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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이미 강준만 선생님이 앞권에서 다뤘던 것이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하여(?) 다시 다루셨다. 뭐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다. 리영희 선생님의 말처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기 때문에, 혹은 박노해의 말처럼, 우리나라는 우익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좌익의 무게를 좀 더 강하게 해야 보정이 된다던가.... 지역주의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고, 패거리주의도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패거리 안쪽과 바깥의 그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좌익과 우익의 구분이나 무게중심이 문제가 아니라, 진보가 문제라는 의식과 같은 것일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번 호 역시 저번 호와 같은 관심으로 열심히 읽었다. 개인적으로 나 역시 학문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학생이고, 그런 점에서 인맥과 패거리주의에 상당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예컨데, 이번 호에서 적나라하게 다룬 문학과 지성의 패거리주의나, 학계의 패거리주의와 침묵의 카르텔(얼마나 멋진 비유인가)을 심각하게 읽었다. [인상깊은구절] 박정희와 전두환은 지식인의 생명이라 할 '표현의 자유'를 압살한 독재자였다. 그 생명을 거세당한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이었겠는가. 세상을 등지고 자기의 좁은 영역 안에서 '작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 성완경이 잘 지적한 "인맥의 카르텔과 이에 기생한 서열화된 촘촘한 먹이사슬"이 그렇게 해서 생겨나고 강화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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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굵어지면서 세상에는 밝은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점점 좋지 못한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강준만 교수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의 부조리와 비양심을 더욱 밝히 볼 수가 있다.
통쾌한 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감탄하지만, 인물과 사상 단행본 15권인『패거리 공화국』은 다소 우울하게 읽은 책이다. 어쩌면 성실한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가 패거리주의로 만연되어 있다고 말한다. 패거리주의란 연고나 정실 또는 그 밖의 기준에 의해 형성된 배타적인 집단이 모든 공적 원칙과 명분을 초월하거나 훼손하면서 집단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성향 또는 행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혈연, 학연, 지연의 '강준만식' 표현인 셈이다.
강준만 교수는 이 패거리주의가 한국인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패거리주의 앞에서 진실은 무력하고 패거리의 이익만이 있다고 주장한다. 슬픈 현실이다.
또한 학계라는 곳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배타적인 '패거리주의'가 만연한 동네란다. 이건 학문의 길을 가려는 내게는 대단히 심각하고 열받는 소식이다. 주류에 들기 위해서 패거리에 들어야만 하는가? 그 것이 아니면 비주류의 길을 걸어야 하나? 이미 이렇다할 연고가 없는 나로서는 결단을 할 수밖에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식인 연고주의 비판론을 펴든지, 아니면 두 배, 세 배 노력하여 '후천적' 연고를 만들던지...
패거리주의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변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왜냐 하면, 연고주의는 숙명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또한 연고주의가 갖는 순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순기능에 대해서는 노스캐롤라니아 대학 커뮤니케이션 교수 찰스 콘래드의 주장을 요약해 본다.
그는 기업 조직에서 능력과 실력만으로 승진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를 3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눈만 봐도 상대방의 기분까지 알 수 있는 사람과 일을 할 때 생산성이 높아지는데, 패거리주의는 이러한 편안한 동질성의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 둘재, 조직 내부의 권력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유능한 사람을 승진시키면 내 패거리에 대한 의존도가 약해지고, 결국 나를 추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을 패거리에 소속된 적당한 능력의 소유자를 승진시킴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셋째, 실력 평가는 단순한 업무의 경우를 제외하면, 매우 어렵다. 이러한 경우 '무엇을 아느냐'보다 '누구를 아느냐'의 인간관계가 더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진정 패거리주의가 득실거리는 사회인가? 정답은 그렇다. 이 책은 바로 그 패거리주의를 고발하는 책이다. 강준만 교수는 얘기한다. "연고주의는 그 어떤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회 균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문학과 지성사'의 서울대 일색의 패거리주의, 학계의 패거리주의, 한국 문단의 패거리 주의 등 패거리주의 고발문(?)들을 읽을 때, 과연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왜 강준만 교수는 이러한 패거리주의를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을 얘기하지 않는가라는 답답함도 든다. 이해는 간다. 그도 불가능한 일임을 이미 경험하고 느끼지 않았는가!
