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많은 이들이 낙원을 잃어버렸고, 또 그런 경험이 없다 해도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이야기는 울림을 갖는다. 우리 대부분은 세상이 너무나 새롭고 놀랄 일이 가득한 어린이의 인식이라는 낙원을, 또 몸 자체가 정원이 되는 첫사랑의 달콤하고 풍성한 낙원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거나, 잊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에덴동산 이야기가 문학에 그토록 많은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하게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정원, 우연히 발견했지만 두번 다시 찾을 수 없는 낙원. p.53~54 올리비아 랭은 마흔 살에 뒤늦게 집을 살 때까지 줄곧 세 들어 살았고, 야외 공간이 있는 아파트에 산 적은 드물었다. 그러다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곧 결혼했다. 애초에 정원 가꾸기라는 공동의 취미 때문에 친구가 되었고, 그의 은퇴 후 정원을 가꿀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들이 서퍽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 얼마 뒤 코로나로 인해 영국에서 봉쇄 조치가 실시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집에 갇혔고, 야외 운동은 하루에 한 시간만 허락되면서 너무도 빠르게 움직이던 세상이 딱 멈추게 된 것이다. 그 시기 동안 올리비아 랭은 집의 오래된 정원에 매료되어, 옛 모습을 복원하고, 식물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전염병의 공포가 커질수록, 정원을 드나들며 위안을 얻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 세계 사람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식물과 열병 같은 사랑에 빠졌다. 정원 가꾸기는 발을 땅에 붙이게 하고, 마음을 달래고, 유용하고,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었기에 사람들 모두가 갇혀버린 현재의 순간에 순응하는 방법이 되어준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의 문턱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그때, 씨앗이 펴지고, 싹이 움트고, 나팔 수선화가 흙을 밀며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이고,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릴 수 있게 되는 희망이 생기게 된다. 올리비아 랭의 새로운 집에는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오래된 정원이 있었기에, 정원을 복원하는 동시에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되는지 추적하기로 한다. '모든 식물은 공간과 시간의 여행자이므로 아무리 작은 정원도 역사와 교차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싹을 틔우거나 이상하게 성장할 수 있는 요소들이 파묻혀 있던 정원의 비밀은 세기를 거스르는 여행으로 확장된다. ![]()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진 채 어른이 된다. 그 짐의 일부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고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정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른이 때로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한 자신의 과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안전하고, 야생적이고, 어지럽고, 풍요롭고, 무엇보다도 공개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갈망을, 끈질기게 계속되는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물론 집을 갖고 싶었지만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원이었다. p.236~237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는 올리비아 랭의 신작이다. <외로운 도시>, <이상한 날씨>, <에브리바디>까지 차근차근 읽어왔는데, 매번 인문학적인 사유와 빛나는 통찰력으로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 개인의 고독을 사회적 소외로 확장한 <외로운 도시>, 혼란스러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탐색한 <이상한 날씨>, 그리고 질병과 성, 저항과 감옥 등 몸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살펴보았던 <에브리바디> 모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이번 신작은 '정원'을 다룬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나 역시 나만의 정원을 가지는 것이 오랜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심에서 단독주택이 아닌 이상 정원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서재가 실내 정원처럼 되어버렸는데, 나름 온실도 있고, 천장까지 닿는 식물들도 몇 있어서 정원이나 다름없는 공간이긴 하다. 이렇게 식물이 주는 위안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독자로서, 올리비아 랭의 정원 이야기는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팬데믹, 브렉시트, 극우 세력의 부상 등 시대의 어두운 분위기와 새어머니의 죽음 같은 개인적 문제에 짓눌려 있던 올리비아 랭은 정원에 탐닉하며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간다. 또한 정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탐독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낙원》을 시작으로 윌리엄 모리스의 《에코토피아 뉴스》, 데릭 저먼의 퀴어 유토피아 등 예술, 역사, 사회사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정원을 돌보는 방법에서 ‘정원’이라는 개념 그 자체로 확장되는 사유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대정원의 매끄러운 아름다움에 어떤 희생이 담겨 있는지도 놀라웠다. 18세기 영국에서 진행된 대정원화 작업에서는 상류 지배 계층을 위해 오소길, 농장, 때로는 마을 전체를 옮기기도 했다니 말이다. 