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테의 신곡에 대해 들어보지 않은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대서사시를 읽어본 이도 드물 것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실체에 다가가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굳이 단테의 신곡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전'을 두루 망라한 교양인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서울대에서 선정한 '필독서'에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필독서' 목록 200권 중 제가 읽은 것은 극히 일부이며, 앞으로도 읽지 못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평생 '필독서'를 읽지 못한 '낙제생'으로 살아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번 기회에 단테의 신곡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역본은 아닙니다. 다니구치 에리야가 현대의 독자를 위해 작품의 본질을 쉽고 간결하게 엮어 다시 쓴 글입니다. 원본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작품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길은 없으나 묵직한 완역본을 읽을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일러스트레이션입이 압권입니다. 19세기의 천재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그린 이 그림은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실제 이 그림(판화)는 1861년 구스타브 도레가 자비로 출판을 하여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도레라는 이름을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유럽으로 알리게 한 걸작입니다. 텍스트도 텍스트이지만 이 그림만으로도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 있습니다. 신곡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네이버에서 "신곡"을 검색해보면 많은 요약본을 찾을 수 있는데, 저는 그것보다 더 잘 요약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느낌을 표현할 방법도 마땅치 않습니다. 사실 텍스트를 읽으면서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 그리고 단테가 살았던 당시의 이탈리아·유럽의 현실을 뒤섞어 표현한 단테의 상상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단테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받아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저의 취약한 인문학적 지식과 토대로부터 기인한 것일뿐, 섣불리 고전의 무용성을 얘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행히 엮은이가 간간히 써놓은 주석과 구스타브 도레의 일러스트가 있어 신곡의 얼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림을 제외하고 텍스트 분량도 많지 않아 출퇴근길에 오며가며 가볍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지하철에서 누군가 제 옆에서 이 책을 힐끗 보았다면 아마도 만화책을 읽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책에서 일러스트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의 일천한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는 감동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흥미로는 경험이었습니다. 단테와 신곡, 구스타브 도레에 대해 조금이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다들 아시다시피 신곡은 <지옥편><연옥편><천국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옥편>에는 생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 죄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영역,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받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중 지옥의 제삼 영역은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한 자들이 떨어지는' 지옥입니다. 이곳에 떨어진 망자들을 케르베로스라는 괴물이 발톱으로 몸을 갈갈이 찢어발겨 먹습니다. 교훈) 식탐한 자는 현세에서는 비만과 성인병으로 고생하며 죽어서도 지옥에 떨어져 케르베로스의 먹이가 된다. ** '케르베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머리 3개에 뱀꼬리 모양의 개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신곡에는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신화속 인물들은 지옥이나 연옥에서는 보이는데 천국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못찾은 건가요...지옥편>천국편>연옥편>지옥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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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보고자 신곡을 빌렸으나 결국 지옥편부터 천국편에 이르기까지 단테와 사후세계를 동행하게 되었다. 베르길리우스라는 현자와 함께 둘러본 지옥과 연옥 그리고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와의 천국으로의 여행. 