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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한 문학가의 어떤 작품에서도 무려 오년동안 얻을 수 없었던 감명이었다. 그걸 고작 일본 하이틴 소설에서 느끼다니. 풀리지 않았던 화두를 남겼던 개인적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인간사를 소재로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게 써나간 이야기 덕분이기도 하리라. 덕택에 냉정하지도 흥분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아주 즐기듯이 작품을 즐기고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고 비로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벼운 깃털을 겨드랑이에 달은 기분이었다.
작가의 눈썰미는 사건의 해결 주체를 당사자인 로사 기간테아가 아니라, 그 후배인 유미와 요시노로 설정한 데에 있다. 두 소녀가 금단의 사랑을 나누는 소설인 “가시나무 숲”의 작가가 그녀들의 산백합회 선배인 로사 기간테아라는 소문이 퍼진다. 그리고 그 작가설의 근거는 1학년인 유미와 요시노가 입학하기 전 바로 일년 동안 로사 기간테아에게 있었던 일이 그 가시나무의 숲과 흡사하다는 이야기. 털털하면서도 호방하고 눈치가 재빠르면서도 이해심이 깊은 로사 기간테아가 그런 일을 겪었다고 ? 초점은 로사 기간테아의 과거로 옮겨간다.
하지만 이번 편의 재미이자 감동은 유미와 요시노의 진범 찾기, 아니 진짜 작가 찾기에 잊지 않다. 그 과정 속에서 밝혀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인공의 예상치 못한 과거의 상처, 그리고 행간이 암시하는 치유와 극복이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단지 한 소녀가 아픈 과거가 있었고 그걸 털어버렸다는 암시 정도면 충분할까? 마침내 유미와 요시노는 가시나무 숲의 출판사를 찾아간다. 새로운 장소엔 늘 새로운 사람이 있다. 문을 두드리려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바로 그 ‘인물’을 만난다는 우연적 설정은 억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티끌은 이어서 밝혀지는 가시나무 숲의 진짜 사연이 주는 여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릴리안 여학원이 맞는 크리스마스는 이번 한번 뿐이 아니리라. 수년 전에도, 수십 년 전에도 소녀들은 올해처럼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았으리라. 크리스마스 이브가 온다. 현재의 그녀는 과거의 자신과 우연히 만난다. 이 날만큼은 따스하게 내리는 눈보다도 새하얀 그녀와 그녀의 상처는 여문다. 더 이상 릴리안 여학원은 단지 온실에서 순수배양한 양갓집 규수를 박스포장하여 출하하는 시스템이 아직 건재한 곳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겉보기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쓰라린 아픔과 흉측한 상처가 다시금 여물고 그런 구원을 원하는 눈동자가 다시금 온화한 평상과 질서로 돌아온다. 가시나무 숲의 진정한 결말을 바라본 유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곳,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 비현실적인 이차원적 평면이 아닌 곳. 이제 릴리안 여학원은 잊혀질 수 없다.
여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로사 기간테아인 사토 세이의 고백이 이어진 ‘새하얀 꽃잎’은 일년 전 그 사건으로 돌아간다. 매사에 삐딱하고 반항적이면서 방황하던 사토 세이가 한 소녀에게 반하는 사연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동성애’라고 낙인찍힌 통념상 ‘금기’이면서 오로지 허구 세계에서만 문화 상품의 상품적 가치를 위해 허용되다시피 한 이야기이다.
신기하게도 거부감이 없다. 문학작품 소비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금기와 통념에 맞게 살아야하는 한국인이자 연애와 성에 대한 보수적 관념을 지녔으며 특히 동성애는 모른 척 하던 나조차 동화되어버린다. 실존 인물의 자서전보다도 생생하게 적힌 사토 세이의 고백과 갈등과 탄식에선 어떤 작위나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수년 전에 알았던 한 사람과도 흡사한 경우라서 그랬을까. 같은 여성에 대한 사랑을 고해성사처럼 풀어놓는 그 사람의 얘기를 이해심 깊은 척 들어주었지만 속으론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경험은 간간히 떠오르는 물음표 같았다.
작가는 흡족하게도 허구를 허구 속의 달콤함 속에 가두지 않는다. 사회적 질서를 향한 계도, 그리고 두 사람 사이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편견은 이 허구 속에서도 살아있다. 사토 세이는 그녀의 사랑과 함께 도피를 꿈꾼다. 하지만 도피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별 - 하지만 주변에는 그녀를 도와줄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사토 세이는 다친 채 일상으로 돌아오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그리고 당시를 냉정히 돌이켜보면서 죽음과 이어졌으리라는 통찰, 그리고 체념. 방황과 격정, 상처와 성장. 모든 것이 소설 가시나무 숲의 흐뭇한 변주.
인간사가 늘 그렇듯 결국 연락 끊긴 그 사람. 그 실연을 겪은 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걸 기억할까. 아니면 대부분이 그렇듯 철없던 촌극으로 치부하고 노년까지 먹고살 계획을 세울까. 혹은 어느 좋은 남자 만나 언제 그런 과거 있었냐는 듯 평범하게 잘 살까. 이런 상상은 복잡한 망상으로 이어지고 현실을 바라보는 지독한 강박이 일종의 환각적인 집착으로 변질된다. 그럴 때마다 난 이 책「마리아님이 보고계셔」3권도 읽어본다. 책장을 덮으며 “모두가 나이를 먹고 변하지만 과거를 잊어버린 건 아냐. 어쩔 수 없으니 묻어둘 뿐이야”라는 흔한 대사라도 그걸 읊을 수 있는 게 작품의 힘이다. 그래서 반했나보다. [인상깊은구절] 그 때 둘이 손을 잡고 도망쳤다 하더라도, 힘없는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의 말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결코 밝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앞에는 죽음의 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머지 않은 미래에 나는 아마도 ***와 함께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녀 또한 막연히 그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살아서 언니의 말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고 미래가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