농지를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진행된 인클로저 역시 대정원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숨겨진 비용, 권력 및 배제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가 정원의 한 측면이라고 생각해보면, 정원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개인의 것과 공공의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 공간에 대한 올리비아 랭의 사유는 혐오와 배제, 기후위기와 파국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예쁜 책표지만큼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책이었다. 자, 올리비아 랭의 아주 특별한 정원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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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랭의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정원을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정치적 이상과 사회적 배제가 교차하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재정의한다. 저자는 팬데믹과 정치적 혼란이라는 어두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원을 가꾸며, 그 안에 숨겨진 권력의 역사와 억압의 흔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책은 식민지 착취로 유지되던 대정원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소외된 이들의 희생을 폭로하는 동시에, 데릭 저먼처럼 쫓겨난 자들이 일궈낸 낙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죽은 잎사귀조차 생명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저자의 성찰은 깊은 울림을 준다. 결국 이 책은 기후 위기와 혐오가 만연한 오늘날, 정원이 어떻게 우리를 치유하고 타인과 공존하는 공동체의 장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름다운 문장 속에 담긴 날카로운 비평은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발 딛고 선 땅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연말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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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챙겨보는 #올리비아랭 의 책... 비평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통찰력 있게 전달해주는 작가이다.
먼저 읽은, #외로운도시 와 #이상한날씨 는 조금 긴장된 상태로 읽었기 때문에, 뜻밖의 정원이 언급된 제목에 시작이 달랐던 #정원의기쁨과슬픔 , 올리비아 랭이 2020년 영국 서퍽으로 이사와서 낡은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복원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방치되어 있던 정원을 손보는 과정을 섬세한 묘사와 그곳의 식물들 등 자연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마치 함께 만들어가는 듯해서 그림 같이 정원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올리비아 랭은 달랐다. 이렇게 정원을 가꾸는 과정 속에서도, 팬데믹으로 더 심해진 빈부격차로 인한 자연-공원 등-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를 비롯해서 문화, 예술, 역사, 정치,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얽힌 장소인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밀턴의 실낙원, 식민주의와 노예제도의 어두운 역사, 현대의 기후위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었다. 그렇다고 글이 무겁지도 않다. 정원 속 꽃을 돌보고 길을 따라 걸으며 부드러우면서도 생명을 느끼게 하고 있어서 다른 책들보다 훨씬 편안하게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특히 펜데믹 시기가 배경이라서 개개인의 불안과 고립의 분위기가 떠올려졌고, 정원이 주는 위로가 더 크게 와닿았다. 흙을 만지고 정원을 손질하며 추억을 되새기는 그녀의 모습에 깊이 공감되었는데, 이 공감이 확장되어 인상 깊게 남는 것은 바로 그 누구도 억압과 차별을 받지 않는 그런 정원에 대한 소망이다.
이런 정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_14세기 작가 리처드 롤은 <영국 시편>에 내가 무척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이 책은 닫힌 정원이라고 불리며, 잘 봉인되어 있고 모든 사과가 가득한 낙원이다.” 하지만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활짝 열려 넘쳐흐르는 정원이다. 모두의 정원이라는 그 이단적인 꿈.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씨앗을 털자._p344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들, 예술가들, 역사적 사건, 다양한 정원방식 등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서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고, 정원이라는 인간의 문화를 통해 짚어내는 랭의 비판적인 문제의식에 정신이 깨어나는 듯한 의미 있는 시간이였다. 무엇보다도, 언급되는 식물이름은 모르는 것들이 더 많았지만 정원을 저자의 바램대로 가꾸는 과정에서 오는 편안함이 참 좋아서 자연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였다.
_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진 채 어른이 된다. 그 짐의 일부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고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정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른이 때로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한 자신의 과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_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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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올리비아 랭의 신작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영국 서퍽으로 이사한 저자가 새로운 집의 오래된 정원에 매료되어 정원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전염병으로부터 식물을 살리기 위해 애쓰며 오랜 시간 ‘정원’이 ‘낙원’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시작된다.
