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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선생님의 칼럼에 소개된 책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대답이라고나 할까 ?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일단 놀라운 점은 다분히 근대적인 사고인 ‘자유’와 ‘독재’에 대해 서술한 글이 16세기 프랑스의 종교 전쟁 시기에 쓰여진 것이며, 저자의 나이 역시 불과 16세 정도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는 서른 세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고 남아있는 문헌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의 여러 문헌을 예로 든 그의 사유는 능히 근대 계몽 사상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일종의 리플렛처럼 읽혀진 이 글의 영향은 장 자크 루소에 미치고 있다.
라 보에티는 인간의 ‘이성’의 출발점으로 자연법을 설명한다. 먼저 그의 독재자의 지배에 대한 통찰을 보라.
...그들은 강압적으로 통치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다. 어떠한 소유물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양친, 아내와 자식들, 심지어는 생존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강탈, 능욕, 무자비한 짓을 무작정 참고 견딘다. 그리고 그들의 피와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자는 포악한 병정이나 야만적 집단이 아니라, 오직 독재자 한 사람이다. 이러한 독재자는 헤라클레스나 삼손이 아니라, 시합장의 모래판에, 전쟁의 대포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겁쟁이다. 그는 강인한 남자들에게 감히 명령을 내릴 힘조차 없다. 남자들을 유혹하려는 계집 주위에서 비루하게 얼쩡거리는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졸장부이다. (본문 p.17)
그는 종교적 영향력이 극에 달했으며 임금의 폭정을 당연하게 여겼던 시기에 감히 왕 역시 유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대중의 각성을 이야기한다.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도처에 악이 창궐하게 되며, 사람들은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 어떠한 맛과 흥미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치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시킨다. 모든 선 가운데에서 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 - 이러한 충동이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가만히 앉아서 자유를 얻으려고 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자유에 대한 열망만을 수동적으로 지니기 때문에. 자유를 경시한다. 과연 이러한 일이 있어서 되겠는가 ? 어쩌면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가 쉽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라는 고귀한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닐까 ? (본문 p.26)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통찰에 의하면 대중은 ‘자유’의 존재를 경시하고 저항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노예 근성’이 있다. 사람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전부인냥 착각한다. 그리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인민은 자신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지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자유를 너무나 뜻밖에, 갑작스럽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뇌리에는 자유를 되찾으려는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 사람들은 자유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환호하며, 그 순간부터 흔쾌히 즐거운 기분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
처음에 무력에 의해 정복당한 자들은 군주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달리 뾰족한 묘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 사람들은 선대와는 달리 자발적으로 노예처럼 살아가려고 한다. 선대의 사람들은 혹독한 억압 밑에서 온갖 노역을 어쩔 수 없이 행하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다음 세대 사람들은 자신의 타고난 약간의 특권이 오래 지속되는 데 그저 만족할 뿐이다. 그들은 감히 다음의 사항을 인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차체에 눈앞의 것과는 다른 어떤 행복이 주어지며, 전대미문의 어떤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 말이다. (본문 p.47)
그리고 그는 이러한 ‘노예 근성’은 ‘교육과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설명하며 간악한 군주의 책략에 의한 ‘유희’가 제공된다고 한다.
우둔하게 된 인민은 이러한 놀음을 심심풀이로 즐긴다. 인민은 덧없이 사라지는 공허한 오락에 현혹된다. 그들은 말하자면 알록달록한 그림책에 끌려 글 읽기를 배우는 아이들보다 더 끔찍하게 이용당한다. 인민은 정말로 어리석고도 비참한 결과로서 노예 상태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본문 p.68)
독재자들은 조세로 비축한 곡식들 가운데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 포도주와 돈 가운데 6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만을 인민에게 나누어 주며, 마치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민들은 독재자를 마치 자선가로 생각하며, “대왕 만세”를 부르짖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바보들은 조금도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재화 가운데 불과 일부만을 돌려받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그저 왕의 호의로 착각했던 것이다. (본문 p.68~69)
16세기를 살았던 라 보에티의 통찰은 너무나 정확하게도 권력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다. 전두환의 이른바 ‘3S 정책’은 위와 같이 보에티가 지적했던 독재자의 책략이 아니겠는가 ?
