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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굉장히 불편하면서 정직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 자신도 어느 정도 ‘굶주림’을 체험한 기분이었다. 단지 배고픔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고, 버려지고 싶지 않고,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
| ...과자가 하나씩 차례로 사라졌다. 아무리 삼켜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먹어도 충분하지가 못했다. 내 배고픔의 밑바닥은 끝이 없었다. 아, 이럴 수가! 굶주림은 충족되지가 않았다! 하도 게걸스럽게 먹다 보니 마지막 과자까지 손을 댈 뻔했다. 나는 처음부터, 붉은 수염의 그 남자가 머리에 침을 밷던 그 남자 아이, 마차꾼 거리의 그 꼬마를 위해 남겨두려고 결심했었다. 줄곧 그 아이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울며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던 그 아이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애는 남자가 자기에게 침을 밷자 내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나도 자기를 비웃지 않을까 바라보았다... |
| 술을 먹은 다음날이 밝아 일요일이 되었다. 숙취와 함께 흔히 말하는 술배고픈 현상이 나타나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이상하게도 안주를 평상시 위장 용량보다 꽉꽉 채워 넣었음에도 음주 다음날은 해장할 거리를 찾아, 보통 국물이 있는 뜨거운 음식을 허겁지겁 먹게 된다. 인간이 클레임을 거는 많은 상황은 대부분 욕구, 특히 소유욕과 연결돼있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무언갈 가지기 열망하는것에 앞서 보다 일차적인 욕구로 식욕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굶주림의 고통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이 책은 더 본질적인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생각하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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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 까칠한 성격의 동기가 자신의 까칠함은 굶주린 경험에서 비롯되었노라고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문자 그대로 쌀한톨도 없어서 온 식구가 며칠을 굶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별 깊은 생각도 없이 변명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다 그래도 그 말이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그 고백이 약간은 쇼킹했었나보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굶주림 '이라는 심플하고도 박력있는 제목 때문이었다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겪어 본 적은 없기에 도대체 그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스토리도 없다 주인공 이름도 모른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나이는 몇살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언제부터 왜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주인공은 밑도 끝도 없는 굶주림의 한복판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내다 팔 수 있는 건 모조리 팔아 먹었고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도 신통치 않다 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져서 당장 눈앞에 음식이 있다고 해도 소화시킬 힘도 없다.. 희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지만 주인공은 글을 쓰겠다는 불굴의 의지 나쁜 일은 하지 않겠다는 초인적인 도덕심을 가지고 있다 신이 왜 자신을 이리도 괴롭히는가 하고 원망하면서도 절대 악마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 육체의 쇠약함은 의례히 정신을 좀먹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끝까지 자신의 정신을 지켜냈는지 이 책에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이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하니 주인공이 훗날 정신을 지켜내고 훌륭한 글을 쓰겠구나 하고 유추할 뿐이다 굶주린 가운데서도 이성에게는 욕망을 느끼고 어떻게든 체면을 차리려고 하는 주인공의 발버둥이 애처롭다 생존이 위협 받을때 우리는 어디까지 뻔뻔해져도 좋은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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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작가를 그대로 스캔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생생한 문장과 자신의 삶을 날것 그대로 적는 작가의 혼, 그리고 가난함이라는 고난이 주는 치열한 감정까지.
작가의 이력을 생각하면 경우에 따라서 불편해질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작가의 도덕에 신경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여담으로, 표지의 slut은 오타다. sult라고 적혀야 하는데 u와 l의 위치 차이로 뜬금없이 창녀가 되었다. 그리고 출판사는 아직도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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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평론가가 추천한 명작 리스트에서 보고 강렬한 제목이 인상 깊었었는데 이번에 읽을 수 있었다. '크누트 함순'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저자는 노르웨이 작가라고 한다. 흔히 접하는 영미, 프랑스 등의 작가가 아니라서 호기심이 더욱 컸다. 이 노르웨이 작가의 소위 '굶주림'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난과 배고픔뿐만 아니라 그래도 인간적 품위를 지켜내야 한다는 괴로움까지 더해져서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가장 안된 일은 내 양복이 하도 낡고 초라해지기 시작해서 더 이상은 어디든 점잖은 신사로서 모습을 나타낼 수가 없는 일이었다' 라든가 '사는 것이 너무 슬퍼졌을 때 읽을 만한 책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같은 문장은 육체적 배고픔으로 인한 정신적 수치심과 결핍을 너무도 생생히 잘 묘사하고 있어서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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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1934년생이시고 위로 언니 셋, 아래로 여동생 하나, 딸만 다섯인 집의 넷째 딸이십니다. 위로 오빠가 계시긴 했으나 어렸을 때 급체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 하셨어요. 충청도 산길을 조카를 등에 업고 짐을 들고서 심부름을 가자니, 몇 걸음 걷다 조카 내려 놓고 짐가져 오기를 반복, 엄마의 엄마 심부름을 위해 산넘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십니다. 