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클라우(와 무페 중심)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를 접하며 느낀 점은 피플, 포퓰러, 포퓰리즘... 등 주요 용어들이 이미 우리 삶과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계와 견제로 극도로 신중해진 나머지, 있으나 없는 듯 취급하지 않나 싶다. 정작 바람 폭 빼고 작게 깎아 내 준동할 틈도 주지 말아야 할, 아직도 냉전 체제에 머문 극우 선동은 내버려두면서 말이다. 하나의 접착제로, 강력 본드나 박스 테이프가 아니라 포스트잇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 운동이나 외치는 슬로건을 해석할 때 현상 이해(언더 스탠드)와 앎(날리지)에 도움이 됨이 분명해진다. 내가 이 파트의 전문가네에서 다른 영역과의 연결과 트임, 종합 구성력이 없다면 모든 진실이나 진리의 조각마저 손에서 놓치는 헛된 귀결이 될 것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숨을 불어넣는 네 명의 동인이 이를 뒷받침할 내용을 들려준다. 각성된 바를 진정시켜 알리고 싶어 속이 들끓고 입이 근질하면 어찌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을까. 아침에 어느 패널이 자신의 쏘 이모셔널을 말하는데 e motion al로 들렸다. 감정이, 마음이 건드려져야 스위치가 켜져야 움직이고 그걸 잘한다는, 아니 잘하겠다는 자기 규명과 다짐 같다. 그걸 이어 받아 바턴 터치 내 달리기 ^^ 포마는 조금씩 변형 개조되고 있다. 그가 가고 없어도 그의 사상 골격과 뼈대가 남아 있다. 리모델링해 누군가 들어와 살 집 느낌이다. 세계 어딘가로 퍼져 다양한 공부 모임을 자극하고 아는 띠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합창까지는 아니어도 나즈막히 들려올 후속 이야기들. 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걸 망각하고 만다. 다가오는 9월은 이 기운을 받아 ‘철학하고 있네’ 소리 듣는 걸 목표로 생소해도 가까이 두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싶다. 물기나 자갈 바닥 헛디뎌 미끄러지지 않게 정면 주시하고 발아래도 살펴 가며 순환 사고와 내 나름의 어떤 이론화theorize(좀 거창하게 말하자면)까지 가닿고 싶다. 이만 마침 |
|
소책자 팸플릿인 것이 마음에 들었다. 공부하는 동인들의 공저인 것 같아 젊어지는 기분도 좋았다. 마지막 장이라 살짝(쿵) 아쉬움이 스민다. 비오는 새벽, 클래식 라디오 틀어놓고 작성하려한다. 급진성은 언제든지 논쟁을 통해 바꾸고 뒤집힐 수 있다는 함의를 지닌다. 절대적이거나 필연적인 것과 떨어져 ‘우연적’ 경향(방향이 기울어짐)이 짙다.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모든 집단과 조직의 원칙이나 규범, 그 어느 것도 영원의 관점에서 무한히 유효할 수 없다. ‘유한하다’를 기본 전제로 한다. 급진 민주주의는 기성 제도의 무한성과 필연성을 넘어서며 다원성을 띤다. 정치적으로 ‘급진’성은 정치 질서의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지 않음을 바탕으로 한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이해 집단이나 주체들이 갈등상태를 벗어나 “가장 조화로운 완벽한 상태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이다. 허나 정치사회적 ‘통일체 구성’( 과정)은 부득이 주체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제거하고 자유와 평등을 제약하고 만다. 새로운 주체들의 참여를 이미 결정된 것에 (짜)맞춰 제한하려든다. 다행히 민주주의에선 특정한 통일체가 영속적으로 고정되어 힘을 갖지 않는다. ‘우연성 차원’에서 긴장과 균형을 유지한다. 그에 부속된 정치 레짐, 이데올로기, 제도, 가치, 원리도 완전한 결정(체)이 아니다. 끊임없이 재협상(네고시에이션)을 치른다. 정상적이라면 선거를 통해 정해진 임기를 다하면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 특정한 질서(대표적으로 ‘헌법’)에서 제도화되지만, 이것은 우연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109) 수정 헌법과 개정은 다양성과 차이, 자유와 평등을 확장하는 ‘전복의 논리’를 따른다. 잼통이 대권 주자들이 여럿이길 원해서 견제하지 않고 기회를 주는데 제때 기량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기성 질서에서 가시화되지 못했던 / 다양성과 차이의 존재들이 사회적 인식 지평 위에 드러나도록 하면서 // 기성 질서의 주체 위치들의 타당성에 질문을 던지며 / 새로운 정치 주체와 질서를 구성해 가는 지속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09)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성과 –화 구분에 인이 박혔을 거다. 라클라우의 급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자유주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비판의 무기’로 사용된다. 과두제(소수가 지배하는 체제)를 넘어 ‘인민주권’ 회복을 목표로 한다. 급진 민주주의 개념은 두가지 대척점에서 대두되었다. 