와 기녀의 사랑과 이별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變奏)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귀적의(貴適意)

 

저자는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관을 ‘귀적의(貴適意)’라고 표현한다. 이는 문제를 생각하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기의 간절한 뜻에 맞는지부터 출발하여 일단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다른 계획을 세운다11)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내 멋대로 산다는 소위 ‘중2병’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독립된 지식인으로써 소신있는 행동을 한 마디로 나타낸 것이 될 수도 있다.

 

옛 선비들의 삶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는가에 따라서, 아니 무엇을 얻었는가에 따라 오늘날 지식인들의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현대의 선비들의 ‘귀적의(貴適意)’는 내 멋대로 사는 것일까 아니면 소신있게 사는 것일까

 

 

* 이 글은 출판사(인간사랑)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1)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강좌 중국사> 1, (지식산업사, 1989), p. 100

2) 이성구, 앞의 글, p. 101

3) 쑨리췬[孫立群], <중국 고대선비들의 생활사>, 이기홍 옮김, (인간사랑, 2014), p. 13

4) 쑨리췬, 앞의 책, p. 14

5) 쑨리췬, 앞의 책, p. 99

6) 何柄棣, <중국과거제도의 사회사적 연구>, 조영록 외 옮김, (동국대, 1988), p. 48

7) 자크 제르네, <전통중국인의 일상생활>, 김영제 옮김, (신서원, 1995), pp. 131~132

8) 쑨리췬, 앞의 책, p. 323

9) 쑨리췬, 앞의 책, p. 340

10) 쑨리췬, 앞의 책, p. 348

11) 쑨리췬, 앞의 책, p. 36

w******f 2014.09.05. 신고 공감 4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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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의 모델, 현재 지식인의 갈길을 일러주는 중국 선비-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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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의 표지 속 고대 중국 선비를 보면서 참 여유롭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상하의가 붙은 심의를 입고, 수염이 길고 두건으로 머리를 맨 모습에서 고대 선비들의 복장을 알 수 있었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에서 선비들이 여흥을 어떻게 즐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고대에서부터 있었을 정도로, 선비가 그렇게 오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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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의 표지 속 고대 중국 선비를 보면서 참 여유롭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상하의가 붙은 심의를 입고, 수염이 길고 두건으로 머리를 맨 모습에서 고대 선비들의 복장을 알 수 있었고 거문고를 타고 있는 모습에서 선비들이 여흥을 어떻게 즐겼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고대에서부터 있었을 정도로, 선비가 그렇게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나? 그렇지 않아도 선비하면 공자왈 맹자왈 찾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윤리를 고집한다는 선입관이 없지 않았는데. 고대라니 그 존재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선비의 존재가 오래됐고, 그만큼 그들의 의식이나 생활방식은 중국의 지적풍토에는 물론이고 동양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 선비들은 역사에 대한 사명감과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갖고 있어서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의가 대단히 뜨거웠다. 문제는 이 참여가 관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선비의 숫자에 비해 진출할 수 있는 관직이 극히 적어서 이 선비 대부분은 요즘으로 치면 백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표지 속 선비들처럼 여유롭게 거문고나 음률을 즐기면서, 자신들의 열정을 다스리며 살아야 했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책 속에 이백, 두보, 소순 , 도연명, 백거이 등등 우리가 그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문장가들이 쭉 등장하다 보니,'선비'라기보다는 시인, 서예가, 문장가 등 당대의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비는 독립된 계급이 아니었다. 관리와 민간인 사이에서 위 아래로 다 통할 수 있었던 존재였다. 선비계층이 성립됐던 시기는 전국시대였다. 그야말로 사회가 요동치고, 정치 투쟁이 복잡했던 시대였으니, 선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선비들의 목적은 과거 급제를 통한 관직 진출이었다. 관직에 진출하려니 과거를 거쳐야 하고, 과거를 통해 등용되자면 유교 경전을 기본으로  한 독서와 학습은 평생 놓을 수 없는 과제였다. 선비와 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문화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를 시와 그림, 음악, 바둑으로 발산하고 채워가는 동시에 이런 활동은 선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고 취미가 됐던 것이다. 직업적으로 예술가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이다보니 의도하지 않게 선비들이 예술가의 역할을 담당했고 문화적 향수자와 생산자를 겸비하게 됐던 것이다.

 

이 책에서 선비로 언급된 인물들 다수가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라는 점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과거에 급제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으니 관료로 등용되기도 그만큼 어려웠던 시대였다. 대다수  선비들은 사회 참여의 기회가 봉쇄될 수 밖에 없었고, 별다른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선비에게는 독서와 거문고, 그림, 서화 등은 문화적, 정서적 욕구를 달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중국의 그 오랜 역사, 시대를 개괄해서 선비라는 존재를  통시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여간 방대한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선비의 생활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동양의 고대문화의 흐름을 살펴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거론되는 면면들이 워낙 당대의 문인이나 그림과 서예에 조예가 뛰어나고 걸작을 남긴 인물들이  많았다. 또 당대의 학문과 문화의 흐름을 주도해나간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선비는 조선시대 선비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그들이 남긴 정신적, 학문적 문화적 유산들은 높은 수준을 과시하고, 지금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또 여러 왕조와 시대를 거치는 동안 유학을 바탕으로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선비 정신의 기본은 변함이 없다.  이런 점은 현실에 참여하고 사회적 비판과 발언을 아끼지 않는 현대의 지식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선비의 존재에서 지식인의 역할이나 관료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충분히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경제활동과 분리돼 있었던 즉 노동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들의 생활 방식 등 선비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냉철한 비판 또한 병행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문화 전체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특히나 과학에 대한 경시나 부정부패가 심한 관료들의 행태는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는 유교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정보화가 빠르게 진행되는가하면 과학의 발달도 눈부시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사회는 다변화되고 있다.이러한 시대와 사회에 선비문화와 선비정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지, 미래지향적으로 성찰해 볼 일이다.