최근 우리 사회는 <군주론>과 같은 통치론과 경영술의 저작들만이 만연한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소외되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존엄성이 아닐까 ?
많은 사람들은 주변의 억압과 폭력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
라 보에티의 글은 그런 의문에 대해 어느 정도 해답을 준다. [인상깊은구절] ...그들은 강압적으로 통치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다. 어떠한 소유물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양친, 아내와 자식들, 심지어는 생존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강탈, 능욕, 무자비한 짓을 무작정 참고 견딘다. 그리고 그들의 피와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자는 포악한 병정이나 야만적 집단이 아니라, 오직 독재자 한 사람이다. 이러한 독재자는 헤라클레스나 삼손이 아니라, 시합장의 모래판에, 전쟁의 대포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겁쟁이다.군주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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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 . 이 책을 쓴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는.. 18살 이었다고 한다. 평생을 노력하고 50세가 되서야 업적을 이루는 경우도 있고 서태지라던지.. . 자우림. . 가수들도 20대에 이루었던 업적이다.
심지어 세계적인 철학자들, 사상가들, 아인슈타인마저도 상대성이론의 개념은 이미 20대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10대를 넘어서 모든 주변의 환경들을 인식하고 학습하여 그 인간의 의식수준이, 생각의 결정체가 확정되는 순간은 10대 후반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라 보에티는.. 그 의식이 완성될 시점에, 사회를 보고 느낀 그대로를 옮긴 것이지 않을까? 마음의 눈을 깨고 한번만 더 걷어보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알 수 있었을텐데 왜 라 보에티, 만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던 그때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아직 젊어서. . 세상의 편견과 어쩔 수 없다, 라는 그런 변명같지 않은 변명에 넘어가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일치시키려고 할 떄, 작은 것 하나라도 자신이 배운 바에 따라 실현시키려고 할 때, 학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운 것이 울타리 밖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때, 그 사람의 눈과 귀는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완전해진다.
자발적 복종.. 이라. 무전유죄 유전무죄, 라고 외쳤던 그 말은 아직도 이 시대에 남아있다. 현대판 노예제도아래 속에서 착취는 계속되고 '자발적 복종'은 계속된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알아야 한다. 읽어야 한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연한것조차 읽지 못하게 된 우리들로서는, 읽어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살아남기 떄문이다.
기계가 되고 싶은가? 노예가 되고 싶은가?
생각을 깨우는 책을 읽어라. 자신의 존재이유와 목표, 그리고 권리를 찾는 것은 인간으로서, 생명체로서 당연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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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전의 이야기,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다. 공식적으로는 군사독재의 시기가 종식 된지 20년이 되는 해이지만 쿠데타 세력들은 정당의 형태로 변모하여 여전히 건재하고, 틈만 나면 독재자의 망령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그들의 교묘한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2002년에 이어 또다시 독재자의 망령이 되살아나 날뛰게될 2007년을 맞이하여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선성장 후분배의 거짓말이 통용되던 수십년 전의 우민의 상태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진보를 멈추지 않을것인가 하는 문제는 시민들이 얼마나 현명한가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이다. 실제로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기이하지 않은가? 수백만의 사람들은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강요당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민들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자의 명성에 홀리거나 그의 마법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독재자는 홀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권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신비로운 특성을 도외시하면 그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하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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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사 놓고, 이제야 읽는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와 있다.> 졌다는 느낌, 잃었다는 느낌, 잔뜩 끌어안고 읽었다. ‘인민’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말을 나 자신을 향해 비추면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폭군’과 ‘신하’와 ‘인민’을 떠올렸다. 150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18살의 나이로 이 책을 썼다는 작가, 그때 그가 그곳에서 살면서 더 나아지기를 바라고 말했던 것들의 내용이 지금의 우리네 처지와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앞섰던 로마 시대의 상황을 예로 들면서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일조차 비슷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고, 하여 세상은 500년 전이나 2000년 전이나 그다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오죽하면 ‘폭군’도 그대로, ‘신하’도 그대로, ‘인민’도 그대로인 것만 같은지. 우리네 개인의 생의 주기가 짧은 탓일까. 길어야 100년. 이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고 살아남으려면,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폭군’은 누가 되며, ‘신하’는 어떤 사람들이 선택하는 역할이며, ‘인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수한 사람들은 어떤 가치로 제 삶을 꾸려 가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자신이 겪은 만큼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궁리하고 선택하고 포기하는 것일 텐데, 나는 내가 행동하지 못하는 만큼 부끄러워서 무섭고, 행동하지 않는 게 용기 없는 태도임을 알아차려서 무섭다. 얼마나 더 변명을 해야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인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다는 게 다행이다. 이 책을 읽는 것, 이 책으로 자유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폭군과 신하의 의도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도 희망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죽음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켜 내는 것까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사명감일 테니. 책의 절반은 라 보에티의 이론으로, 남은 절반은 이에 대한 보충 자료로 엮여 있다. 이런 글을 필요로 했던 시대적 요구가 여전히 우리 땅에 적용되는 지금, 어리석은 ‘인민’으로서 ‘폭군’과 그의 ‘신하’들을 계속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지 묻고 또 묻고만 있다.
