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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버지니어 울프의 등대로-선구적 페미니스트의 소설
한국에서도 페미니스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버지니어 울프'의 소설과 에세이를 찾기 시작했다. 버지니어 울프는 19세기 후반의 여성 소설가로 뛰어난 작품을 쓴 선구적 페미니스트로 꼽힌다. 남성 작가들이 주도하던 문학계에서 자기만의 기법으로 내적으로 파고드는 작품을 썼다. 소설 <등대로>와 함께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스트 에세이로 잘 알려져 있다. <등대로>의 첫 부분에서 램지 부인과 램지 씨의 사고 방식은 대화를 통해 단적으로 나타난다.
램지 부인은 아들에게 희망적이고 밝은 미래의 전망을 말해주는 반면, 램지 씨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면서 부정적인 결과를 예상한다. 램지 부인은 '등대행'이 확정된 것처럼, 커다란 기쁨을 주는 반면 램지 씨는 자식들의 마음 속에 절망을 심는다. 편협하고 비관적인 사고로 비꼬듯이 말하는 그의 화법은 자식들에게 강렬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다. 램지 씨는 항상 자신이 옳은 말만 한다고 생각하며, 아내를 비웃고 자식들에게는 가차없는 평가를 내린다. 전형적인 가부장인 램지 씨와 낙관적인 램지 부인이 가정을 이끌어나가고 삶을 대하는 방식이고 현대 한국의 가정에서도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인 소설인 <등대로>에는 대표적인 인물이 세 명 등장한다. 앞서 말했던 램지 부인과 램지 씨, 그리고 화가이자 주인공인 '릴리'까지. 램지 부인은 가부장적인 세계가 당연한 세대의 여성이며, 램지 씨는 가부장적인 사고에 도전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남자이다. 릴리는 램지 부인의 다음 세대이며, 가부장적인 가정의 불합리함을 깨닫고 거부감을 갖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를 생각해주고자 하는 주변인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신을 고수한다. 이 구도는 어딘가 익숙하며 공감이 간다. 릴리는 마지막까지 결혼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아마 결혼이라는 것이 여자가 스스로 자아를 찾는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설정한 듯 하다. 만약 릴리 또한 결혼을 했다면 이 소설은 그냥 가정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램지 씨가 가부장 제도를 옹호하는 전형적인 남성이라고 해서, 램지 부인이 그에 순응하는 여인이라고 해서 작가는 그들을 마냥 비난하지 않는다. 램지 부인이 남편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포용하는 마음, 램지 씨가 살아가는 세계 등을 바라보면서 릴리는 여성과 남성 각자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전에 읽었던 페미니스트 소설 <그레이스>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른 관점으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한 쪽의 입장에 서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를 모두 포용하고 함께 보완해 나가면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한 문장씩 곱씹어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잔잔하고도 격렬한 페미니스트 소설이었다. |
| 어머니를 잃는 것이 아이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어머니와 떨어져 살던 12살 때 나의 사진은 초점잃은 얼굴의 깊은 박탈감을 아직도 잘 보여준다. 단지 잠깐 떨어진 것도 그러한데 사별은 얼마나 큰 아픔으로 아이에게 남는가? 이 소설은 버지니아 자신의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프루스트, 조이스, 포크너와 맥이 닿는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고백적 성찰]이다. 작가자신도 밝히듯 이 소설은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고스란히 자신의 아버지를 담아낸 소설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죽고 억압적 아버지 아래서 자라야 했던 그녀가 느낀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양가감정. 그녀에게 아버지란 단지 한 인간으로 그 자신의 완성을 꿈꾸던 학자였다. 한 인간으로 충실히 산다는 것과 부모로서 충실하다는 것은 다르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인생을 걸지 않는다. 아이들은 그들 삶의 가장 단단하고 따뜻한 기반 없이 자라야만 했다. 아버지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그도 삶의 기반인 아내를 잃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 인생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발견할 때까지. 멀리 보이는 등대처럼 무언가 대단한듯 했던 학문과 예술, 자연과 행복은 결국 초라한 삶살이에 지나지 않았다. 프루스트가 말했듯 멀리서 보면 대단해 보이던 사람도 막상 가까이에서 겪으면 일상의 사람이 되고말듯, 의미라는 것, 이상이라는, 예술의 완성에 대한 열망은 찬란한 빛으로 번쩍였으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말한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가노라] 의미란 없고 우리는 혼자일 뿐이고 죽어갈 것이다. [우리는 질풍을 무릅쓰고 달린다. 우리는 침몰할 것이 분명하다] 진력하나 의미란 없고 끝은 소멸이다.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미움도 분노도 이상도 애정도… [램지씨는 상륙했다. 이제는 끝났다…꾸러미는 등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줄 것이야.] 아버지와 두 자녀가 상륙한 등대에는 허름한고 누추한 등대와 등대지기의 초라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 버지니아는 인생이란 것, 예술이란 것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좀더 거센 파도 밑에서 그보다 더 깊은 심연에 가라앉노라] 호주머니에 돌을 채우고 강에 빠져죽은 그녀의 마지막처럼, 오필리아에게서 내려오는 영국인의 水葬에의 동경만이 그녀에게 남았다. [비가 올거야 너희는 등대에 갈 수 없다.]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동경할만한 가치가 과연 우리가 우발적으로 의미를 두는 그것들에 있기나한건가. 왜 평생 그녀는 고통스러워했고, 결국 지쳐 어린시절 충격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정신질환의 굴레를 메고 우울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S 이 독자도 한정되어있는, 난해하기 그지 없는 텍스트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역자와 출판사에게 박수를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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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비교적 짤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를 완벽하게 묘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어머니, 세인트 아이브즈 그리고 나의 유년 시절을 그려 넣을 것이다. 