e****0 2014.09.13. 신고 공감 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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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 쑨리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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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인간사랑의 서평 이벤트 지원으로 읽은 책입니다. >   '선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투를 튼 머리에 갓과 새하얀 도포 차림의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 항상 글을 읽고, 기품있는 행동과 꼿꼿한 성격을 가진 존재가 '선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떠오르는 선비의 이미지와 달리 우리는 선비의 구체적인 이미지나 개념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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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인간사랑의 서평 이벤트 지원으로 읽은 책입니다. >

 

'선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상투를 튼 머리에 갓과 새하얀 도포 차림의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거기에 항상 글을 읽고, 기품있는 행동과 꼿꼿한 성격을 가진 존재가 '선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떠오르는 선비의 이미지와 달리 우리는 선비의 구체적인 이미지나 개념에 대해서는 쉽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는 우리에게 선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전해주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선비라는 계층은 중국의 유학의 대두로 인하여 생겨난 계층이기에 비록 한국의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보다 먼저 선비라는 계층이 등장한 중국의 모습을 통하여 과거의 선비라는 계층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도 선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이 든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의 책 표지부터 눈길을 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비(상투에 갓을 쓰고, 새하얀 도포를 두른듯한 모습)와는 달리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상태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마치 그 곡조에 맞춰서 자연을 벗삼아 노래를 부르는 두 인물의 모습은 우리의 선비와의 모습은 사뭇 다른 인상을 전하는 듯 하다. 총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바로 중국의 선비들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데, 8장까지에는 선비의 개념은 물론이고, 의식주를 모두 아우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마지막장에는 실제 이 책의 제목인 중국 고대 선비라 할 수 있는 위진 시대의 선비들의 특징을 따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차례를 살펴보게 되면 자연스레 이 책은 중국의 선비들의 모든 것을 담은 백과사전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중국에서 선비의 역사는 주나라를 기점으로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시대별 선비들의 지향점을 설명을 하고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지향점은 바로 입신양명임을 설명을 하고 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단어에서 중국의 선비들은 특히 치국(治國)이 그들이 선비로서 해야할 본분임을 생각하며 시대별로 그러한 지향점에 따라서 선비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선비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어떠한 교육을 받고, 독서의 방법은 어떠했는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중국의 과거제는 수나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도입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주로 발탁이나 유세를 통하여 벼슬자리를 얻는 선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춘추시대의 그 유명한 공자와 같이 각 국을 떠돌면서 유세와 가르침을 전달하면서 벼슬을 얻는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로 설명이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벼슬을 통한 치국(治國)을 이루는 것이 선비의 목표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모습을 다양한 인물들의 사례를 통하여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전달을 하고자 한다. 그 유명한 당나라의 시인인 두보의 사례는 그렇게 노력을 하였건만 과거에는 쉽게 통과하지 못하여 노년까지 범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선비들에게 벼슬은 특권층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에 그들이 평생의 목표를 과거로 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전달하고 있으며, 이러한 풍토는 평생 합격할 때까지 과거 시험을 치루는 선비들의 모습에서 쉽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당시로서도 장수라 할 수 있는 90세 이상의 노인이 과거 시험을 치루러 왔다는 소식에 놀라서 황제가 친히 합격을 시키는 사례라든지 30년 이상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사례 등이 다수 설명되면서 선비와 과거의 관계가 불가분의 그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비가 열심히 글을 읽어서 장원에 급제하는 모습을 TV나 영화를 통하여 보던 우리에게 실제 과거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과거가 선비들의 목표가 되었다면 자연스레 선비와 독서의 관계도 역시 떼어낼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중국의 선비들의 책에 대한 사랑을 많은 사례를 통하여 설명을 한다. 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성어인 형설지공(螢雪之功)은 갖은 고생 속에서 공부를 이루는 뜻이지만, 실제 그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선비들의 독서에 대한 열의를 설명을 한다. 여기에 책에 대한 선비들의 사랑도 등장하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존재였기 때문에 응당 선비라면 책에 대한 욕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유한 집안의 출신인 선비들은 책을 구입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렇게 모은 책들을 자자손손 물려주면서 가보로 남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책이라는 매개채를 통하여 다른 선비들과의 만남을 가진다든지 역으로 소중히 모은 책들을 오직 가족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욕심 등 선비와 책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선비들의 학문과 책, 과거제를 설명하면서 그 부정적인 폐해도 소개를 한다. 앞서 선비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수단이었기에 그들이 얼마나 과거에 목을 메는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그 기쁨을 노래한 시라든지 낙방한 사람의 슬픔과 회한을 담은 시가 이 책에서 자주 등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제가 오히려 선비들의 사상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명청 시대의 팔고문(八股文)이 있었는데, 이 특수한 문체는 '사서'와 '오경'의 내용을 가져와 제목을 정하고 주석은 반드시 성리학을 따라야 하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즉, 이 문체는 고대 성현들의 사상과 말투를 그대로 문자로 늘어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적인 배경이라든지 쓰는 사람의 사상이 일체 반영이 안된다는 특징이 있었다. 팔고문이 과거 시험에 등장하면서 결국 과거 시험은 고대 성현들의 서적을 그대로 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치국(治國)의 길을 걷는 선비들의 모습에 더하여 이 책은 그들의 의식주와 취미 생활도 자세히 언급한다. 당시의 생활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러한 부분들은 특히 우리가 생각하던 선비들의 생활상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을 한다. 심지어 기생으로 알고 있는 청루의 여자와 선비와의 관계도 묘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절제된 모습의 선비를 떠올리지만 술(酒)에 대해서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술에 취하여 물에 비췬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이백이라는 유명한 시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선비들은 술을 금기시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오히려 취기에 오른 상태에서 지은 그들의 시를 보여주면서 술문화를 즐겼음을 보여준다. 또한 청루의 여자와 교제를 하면서 시, 서, 화를 공유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선비의 모습과는 달라보인다.