읽는 내내 단테가 직접 이러한 환상을 겪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는데, 사람에게 이러한 상상력이 주어졌다면 성경이란 것도 신의 감동에 의해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머리좋은 이야기꾼이 풀어놓은 잘짜여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의심해보게 되었다. (부모님이 아시면 놀랠노자겠지만;) 아무튼, 사후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까지 빠지지않을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람 수도 적고 그만큼 발견된 것들, 생각해놓은 것들이 적어 더욱 폭발적으로 단테는 사후의 일들을 그려낼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미 발명되어야할 것들은 대부분 발명되어진 지금 우리는 지옥에 대해, 천국에 대해 무엇을 더 꿈꿀 수 있을까. 질투에 눈이 먼자들은 눈꺼풀을 바늘로 꿰매고, 세상에서 탐욕이 가득했던 자들은 모래를 먹으며 땅을 긴다. 자살한 사람들은 마른 나무가 되어 가지가 부러지고 줄기가 끊어지는 생생한 고통을 겪으며 오만한 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리를 숙인채 걸어가며 성에 탐닉한 자들은 불에 자신을 끊임없이 태운다. 그리고 천국. 빛이 가득한 그 곳에 가면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던 세상의 일들에 대해 의문이 풀리게 된다. 만약 지옥과 천국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천국에 가야할 이유는 지혜에 있다. 꼬여있던 내마음의 어둠에 지혜의 빛이 비취는 순간 '아-'하는 깨달음과 함께 평온이 찾아온다면 백 번을 죽어도 그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독후감을 하나 쓰는데도 모순이 한가득인데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깔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니 앞으로 교회를 잘나가 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신곡을 읽으면서 당시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공포에 떨었을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지나친 혐오자극은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뭐 개인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시대에는 반감형성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당시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는 장면만 떠오른다. 과연 신이 바라시는 것이 공포에 떨며 자신을 경배하는 인간들일까? 내 수준으로 신을 끌어내려 생각해보자면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신에게 나아와 숭배하는 것. 그것이 진정 신이 바라는 것 아닐까? 물론 이러이러한 것이 있다고 알리는 게 나쁘진 않지만 종교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더군다나 공포를 조성하며 나오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단테가 신곡을 쓰던 당시와 현재의 종교문화를 살펴보면 크게 달라진 점은 없는 듯하다.
나그네여 죄를 씻으라. 죄가 무거울수록 정화의 고행은 힘드니. 나그네여 그대 여기 죄를 씻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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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려고 책을 펼쳤다.그런데 책 속의 삽화가 너무 끔찍해서 도저히 읽을 자신이 없었다.우연찮게 요즘 보르헤스의 글에서 단테의 신곡을 만났다.보르헤스는 단테의 신곡이 미학의 절정이라고 말했다.그래서 나는 끔찍한 그림을 떠올리며 이 책을 과연 읽을 자신이 있을까? 의문시 하면서 이 책에 도전을 했다.311쪽 분량이지만 삽화가 각 페이지마다 있어서 실제 글의 분량은 많지 않다.
단테 알리기에는 1265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소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다행스럽게도 나는 유럽의 역사소설과 팩션을 많이 읽었다.그래서 단테가 생존했을 당시의 이탈리아가 중세와 르네상스의 과도기로 혼란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신곡>은 총 14,233행의 장대한 서사시로,지옥,연옥,천국의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곡>은 단테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베르길리우스(인간의 이성과 철학을 상징)와 베아트리체(신앙과 신학을 상징)의 도움을 받아 지옥,연옥,천국을 여행하며 경험한 내용이다.신곡은 이성과 낭만,현실과 환상,시와 과학을 바탕으로 자신이 권력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쫒겨났던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한 풍자까지 섞어 놓았다. 이 책을 끔찍하게 또는 아름답게 표현한 19세기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인 구스타브 도레는 치밀한 선묘사에 의한 섬세한 하프톤(망판)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했다.14세기의 단테와 19세기 구스타브 도레의 만남으로 이 책은 그 빛을 발한다. < 지옥편>어두운 숲,가슴을 오그라들 듯한 공포,죽음보다 깊고 어두운 세계에 발을 내딛은 단테는 표범,사자,늑대를 만난다.먼저 지옥의 강을 지키는 카론을 만난다.그는 지옥에서 시인들,철학자들을 만난다.정욕에 몸을 맡긴 자들,당시의 이탈리아 현실에서의 비극의 주인공,그리스로마신화의 주인공들도 만난다.각 장마다 삽화가 너무 끔찍하다.지옥에서는 온갖 종류의 죄를 지은 온갖 종류의 인간군상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온갖 종류의 벌을 받고 있다.읽으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은 단테가 살았던 당시의 인물들을 지옥에서 만나는 것이다.