- 나는 루머리의 정원을 갖게 되면 복원하는 동시에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되는지 추적하기로 다짐했다. 모든 식물은 공간과 시간의 여행자이므로 아무리 작은 정원도 역사와 교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정원 이야기를 모두 탐구하고 싶었다. 즉 낙원을 만드는 비용을 따질 뿐 아니라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배제와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앞으로 다가올 힘든 시기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이 담긴 에덴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p. 30)
- 놀라운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존재하고, 절대 정적이지 않고 항상 움직이며, 진보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 종을 뛰어넘는 생태계. 나는 그곳에 살고 싶다. 우리가 그곳에 살지 않으면 세상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 비옥한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우리가 정원을 들여다볼 때마다 초대장이 아직 거기에 있다. (p. 221)
브렉시트, 민주주의의 위기, 가족의 비극 등 여러 사건으로 글을 쓸 수 없었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백하는 올리비아 랭은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절실했고, 아주 개인적인 이유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유에서 시작한 여정에 혐오와 배제가 없은 모두의 정원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많은 예술과 사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 또는 기쁨과 자유가 가득한 유토피아를 상징한 정원을 다채로운 기록을 엮은 서술로 공간으로의 정원과 해방과 공동체의 기능으로의 정원까지 여러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진 채 어름이 된다. 그 짐의 일부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고 독특할 수밖에 없지만 일부는 정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어른이 때로 방사능 물질처럼 위험한 자신의 과거를 처리하고 관리하는 방법은 무척 다양하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p. 236~237)
- 가장 무서웠던 것은 정원이 이기심의 또 다른 표현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정원을 원래 세상의 더욱 해로운 충동에 맞서는 곳, 세상의 우선순위에서 벗어나 다른 생명체를 더욱 배려하는 피난처였지만 이제는 공동의 비용으로 누리는 개인의 사치가 되었다. 내가 환경 운동을 하던 시절, 정원 가꾸기는 인생을 보내는 가장 좋고 가장 덜 해로운 방법 같았다. 약초 공부를 하기로 결정한 것도 식물을 키우는 것이 윤리적으로 가장 무방한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원이 동시에 많은 것이 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이고, 열려 있지만 닫힌 곳. (p. 328)
- 정원의 시간은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시간과 다르다. 손목시계나 아이폰 잠금화면에서 반짝이는 숫자와도 다르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면서 가끔은 아예 멈추기도 하고, 부패와 비옥함이 길고 구불구불한 나선처럼 말려서 항상 순환적으로 진행된다. 시계로서의 정원에 주목하는 것은 시간과 다른 관계에, 선형적이 아니라 원형적인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또한 반복해서 등장하는 정거장 중 하나가 죽음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p. 331~332)
정원하면 아름다운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자연적인 공간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만 <정원의 기쁨과 슬픔>을 읽으며 정원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자연물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위해 불순물을 배제하는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말과 여러 사상과 문학작품, 역사 속 사건들을 통해 살펴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정원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편집된 이미지라는 정원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었음을, 저자가 바라는 ‘모두의 정원’이 가장 자연스럽고 자연적인 형태의 정원이자 매혹적인 곳이라 생각되었다.