 책의 마지막에서 소개하는 위진 시대의 선비들의 삶도 흥미를 갖게 한다. 앞서 과거를 목표로 삼던 선비들의 모습과는 달리 오히려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알려진 선비들은 부패한 정치권력에 눈을 돌려 죽림에서 거문고와 술을 즐기면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대적인 배경 자체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러한 그들의 삶은 당시의 정권의 부패에 항거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책은 '선비'라는 소재에 대하여 세밀하게 설명이 된 책으로서 정말 '선비'에 대한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쑨리췬)와 소재가 우리가 아닌 중국이긴 하지만, 우리의 선비라는 계층은 분명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의 등장은 왜 우리는 우리의 선비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한 책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순히 '선비'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찬 책이었다면 지루했을지도 모를 이 책은 해당 사례별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등장하여 딱딱한 느낌없이 무난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두툼한 만큼 '선비'에 대한 모든 내용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가 된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사견이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관심을 가져볼 책이라 생각된다.

g*******7 2014.09.1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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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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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선비들이라 하면 책을 읽고 정사를 논하기도 하고 절대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는 사람(?) 아니면 양반(?)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고대 선비들의 출세부터 먹는 음식, 술 그리고 행동등이 상세히 나와있다.   '선비는 강직하고 의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책임이 무겁고 가야 할 길도 멀고 아득하다' '논어'의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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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선비들이라 하면 책을 읽고 정사를 논하기도 하고

절대권력 앞에서 굽히지 않는 사람(?) 아니면

양반(?)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고대 선비들의

출세부터 먹는 음식, 술 그리고 행동등이 상세히

나와있다.

 

'선비는 강직하고 의연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책임이 무겁고

가야 할 길도 멀고 아득하다'

'논어'의 태백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선비라고 해서 태연하게 풍류를 즐기고

책만 읽는게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 선비들의 벼슬은 그야말로 전쟁터라 할 수 있다.

맹자의 '등문공하'에서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마치 농부가 농사 짓는 것과 같다'

'선비가 지위를 잃는 것 제후가 나라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나와있다.

그 정도로 가난한 선비들은 주위에 무시와 멸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더더욱 벼슬길을 올라야 했다.

 

우리나라 선비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가난과 청빈으로 삼았지만 음식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것 같다.

양반이라면 부엌을 드나드는건 상상조차 못했으니깐 말이다.

그치만 중국 고대 선비들은 맛과 맛나게 조리하는 방법까지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 '논어'에 食자가 41회나 나오고 공자는

'밥은 깨끗하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회는 가늘게 썬 것은 아니면

들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술을 빼놓을 수 없는게 선비들의 일상이 아닐까 싶다.

'근심을 어떻게 풀 것인가, 오직 술 뿐이네'

'소창유기'에서 '술은 신나게 마실 수 없나니, 신나게 마시면

몹시 취하고, 몹시 취하면 정신이 혼미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중국은 차 문화가 잘 발달된 나라이다.

중국고대 선비들은 차 마시는 예법이며 차의 색과 모양, 맛을 굉장히

중요시하였다고 이 책에서 소개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고대 선비들의 모든 생활사

즉, 겉으로만 보이는게 아니라 그 선비들이 행하였던

모든것들이 세세히 마치 우리가 한 역사책을 보듯이

나와있다.