그는 결국 '연고주의 옹호론'을 옹호하겠다고 말한다. 연고주의를 대 놓고 옹호하는 것은 연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철저히 패거리에 속해 있는 지식인들처럼 적어도 이중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대한민국의 진실이 담긴 '패거리 공화국 헌장'을 만들면 어떨까하고 농담(?)을 던진다
<이 나라의="" 상층부는="" 고향과="" 출신="" 학교에="" 의해="" 지배된다.="" 중="" 하층부="" 사람들도="" 선거에선="" 고향에="" 따라="" 표를="" 던진다.="" 대학교수들도="" 총장을="" 뽑으라고="" 그러면=""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에="" 따라="" 편이="" 갈린다....="">로 시작하는 '패거리 공화국 헌장'을 상상 해보라. 그렇다. 이렇게 최소한 진실이라도 알리는 편이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겠지만, 확실히 패거리주의를 뿌리뽑을 수 없다는 현실이 다소 서글프기도 하다.
이 책에는 저널리스틱한 에세이스트 고종석의 글과 전방위 논객 진중권의 글이 포함되어 있어, 이들의 호탕한 글솜씨를 맛볼 수가 있다. 이들은 통해 서글픈 현실을 잠시나마 위로해 본다.
그릇된 것을 타파하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왜 잘못된 것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런 후 올바름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자. 이 책을 통해 그릇된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정의에 관한 6가지 이론』이라는 책을 만지작거리며 희망을 가져본다... [인상깊은구절] '문학과 지성', 이러시면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패거리주의와 마피아주의는 문학적이지도 지성적이지도 않다. '문학과 지성' 사람들이 조선일보와 한겨레에서 똑같이 융숭하게 대접받는 것은 그 두 신문 가운데 어느 한 신문이 크게 잘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문학과 지성 사람들도 그렇게 양다리 걸치기를 해도 되는 것인지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적했다시피 권오룡의 글은 그대로 문학과 지성사에 적용되는 명문이므로 그걸 텍스트삼아 두고두고 반성의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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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에게 성역과 금기는 없다. 그의 손에 걸리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린다. 그러나 그가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했다고 보면 그건 오해다. 다소 과격한 말투를 사용하거나 약간 흥분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글에서 그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잘한 부분은 칭찬하고, 못한 부분만 꼬집는다.
이 책 <패거리 공화국="">에서는 그동안 아무도 별로 건드리지 않았던 학계, 특히 인문학, 문학계에 만연한 패거리주의에 대해 집중 공격한다. 문학은 영원한 거라고, 그래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누군가 그 금기에 도전하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거라고 씹는 저 문학 엘리트주의자들에게 가하는 일침은 통쾌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안전한 패거리 문화 속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게 이 땅에서 살기 훨씬 편한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대학원은 그렇게 서로 밀고 끌어주어 세를 형성하는 곳이 아닌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인상깊은구절]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실은 거대한 짝짓기 게임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새 그렇게 컸다. 우리는 주변의 동료를 물리쳐야 할 경쟁자로 생각하도록 교육받았고, 우리가 졸업 후에 나가서 살아야 할 사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사각의 정글이라고 배웠고, 그 아비규환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패거리'라는 이름의 짝짓기 게임을 배웠다. 그리고(놀이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수단이라는 널리 알려진 테제를 취하여 말하자면) 아마도 일찍부터 이런 문화에 익숙하게 만들어 아이들이 커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짝짓기 놀이'를 계발해 가르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화에서는 아이들에게 동료를 친구라 가르치고, 경쟁만이 아니라 동시에 협력을 해야 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가르쳐도 사회가 존속된다. 사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 일단 사회적 협력이 존재해야 경쟁도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의 바탕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패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