그 하나가 자본주의의 ‘자유 민주주의 대의제 엘리트 과두제’이다. 나머지가 현실 사회주의(이론이나 이상과 대조)의 ‘권위주의적 일당 독재 체제’이다. 급진 민주주의는 ‘인민주권’popular sove reign ty이 형식적 절차와 법치주의의 한계에 갇힐 때 호출된다. 시민 사회의 다양성과 차이와 자율성이 약해질 때 차용할 수 있다. 잘못 알기 쉬운 점이 급진성의 조건은 기성 질서에 대한 철저한 부정negation이 아니다. 권력의 자리가 ‘비어 있는 장소’가 (윤활)되도록 (환경과 여건을) 꾸리는 거다. 급진성 투여는 영원의 관점(‘영속성’)에서 벗어나 질서의 토대ground를 보.게. 한.다. # 즉 어떤 인물, 집단, 세력, 정체성도 권력의 자리를 항구적이고 절대적으로 차지할 수 없으며, 어떤 특정한 정치적 해결책이나 과제도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111) 급진성의 조건 하에선 다양성과 차이가 민주적 질서 속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보장된다. 위계적이지 않다. 저자는 프랑스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임을 말한다. 왕의 단두와 군주제 철폐보다는 “혁명을 통해 권력의 자리가 더 이상 특정한 인물이나 세력에 의해 / (경험을 앞질러) 선험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차지될 수도 세습될 수도 없도록, // 계속해서 누구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면서도 / 끊임없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장소’로 남도록 했기 때문이다(111-112).” 줄여 말하자면 권력은 일시적 부여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권력은 어느 누구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않는다. 확실성의 표식을 지우기 시작한지 삼백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 불안정한 체제”(112)다. 점유할 권력의 성격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선거를 결정짓는 3대 요소도 떠오르고 저것 가고 이것 오며 넘실댐이 그려진다. 그런데 레이디 맥베스께서 친히 시간을 과거로 돌려 귀족정과 신분제 정치를 하려 들었다. 왕당파는 무슨 그냥 전두환과 박정희 섞어 군사 쿠데타로 장기 집권하려든거지. 그네 때의 계엄문건이 죽지 않고 ㅠ 김어준 총수가 박구용 교수와 대화하던 중에 대권을 노린다면 조국이여 이잼 공부부터 하라고 지나가듯 말했다. 정 대표가 이 공부를 제법 열심히 한다고 평했는데 어쩔 수 없는 친목‘계’인 정치판인 건지.. 직접 하려던 거 개혁 책무에 집중하느라 직은 물 건너간 이에게 나눠 준 거라고 (나 편하게) 보고 싶다. 지인짜 다들 정치하려는 목적을 묻고 소속을 분명히 하면 쓰겠다. 생채기나고 고단한 민주 진영 지지자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말이다. 국민이 먼저다. 아니 정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거다. 민주주의의 급진화, 급진‘화’인데 급 진화로도 읽게 된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 채워지지 않고 비워둠이 부단한 움직임과 소통 의지를 낳는다. 듣고 봐야지 알지 않겠나. # 따라서 특정 정체성이 잠정적이고 한시적으로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 여러 다른 정체성과 등가 관계를 형성하고 / 이들을 대표와 재현하는 방식으로 헤게모니적 정체성이 / 다른 정체성들의 차이를 삭제해 나가면서 //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일해가는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아니다. (112) 철지난 정치 사고가 다발하는(공통 감각도 정무 감각도 영) 실정 정치에 주입할 내용이다. 번역투의 장문이 많아 슬래시로 쉬어감을 표시하였다. 저자가 유사하나 구분해야 할 (배치) 용어 사이에 슬래시를 둔다. 아차, 헷갈림 방지용으로 8장부터 임의로 슬래시 대신 –와/-과로 고쳐 썼음을 밝힌다. 대표/재현 방식은 다양성과 차이를 유지하게 두며, 유비적 관계와 인접성 관계 속 은유와 환유의 논리 등을 적극 사용한다. ‘선험적으로 결정된’ 특권적 주체는 없다. 엘리트로 불리고 지금은 카르텔에 물든 잉간들이 좀 알면 좋겠다. 마이클 샌델도 타고난 것으로 오만방자 떨지 말라고 했거늘. 우리나 외국이나 난리도 아니다. 공정과 상식을 요구하면서 건드리지 않는 (위헌적) 특수층이 존재하는 총체적 형언 모순 사태다. # 특정한 국면과 맥락에서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 다른 여러 주체와 정체성을 하나의 민주적 목표로 등가적으로 연결할 수 있을 때 / 헤게모니(지배 권력)적으로 출현할 수 있다. (113) 무엇보다 연대 투쟁이 가능할 때 리더십의 신뢰가 획득된다. 유겟잇~ 집회의 다양한 깃발과 무대 발언들과 형형색색의 빛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실감하고 똑똑히 보았다. 말 그대로 “급진화된 민주주의 체화”의 기회였고 그것을 체화한 역사의 몸체는 이전과 또 다르게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민주주의 지형은 차이성을 제거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한다. 