26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신중한 자와 변덕스러운 자, 용기 있는 자와 비겁한 자들, 누구나 할 것 없이 행복해지고 싶어 하며, 선(善)을 바란다. 그러나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34-36 그렇지만 우리는 자연에서 어떤 분명하고도 확실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어느 누구도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한 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평등이다. 신의 시녀이자 인간의 교사인 자연은 인간을 오로지 어떤 한 가지 형태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설계에 따라 창조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서로 동지로서 그리고 나아가 형제로서 인식하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연은 – 영혼의 영역이든 육체의 영역이든 간에 – 어느 한 사람을 선호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부여했는지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강한 자와 영리한 자가 마치 무장한 강도처럼 약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습격하거나 약탈하게 하지는 않았다. 자연은 이 세계에 마치 전쟁터와 같은 무엇을 설치해 두지는 않았다. 자연이 개개인들에게 제각기 다른 능력을 부여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추측컨대 강한 자와 영리한 자로 하여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과 형제애를 나누게 하고, 힘없는 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연은 좋은 어머니이다.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지상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게 하였으며,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동일한 범례를 가르쳐 주었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비추면서, 동시에 이웃 사람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또한 자연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말을 통하여 항상 신뢰하고, 언제나 형제같이 지내도록, 이른바 “언어”라는 위대한 선물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동으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공동 의지의 운명이 자라나게 하였다. 자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를 어떤 결합된 띠로 결속시키고, 하나의 공동체로 모이도록 한다. 자연은 우리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바람직한 공동체를 재건하려고 애쓴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자연적으로, 천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군가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이 우리 모두에게 고유한 권한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허용했음을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주어진 사회에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3 폭군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력에 의해서 나라를 차지한 자이고, 둘째는 상속을 통해서 나라를 차지한 자이며, 셋째는 인민에 의해 선출된 자이다. 49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하게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50 인간은 자연적으로 발전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바르게 교육받지 않으면 얼마든지 나쁘게 변형될 수 있다. 58 책과 학문은 개개인에게 무엇보다도 자아에 대한 의식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로 하여금 독재자를 증오하게 만든다. 위대한 술탄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술탄이 지배하는 나라에는 학자들이 살지 않았다. 69 비천한 인민은 항상 그러하다. 그들은 아무런 지조 없이 그저 향락에 자신의 몸을 던져버린다. 즐거움을 고결하게 향유할 능력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주어져 있지 않다. 비천한 인민은 불법과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 둔감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압제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하나의 명예로 생각한다. 73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악을 가한 자에게 복수하지 않고 그저 참고 살아간다. 이 사실에 대해 독재자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종교의 배후에 숨기 때문에, 신성의 끝자락은 교묘하게 감추어진다. 76-77 전제 군주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언제든지 인민을 길들이며, 그들이 공손하고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천한 인민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88 폭군은 자신에게 알랑거리며, 총애를 얻으려고 하는 족속들을 바라본다. 신하들은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행해야 할 뿐 아니라, 폭군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폭군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폭군의 마음보다 앞서서 모든 것을 간파해야 한다. 그에게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신하들은 폭군의 마음에 들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을 학대하고, 때로는 모든 시중을 감수하며 죽음까지 무릅써야 한다. 폭군의 유흥을 준비하는 일은 신하의 몫이다. 즉 신하들은 향락적인 연회를 개최하여 폭군을 만족시키고 황홀하게 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유흥은 그들의 고유한 기질을 억압하고 천부적인 재능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신하들은 항상 통솔자의 말에 넋을 잃고 들어야 하며, 그의 눈짓에 따를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나 그를 살펴보아야 한다. 