마치 한 선비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때까지의

모든 고뇌와 기쁨 그리고 정치에 대한 갈망등

두껍다고 느껴진 책이 어느덧 뒷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중국을 제대로 알고자 하면 이 책부터 권하고 싶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를 엿보면 현대의 중국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우리나라 옛 선비들과의 생활사도 어떤 영향이 미쳤는지

역사적 비교가 할 수 있으니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y*****9 2014.09.1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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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은 어떻게 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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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정의에 따르면,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지칭함'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살아야 할 바른 길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에도 절제를 잃은 욕망이 현재의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오늘의 지식인이 가야 할 길이 바로 올곧은 선비들이 이미 걸었던 그 길이 아닐까?     선비士는 고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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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정의에 따르면,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지칭함'이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살아야 할 바른 길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에도 절제를 잃은 욕망이 현재의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오늘의 지식인이 가야 할 길이 바로 올곧은 선비들이 이미 걸었던 그 길이 아닐까?

 

 

선비士는 고대 중국의 지식인에 대한 일종의 호칭으로 '유생儒生' 또는 '문인文人'이라고도 했다. <시경詩經>에서는 '젊은 남자'만을 지칭했고, 상商과 주周 시대에는 주로 '무사武士'를 가리켰다. 또 <상서尙書>에 의하면, 귀족 등급 중 가장 말단에 위치했다. 선비는 또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들은 춘추 전국 시대에 활약하던 선비 계층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엇다. 이들이 가진 지식은 이론적 뒷받침도 없었고 이를 사회에서 교환할 만한 정도에 이르지도 못했다. 분봉제分封制와 엄격한 등급 제도에 의해 생겨난 선비는 아직 신분이 자유롭지 못하고, 지식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주성도 모자랐다.

 

춘추 전국 시대의 격렬한 사회 변화로 이후 선비는 등급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정치, 사상, 문화 방면에서 매우 활기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사회가 지능과 지식에 대한 욕구가 급격히 많아졌고, 이에 그들은 독립된 지식 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임금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은 물론 권세 앞에서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정치적인 주장을 자유롭게 펼쳤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음양가, 병가 등 수많은 유파가 등장해 서로 상대방의 의견에 공격을 퍼붇고 새로운 이론을 세우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상태를 만들어냈다. 중국의 사상과 문화는 절정을 향해 발전해 나아갔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뒤, 선비들의 형편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황제의 권한은 사회의 모든 것을 압도했고, 모든 것을 지배했다. 대표적인 조치가 바로 진시황의 '분서갱유분書坑儒'이다. 이후에도 있었다. 한무제漢武帝의 '독존유술獨尊儒術'과 수당隋唐 이후의 과거제도가 그것이다.

 

중국 고대 선비의 구성은 복잡하다. 직업도 다양했다. 이에 그들의 생활수준과 방식도 서로 달랐다. 또한 그 인품과 덕성, 그리고 성격도 제각각 다르다. 선비 중엔 국가를 사랑하고 정의로운 군자도 있고, 사상이 심오한 지자智者도 있으며, 멋을 알고 무척이나 감상적인 재주꾼도 있었다. 당연히 영혼을 팔고 인격을 상실한 변절자도 있었다.

 

 

 

정의를 가르치며 살기를 도모하지 않고 자기의 이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논어>, 위령공衛靈公

 

 

모두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첫 번째 장은 책 전체의내용을 간략하게 추려서 서술한 꼭지이다.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자유와 아울러 문화적인 품위를 자못 높이 보았던 중국 선비들의 자세한 생활 모습을 알려면 이 장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펼쳐질 내용까지 살펴 봐야 한다.

 

저자 쑨리췬은 중국 텐진天津 출신의 역사학자로서 난카이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중국고대사'와 '위진남북조사'를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고대사>, <사기선史記選>, <중국 봉건왕조 흥망사>, <신편 중국역조기사본말> 등이 있다. 또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의 <여불위呂不韋>, <이사李斯>, <범려>, <한비자韓非子> 등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대 선비들은 천하의 일을 자신의 맡은 바 소임으로 여겼기에 강렬한 참여의식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상과 포부를 실현코자 자신의 지식수준을 끊임없이 높여야만 했다. 그래서 고대 선비들은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독서를 행했다. 이는 부단한 노력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음을 후세인들에게 보여준 셈이다.

 

'귀적의貴適意'란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신의 간절한 뜻에 맞는지부터 출발하여 뜻에 맞지 않으면 주저하지 않고 다른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생활은 위진 시대에 유행했다. 이 생활관의 특징은 유가에서 추구하는 출세에 대한 욕구가 개인적 욕구인 자족自足으로 넘어갔다.

 

수많은 선비들이 생활에서 멋을 중시하고, 품위를 염두에 두고 각자의 생활에 개성과 다양성을 곁들였다. 그들은 술을 좋아해 술로 감정을 조절하고 기분을 풀면서 근심 걱정까지 해결했다. 술을 마신 뒤 시를 읊고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으니, 이것이 바로 선비 생활의 큰 즐거움이자 멋이었던 것이다.

 

난득호도難得糊塗, 정판교의 글씨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노는 것은 조국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며 심신을 수련하고 정서를 가다듬을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이 쓴 여행기와 자연을 읊은 수많은 시를 통해 고대에서 현대까지 계속 이어진다. 금기서화琴棋書畵, 이 네가지는 고대 선비들의 생활에 운치와 고상함을 가미했다.

 

또 선비들의 생활에서 청루靑樓 여자들과의 교제를 빼놓을 수 없다. 청루 여자란 기생을 말한다. 이는 창녀와는 다른 말이다. 당시의 기생들은 자색이 뛰어나고 재능과 기예를 갖춘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교제는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일이었다.

