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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와 함께 서양 문화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쓰여졌고 <오디세이아>는 전쟁 후 고국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다룬 작품이다. 서사시 형식으로 쓰여진 두 작품은 서양 문학사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영웅과 사건은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를 읽지 않았더라도 트로이 전쟁,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등은 익히 알려져 있다. '니코스 카잔카키스'는 그리스의 대문호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국내에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읽었는데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뛰어난 소설적 전개를 사용해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전달하는 작가의 재주에 감탄하게 됐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워낙 유명하고 주요필독서 목록에 항상 포함되기 떄문에 호기심이 일어 별개의 출판사에서 발간된 두 권의 <오디세이아>를 읽은 적이 있는데...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읽었지만 읽었다고 말하기 어색한 느낌, 내용 전반에 대한 정리가 제대로 안되고 감동도 전해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문학작품에 대한 짙은 감성의 부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개인적 경험으로 내게 <오디세이아>는 읽었지만 안 읽은 것과 같은 책으로 남겨져 있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처럼 <오디세이아>도 원전의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으면서 소설적 재미를 선사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를 읽게 됐다. 그러나 책장을 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아닌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됐다. 오디세우스가 고국인 이타케에 도착한 후 페넬로페의 무례한 구혼자들을 벌하고 아들인 텔레마코스에게 제위를 이양한 후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원전과는 다른 책이었다. 오디세우스가 20여 년 간의 모험을 마치고 이타케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부재 중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려 찾아온 많은 남정네들은 나라를 축내고 오디세우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었다. 분노한 오디세우스는 이들을 모두 도륙하고 이타케를 안정시킨 후 제위를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 나이는 들었지만 현실에 만족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사는 그런 이들을 모았다. 묵묵대장, 강돌, 철석, 켄타우로스, 그리고 오르페우스, 개성과 사정을 가진 이들과 함께 배를 건조해 다시 드넓은 바다로 나간다. 바다에 나온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해방감과 모험에 대한 기대로 설레이며 스파르테로 향한다. 스파르테에는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있었다. 스파르테의 왕이자 헬레네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와 함께 눈이 맞아 달아났던 헬레네를 되찾아 왔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모험보다는 현세적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메넬라오스와 조우한 오디세우스는 몸과 마음이 노인으로 변해버린 친구를 보며 적잖이 실망한다. 과거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스파르테의 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향락과 안락함에 물든 노인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세상에서 인간이 치러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주어진 운명을 지워버리고 그 운명과 싸우는 것이라 생각하오. 그래야만 인간은 신까지도 능가할 수 있소! (오디세우스가 메넬라우스에게) 오디세우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자 시도하지만 그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포기한다. 대신 가슴에 불같은 정열을 간직한 여인 헬레네를 납치할 계획을 꾸민다. 요부인 헬레네 또한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동참하고자 한다. 새로운 동료 바위를 얻고 헬레네를 훔쳐 스파르테를 빠져나온 오디세우스 일행은 크레타로 향한다. 크레타를 다스리는 왕은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이도메네우스였다. 오디세우스가 크레타에 도착해 살펴보니 귀족은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서민과 노예들의 삶은 열악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게다가 이도메네우스는 오랜만에 만난 오디세우스를 무시하고 헬레네를 훔친 처사를 비판했다. 자존감이 매우 높은 오디세우스의 상심은 컸고 이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이도메네우스는 헬레네의 미모를 접하고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다. 헬레네는 늙은 크레타의 왕이 달갑진 않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순순히 따른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복수와 시민들을 위해 왕을 비롯한 귀족을 모두 불태울 계획에 몰두하는 사이 헬레네가 임신하게 되고 이도메네우스는 성대한 결혼잔치를 거행한다. 결혼잔치가 있던 날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촛불과 등잔을 끄고 불을 지르고 기름을 부어 성과 결혼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을 불태운다. 늙은 크레타 왕은 아비의 폭정과 타락을 혐오하는 자신의 딸 휘다의 창에 맞아 죽는다. 왕과 귀족을 잃은 크레타를 강돌과 임신한 헬레네에게 맡기고 자신은 모험을 준비한다. 헤어지는 순간 오디세우스는 강돌에게 친구로서, 선배로서, 왕으로서의 조언을 남긴다. 청동 세공인(강돌)이여, 떠나기 전에 내가 충고하겠는데, 왕관은 무거워서 인간의 두개골을 깨뜨릴지도 모르니 내 충고를 듣고 머리를 활짝 펼쳐 보도록 하라. 강돌이여. 백성들 한가운데로 걸어갈 때는 무서운 사자 두 마리를. 힘과 인내심을 그대의 좌우에 데리고 다녀야 하며, 시커먼 야수 같은 그대의 백성은 무자비한 사랑으로 다스리고,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고, 노예들을 영원히 해방시키고, 덕망과 권력과 부유함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너무 교만해지거나 세상을 우습게보지 말 것이며, 가장 훌륭한 선을 보더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재난을 만나더라도 <더 많은 재난>을 청하라. 참된 인간의 마음은 끝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새로운 크레타의 군주가 된 강돌에게) 크레타에서 반란을 꾀하며 오디세우스는 묵묵대장을 잃었다. 대신 세이렌 같은 치명적 매력을 풍기는 크레타의 무희, 딕테나를 동료로 받아들인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뱃머리를 남쪽으로 삼아 아프리카로 향한다. 아프리카 항구에 도착해 강(나일 강?)을 거슬러 오르며 보니 지독한 가뭄으로 토지가 메마르고 서민과 노예는 일용할 식량조차 부족해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귀족들은 그늘에서 호의호식하는 풍경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무언가 할 준비를 한다. 처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를 선택했을 때 기대했던 바와 달라 다소 실망하긴 했지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속편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세우스는 다면적 인간으로 표현된다. 