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뜻 보면 서양화로 느껴질 그림이라고 저자는 말했다.그러나 내가 언뜻 보았다면 김홍도나 신윤복그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 어쨋든,강희언의 시음이란 그림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크양식이었다. 그러니까 까라바조를 끌어들인 이유는 바로크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포석정도였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가 되였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바로크 양식이라니?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강희언이 강표암에게 사사하면서 서양화법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는 설도 있으니,흥미로운 그림이 아닐수 없다. 강희안의 그림 시음의 포인트는 '표정'이라고 했다.바로크의 특징인것이다. 까라바조에 대한 이야기보다 강희안의 그림에 대한 바로크적 해석이 훨씬 흥미롭다. 정말,관음이 미소짓는 기분처럼~ <루브르 계단에서 관음,미소짓다>의 의미를 알것 같다. 화원의 전통 속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다는 것,반항적이었다는 것,성의 풍속도를 통해 상류 계층을 묘사하여 비난을 받고 사회에서 축출당했다는 점등을 생각하며 마네의 그림을 통해 신윤복의 그림을 분석한 저자. 제리코의 <메두즈의 뗏목>을 보면서 김홍도의 씨름을 떠올린 저자..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으나,그것은 서로의 보는 바가 달라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서양의 그림을 통해 조선의 그림을 설명하는 방법은 신선했다. 여기서도 제리코의 그림보다는 김홍도의 씨름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흥미롭다. 제리코의 그림은 씨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에 불과한 그림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씨름에 대한 해석은 해학 속에서 혁명을 표현해 낼 수 있는 김홍도의 가치가 아니였나 싶다. 제리코의 그림보다 김홍도의 그림이 더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동안 씨름도를 보면서 혁명이 그림 속에 담겨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것 같은데 말이다. 밀로의 비너스상을 보면서 동양의 미인도를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림보는 재미는 알면 알수록 이렇게 다양한 것이로구나,새삼 느낀다. 작가의 호기심은 밀로의 비너스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였던 것 같다.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것을 따라가다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미인도가 떠올랐으니. 의외라면 신윤복의 미인도가 아닌 윤공재의 미인도가 생각났다는정도일까. 서양의 비너스와 동양의 미인도 그저 무심히 보면 시대를 상징하는 미인의 그림이겠거니 하고 지나치련만,저자는 그리스가 추구하던 미의 가치와 동양(우리나라)에서 추구하던 미의 가치는 달랐음을 생각하고 분석해낸다. "이상주의에 치중한 비너스가 차가운 돌의 미인이라면 <미인도>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살아 있는 肉의 미인인것이다.신을 사랑하던 그리스인에 비해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아름다움을 구하고 情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 유럽에 바르비종이 있었다면 조선엔 진경 산수화가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 같다. 바르비종파나 진경 산수화를 그린 화가 모두 자연을 신화나 신비주의와 연관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객관적 과학적 시각으로 관찰하고 그렸다는 것.. 이런 진경 산수화의 결과는 바르비종파가 인상파의 효시가 되었듯 산수화 역시 중국화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진경산수의 맛은 조선에서 나온 것은 조선이 시대를 앞서는 예술 감각이 있었음을..
책을 처음 열어 보고는 실망했더랬다. 그림관련 책인데,그림의 판형이 칼러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런데 생각보다 글이 흥미로워서 그림을 검색해 가면서 읽는 노력을 기꺼이(?)했다는 사실. 강희언의 시음이란 작품 속 표정을 오롯하게 감상하려면 필요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저자가 설명하는 표정들을 흑백의 그림에서 느끼기란 역부족이였다. 저자의 말에서도 언급한 부분이지만,자신의 의견은 잠정적일수 있음을 전제로 둔 이야기였다.그래서 서양의 그림 속에서 동양의 것을 찾아낸 혹은 닮은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궤변스럽거나 억지스럽지 않았나 보다.(아,가끔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지만,그것은 서로 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정버렸다!) 어쩌면,영향은 받았을지라도,그 속에서 우리것의 아름다움 혹으 대단함(?)을 드러내고 싶은 자부심이 더 크게 보였으니까. 그림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글 사이사이 개념에 대한 메모를 함께 기록해준 자상함이 좋았다. 어째서,저자가 관음의 미소를 짓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기때문에,더 재미있게 읽을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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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술에 대한 책을 다시 읽고 있다. 한동안 '읽어 주는'시리즈가 유행일 때 좀 읽다가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다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동서양 그림을 주제별로 같이 비교하고 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장르라고 생각되는 동서양 그림에서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고려 시대의 불화를 많이 소개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노출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비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던 고려 시대 불화를 소개하고 그 가치를 일깨워 주어서 기뻤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낙원'의 이미지는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미지이다. 반대로 600년 이전에 우리 선조가 가지고 있던 낙원의 이미지는 아주 다르다. 문화의 세계화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과거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또한 동양화를 설명할 때 서양화를 설명하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해하기가 더 쉬운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우리 의식에는 이미 서양화가 먼저 들어 왔기에 동양화 전공자가 설명하는 동양화를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동양화를 이해할 때 서양화적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이해를 하기 쉽다니...