* 어크로스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 #연말리뷰 |
![]() * 이 책은 ‘논픽션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라고 평가받는 영국의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올리비아 랭이 정치적 장소로서의 ‘정원’이라는 공간을 탐구하고 있는 에세이다. 팬데믹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하던 때 랭은 정원이 딸린 집을 구입한다. 봉쇄 조치가 내려져 사람들을 고립시키던 때 랭은 정원을 가꾸면서 위안을 구하려 한다. 한편 랭은 정원을 가꾸면서 정원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점점 의식하게 된다. 정원이란 역사나 정치 바깥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랭은 억압과 해방이 공존하는 정원의 세계를 깊게 파고든다. 올리비아 랭은 그녀가 마흔 살이던 2020년도에 정원이 딸려있는 생애 첫 집을 구입한다. 랭은 어릴 때부터 나만의 공간을 간절하게 원했고 그 공간에는 정원이 있길 바랐다고 한다. 랭이 가진 정원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다. 랭은 20대 때 인간에 대한 아포리즘과 조언을 노트에 베껴 적었는데 그중 ‘아무리 일시적인 거처에서 지내더라도 정원은 만들 가치가 있다’라는 규칙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랭은 왜 정원을 만들고 싶었을까?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브렉시트가 결정되었고 전 세계에서는 극우가 득세하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민주주의, 미덕, 진실, 자유주의 같은 소중히 지켜온 생각들이 무참하게 짓밟혔다. 랭은 언어의 영역과 관계없이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고 무언가를 고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글을 쓰는 것도 때때로 말하는 것도 힘들던 그때 랭은 정원으로 향한다. 언제나 사물의 표면 아래 심연을 탐구하는 작가답게 랭은 정원을 가꾸는 동시에 정원이라는 정치적 공간을 탐구해 나가기 시작한다.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조치는 세상의 피난처인 정원이 얼마나 정치적인 공간인지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히 드러낸다. 랭의 정원은 영국왕립원예협회 소속의 유명한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것이었다. 랭은 루머리의 정원을 갖게 되고 이를 복원하면서 그것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되는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정원을 소유하는 것은 사치이자 특권이다. 누군가에게 정원은 아름다운 낙원이지만 누군가에게 정원은 착취와 폭력이 난무한 지옥이다. * 랭은 먼저 <창세기>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서구에서는 정원을 낙원으로 보는 오래된 생각이 있는데 성경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다시 쓴 작품인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인간의 타락을 둘러싼 서사시인 『실낙원』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랭은 정원을 가지게 된 이후 『실낙원』을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이 작품이 정원을 가꾸는 구체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한다.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종교에 관한 작품이며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실낙원』을 읽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는 이 책을 식민지 악행에 대한 알레고리고 읽는 것이다. 밀턴은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 1년 후에 태어났다. 당시 탐험가들은 아메리카를 낙원처럼 설명했다고 한다. 마틴 에번스는 『밀턴의 제국 서사시』에서 『실낙원』에서는 여러 가지 식민지 서사가 중첩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밝힌다. 에덴은 무한한 풍요와 가 능성의 공간이지만 땅 주인은 따로 있고 모험가들은 약탈을 자행한다. 땅 주인을 위해 일하는 식민지 노예들의 삶에는 끝없는 노동과 폭력, 불구, 부상, 강간, 유산, 죽음만이 존재한다. 즉 에덴은 비정치적-비역사적 공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 앞서 말했듯 랭의 정원은 마크 루어리가 만들었다. 마크는 어느 조경 건축가의 조수로 일을 시작해 내내 최상류층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는 30년 넘게 정원 수십 곳을 디자인하고 복원했고 원예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1995년 왕립원예협회 명예 회원이 되었다. 한편 마크는 노퍽 변두리에 위치한 디칭엄 홀의 정원에서도 일했는데, 랭은 디칭엄 홀이 W.G. 제발트가 그의 도보 여행 마지막 정거장이었음을 기억해 낸다. 몇 년 전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관련된 책들을 구입해서 읽어 오고 있는데, 그중에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가 있다. 그래서 이 책 이야기를 할 때 반가웠다. 랭은 『토성의 고리』에서 랭을 늘 괴롭히던 정원의 한 측면을 발견하고 다음을 인용한다. " 상류 지배 계층이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광대한 땅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러한 사유지는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유행했다. 대정원화에 필요한 작업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2,30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완성하려면 보통은 토지를 몇 군데 사들여 기존 사유지와 통합해야 했고, 저택에서 인적이 전혀 없는 드넓은 자연을 방해 없이 바라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도로와 오솔길, 농장들, 때로는 마을 전체를 옮겨야 했다. " 광대한 사유지에 방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자연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은 누구일까.