 

 

 팔대산인八大山人(1624~1703년)의 <방예운림산수>

 

 

두 번째 장은 책을 가까이 한 선비들의 독서 생활을 보여준다.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유가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벼슬길로 나서려는 선비들은 나라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려면 독서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공리적인 목적 외에도 독서는 자기를 바로 세우며 인격을 갈고닦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었으므로 옛 선비들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책을 읽고 베꼈으며 책을 갈무리하기에 온 정성을 쏟았다.

 

한대漢代의 대학자 동중서는 꽃피고 새 지저귀는 농원을 십 년 동안이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의 대문학가 한유도 그의 손에서 책이 떠날 때가 평생 한 번도 없었는데,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곱 살 때부터 책읽기를 시작해 책을 베개 삼고 밥을 먹을 때도 책읽기 일쑤였다.

 

문전옥답 한 마지기 땅 다 팔아서

창 아래 책상 가득 책을 쌓으리

  - 두순학, <서재즉사시書齋卽事詩> 중에서

 

선비들은 평생 책을 벗 삼았다. 책은 이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감정을 순화하고 영혼을 맑게 했으며, 마음을 의탁하는 가장 멋진 정신적 즐거움이었다. 갖가지 독서 환경 중에서 선비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야독夜讀이었다. 특히, 눈 내리는 밤에 문 걸어 잠그고 금서禁書를 읽는 것은 옛 선비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진시황이 민간인의 장서를 금하고 압수한 책을 모두 불태웠지만 책을 목숨처럼 아낀 선비들은 이 폭정에도 굴하지 않고 별의별 방법으로 책을 보존했다. 공자의 9세손 공부는 한 더미나 되는 책을 방안의 벽 속에 감추었다. 이 책은 한무제 때 공자의 옛집을 허물고 새로 증축할 때 발견되었다.

 

인쇄술 발달 이전에는 도서의 유통 방식이 주로 베끼기에 의존했다. 책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은 모두 베끼기의 경험이 있었다. 또 타인에게 빌려서 읽기도 했는데, 책장을 넘길 때에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을 다했다. 해마다 날을 잡아 햇볕에 책 말리기를 하여 습기를 막고 책벌레를 박멸했다.

 

책을 읽고, 갈무리하고, 베끼고, 글을 쓰는 일은 고대 선비들의 생활에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선비와 책의 관계는 사람과 공기, 사람과 햇볕과도 같아서 분리되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중국의 문화가 끊임없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선비들의 이런 정신과 노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세 번째 장은 선비와 벼슬길을 다룬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기록된 '당등과기총목唐登科記總目'의 통계에 의하면, 당나라 고조 무덕 원년(622년) 최초로 장원에 오른 손복孫伏부터청나라 광서 30년(1904년) 마지막으로 장원에 오른 유춘림劉春霖까지 무려1,300년 가까운 동안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는 모두 504명에 불과했다.

 

선비들은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과거라는 관문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몇 년에 걸친 학업의 고통이 달콤한 맛으로 다가올지는 과거 급제 한 판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과거장에 참석한 응시자는 현장에서의 갖가지 고통도 참아내야만 했다. 당나라 때의 선비들은 대개 새벽 6시 전후에 과거장에 입장해 오후 6시 전후에 시험지를 제출할 때까지 그야말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룬다.

 

"한밤에 일어나 앉아 밥을 싸고 떡을 챙긴 뒤 동화문東華門 밖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무리를 따라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아 시험지 앞에 놓고 모든 생각을 집중하니 마음도 떨리고 몸도 오싹하였소"

 

이는 송대宋代의 문학가 소순蘇洵은 세 차례나 진사를 뽑는 과거에 낙방하고 맥이 빠져 마음이 통하는 친구 매요신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글이다. 시험 때문에 겪었던 고통스런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예부에서 시행하는 시험은 일반적으로 2월에 진행하므로 날씨가 쌀쌀하고 심지어 눈발이 휘날릴 때도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선비와 낙방하여 실의에 빠진 선비들의 희비를 만날 수 있다. 민간에선 과거에 합격해 벼슬에 오르는 것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말했다. 이는 황하에 사는 수많은 잉어 중에서 굳센 녀석만이 용문에 뛰어올라 자랑스런 용이 될 수 있다는 민간설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당唐의 수도 장안으로 해마다 과거 응시자 이삼천 명이 모여들지만 진사로 급제하는 이는 불과 일이십 명이었다. 벼슬의 자리수가 뻔하니 무턱대고 많이 뽑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평생 과거에 매달린 사례가 많았다. 일흔이 넘은 조송曹松이 과거에 참가하자 그 나이를 보아 특별 합격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다 보니 고대 선비들은 벼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공부뿐만 아니라 로비 활동을 할 줄 알아야 했다. 권력을 쥔 관료에게 청탁하는 풍속이 성행했다. 답안지에 응시자의 이름을 가리지 않고 채점하기 때문에 사전 로비를 통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험 전에 고위직 벼슬아치를 찾아 다니며 인사하고, 글을 올리고, 선물을 바치는 등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권력자를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에 이렇게 해서 벼슬길에 오른 선비는 극소수였다.

