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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새로운 해석, 그 미덕의 뒷면도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
"고전의 새로운 해석, 그 미덕의 뒷면도 솔직하게 보여주는 책!" 내용보기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쓰는 산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중학교 1학년 국어시험에나 나올법한 문제고, 답은 물론 ‘수필’이다. 그러나 ‘수필’의 본디 뜻은 우리의 상식 속에 들어있는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르다. 그 차이는 박홍규 교수의 근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의 서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수필의 어원은 ‘에세(Essai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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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쓰는 산문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중학교 1학년 국어시험에나 나올법한 문제고, 답은 물론 ‘수필’이다. 그러나 ‘수필’의 본디 뜻은 우리의 상식 속에 들어있는 위의 내용과 전혀 다르다. 그 차이는 박홍규 교수의 근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의 서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수필의 어원은 ‘에세(Essais)'다. 이는 몽테뉴의 저작 <에세>에서 유래했다. 응당 몽테뉴는 수필의 비조인 셈이다. 중요한 건 알맹이인데, 서두에서 말한 대로 수필을 ‘멋대로 쓴다’, ‘되는대로 쓴다’ 혹은 ‘무형식의 산문’ 정도로 이해하는 건(더구나 그렇게 가르치는 건) 무식(더불어 무책임)의 소치일 뿐이다. 누가 감히 몽테뉴와 그의 저작 <에세essais>를 두고 ‘멋대로 쓴 글’이라 폄훼 할 수 있단 말인가. 본디 ‘에세’란 인간 내면의 사유가 탁마와 절차의 과정을 거쳐 문장으로 완성된 것이다. 특히 몽테뉴의 <에세>는 “자주와 자립의 바탕 위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남들과는 다른 결론을 끌어내는 자신만의 글쓰기”(p.112)라는 점에서 이전의 수상록 혹은 명상록과도 다른 새로운 글쓰기의 규범으로 평가된다. 여러 고전을 인용하고 해설을 덧붙이는 형식의 격언집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한 것이었지만, <에세>처럼 하나의 책 안에 여러 가지 주제를 체계에 상관없이 쓰는 태도는 고대 그리스의 ‘diatribe' 즉 ’도덕적 논설집‘이라는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르네상스기에 ‘discourses', 즉 ’논설‘(국내에 ‘담론’으로 번역되는)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고, 마키아벨리도 그런 제목의 글을 썼다.(p.123) 그런데 박 교수는 <에세>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첫째, 몽테뉴는 모럴리스트다. 그러나 모럴리스트를 단순히 도덕주의자 정도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모럴리스트란 그리스 로마의 전통적 휴머니스트이다. 특히 (‘피론’과 ‘엠피리쿠스’의)회의론의 영향을 받은 17~18세기의 철학적 작가들을 뜻한다. 그들의 공통적 관심은 인간을 특히 감정이나 정서의 측면에서 자기인식에 이르도록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은 약화된다. 아니 과도한 지성이나 정신을 경계한다. 모럴리스트는 차라리 감정주의자라 번역하는 편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엇보다도 모럴리스트의 특징은 그 웃음에 있다. 모럴리스트의 웃음은 순수하지도 심각하지도 않다. 우아하지도 저속하지도 않고, 고급도 저급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둘째, 몽테뉴의 <에세>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탐구이다. 그를 상징하는 말인 ‘크세주(Que sais-je)'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심오한 사색의 결론이 아니라 회의주의적 사색의 이정표에 불과하다. 그 성과는 자유로운 정신이다. 회의주의는 허무주의와 다르다. 회의의 결과 어떤 현실성을 자유롭게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몽테뉴의 회의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p.26) '몽테뉴는 처음부터 치열한 회의주의자였다. 그래서 ‘시론’이라는 <에세>를 쓴 것이다.“ ( p.133) 셋째, 몽테뉴는 아동교육에 관심이 많았으며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역사교육을 통해 “가장 훌륭한 시대를 산, 가장 가치 있는 영혼과의 빈번한 교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다른 무엇보다도 “생생하고 완전한 형태로 인간 내면의 다양성과 진리, 즉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교육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실학적 전문가들에게는 심한 멸시와 조롱을 보냈다. “학자 무리는 자신들 골통의 껍데기에 떠도는 지식으로 교만해져, 잘난 체 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다리를 휘감는다. 그들의 입에서는 멋진 말이 나오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들은 갈레누스는 잘 알지만,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법률로 가득 차게 하지만 소송의 요점은 스스로도 모른다.” (p.157) 넷째, 20대 초반부터 17년간 판사로 재직했고, 몽테뉴 성의 성주이며 거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였던 몽테뉴가 갑자기 판사직을 내던지고 은둔과 칩거의 세월을 보낸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살았던 시대가 곧 전쟁과 혼돈의 시대였고, 그래서 몽테뉴가 자신의 성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오로지 <에세>의 집필에만 몰두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박홍규식 몽테뉴의 결론은 거창하기 만하다. 인생 후반을 시골의 성에 묻혀 『에세』를 썼지만, 그의 삶 속에서 우리는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평생 친구 라 보에티의 영향,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 본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영주이면서도 농민이나 직인들과 대화하기를 즐겨했던 그의 풍요로운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감히 저자는 몽테뉴를 ‘모든 선각자들의 선각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박홍규의 몽테뉴'를 모두 수용할 수 없다. 다소 무리한 해석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형적인 르네상스인', '최초의 생태주의자', '심리학의 선구자', '문화상대주의자' 등의 수식어는 지나친 감이 있다. '박홍규의 몽테뉴'에는 심각한 모순들도 있다. 첫째, 박홍규는 몽테뉴의 저작 <에세>의 최고의 미덕은 회의와 비판정신이라면서 무릇 글이란 비판의식이 살아있는 것이라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에세> 예찬에만 모든 페이지를 할애했다. 둘째, 모럴리스트 몽테뉴를 논하면서 그에 비견되는 국내학자를 열거하고 있는데 그 면면들이 어이가 없을 정도다.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정도는 그렇다 쳐도 김동길, 이태규에 이어 박노자나 강준만까지 언급한 것은 너무 나간 느낌이다. 셋째, 전쟁의 혼돈속에 은둔하며 <에세>집필에 몰두했던 몽테뉴를 두고 전형적 회의주의자 혹은 비판주의자로 지칭한 것 역시 아이러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런 유형의 인물이나 그들의 경향성을 두고 양비론자 혹은 나약한 지식주의자라 부르지 않아 왔던가.