손과 발로써, 눈과 귀로써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93 사람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항상 독재자를 용서한다. 102 배우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자! 위를 향하여 응시하자! 우리의 명예를,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을 깨닫고, 우리의 오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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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고 부르는 책을 마주보면서 느끼는 나쁜 버릇은,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비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
우리 조상보다는 현재의 우리가 더 고민이 많고, 더 어렵고, 사회를
보는 눈은 좀더 떠 있다는 등등으로 은연중에 우리가 좀더 낫다는 그런 뜻이 숨겨져 있다. 나 스스로도
종종 그런 모습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책은 1500년대 활동한 라 보에티라는 작가가 쓴
책이다. 책의 내용이 많지도 않고 9개의 소주제로 모여있어서
읽기 편하다. ‘읽기 편하다’는건 앞서 말한 가벼운 분량과
짧은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게 쉽다는 말이지,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하지 않다. 고전을 읽는 건, 우리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나와 우리’를
보는 거울의 하나로 고전을 본다. 그러다보니, 고전 책 하나
하나를 내가 처해진 상황을 투영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도 저자의 생각이 요즘
한국이 마주하고 있는 정치, 사회 등 우리 삶에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 사람이라는 무리가 언제부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의 사회 형태를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회의 발걸음이 한발짝 앞서서 나가는건, 마치 거대한 맘모스가
뱃속에 곧나올 새끼를 잉태한 채 힘들게 겨우 한걸음 나가는 모습처럼 힘겨워 보인다. 그리고 때로는 그
한발을 내디뎓다가 두세발짝 뒷걸음 치는 등 숱한 실수와 문제를 꽁꽁 싸매고 나가는 듯 싶다. 그런 어려운
한걸음 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사회 운영 체제를 만들어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 이상에 비해서 유지하고 나아간다는게 참으로 어렵다. 왕이나 신이 다스리는 옛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때로는 이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독재를 행하는 모습은
전세계에서 아직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점에서부터 보에티의 책을 시작한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마을과 도시, 그렇게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독재자의 전제 정치를 참고 견디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독재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한 그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민들이
그를 참고 견디는 만큼, 독재다는 그들에게 동일한 정도의 해악을 저지른다….그렇지만 놀라운 것은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로지 않게 여기는 태도이다. 실제로 인민들은 폭적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로 기이하지 않는가? 수백만의
사람들은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어떤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강요당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정말 자유를 꿈꾸고 손에 잡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그저 열망하기만 하였으며 단순히 그러한 의지만 품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왔다. 실제로
언젠가는 반드시 자유를 쟁취해야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건 자유라고
말한다 [많은 선 가운데는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치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시킨다] 그리고 그러지 못한 그때 사람들에게 외친다. [아, 인민들이여, 너희는 불쌍하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의 불행에 관심 없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참으로 어리석다. 왜냐하면 스스로 찾아야 할 행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가장 귀중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강탈당하고, 수확물을 도둑 맞으며, 거주지를
빼앗기고, 상속 받은 가구들을 빼앗겨 질질 끌고 가게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모든 것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로 마무리한다. [배우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배우자! 위를 향하여 응시하자! 우리의 명예를,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선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을 깨닫고, 우리의 오류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게 하는 신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즉 신은 저 아래의 전제
군주와 그 패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형벌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은 다음의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선량한 자와 신의 은총을 받는 자라면 누구든지 폭정을 가장 저주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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