서술될 때 궁수, 외로운 자, 살인자, 많은 고뇌를 겪는 자, 교활한 자, 고독한 자, 세상을 방랑하는 자, 이성을 엮는 자. 바다에서 싸우는 자, 가정을 파괴하는 자 등 굉장히 다양한 형용사가 그를 수식하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무자비한 폭군의 성질을 보이다 또 어느 순간은 인간을 사랑하는 선군의 모습을 보인다. 스스로를 현실적 쾌락에 안주하지 않는 영혼을 가진 철인으로 생각하고 더욱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조차도 가끔 흔들리는 듯 싶다. 동료에게는 육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철저한 이성을 갖추라고 꾸짖지만 정작 자신은 일탈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모습의 다면성은 인간의 내면에 갖춘 다양한 모습, 상황에 따라 대상에 따라 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인간적 반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고국인 이타케, 스파르테, 크레타, 그리고 1권의 말미에 도착한 아프리카까지 어느 곳에도 정착하고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마음이 생겼다 하더라도 일부러 돌려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난다. 그것이 진정 인간의 참모습이며 신과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오디세우스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대단함과 달리 독자로서 느낀 바는 오디세우스는 '재앙을 부르는 자'이다. 그가 접한 모습이 타락한 사회인 것은 맞지만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오디세우스는 일격을 가한다. 가끔은 절멸을 목적으로 한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오디세이아 2권>에서 아프리카의 귀족들은 혼줄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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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디세이아>를 읽고자 했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슷한 형태의 작품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기대했었다.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허구'를 살짝 가미해 스토리를 재밌게 전개하는 형식으로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를 근현대인들의 취향에 맞게 각색한 작품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디세이아 1권>을 읽으면서 내 예상과 어긋나는 전개를 접하며 약간의 난해함을 느끼게 됐고 2권까지 읽었을 때 비로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의 주인공들을 차입했을 뿐 전혀 다른 책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이타케 섬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갖은 모험을 거친 오디세우스는 그리운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부인 페넬로페, 아들 텔라마코스, 그리고 백성들을 통해 평온을 얻지 못한다. 동료를 꾸려 새로운 모험을 찾아 이타케를 떠나게 되는데 스파르테, 크레타, 그리고 이집트 등을 방문한다. 오디세우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부조리하고 케케묵은 인습에 덮힌 노폐물의 축적이었기에 오디세우스는 새로운 변화를 꾀한다. 스파르테에서는 현실에 안주하는 메넬라오스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헬레네를 납치하는가 하면 크레테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귀족의 지배체제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이집트에서도 파라오와 귀족들의 부조리한 행태에 분노하여 반란을 꾀한다. 새로운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기존의 것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비춰진다.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동정조차 메마른 철인이 되는가 하면 세상 만물에 대한 사랑을 품은 선인이 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언행으로 <오디세이아> 전반에 내재된 니체의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오디세우스에서 '차라투스트라'를 연상하게 된다. 오디세우스의 생각은 인간세상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이 창조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를 하고 결국 신을 죽이기에 이른다. 적어도 오디세우스의 이성은 신을 더이상 인간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돌려놓는 듯 했다.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차라투스트라가 그러했듯 인간의 삶과 자유에 대해 이성적 고민을 지속하며 고난과 고통을 견뎌내면서 더욱 성숙하게 된다. 그리고 아프리카 남단과 남극으로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인간의 모습과 삶, 죽음, 자유 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오디세이아>는 니코스 카잔차키의 <그리스인 조르바>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철학서에 가깝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접하는 기분이 들 정도이다. 오디세우스를 통해 카잔차키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이성을 채찍질해 얻게 되는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값어치 있는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내가 작품에 대한 예단과 오해로 읽기 시작해 마무리를 짓고 싶은 마음에 다 읽어내긴 했지만 돌이켜봐도 쉽지 않은 책이라 여겨진다. 어설프게 이해하고 있는 니체의 사상에 빗대 어렴풋이 이해했을 뿐 <오디세이아>에 담긴 사상적 깊이는 현재 내 지적수준으로 따라잡기 매우 버겁게 느꼈다. 언제고 더 공부가 되어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질 때 다시 <오디세이아>를 읽어보고 싶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를 서사시나 소설로써 접하는 것은 완독하기 매우 어려운 길이라 생각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호기심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철학서를 접한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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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1권>에서 트로이 전쟁 후 기나긴 모험을 마치고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몰살시킨다. 자신의 제위를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물려주고 믿음직한 동료를 모아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데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스파르테였다. 그곳에서 메넬라오스와 해후하지만 나태한 삶에 안주한 그의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다.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이자,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를 꼬셔 그녀를 납치하고 크레타로 향한다. 크레타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이도메네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도메네우스는 자신과 귀족들의 탐욕을 채우고 향략을 영위하기 위해 서민과 노예를 억압하고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에 반한 이도메네우스와 크레타의 귀족들을 벌하고 난 후 자신의 동료인 강돌과 헬레네에게 크레타를 맡기고 섬을 떠난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아프리카였다. 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귀족들의 나태와 사치, 그리고 오만을 목격하고 서민들의 처참한 생활을 알게 된다.