단 한가지 그림들이 컬러가 아니라 흑백이어서 좀 아쉽기는 했는데 생각해보니 흑백이라 더 쉽게 공통점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소개된 서양화는 대부분 어디서 한번씩 본 그림들이고 오히려 고려불화가 처음보는 경우가 많아 씁쓸하고 컬러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언젠가 훌륭하지만 세계에(특히 일본에 많은) 흩어진 고려불화의 멋진 도판과 해설이 있는 책을 기대한다.
그리고 미술에 대한 책을 읽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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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자의 독창적이고 용기 있는 시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서양미술은 물론 우리의 미술작품에 대해서도 틀에 박힌 평가와 이해를 거부하고(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그 둘을 전혀 색다른 각도와 지평에서 바라보는 이 책의 저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공부는 굉장히 많이 한 것 같고.... 그것도 책을 통해서만 아니라 실제로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가슴으로 이해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여지껏 무관심했던 우리의 것, 동양의 아름다움과 깊이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건 그저 관념적인 논평이라든가, 기존의 지식을 재활용하는 책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수확이다. 미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무척 독창적이면서도 일리가 있고, 내밀하면서도 보편타당하다. 무엇보다도 저자 자신의 가슴 깊숙이 그림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왔던" 과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미술평론이라고 하기엔 그 용어가 너무나 편협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저자의 식견과 감수성이 미술뿐만 아니라 조각, 문학, 철학, 미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특히나 자신의 내밀한 몽상 속에서 그 모든 것이 무르익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다음 저작이 기대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그 성녀가 처음으로 영세를 받았다는 작은 시골 성당을 가 보았을 때 성당의 기둥들을 보며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둔탁한 돌을 깎고 다듬어 마침내 레이스 천 조각 같은 정교한 장식을 만들어 치장한 기둥은 고통을 견디는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세상에 선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의 한 방법이었으리라. 스스로 고통을 가해 그 고통을 겪어내고 자신을 죽이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모든 순간을 헌신하며 사는 이런 삶이 있었기에 돌이 성당으로 변했던 것이며, 평범한 어린 소녀가 성녀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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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과 관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술의 근저가 되는 인간 심연이 시공을 초월하여 같은 모습으로 흐른다고 할지라도 두 세계의 병치는 사뭇 어색할 뿐이다.
그러나 서양 미술의 핵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동양의 관음이 미소를 짓는 건 어딘가 모르게 범상찮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도대체 관음이 무슨 의미로 미소를 짓는단 말인가.
심상치 않은 제목을 단 이 책의 저자 박정욱은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글이 편안한 걸로 봐서 뒤늦게 그림에 빠져들어 그 세계로 접어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든다.
이 책은 너무나 쉽고 편안한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간혹 등장하는 전문 용어들은 주를 달아 설명해 놓았는데, 이 역시 전혀 까다롭지 않다. 짐작컨대, 저자 자신이 미술에 입문하기 전에 가졌던 어려움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었을까.
접근 불능 상태를 경험하는 일반인들에게 미술을 배려한다는 건 결국 무엇인가. 고급 예술을 일반인들도 편안히 향유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고 더불어 미술의 세계로 일반인들을 끌어들인다는 전략이 아닌가.