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 그 땅과 사람들을 약탈하고 착취하여 막대한 부를 쥐어짜낸 영국의 상류층들은 저택과 대정원을 만든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정원 가꾸기는 사교계에 들 어가는 방법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돈 많은 자들이 예술작품을 이용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듯 말이다. *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 중에 정원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정원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두를 위해 문을 활짝 열었던 아리스 오리고의 정원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리스 오리고는 영국계 미국인 여성으로 무일푼의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했지만 먼 사촌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유산을 받게 된다. 오리고 부부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오리고 부부는 모범적인 지주였고 상류층의 생활을 즐겼지만 농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아이리스가 임신 8개월일 때 브리튼 전투가 시작되었고 전쟁은 오리고 부부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들은 정원을 활짝 열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도록 만든다. 이탈리아 군인, 영국인 포로, 절박하고 궁핍한 피난민 등 누구에게든 정원 문을 열어주고 그들이 식량을 요청하거나 길을 물으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아이리스는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환자를 치료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일을 했다. 정원은 정말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 랭은 2년 동안의 작업을 통해 마크 루어리의 정원을 복원해 낸다. 정원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거나 대충 하지 않았다. 랭의 정원의 문제 하나 없이 완벽해 보였고 드디어 사람들을 초대한다. 랭의 정원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곳으로 복원된 이야기로 끝날까? 그렇지 않다. 잉글랜드에 가뭄이 들고 가뭄은 심지어 다음 해까지 지속될 것이라 한다. 정원에 물을 줄 수가 없었고 랭이 그토록 아끼는 식물들은 죽어간다. 랭은 죽어가는 정원에서 이기심을 경계한다. 당시 영국에 닥친 가뭄은 기후변화의 결과였다. 랭은 그의 정원에 닥친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데 그 이유;는 "휴식이나 회복 없는 영원한 생산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애착하여 가꾼 정원은 생태적으로 인위적인 공간이다. 정원은 자연의 축소판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고 변형하여 연출한 인간들의 낙원이다. 비는 다시 내렸다. 랭은 인간들이 일으킨 기후변화에 더 잘 견디는 식물들을 더 들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대신 이번에는 완벽함이라는 환상을 쫓지 않는다. 정원에서 죽어있거나 또는 죽어가는 식물들은 그림을 망치는 추한 요소가 아니다. 죽은 나뭇잎 껍질은 미생물의 활동에 양분을 제공하고 새로운 싹을 키운다. 랭은 생명을 만들어가는 죽음이 낙원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식민지 시대의 대정원이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사적이고 친밀하고 동시에 활짝 열린 정원들은 공공에 기여할 수 있다. 랭은 정원이 도서관과 병원처럼 우리 모두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이해를 가져야 된다고 말한다. 정원이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공공 재산이 된다면 우리 모두의 마음은 조금쯤은 더 비옥해지지 않을까?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정원의기쁨과슬픔 #올리비아랭 #어크로스 #인문에세이 |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올리비아 랭의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원예 가이드북이 아닙니다. 정원을 통해 인류의 역사와 권력, 배제와 포용, 상실과 희망을 탐색하는 깊이 있는 여정을 선사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해 역사와 문학, 예술을 넘나들며 정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다층적 의미를 풀어냅니다. 책의 부제 '인간이 꿈꾼 가장 완벽한 낙원에 대하여'가 암시하듯, 정원은 단지 식물이 자라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이상, 그리고 가장 깊은 상실이 투영된 공간입니다. 올리비아 랭의 여정은 영국 서퍽으로 이사하면서 시작됩니다. 새 집에는 유명 정원사 마크 루머리가 디자인한 정원이 있었고, 랭은 그곳에서 팬데믹과 브렉시트, 극우 세력의 부상으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잠시 도피할 수 있는 안식처를 발견합니다. ![]()
랭에게 정원은 직선적인 시간이 아닌 순환적 시간,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시간의 흐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정원을 가꾸면서 식물과 흙, 계절의 변화와 교감하며 자기만의 에덴을 만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원예 활동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질서와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자,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이기도 합니다. 랭의 정원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임과 동시에,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직면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정원은 오랫동안 이상향의 상징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 프랑스 왕실의 베르사유 정원까지, 정원은 문명 속에서 유토피아의 메타포로 존재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원은 대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습니다. 배제와 소외의 공간이었던 겁니다. 랭은 정원에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낙원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탐구합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이브의 슬픔과 교차시킵니다. 이브에게 정원의 상실은 공간의 상실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 방식의 상실임을 강조합니다. 