 

낙방한 선비들의 선택도 눈여겨 볼만하다. 당나라 때는 해마다 봄에 합격자를 발표했다. 낙방자는 아픈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에 굴하지 않고 재도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낙향하지 않고 장안에 그냥 머물며 구차하게 살면서 공부를 계속한 이들도 있었다.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의 선발이 순기능도 분명 있었지만, 너무나도 힘들게 통과하고 얻는 자리라서 백성의 재물을 탐하는 벼슬아치와 변변치 못한 관리를 양산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법, 외무, 행정 등 고시를 통한 벼슬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시험 한 번 잘 친다고 그 사람의 능력을 모두 판단할 수 있겠는가?

 

 

네 번째 장은 선비의 의衣와 식食을 다루었다. 복식과 음식은 시대적 특징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성격적인 특성까지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했던 중국 선비들의 모습은 선비들의 주거와 행동을 다룬 다섯 번째 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이 추구했던 정신적인 이상이 한국 선비들의 이상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여섯 번째 장에서 선비의 회합과 결사에 대한 내용을 만난다. 물질이 주는 즐거움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던 선비들의 오랜 전통은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생활을 한껏 풍요롭게 만들었다.

 

'친구가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 <논어>, 학이편學而篇 

 

공자의 사상은 중국 고대선비들의 생활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비들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염려하는 사회적 책임감과 사회에 참여하려는 강렬한 의식뿐만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와의 거짓없는 참된 정을 나누고 싶어 했다. 이런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들은 시문詩文 쓰기 외에 회합과 결사를 즐겼던 것이다.

 

동진東晉 이후, 선비들은 새로운 결사結社를 왕성하게 일으켰다. 천바오량陳寶良은 <중국의 사社와 회會>(1996년)에서 '사社'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따라서 선비들이 만든 결사라면 이는 생각이 같고 서로 지향하는 바가 같음을 통해 맺어진 문화 활동 단체를 가리킨다.

 

1. 땅을 맡아 다스리는 신

2. 고대 향촌의 바탕이 되는 행정 단위

3. 민간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날 거행하는 갖가지 축제

4. 생각이 같고 지향이 서로 통하는 이들이 맺은 단체

5. 직업에 따른 단체

 

시 동호회의 결성은 선비들 모임의 주요한 형식이 되었다. 그밖에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한가로이 지낼 경우 서로 교유하기 위해 결성하는 갖가지 단체도 있었다.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는 845년 '구로회九老會'를 세웠는데, 여기엔 일흔 살 이상의 노인이 아홉 명이었다. 음식을 즐기기 위해, 피서를 위해, 꽃놀이를 위해 등등, 비정치적인 모임을 통해 교류했다.

 

 

 

 

'선비와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소양은 선비가 선비일 수 있는 바탕이기에 옛 선비들은금기서화를 연마했으며 이를 통하여 심신을 수련했다. 일곱 번째 장에선 '선비와 금기서화'에 얽힌 갖가지 일화를 통하여 중국 문화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난득호도難得糊塗"

총명함을 얻기란 어렵다, 어리숙해 보이는 것은 더 어렵다.

 

 거문고를 타고 아름다운 곳을 감상하는 것은 위진 시대 선비들의 삶의 일부였다. 거문고는 기분을 전환시키는 작용을 하기에 음악을 잘 모르는 도연명'줄도 없는 거문고 곁에 두고, 한 잔 술 함께하는 벗을 만나면, 거문고 어루만지며 뜻을 나누었다'라고 <송서宋書>의 '도연명전'에서 전하고 있다.

 

 

중국 고대 선비들 중 대나무 그리기를 몹시 좋아한 사람이 정판교다. 직업적인 문인화가였던 양주팔괴揚州八怪 중 한 명인 그는 강희와 건륭 연간(1693~1765년)에 살았는데, 살면서 언제나 대나무를 떠나지 않았고, 강남 사람들이 잉어에 곁들여 먹는다는 싱싱한 죽순을 먹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는 살고 있는 집에 대나무를 심었고, 대나무의 굳센 품격을 훌륭하게 여겨 이를 즐겨 그렸던 것이다. 

 

 

펄펄 날리는 버들솜 벌써 아름다운 봄날을 데려갔는데,

해당화는 이리도 늦게 온 나를 미워하는구나.

- 구양수歐陽修

 

이는 <송비류초宋裨類초>에 실린 글이다. 북송의 유명한 문학가 구양수는 기녀妓女와 교류가 있었다. 그가 여음汝陰에서 조용히 살고 있을 때, 영리하고 재주있는 기녀가 둘 있었다. 이들은 그가 지은 시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는 그녀들을 좋아해서 어느 날 잔치를 베푼 자리에서 언젠가 여음으로 다시 올 때 태수가 되어 오겠다고 약속했다.

 

몇 년 뒤, 구양수는 여음으로 태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그 기녀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이틑날, 그는 동료들과 호숫가 힐방정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시 한 수를 남겼던 것이다. 여덟 번째 장은 '선비와 청루의 여자'를 다룬다. 문화적 소양이 높아서 금기서화에도 능했던 기녀와 선비 사이에 오간 사랑과 이별은 지금도 가슴을 울린다.