y****y 2004.12.18. 신고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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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나키스트이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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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선생의 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어떤 일에 비분강대하다가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려버린다. 아, 덧없는 인생이여. 이 책은 그 덧없음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본인이 아닌 몽테뉴를 모델로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창안한 몽테뉴를 따라 생각하기의 자유로움, 글쓰기의 한가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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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선생의 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어떤 일에 비분강대하다가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려버린다. 아, 덧없는 인생이여. 이 책은 그 덧없음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본인이 아닌 몽테뉴를 모델로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에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창안한 몽테뉴를 따라 생각하기의 자유로움, 글쓰기의 한가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레 표시하는 글의 방식. 하지만 에세이는 단순한 감상용 글쓰기에 불과한가? 박홍규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리 에세이라고는 해도 거기에는 글쓴이의 철학과 논리가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이 뒤로 넘어갈수록 저자의 개입이 강해지고 특유의 고집이 엿보인다. 그렇게 되면 글은 재미가 없어진다.
c*****0 2005.05.16.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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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와 함께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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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수상록>이 학창 시절 필독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학교에서 필독서라고 꼭 집어주던 책들은 몹시도 재미없고, 지루하며, 고리타분했다는 기억이 있고, 덕분에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더더욱 멀리하게 되더라는 청개구리 심보는 잘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꼭 내 청개구리 기질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니 부모가 혹은 학교에서 좋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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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수상록>이 학창 시절 필독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학교에서 필독서라고 꼭 집어주던 책들은 몹시도 재미없고, 지루하며, 고리타분했다는 기억이 있고, 덕분에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더더욱 멀리하게 되더라는 청개구리 심보는 잘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꼭 내 청개구리 기질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니 부모가 혹은 학교에서 좋은거라고 권하는건 꼭 하지않더라는 건 알겠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라는 부제를 단 김운하의 <카프카의 서재>를 읽다가 몽테뉴에 급작스러운 관심이 생겼다. 김운하는 사는게 뭔가 싶은 고독과 우울속에서 집어들게 되는 책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살아야 할 이유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몽테뉴를 읽고 싶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사다놓은 <수상록>(권응호 옮김/홍신문화사)는 읽기가 쉽지 않다. 어쩐지 책만 집어들면 잠이 쏟아져 한두 페이지를 넘기가 힘겹다. 오랜 세월의 탓도 있겠으나, 문화의 탓도 있겠고, 번역의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책장에 곱게 모셔둔 <수상록>을 볼 때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만 깊어지는 듯 하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으며,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와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를 알았다. 왠일인지 두 책다 절판 된 상태로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는 도서관에서, 박홍규의 이 책은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몽테뉴 <수상록>의 해설판과 같은 책이다. 몽테뉴가 에세를 쓰게 된 배경, 몽테뉴의 개인적 이야기, 에세가 의미하는 것, 에세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몽테뉴와 현대는 어떻게 조화로운지 등등. 나처럼 몽테뉴의 '에세'가 궁금하지만, 쉽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 같은 책이다. 이 책의 도움으로 <수상록>에서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를 읽었다. 그러나 역시 몽테뉴의 문장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않다. 그나마 이 책이 없었다면, 그 한꼭지 조차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다.

박홍규 교수에 의하면 수상록과 같은 좋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좋은 번역으로 출판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역시 그렇다. 읽기에 버겁고, 펼치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그런 책 말고 읽고싶어지는 그리하여 충실하게 살고 싶어지는, 혹은 죽음을 겁내하지 않게 되는 그런 '에세'가 출판되어 준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박홍규 교수야 뭘 좀 아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자신있게 하는 것일테고, 나는 뭘 좀 모르니까 쉽게 읽고싶을 뿐이다.


물론 책을 읽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케케묵은 것인지도 모르나,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그 가능성의 하나가 글쓰기의 문제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의 표본으로 몽테뉴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99쪽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고서만 백날 읽은들 소용없는 일 일터. 읽기 쉽고 지루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커진다.  

 

a*****0 2014.02.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