존 밀턴의 정치적 실패와 이브의 추방을 현대의 상황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가치가 위협받고, 기후위기로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상황은 또 다른 형태의 낙원 상실로 다가옵니다. 이 상실감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이며,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 아름다운 정원과 풍경 뒤에 숨겨진 권력과 배제의 역학은 역사 속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18세기 영국의 대정원화 작업과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정원이 어떻게 권력과 계급의 표현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풍경(landscape)'이라는 개념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시골 경치를 그린 회화를 의미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이러한 미적 관점이 실제 자연을 변형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영국 상류층은 방해 없이 자연을 감상하기 위해 농장과 마을을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공유지는 사유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고 합니다. 시인 존 클레어는 인클로저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공동체를 그리워하며, 통제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정원과 식민주의의 관계도 등장합니다. 땅에 구근이나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는 뜻의 '플랜터 planter' 단어는 16세기 말에 식민지 개척자라는 뜻이 추가됩니다. 이는 플랜테이션이라는 단어 역시 정복당하거나 지배받는 국가에 공동체를 만들어 정착하는 행위로 의미가 바뀝니다. 유럽인들이 '발견'한 낙원적 풍경이 사실은 이미 원주민들에 의해 오랫동안 가꿔져 온 공간이었음을 짚어줍니다. 랭은 정원이 순수한 자연의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을 가진 인간의 창조물임을 강조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정원은 타자의 배제와 착취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정원의 아름다움 뒤에는 종종 폭력과 강탈의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랭은 현대의 식물원과 정원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유산에 어떻게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지 성찰합니다. 정원을 단순히 미적 공간이 아닌 역사적, 윤리적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그러나 정원은 단순히 배제의 공간만이 아납니다. 그것은 또한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정원 가꾸기가 개인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배제의 경험을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화감독 데릭 저먼이 에이즈로 죽어가며 던지니스의 자갈 해변에 만든 정원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낙원을 탐구합니다. 그곳은 가시금작화와 갯배추 같은 현지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랭은 저먼의 정원이 단순한 위안을 넘어 적극적인 창조와 저항의 행위였음을 강조합니다. 그 외에도 버지니아 울프, 조지 엘리엇, 잔 모리스 같은 작가들이 정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분석합니다. 정원이 문학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를 탐색하며, 상실과 회복이 정원 속에서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줍니다. ![]()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정원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기후위기와 생태적 파괴를 전쟁에 비유하며, 위기 상황에서 정원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많은 식물 종이 멸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정원은 보존과 저항, 그리고 미래를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랭은 배제와 통제의 정원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유 정원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며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 결국 배제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개암나무 아래 나뭇가지와 죽은 나뭇잎 껍질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조금 지저분한 경계 화단이 완벽한 화단보다 훨씬 비옥하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정원의 기쁨과 슬픔>은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합니다. 도시 공동체 정원, 게릴라 가드닝 같은 대안적 정원 활동을 통해 정원이 어떻게 공공의 공간이자 저항과 연대의 장이 될 수 있는지 탐색합니다. 이런 정원은 배제가 아닌 포용, 통제가 아닌 공존, 소유가 아닌 공유의 가치를 실현합니다. 랭은 정원이 단순한 낙원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과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실천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이야기합니다. '모두의 정원'이라는 꿈은 혐오와 배제, 기후위기와 파국의 시대에 가장 매혹적이고 희망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정원이라는 렌즈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권력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특히 정원의 정치학에 대한 주제가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공공 정원과 개인 정원은 어떤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모두를 위한 정원은 가능할까요? #정원의기쁨과슬픔 #올리비아랭 #어크로스 #정원 #실낙원 #인문에세이 #인디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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