 

 

마지막 장은 중국 고대 선비들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위진 시대 선비의 생활'을 다루었다. 위진 시대 선비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태도와 생활 방식을 갖고 있었다. 니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정신적인 풍모는 중국 고대 선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한나라 말기부터 계속된 변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당시 선비들은 '인생이 이렇게 짧은가'라고 느꼈다. 또 생활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한나라 말기 이후 사회적인 경향이었다. '강동보병江東步兵'으로 불리었던 장한張翰과 관련된 이야기가 <세설신어>, '식감'에 실려있다.

 

 순채국

 

진晉나라 혜제惠帝 때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 집정하자 대사마동조연大司馬東曹掾에 임명된 장한은 수도인 낙양에서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자 고향땅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먹고 싶었다. 당시 낙양은 매우 혼란스런 모습이었다. 그는 조만간 사마경이 실권할 것을 예감하고 '순갱로회蓴羹로膾'를 핑계삼아 고향으로 떠났기에 '팔왕의 난'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다. 가을바람이 불면 우리가 '전어'를 떠올리듯, 장한은 '순채국과 농어회'를 찾았던 셈이다.

 

이처럼 당시의 선비들은 '제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이라는 생활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장한 역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삶의 머리로 삼아야 할진대, 내 어찌 고향을 멀리 떠나 천 리 밖에서 벼슬하며 명성과 감투를 탐하랴!'라고 말하면서 수레에 올라 고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속에 구속됨이 없이 드러내는 대담한 개성

생명 의식의 각성

약을 먹고 술을 흠뻑 마시는 풍조

남이 뭐라던 자기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생활 태도

 

벼슬살이가 유가에 인생철학의 바탕을 둔 것이라면, 은거하는 삶은 바로 도가에 그 뿌리를 둔다. 당시의 선비들은 속세의 굴레를 벗어나 자연에 묻혀 은거하며 자연적인 인격을 실현코자 했다. 세상을 피해 은둔하려는 풍조가 매우 성행했으며 선비들의 품격, 사회생활, 문학과 미학, 예술 등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죽림칠현도

 

죽림칠현竹林七賢, 정치권력을 떠나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벗 삼아 청담을 주고받으며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이 은거하는 삶을 살앗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완적, 혜강, 산도, 상수, 유령, 완함, 왕융이 그들인데 이들의 근본사상은 바로 노장老莊사상이었다.

 

 

2013년, 영주선비문화축제 중에서

 

 

역사 속 인물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천 년 전 인물도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우리 앞에 생생한 모습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옛적 선비들의 생활과 태도를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올바르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소백산 아래 작은 마을 경북 영주에서는 해마다 '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10/23~26,4일간). 선비들의 정신과 문화를 느껴봄이 어떠하랴. 

5****0 2014.09.21.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쑨리췬/인간사랑] 중국 고대 선비들을 통해 선비정신을 보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쑨리췬/인간사랑] 중국 고대 선비들을 통해 선비정신을 보다~" 내용보기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쑨리췬/인간사랑] 중국 고대 선비들을 통해 선비정신을 보다~     선비라면 예와 문을 두루 사랑하고, 명분과 이념을 강조하며 절제력 있는 옛 지식층을 말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선비정신이라는 말에는 다분히 긍정적인 평가가 들어있다. 중국 고대 선비들과 조선의 선비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학을 국가의 기본으로 하던 조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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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쑨리췬/인간사랑] 중국 고대 선비들을 통해 선비정신을 보다~

 

 

선비라면 예와 문을 두루 사랑하고, 명분과 이념을 강조하며 절제력 있는 옛 지식층을 말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선비정신이라는 말에는 다분히 긍정적인 평가가 들어있다.

중국 고대 선비들과 조선의 선비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학을 국가의 기본으로 하던 조선이었으니까.

 

선비에 대한 호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선비는 어떤 사람들일까. 선비들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를 출판사로부터 선물로 받으면서 많은 궁금증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역사를 좋아하기에 기대 가득해서 펼쳤던 책이다. 역시 기대 이상의 책이었다. 648쪽에 이르는 책 속에 여태 접하지 못했던 중국 선비들의 이야기가 세밀화처럼 자세하고 풍부하게 나와 있었다. 읽으면서 내내 책을 보내주신 분께 감사하며 읽었다.

 

선비()는 어떤 사람들일까.

원래는 귀족 부녀자도 선비라고 함께 칭할 수 있었지만 선진시기에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기도 했다고 한다.

상과 주 시대에는 무장한 병사나 각급 귀족에 대한 통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선비들은 지식과 기능을 두루 갖췄지만 엄격한 신분등급제였기에 실력을 펼칠 수 없었다.

 

치열한 변혁의 시대인 춘추전국 시대에 오면서 국가적으로 지식과 지략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면서 선비는 자유로운 신분, 예우를 받는 신분이 되었다. 선비들은 점차 자신만의 정치적 주장을 펼치면서도 도의를 지키는 지식층으로 인식이 되었다. 각자 개성이 뚜렷했던 선비들은 유가, 묵가, 법가, 음양학, 명가, 병가 등 수많은 유파를 이루면서 서론 논쟁하는 백가쟁명의 시대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선비들은 정치, 경제, 문화, 문학가, 사상가 등 각 분야로 진출하면서 중국의 사상과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도 대부분은 권력이나 물질에 혹하지 않았다. 책이 아주 귀했던 기원전이었는데도 학문과 사상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선비들의 경쟁도 작용했으리라.