그러고는 내가 늘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들, 즉 삶, 죽음 등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배를 타고 앉아 죽어가는 고등어를 짓이기며 “우리는 모두 외롭게 죽어간다”라고 읊조리고 있는 아버지다. 누구보다도 먼저 여성의 가치에 눈을 떴기에, 버지니아 울프는 괴로웠다. 마치 좌파가 우파보다 덜 행복해하며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고 할까? 부모의 이른 죽음도 그녀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한 요소이겠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있었을 수많은 고뇌는 바로 시대가 허락하지 않은, 자신의 여성성을 긍정해야만 하는 과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고민의 결과이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아마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기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 역시 자신의 어린 시절, 부모가 보여주었던 일뱡항적인 소통, 소외 등을 그대로 그려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린 잘 안다. 문제를 깨닫기 위해서는 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이 우선되어야 함을……. 작품 전면에 부각되었던 램지 부인이 중간에 죽어 버린 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아마도 ‘릴리’라는 이름의 여성인 듯하다. 화가이자 독신녀인 그녀는 램지 가의 식구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선 인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러하듯 그녀 역시 소설 속 시대 상황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자가 그려낸 시대엔 더더욱 결혼이 삶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램지 부인은 그녀에게 결혼할 것을 끊임없이 종용한다. 당대의 시선에서는 결혼을 한 사람만이 완벽한 인격체로서 존중 받을 수 있었기에, 램지 부인의 설득은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것이다. 그렇지만 램지 부인 자신의 결혼생활이 과연 행복한가를 물으면 우린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녀는 무려 여덟 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아이가 많은 게 단순히 결혼 생활을 파탄으로 몰고가는 요소는 물론 아니다. 문제는 부부 간의 냉랭함에 있다. 램지 씨에게 가족은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방해하는 요소와도 같다. 그의 시선으로 볼 때 여자는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무식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 아내가 책을 들고 있어도 과연 그 내용을 이해나 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램지 부인 역시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여성임에도 그녀는 자신이 남편보다 하위에 놓여야만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남편은 마땅히 존경 받아야만 하는 대상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녀의 여성성은 아이를 돌보고 끝이 없는 가사를 하는 쪽으로만 발휘될 뿐이다. 서로가 원하는 게 분명히 존재함에도 그들 사이엔 어떠한 교류도 없다. 말 그대로 함께 있기만 할 뿐인 것이다. 아내의 돌봄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을 존경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아내. 서로를 귀찮아 하면서 서로 딴 세상을 그리는 이 결혼생활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리라! 우리 모두가 외롭게 죽어간다. 저자의 이 말이 본 작품에선 확연히 드러난다.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제 진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한 채 살아간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램지 부부의 삶이 그러하며, 그런 부부를 바라보는 릴리 역시 외롭긴 마찬가지다. 지향하던 장소 ‘등대’로 향하는 그 순간에도 (물론 램지 부인은 이미 죽어버린 후이긴 하지만) 단절된 인물들 간에는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홀로 거니는 데에 익숙해진 인물들이 제 마음을 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듯 서로를 오해하며 지속되어 온 갈등을 풀기 위해 우린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성(性)이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껏 온전한 평행성을 달려온 두 요소 간에 작으나마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다리가 놓인다면, 적어도 자기 안에 고립되어 느껴야 하는 외로움으로부턴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에……. |
| 서른네 살의 노처녀 릴리는 램지 가의 여름 별장에 초대된 사람들 한켠에서 쉽게 완성되지 않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캔버스에는 가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집안의 천사' 램지 부인이 있다. 누구든지 사랑하고 축복하고 싶어하는 그녀는 항상 자신을 희생하고, 타인을 충만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릴리는 부인의 로맨틱한 환상의 베일을 벗겨낸다. 거기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이좋게 공존하지 못하고 오로지 한쪽의 지배만을 강요하는 가부장 제도의 현실이 숨어있다는 것. 울프는 남성들이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소설작법을 거부하고 '의식의 흐름 수법'을 통해 남성적 언어 이전의 자연의 언어를 구현한다. |
| 가는길에 불평 합니다. 빼먹는 문장도 너무 많고 기본적인 등장인물 번역도 틀리게 너무 많아요. 정말 울프 위원회 맞나요? 부끄러운줄 아시고 반성해야겠져? 더군다나 서울대 명예교수라는 타이틀을 걸고 그렇게 잔인하게 문장들 마음대로 삭제해도 되나요? 너무 심하게 번역한것 같아 몇자 적습니다. 아무튼 이 책 번역은 책임감없는 돈벌이로만 보임. 제 돈이 너무 아깝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