한편 저자는 그림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도 허물어뜨리고 있다. 장르를 파괴하고 이성에 기대지 않고 감성에 호소하는 형태의 글쓰기를 통해 일반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한 이 책의 첫장을 보면 고려 불화에서 그리스 신화와 예술의 형식을 발견한 대목이 나온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불교와 그리스 문화의 융합이 이루어져 '간다라' 양식이 탄생했고, 한국의 불교 미술이 간다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화 '아미타여래'의 유연한 옷자락과 서양의 페르낭 크노프의 '침묵'이라는 그림속 여인의 옷자락에서 동일성을 찾는 것 또한 그다지 낯선 부분은 아니다.
서양 그림 '침묵'속에선 느낄 수 없는 낙천적인 세계관을 우리 불화에서 찾아내어 정감 있고도 꼼꼼한 언어로 기술해 놓은 대목은 독특함을 넘어 찬탄을 불러 일으킨다.
저자는 이처럼 서양 그림과 우리 그림 속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을뿐더러 우리 그림의 우수성을 아주 쉬운 필치로 그려놓고 있다.
'승리하는 민중'이라는 소재를 단 단락을 보면 김홍도의 그림 '씨름'과 19세기 서양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즈의 뗏목'라는 그림이 나온다.
'메두즈의 뗏목'은 비참하게 사는 민중들의 고통에 겨워하는 모습과 저 먼 세계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든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고통에 찬 현실에의 변혁을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김홍도의 그림엔 당시 민중의 고통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다. 눈앞의 풍경과 그를 감상하는 느긋한 인물들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제리코의 그림과 김홍도의 그림을 대비시켜 우리 조상의 정신 세계를 들려준다. 우리 화가들이 핍박받는 민중들을 그리지 않은 이유를 색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다.
<민중들을 하나의 군상으로 쳐다보는 오만함, 또는 그들의 인생을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지적 오만을 제리코의 '메두즈의 뗏목'의 상징적 군중의 상에서 볼 수 있다면 김홍도의 '씨름'에는 그런 오만함이나 엘리트 의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그린 민중은 아름답다. 그가 그린 민중은 살 줄 아는 민중들이고 힘있는 승리자로서의 민중들이다. 씨름판에 넘쳐나는 힘이다.>
당시 사회상과 화가의 위치를 생각할 때 전적으로 공감가는 해석은 아닐지라도 몹시 끌리는 해석이 아닌가.
그러나 이 책은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지식을 완전히 배제한 건 아니다.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글을 썼을뿐 그 모든 것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관음이 루브르 계단에서 떠올린 미소엔 무슨 의미가 숨어 있을까? 책을 드는 순간 떠올린 그런 궁금증은 이 책을 덮는 순간 깨끗이 사라졌다. 루브르 박물관의 계단을 밟듯 한 계단 한 계단 발전해 온 서양 미술, 현대에 이르러 태고적 상태인 혼돈과 추상의 세계로 다시 침몰해 버린 서양미술.
관음이 거대한 서양 미술을 향해 짓는 미소의 뜻은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인상깊은구절] 정형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자유 자재의 모습, 모호한 실험적 이미지, 흔적을 그대로 남기는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가진 한국의 자기 문양은 프랑스 인상주의와 통하는 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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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난지도 벌써 오래 전이다. 그림에 문외한이면서도 워낙 관심많은 분야인데다 이를 도와주듯 한참 '그림 읽어주는'부류의 도서들이 많이 출판될 무렵 비슷한 호기심으로 읽게 되었던 책 중 하나인데 책 제목에서 말하는대로 이 책은 동서양(자세히 말하면 우리의 것과 서양의 것)의 미술의 비교를 통한 아름다움과 이해를 보여주는 책이다. 사상과 관습, 그리고 표현 방법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지역적 배경에서 비롯된 작품들을 절묘하게 맞추고 설명해 놓은 점은 신선하고 지적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품과 글을 비교하며 충분히 감상하기에 전체적으로 흑백처리된 작품들이 이해도를 높이는데 미흡하다는 것이다. 읽다보면 답답함을 느낄때가 많았고 특히 빛의 변화를 중요시했던 인상파 작품들을 접할때는 특유의 미묘한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안타깝기도 했다. '읽는' 즐거움 만큼이나 '보는' 즐거움도 충족되었으면..하는 아쉬운 생각이 앞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