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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문체에 매료된지 오래다. 이제 나는 그의 글을 대충은 읽었다고 생각한다. 머리속에 연암의 문체와 어디 한군데 맺힘이 없는 사상이 똬리를 틀었다. 연암의 글을 읽다보면 세상물정을 두루 꿰고 있는 박학다식함에 놀라고,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는 관찰력에 놀란다. 스스로 과거를 거부한 연암은 제도권내의 온갖 제도와 사상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만들었고 또한 그것을 즐겼다.
이 책은 '연암집'에 수록된 글 중 엑기스만 뽑아 낸 90여편의 시와 소설, 논문, 편지글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총석정 해돋이'를 비롯한 시 13수, '양반전'등을 비롯한 단편소설 10편, '북학의' 등의 문집 서문, 상소문, 논문,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연암 문학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요동의 이 벌판을 언제나 다 지날꼬/열흘을 와도와도 산 하나 안 보이네/새벽별 말머리를 스치어 날아가고/아침 해 밭 사이서 돋아 올라오네' -요동벌의 새벽길- '우리 형님 신관과 비슷한 분 뉘였나?/ 아버님을 그릴 때 우리 형님 뵈었네./이제 형님 뵈련들 어디 가서 뵈옵나?/ 옷과 갓을 갖추고 냇물 따라 거니네'-연암에서 돌아간 형님을 생각하고-
보는 것처럼 연암의 시는 간결하고 형상이 그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암이 그 시대의 양반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다. 당시 양반가의 시에서 보기 힘든 현실 비판의식이 서정시 속에서 주옥처럼 빛난다. 그러나 연암의 글은 역시 시보다는 산문쪽이 빛난다. 현실정치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연암은 비록 나이 들어 벼슬길에 나가기는 했지만 원래는 벼슬을 거부하던 초야의 선비였다. 형님을 따라 중국행을 하면서 본 선진문물과 그들의 기상, 대륙을 관통하는 그들의 자존심을 보고 그때의 느낌을 열하일기라는 방대한 글로 담아내기는 했지만 말년에 한 관리 생활을 통해서도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런 의식들이 그의 산문에 보석처럼 녹아 빛이 나는 것이다. 연암의 저변을 흐르는 깊은 서정성과 현실을 살아내면서 스스로 체득한 비판의식이 산문이라는 좋은 도구를 만난 것이다.
단편소설은 재미있다. 연암 특유의 풍자와 해학이 소설에서 빛이 난다. 말거간전, 예덕선생전, 김신선전, 허생전, 범의 꾸중, 열녀 함양 박씨전등 연암 소설의 진수로 꼽히는 글들이 모조리 실려 있다. 예리하고 빛나는 산문들을 읽고 있으면 내가 쓰는 글들이 허접쓰레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연암의 글은 맑고 뛰어나다. 세상사에 그리 연연해 하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세상사를 날카롭게 꿰뚫고 거기에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거기에다 연암에 은둔하는 처사로서의 담담한 심사를 엿볼 수도 있고 벗들과 연암 골짝에서 나누는 한잔의 술에 대한 정취도 미려하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이 번역한 작품이다. 고전문학쪽에는 별 지식이 없어서인지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문체로 번역해 놓은 작품만을 대할뿐이지만 한문에 조예가 있다면 책의 뒤편에 실어 놓은 원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열하일기는 북의 학자인 리상호 번역본을 읽었는데 이 책 역시 북의 학자가 번역한 것을 읽게 되니 새삼 북으로 간 학자들이 아쉬워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예출판사가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겨레고전문학선집'이란 이름으로 남녘의 보리 출판사가 펴낸 이 책은, 그러나 번역원문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범위내임을 밝힌다. 번역본은 누가 번역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지는 것은 누차 보아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도 하나의 문학작품이 될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원문을 빼고도 500여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책의 두께에 비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을수 있으므로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좋다. 읽고 나면 참 좋은 책 하나 읽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그런 책이다.
거기에다 책 뒤편에 써놓은 서평은 그것으로도 하나의 작품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하명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는 서평은 연암의 일대기와 그의 책, 사상등이 집대성되어 있다. 연암을 잘 모른다면 서평부터 먼저 읽고 들어가도 좋겠다. 그만큼 김하명이란 사람은 연암의 문학을 꿰뚫고 있으며 연암의 일생을 문학과 연결시켜 뛰어난 한편의 평론으로 완성시켰다. 막연하게 글을 읽어가다가 뒤편의 서평을 읽으면 반짝 하고 불이 켜진 것처럼 연암의 글들이 해석이 된다. 서평이 91년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글이 북한에서 발행된 것이 그 무렵일 것이다. 좋은 학자 한 사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큰 행운인지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실감이 난다.
'내가 즐겁다는 글자 樂 한 자를 써 놓으니 거기 웃는다는 글자가 무수하게 따라붙습니다. 이 편지를 뜯을때 그대는 나의 별명을 껄껄선생이라고 지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별명을 사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글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이 정해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