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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무겁게 내려있는 바닷가 뱃사장에 한 사나이(잠파노/안소니 퀸)가 진한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그 사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영화 '길'은 막을 내리지만, 잠파노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파노가 '길'에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야성적이고 힘이 넘쳐 보였는데, 끝 무렵의 젬파노는 그 거칠었던 사내가 이렇게 서럽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저 초췌하고 기가 다 빠져 있었다.
<길의 엔딩장면-밤바다 사장에서 엎드려 우는 잠파노>
잠파노는 가슴에 쇠사슬을 묶어 그것을 힘으로 끊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거리의 역사(力士)였다. 그는 젤소미나(쥴리에타 마시나)를 데리고 같이 유랑하게 된다. 다소 지능이 모자라기는 했지만 순박하고 착한 젤소미나, 그녀는 가난하고 동생이 많은 집에서 입하나라도 덜기 위해 단돈 만 리라에 잠파노와 길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길'의 줄거리는 그야말로 단순했다. 거리에서 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잠파노와 그의 조수가 된 젤소미나의 여정,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캐스팅에서 그야말로 두 주인공 배우의 이미지와 배역 캐릭터가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송아지 눈처럼 크고 순하디 순한 눈을 꿈뻑이는 쥴리에다 마시나는 젤소미나의 이미지와 겹쳐졌고, 산짐승같이 거친 마초인 잠파노는 안소니 퀸은 마치 아바타같았다. 이렇게 적역에 좋은 작품을 만난 것은 배우로선 큰 축복일 수 밖에 없는데 이 두 사람은 멋진 연기력으로 작품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공연하느라 정처없이 떠돌며 생활하지만 젤소미나는 잠파노가 힘을 쓸 때 작은 북을 치면서 '위대한 잠파노가 왔어요'를 외치거나, 나팔을 불면서 흥을 돋구었다. 춤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순하디 순한 젤소미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잠파노는 그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손찌검하고 구박했다. 심지어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함께 밤을 지새고 오기도 했다. 젤소미나가 잠파노 곁을 떠나려해도 잠파노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고, 가난한 집안에서도 늘 웃음을 머금었던 젤소미나는 잠파노로 인해 고민을 하게 된다. "난 뭐하러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라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품었다. 잠파노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받고 싶었고,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 잠파노는 자신을 약올리고 조롱하는 앙숙 공중 줄타기 곡예사 마또에게 맞대응하려다가 경찰서에 구금되고, 그 사이 젤소미나는 서커스단과 함께 떠날까 궁리한다. 그런 그녀에게 마또는 잠파노가 그녀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위로해준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젤소미나는 경찰서 앞에서 잠파노를 기다렸다.
함께 떠나는 두 사람,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됐으면 이 영화는 지금처럼 긴 여운을 남기지 못했겠지. 잠파노는 우연히 마또를 만나 실수로 그를 죽이고 만다. 그 장면을 목격한 젤소미나는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그러자 젤소미나를 견디지 못한 잠파노는 그녀가 잠 든 사이 나팔을 남겨둔 채 몰래 떠나 버렸다. 몇년 뒤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 잠파는 바닷가에서 통곡하는 마지막 장면으로 '길'은 마무리 된 것이다.
'길'은 흑백영화만이 지닐 수 있는 소박함과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잠파노는 우리로 치면 시골 마을이나 시골 장터의 약장사 같았다. 지금 같으면 전혀 먹히지 않을 쇠사슬 끊기 힘자랑이라니.. 그 옆에서 밝게 웃으며 나팔 부는 젤소미나는 야수 옆에서 좋다고 꼬리치며 주인에게 사랑받으려고 순종하는 강아지같다고 할까. 잠파노의 힘자랑에 신기한 듯 감탄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순박함이나, 다음 공연지를 찾아 떠나는 시골 길의 한가로움은 마치 우리 60년대 영화의 한장면같이 정겨웠다. 그런데 왜 그리 그 풍경들이 눈에 꽉 차게 들어오는건지..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버려두고 떠난 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가 빠져버렸다. 폭음은 하지만 전처럼 여자를 밝히지도 않고, 눈에 띄게 초췌해 보였다. "그래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죠? 하고 물었던 젤소미나가 어느새 잠파노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일까? 그 답은 까맣게 내린 어둠 속에서 하얗게 물거품내며 무너지던 밤파도처럼 그 바다사장에서 엎드린 채 목놓아 울어대던 잠파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송아지같은 그 큰 눈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난 뭐하러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하던 젤소미나의 물음에 대한 답도 됐을 것이다.
'길' 정말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역시 다시 봐도 좋았다. 버려진 젤소미나가 나팔을 불면서 구슬프게 노래했을 장면도 상상이 됐다. 초췌해진 모습으로 다시 길을 떠날 잠파노의 정처없는 여정도 그려졌다. 아마도 그는 젤소미나 없는 외로움이, 혹은 회한이, 혹은 속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됐을 것이다.
페데리코 펠리니, 괜히 거장이 아니다. 명불허전이었다. 쥴스 다신과 멜리나 메르쿠니라는 감독-배우 부부의 역작 '일요일은 참으세요'에 이은 펠리니와 마시나 부부의 역작 '길',이렇게 멋진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부부, 사랑에서는 천생연분 ,일에서는 훌륭한 동료가 된단 건 황홀할만큼 멋진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