 

이후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선비()는 독립된 계급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지식인에 대한 일종의 호칭으로 儒生이나 文人을 일컫게 된다. 선비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문화전파와 사회 활성화에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지식과 정의라는 부분에서는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은 선비의 의미가 유학자이자 문관이고 시인의 품격을 갖춘 지식인 정도라고 항 수 있다.

 

중국 고대 선비의 품격은 어땠을까.

선비들은 역사에 대한 강한 사명감과 우환의식을 지녔기에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했다.

이들의 청렴한 생활, 공정한 법 집행, 깨끗한 관리, 사회에 대한 책임감, 위기에 대처하는 용감한 헌신 등은 사회 질서 유지의 버팀목이 되었다.

 

선비들의 이상형은 각 유파마다 차이가 있다.

유가의 이상적인 인격은 군자나 성인의 경지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가치로 여겼기에 정치적인 인격에 오르는 것이었다. 도가의 이상적인 인격은 자연주의다.

 

선비들에게 있어서 독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독서를 하는 입장에서 가장 끌렸던 부분이다.

선비들의 독서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확장되었고, 지식과 문화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전기가 없었던 시절, 선비들은 어떻게 책을 읽었을까.

옛 이야기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

광형은 벽에 구멍을 뚫어 이웃집의 불빛을 빌어 책을 읽었고, 손강은 가난하여 눈빛에 비추어 독서를 했고, 차윤은 반딧불을 주머니에 모아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니.

소진은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자기 넓적다리를 찔렀고, 손경은 잠을 쫓으려 자기 머리와 들보를 끈으로 연결해 책을 읽었다니, 정말 대단한 독서열이다.

독서의 공리적인 측면, 출세의 도구, 인격 수양의 도구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독서야말로 만 배의 이익을 주는 것이다.(본문 중에서)

 

아침에 땔감을 해주고 남의 책을 빌려보는 정신자세, 책을 베껴서라도 소장하고 싶었던 선비들의 이야기는 책이 풍부한 우리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당대의 대문학가 한유는 그의 손에서 책이 떠난 순간이 평생 한 번도 없었다니. 선비들의 삶에서 독서는 일상의 중요한 일부였다.

책을 읽고, 책을 모으고, 책을 베끼는 삶, 평생을 부지런히 익히고 배웠던 선비들의 이야기 속에서 형설지공과 남아수독 오거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야를 넓혀주고 알아가는 즐거움을 주는 독서에 대한 옛 이야기들이 독서의 소중함을 새삼 깨치게 된다. 책 좋아하는 버릇, 나도 고칠 이유가 없음을 새삼 공감하며 읽은 부분이다.

 

위진 시대 선비들의 삶의 특징에는 특별히 노장사상이 바탕이 되고 있다고 역사책에서 배웠는데. 선비들이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되자,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풍조가 성행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위진 시대는 혼돈의 시대였기에 이 시대의 선비들은 세속에 구애됨이 없이 대범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았고, 자아의식이 강해 삶과 죽음에 대한 각성이 뚜렷했으며, 심지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약을 먹고 술을 흠뻑 마시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피해 살아야 했던 선비들의 안타까움을 볼 수 있었던 시대다.

 

책 속에는 선비들의 과거시험 풍경, 과장의 풍경들, 선비의 수수한 복식, , 고기, 생선, 만두, , , , 채소 등 음식과 관련된 일화들, 주거생활, 자연을 본뜬 개인용 원림, 산천유람의 취미, 선비들의 회합과 결사, 선비와 금기서화, 제 뜻과 제멋에 살고자 했던 독특한 위진 시대 선비들의 생활 등 풍부한 사례들이 즐비하다. 다른 책에서 소소하게 접했던 선비들의 삶이 총정리되는 기분이랄까.

 

선비들의 높은 지식수준, 꾸준한 독서, 나름의 취미생활, 고집스런 주관, 솔직하고 호방한 성격, 멋과 품위를 중시하는 가치관, 개성과 다양성, 문과 예가 함께하며 자연을 즐기는 풍류, 고상함과 운치, 지식과 오락, 음악을 함께 즐기는 금기서화(琴棋書畵), 강렬한 사회참여의식, 사회적인 책임감 등에 대한 일화들을 접한 책이다.

 

사회적 풍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선비들의 삶에는 책과 문화, 높은 정신력, 이상과 가치가 함께 함을 알게 된 책이다. 세속 정치에 참여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는 적극성도 있고, 세속에 초연하기도 했던 선비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선비정신을 다시 정리해보게 된다.

 

 

지식을 생활 속에 녹이고자 했던 옛 선비들, 정치가, 사상가, 문학가, 군사전략가가 되어 자신의 이상을 펼치고자 했던 선비들의 실천력과 과감한 행동력을 접하면서 안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임을 새삼 되새기게 된 책이다.

기대 이상의 내용들이기에 소중하게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a******7 2014.09.24.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