못먹고 못살던 시절을 지내오신 엄마에게 갑은 경제적으로 탄탄한지 입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바뀔리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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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조여정 배우가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요."라며 추천했던 책. 예전에 크누트 함순에 대해 검색해보다 나중에 읽어봐야했던 그 책을 마침 티비에서 보게 되어 드디어 읽게 되었다. 주제는 '굶주림' 외에는 없다. 가난한 지식인이 그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하는 일련의 모든 행동을 보면 우울하고 서글퍼진다.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섭취를 하지 못하니 일단 어떻게라도 음식을 구해보기 위해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매일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아사 직전까지 가서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돈을 거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기도 하다. 결국 그 한낱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돈을 포기한 자신의 모습에 후회와 혐오감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면 인간이란 역시 잘못을 되풀이하는가 싶기도 하다. 톱밥을 씹는다거나 뼈에 붙은 날고기를 먹는다거나 쓰레기까지 뒤져가며 음식을 찾아 먹는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다. 음식의 풍요가 지나쳐서 비만이나 관련 질병이 문제가 되어버린 현대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의 굶주림을 대리경험 하면서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처참해질 수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너무 생생하고 자세한 묘사로 인해 저자 본인의 경험담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가난하고 굶주렸던 시기를 겪었던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복지 최선진국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노르웨이도 한때 극한의 빈곤을 겪는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이북을 읽으며 중간중간 거슬렸던 오탈자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어 유익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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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이 가장 강한 동기이고 변명이다. 하찮은 젊은이의 굶주림을 통해 뭘 보여주는건가 라고 생각하며 읽다보니 순식간이라고 할 만하게 한숨에 이 책을 다 읽었다. 굶주림이 죄과를 치르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독단이라 한다. 이 얼마나 거대하고 유치한 자아 비대일까. 불행함으로 표상되는 빈곤으로부터 우연의 힘으로 간신히 한발짝 두발짝 멀어졌다가 맥없이 되돌아오는 반복은 체념을 나에게 까지 전해준다. 생에 대한 어떤 강렬한 욕망이 없고, 욕구도 없다. 그 모든 없음의 상태는 불안정하지만 어쩐지 허망한 달콤함도 제공한다.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해진 육체로도 크리스티아나의 사랑을 (어쩌면 연민을) 얻을 수 있다는 배웠으나 운이 따르지 않는 남성의 알량한 자존감이 가득했다. 빈약한 지성에 대해 생각해보니 무기력하고 유약했던 개화기 지식인들이 생각나기도한다. 어쨌든 그리고 그는 마침내 문득 마주친 선원을 따라 배를 타고 현실에서 도망쳐 버린다. 이토록 허무한 서사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한참동안이나 생각했다. 남겨진 어떤 의미는 잠시 미뤄두고 한달음에 읽는 맛을 오랫만에 느껴서 책을 덮으며 좋다..라고 느꼈을까. 다시금 정직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기분인가. 내 빈 주머니는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보니 즐거웠다. 잘 생각해 보면, 그 돈은 사실 내게 남모르는 많은 근심을 안겨주었다. 나는 실제로 그것을 생각하며 여러 번이나 몸을 떨곤 했다. 나는 냉혹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내 정직한 천성이 완벽하게 비천한 짓에 저항을 한 것이다. - 187 하지만 거기에는 장점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가난하면서 똑똑한 사람은 부자이면서 똑똑한 사람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사물을 관찰한다. 가난한 사람은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주변을 살펴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의심쩍게 관찰한다. 한발 한발을 내디딜 때마다 의무와 임무를 생각하고 느낀다. 그런 사람은 귀가 예민하다. 감수성이 강하다. 경험이 풍부하다. 그의 영혼에는 불꽃이 깃들여져 있다...... - 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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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중 작품이 이해하기가 편했던 건 "헤밍웨이"의 작품이었다. 그 외의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 그들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크누트 함순의 작품은 처음이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말년에 나치에 부역한 혐의로 고초를 겪었고. 일단 작가의 가난한 경험, 굶고 살았을 정도의 가난한 경험이 아주 처절하게 녹아들어있었다. 그런데 그 굶주림으로 대표되는 사람을 좌절하게 만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주위의 상황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공감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본 작품의 주인공은 하루하루 의식주 해결이 힘들다. 매 끼니를 먹는 것은 사치다.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의 식자계층인 것 같다. 신문사에 투고해서 그 고료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고 늘 희곡을 완성하겠다며 썼다 찢었다를 반복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없고 사랑도 사치에 불과해진다. 결국 배타고 외국으로 반은 도피로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면서 끝이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육신을 위한 의식주는 어느정도 보장이 되고 굶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그에 반해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갈수록 더 단순해지고 편협해지고 내가 아닌 타자를 이해하는 능력은 더욱 사라져간다. 결국 현대를 사는 우리는 영혼이 굶주린 셈이다. 그나마 본작의 주인공은 외국행 배라도 타지,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굶주린 영혼을 채울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