단테는 지옥에서 인간 본성에 의문을 품는다.단테는 기독교도가 아닌 무함마드,알리도 지옥에 그려 넣었다.지옥편을 보면 이 세상에 지옥에 가지 않을 인간은 아마도 없을것 같다. <연옥편>연옥에서는 죽기 직전에 죄를 뉘우친 사람들로,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통치자들,오만,자만,태만,질투,미식과 포식,영화와 물질을 탐한 어리석은 자들,그리스 신화나 성서에서 본 인물들이 죄를 씻고 있다.단테 자신이 살던 당시의 현실의 인물들도 연옥에 배치시켰다.로마 교황 아드리아노 5세가 연옥에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연옥편은 요한 묵시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이 세상에서 연옥에 가지 않을 사람 또한 없을 것 같다. <천국편>베르길리우스는 천국에 동행하지 않고 단테 혼자 천국여행을 한다.그는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난다.천국에서 그는 새로운 앎의 세계에 눈을 뜬다.아~역시 고전이구나! 나에게 단테의 <신곡>을 알게 해 준 보르헤스에게 감사한다. 지혜는 빛 사랑은 빛 빛은 모든 것! 있을 수 있는 일을 이룰 수 있는 일을 구해야 할 일을 당신과 함께 나는 사랑 나는 빛 (P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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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단테의 신곡이자, 구스타브 도레의 신곡입니다. 현대 일러스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스타브 도레. 그는 신곡을 읽고 받은 감명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 책에 실린 그림이 자그마치 140 여 편에 이릅니다. 그러니 텍스트를 무시하고 그림만 훑어나가도 신곡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훌륭한 그림들과 신곡을 다니구치 에리야 라는 사람이 엮었습니다. 텍스트는 현대 독자들을 위해 한결 쉽고 간결해졌습니다. 신곡은 단테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사후세계를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지옥과 연옥은 평소 그가 존경해마지않던 로마의 최고 시성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하고, 천국은 생전에 그가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합니다. 지하로 지하로 한없이 내려가는 구조로 설계된 지옥세계엔 생전에 갖가지 죄를 범한 인간들이 죄값에 해당하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상징성을 갖는데, 신화 속의 인물에서부터 단테와 동시대를 살아간 실존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팩트럼을 자랑합니다. 바로 이 인물들과 이들이 갖는 상징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곡’에 ‘현재성’을 부여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묘사하는 단테의 문체는 탁월합니다. 거기다 구스타브 도레의 그림까지 곁들여져 그 생생함은 배가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어떤 면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사실 텍스트를 읽으며 머리속에 그려보는 세계는 독자마다 상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이 워낙 강렬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림에 자신의 이미지를 꿰어맞추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모두 똑같은 「신곡」의 이미지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무신론자의 입장에서는 이 작품의 짙은 종교색이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공교롭게도 「금강경 강의」라는 책과 이 책을 동시에 읽고 있었는데, 솔직히 ‘몰입’ 측면에서는 ‘금강경 강의’가 나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불멸의 고전이 가진 매력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서구에 대한 이해(역사 신화 종교 정서 등)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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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구원을 노래한 불멸의 고전이라는 명제가 붙은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가 스승인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지옥과 연옥을 거친 뒤 천국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며 항용 신에 의지하는 길만이 영원한 영생을 얻는다는, 이것이 내가 간략하게 이 책에서 알아낸 줄거리이다.
이 책은 구스타브 도레의 무시무시하게 묘사된 지옥의 그림 등을 보면 헉, 왠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심정적 압박을 사정없이 가한다. 그리고 14세기 기독교가 위세를 떨치던 무렵, 피렌체에서 쫗겨난 단테가 분노와 삶의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가지고 써내려간 듯 한데 기독교도가 아니어서 그런지 영 와닿지 않는다.
사실 당시 중세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거스를 수 없는 불멸의 정의였을테고 그들에게 내세란 신의 뜻을 따라 살다 구원을 받는 천국으로 오직 이 곳을 향해 가는 길만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 단순한 카테고리가 복잡한 현대를 사는 나같은 무신론자에겐 그리 불멸의 고전처럼 여겨지질 않으니 이를 어쩌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