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면 내년의 시간을 기록할 달력과 다이어리를 고르는 데 골몰한다. 벽걸이와 탁상 달력을 펼쳐 놓고 공휴일과 기념일을 확인하고 휴가 계획도 메모한다. 하루는 24시간, 일주일은 7요일, 한달은 30일, 90일은 분기, 180일은 반기, 일년은 365일, 이렇게 시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 공간을 새겨 넣는다. 이제껏 시간에 대한 관념이라야 기한을 엄수하고 약속 시간을 지키고 마감일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시간의 형태에 굳이 의문을 가지지조차 않았다.'잊힌 시간 형태의 기록'의 부제가 있는 『시간의 연대기』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형태, 즉 주중 5일과 주말 2일의 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의 관공서 근무 시간, 음력으로 열리던 장날이 양력 5일장으로 정착된 배경 등 일상 생활 속 시간의 통일이 갖는 의미를 되새긴다. 음력과 양력이 혼재하는 한국의 시간이 일제에 의한 식민지 기간 동안 시간의 일치를 통해 식민지의 정신과 육체의 통일을 강제당한 사실을 역사적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쇄국정책의 구한말 조선이 일제강점기 '덕분에' 근대화와 산업화를 빠르게 흡수하였으며, 이는 곧 한강의 기적이라는 유례가 없는 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을 학부 시절에 만나곤 했다. 책의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아주 간명하게 집필 동기를 밝힌다. "우리에게는 전통을 근대로 번역할 수 있는 시간, 음력을 양력으로 번역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 결국 식민지 시기는 우리에게 시간의 공동화(空洞化)를 남겨 주었다. 이 파괴된 시간 앞에서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p.712 책의 참고 문헌 목록이 웬만한 단편소설 분량이다. 고려시대문헌에서 1980년대 신문기사까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환하게 밝히는 일본의 근대 문헌까지, 과묵한 연구자의 수행이 844쪽의 벽돌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 책이 '잊힌 시간을 담은' 미시적 역사를 담은 연구서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출판사 테오리아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