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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소통: 어슐러 K 르귄의 단편소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 바람의 열두 방향 중 -
이 단편은 어슐러 K 르귄의 초기 단편을 모은 SF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려 있다. 흔히 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이라고 하면 무협지와 유사한 흥미 위주의 읽을거리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러한 내용의 소설들이 많다고 하나, 르귄의 경우는 다만 과학소설의 양식을 빌릴 뿐 보다 심리학적 주제에 천착하고 있어 소위 hard SF와 다소 구분된다. 예를 들어, 그녀의 소설에서 광속여행을 통한 시공간의 일그러짐은 주체의 불안, 자아의 혼란을 시사하며, 외계 행성 문명과의 만남은 타자와의 접촉에 수반하는 공포 혹은 역으로 외부로의 도피(자아로부터)와 같은 심리적 사건들을 유발하는 장치이다.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는 약 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타인과의 접촉, 소통으로 인한 공포와 상처를 다루며 두 가지 흥미로운 소재를 선보이고 있다.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소재를 맘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야말로 SF와 판타지 장르문학의 재미이다.) 하나는 타인의 감정을, 당사자조차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까지도 그대로 느끼는 매우 과도한 공감능력으로 고통 받는 ‘감지인’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걸 알지 못하므로, 그에게는 ‘남’이라는 게 없다. 타인의 폭력적인 감정의 바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를 닫거나 혹은 받은 감정 그대로를 되돌려주기 때문에, 그는 대단히 이기적이고, 괴팍하며, 폭력적이고도 외롭다. 또 하나의 소재는 동물이 전혀 없이 독립영양계의 식물로만 이루어진, 그러면서 하나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외계 생태계이다. 풀뿌리, 나무뿌리들이 뇌의 신경세포처럼 시냅스를 이루면서, 행성을 덮고 있는 식물군 전체가 하나의 개체로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또한 우주 공간에서 혼자 또렷이 존재하여 왔으므로 ‘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만나자, 첫 반응은 충격과 공포, 공황이었다. 워낙에 크고 강력한 감정인지라 감지인과 더불어 먼 우주공간을 날아온 ‘보통’ 사람들조차 이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미칠듯 한 공포에 질려 앉은 채로 숨이 멎어버린다. 바야흐로 행성을 뒤덮은 공포의 감정에 전염된 이들 남녀의 운명은... 아아 (쿨럭)
소통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여기 제시한 르귄의 단편은 소통이 불러오는 공포와 폭력을 또한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듯, 외로움은 말의 한계, 소통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은 수도자가 스스로 택하는 방편이기도 하고, 또한 수줍은 마음의 가리개이기도 하다. 상처받기 두려운 사람이 위악의 껍질 뒤로 숨어버린다면, 어떻게 그를 불러낼 것인가? 굳이 불러내야만 하겠는가?
이 경우의 답은 당위보다는 방법에 있다. 슬픈 일이지만 모든 소통은 그 어떤 가치와 이름으로 포장하더라도 항상 폭력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는 서로 생각이 다르고 말이 틀려 싸운다. 그 후로도 합의를 이루는 과정 또한 합의되지 않는 언어들을 숨기고 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은 미처 다 주장하지 못하고 남긴, 숨겨버린 언어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대저 소통을 빙자하여 함부로 사랑을 말하면서 남의 마음에 무례히 손을 대려는 자에게 예의와 부끄러움을 알게 하소서. 무릇 대화를 하기 전에 듣기를 먼저 준비하고, 토론을 하기 전에 미리 필요한 공부를 챙겨 해 두고, 타인의 시간과 에너지를 무익하게 끌어대어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을 갖추어야 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대화의 예절을 반복 강조해야만 하는 무료함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모든 만남은 또한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팔만 사천 연기 하나 하나가 각기 인연이며 또한 싸움이다. 외부와 끊임없이 접촉하는 인간의 마음은 피흘리는 전쟁터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손으로 상처 입는 것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만남은 늘 무겁다. 그러니 타인이 혹 나를 사랑하고 싶다 하여도 나에게는 내 공간을 지킬 권리, 사랑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나를 소비하고 싶다면 동시에 나에게 소비되어도 좋다는 자세를 갖추어야 상호 신뢰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가 그대를 소비하고 싶지 않고 그대에게 소비되고 싶지도 않다면, 그러면 우리는 이제 남이다. 잠시 서로의 표면을 스친 것일 뿐이다. 이것이 위악이다. 이것이 쿨(cool)이다. 얼음장 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진실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오지 않으려면 차라리 나를 홀로 내버려두라. 이 오만함조차도 그냥 내버려두라. 이를 ‘소통의 한계’라 부르지 말자. 차라리 ‘소통의 폭력성’이라 부르자.
르귄은 이를 잘 안다. 동양에서 온 일본인 ‘조정관’ 여인은 이 상처받은 짐승, 오만한 패배자 ‘감지인’에게 다가가 증오가 아닌 사랑의 관계를 알려주려 애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자 반사적인 증오가 여인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데, 감지인은 이를 즉각 느껴 실제로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며 여인을 떠나간다. 그럼에도 그는 잊지 않았다. 결국 감지인이 이 공포, 증오의 광기가 몰아치는 외계 행성의 숲속 어딘가로 녹아들듯 사라져간 후, 우주는 평화를 되찾는다. 조정관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늘 그럴 수는 없을 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함께 있고 싶어?” ‘에반게리온’ 중 여리고 외로운 소년 이카리 신지의 환상 속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이 말을 걸어온다. 위악 뒤에 숨어 있는 외로운 자의 모습은, 어찌 보면 햇볕 아래 즐겁게 어울려 노는 친구들을, 그늘에 숨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소년과도 같다. 그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놀자고 청할 것인가? 아니다. 나라면 차라리 그의 외로움을 지켜줄 것이다. 이것은 가시덤불 칭칭 감겨 피 흘리는 내 손을 차마 숨기고 싶은 내 나름의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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