<오디세이아 2권>은 아프리카(이집트)에서 오디세우스가 핍박받는 서민과 노예를 선동해 파라오와 귀족들을 몰아내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오디세우스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다. 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고된 과정을 거쳐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부족 마을에 도착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습을 접하고 또 다시 오디세우스는 기존의 부패한 혹은 파렴치한 것들을 벌한다.
<오디세이아 1권>을 읽을 때는 무법자 같은 오디세우스의 행보가 재미있고 황당하기는 했지만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2권에 이르러 보니 <오디세이아>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이 니체의 철학,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됐다. <오디세이아>에서 보이는 오디세우스의 생각과 행동이 실은 기존의 질서에 회의하고 안주하는 삶을 거부하고 영혼과 이성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수행임을 느꼈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 후 읽어가다 보니 <오디세이아> 전체가 니체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집트를 뒤짚어 놓은 오디세우스가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자 할 때 그와 동행하고자 모인 이들에게 오디세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은 차라투스트라가 추구하는 철인(위버멘쉬)의 삶과 범인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영혼의 중요성을 역설한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은 고통과 고뇌를 통해 진정한 영혼을 마주할 수 있음을 주장했지만 많은 도시 사람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 듯 보였지만 체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결국 세상의 노예로 안주하길 바라는 자들이다.
오디세우스는 사막으로 나가고 선지자에 이끌리 듯 그의 동료와 추종자들은 오디세우스를 따른다. 사막을 행군하는 것은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오디세우스에게 사막이 주는 고통과 고독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 과정이며 수행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를 따라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맹세한 자들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힘든 여정에서 식욕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본능이 충족되지 않자 불평하고 고통 앞에 자유가 무슨 소용이냐며 떠든다. 이것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마지막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차라투스트라가 철인의 조건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디세우스는 이러한 마지막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미개한 어떤 것을 바라보는 경멸의 시선을 담아 그들을 바라 볼 뿐이다.
사막의 황폐하고 적막한 환경에서 자라난 푸른 풀잎을 보며 오디세우스는 말한다.
오디세우스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황량한 사막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의지로 푸른 잎을 틔운 풀의 결단과 용기는 고독과 고통을 이겨내고 의지를 관철시킨 존재의 위대함을 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교화시키려 자유와 영혼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인간의 본능에 휘둘리는 보통의 사람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오디세우스가 이성에 기반한 진정한 자유와 영혼을 얻기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상에 새로운 이성을 세우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리라 선언하는데, 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니체가 언급한 바를 답습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외에도 <오디세이아> 전체적인 내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 문장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영원회귀가 역설적 사상이지만 정의대로 어떤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했을 때 모든 찰나의 순간은 영겁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매 순간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고 현재를 허투로 보낼 수 없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한다.
고독한 오디세우스가 결전을 앞두고 산에 올라 신에게 말하긴 처음에는 <오, 신이여, 나를 신으로 만들어 주소서!>라고 소리치지만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 <신이여, 나를 신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부활시키는 이성의 숨결 속에서 어느새 싹튼 '젖먹이 아이'를 뱃속에서 느낀다. 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낙타, 사자, 그리고 갓난 아이를 상징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오디세이아> 1권을 펼쳐 들었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감흥을 얻길 기대했었지만 예상과 다른 전개에 잠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오디세이아>의 내용이 다채롭고 서사적인 문장이 싫지 않아 어렵움이 있었지만 읽어 나갔다. <오디세이아 1권>을 다 읽었을 때조차 (아둔한 나는) 니체와 <오디세이아>를 연관짓지 못했는데 <오디세이아 2권>, 특히 사막을 건너는 부분에 니체의 사상이 극명하게 베어있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오디세이아>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오디세이아>라는 고전을 기틀로 니체의 사상을 담아내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오디세이아>의 중구난방처럼 보이던 전개가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으며 남은 <오디세이아 3권>까지 읽으면 좀 더 명확한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한다.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오디세이아>가 쉬운 책도 아니고 가벼운 책도 아니지만 한번쯤 니체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PS) 아둔한 나는 2권에 이르러서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가 논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고 이전의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돌아보게 됐지만 다른 독자들은 더 일찍 본질을 알고 접근하는 것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