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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마땅히 왔어야 할 게 너무 늦게 찾아왔다는 느낌도 듭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내용으로는 "훈고학→성리학→양명학→고증학"으로 중국의 학문사가 변천했다는 공식, 이게 철칙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물론 뭐 최근의 학문 성과에 의해 그에 반대되는, 혹은 대안이라 할 만한 패러다임이 제시된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앙상한 도그마는 볼 때마다 뭔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라는 명제를 이 책의 주축으로 삼습니다. 이 점이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명대에 양명학이 성행했다고는 하나 황실, 정부 차원에선 여전히 성리학을 국가의 대종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저 명제 자체가 기존 학계의 주류적 입장을 크게 전환한 건 아닙니다. 이 책의 포인트는, 오히려 "고증학"의 외연과 내포를 크게 넓혀 잡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종래 고증학이라 하면, 관(官)에서 민간에 대해, 예컨대 화하의 정통성을 지닌 집단이 아닌 오랑캐의 전횡을 놓고 비판적인 시각이 일어나는 걸 사전에 진압한다든가, 본디가 현실 참여적인 유학의 성격을 그저 "검증"에 영역에 붙들어맨다든가 같은, 뭔가 압력, 탄압의 결과물로 움츠려든 성격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반론을 가하는 것입니다. 즉 고증학은 현실과 타협하고 애써 대의명분을 외면하려 들다 나타난 사생아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면에서 타락한 사회를 개혁하고 민생의 개선을 꾀하는 지식인들의 장한 성과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는 확실히 혁신적인 시각이요 분석입니다. 이 입장이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면 교과서도 아마 다시 쓰여야 할 것입니다.
당파 싸움이란 꼭 보면 외세에 의해 망하기 직전에 널리 성행합니다. 송나라에서도 여진, 몽골에 의해 체제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구법당과 신법당의 싸움이 시스템 전체를 좀먹었습니다. 명 역시 농민 반란이 중원을 휩쓸 지경까지 가는 데에 동림당과 비동림당 세력이 죽도록 싸웠고, 이에 앞서 장거정 같은 대재상이 잠시 전권을 잡았으나 죽고 나서 완전히 매도, 청산되었고 이 와중에서 또다시 비생산적인 당쟁이 조정을 휩쓸었습니다(물론 장거정 자신의 잘못도 큽니다만). 우리 한국에서도 인터넷에서 아무짝에도 못쓰는 소모적인 싸움이 일어나 커뮤니티가 다 망해갈 무렵 등장한 게 "팩트와 의견을 가려서 보자"는 일종의 자각이었습니다. 십 년 전만 해도 "팩트"의 개념 자체가 안 잡혔고, 그저 너도 나도 상부의 지령을 받아 자기 주관, 선입견만 갖고 빡빡 우기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멍청하고 미개한 인간은 그 암흑의 동굴 속에서 헤어나올 줄 모릅니다.
고증학이란 바로 이런 각성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잣대로 검증을 해 본 뒤에 싸워도 싸우자." 고증학을 이렇게 파악한다면 과연 근대 정신의 태동이라 할 만큼 의미가 새로 부여되고, 또 훨씬 전대의 훈고학과도 명확히 스탠스가 차별됩니다. 검증을 통해 "미신을 타파하고 영원한 질서를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밝혀낸 고증학의 새로운 면모인데, 그가 주장하는 고증학은 청대 들어서 발생한 사회적 변혁의 적극적 반영이자 (역으로) 추동력이었다는 거죠. 주목할 만한 견해가 많아 꼭 다들 읽어 보셨으면 하는 멋진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2004년 번역). 예문서원은 유, 불 경전 번역으로 이미 지성파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는 출판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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