그럼으로써 ‘헤게모니 실천’의 지형이 열린다. 창세기 가고 창출기 ㅎ 예상하지 못했지만 해방이라는 말을, 오염된 자유 외침이 범람해 더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해방들emancipations의 논리는 정치 공간을 급진적으로 확~ 확장한다. 배제하지도 (피)억압하지도 음소거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인민을 정치적으로 구성하고 기성 질서는 민주적으로 재구성되는 수순을 밟는다. ‘급진 민주주의’ 작동 논리와 ‘반본질주의적 헤게모니’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인민이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포퓰리즘”의 작동 논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동일하다. 이들 논리와 원리는 모두 ●전체주의적 반민주적인 권위주의 공세에 ‘대항’한다. # ♣수많은 해방적 실천은 기존 법질서와 정치 체제를 넘어 / 인민 주권을 회복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에 기반한 / 급진 민주주의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114-115) 이들은 서로 미결정 상태로 ‘경합’해간다. 1) 민주적 정치 레짐과 2) 민주적 주체성과 3) 민주주의 보편성이 절대적 결정을 거부한 채, 민주주의의 ‘민주성’을 회복하고자 몸부림친다. 세가지가 고루 갖춰져야지 한 두 개로 치우치면 반민주다. 국힘에 국민 없고 더민에 더불어 없고 정의당에 정의 없다더니 민주주의는 민주성을 찾고자 안달나^^ 으싸으싸 몸을 부린다. 라클라우 별세 후 무페가 ‘좌파 포퓰리즘’을 재개념화했다. 신자유주의 초국적 금융자본 질서가 기후위기, 불평등, 반민주적 우파 포퓰리즘을 확산하는 것에 맞선다. 돈돈돈의 흐름이 이하 모든 문제를 낳는다고 일축할 순 없으나 미역이나 복어처럼 몸불려 큰도둑정치를 함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민주적 재구성의 ‘녹색 민주주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큰조카를 통해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창비 계간지에서 이와 관련 특집본을 주도해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활동 반경이 묶인 악조건에서도 정신 교류와 지적 대화는 활발했다. 어느 날 갑자기 환경과 함께 사는 가치를 말하는 현상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소논문과 다름없는 내용을 읽고 고민과 사유 끝에 이해한 것을 토대로 리뷰를 쓰고 따로 만나 토론한 것으로 기억한다. 네이티브(네거티브^^ 아니고요) 디지털 세대를 말하듯이 녹색 민주주의 운동과 실천이, 이론 정립이 그들은 생활인 것이다. 그럴 듯하고 거시적인 뭔가를 하고 있음이 일과로 들어와 있(었)다고나 할까. 이걸 내가 놓쳤네그려 사회 곳곳의 지배와 억압, 차별과 배제의 관계에 ‘대항해’ (관계와 구조) 재구성을 하는 ‘정치 프로젝트’가 구현되고 있다. 이미 하고 있다. 키링과 에코백과 우울증으로 극성 요란 떨지 않아도 컨텐츠 제작과 비주얼 중시, 재테크에 능한 멀티형 인재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뒷북 마취 헤롱 거나한거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도 물건처럼 쓰고 버리게 두면 옴팡지게 전염돼 정신이 고칠 수 없게 망한다. 세상 무서운 망조 든다.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엇나감과 막무가내를 틀어(잡아),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심화하고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 ♣즉 급진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에 따라 / 다양한 요구(도구^^ 아니고요)들이 민주적으로 등가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기성 억압과 착취 관계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질서와 상식을 구성해가는 정치적 실천이다. (116) 주도하는 정치 집단과 지도력은, 헤게모니는 미결정 상태로 비어 둔다. 해방된 실천들이 압도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우.연.히 티 피 오에 맞는 무엇이 그 자리를 ‘부재하는 충만함’으로 채울 뿐이다. 그러다가 다른 새로운 어떤 것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억압적 질서가 해체를 맞음이 훨씬 더 많았으면 싶다. 그러나 적대가 사라진 완전한 해방의 정치 종말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 우기고 맹신해도 미망과 주술적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아 이내 꺼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살아 걸어 다니는 촛불 그림‘자’여 라클라우의 이론은 추상적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긍데 본격적인 계약Contract 전에 구두 계약, 다시 말해 초록Abstract 쓰고 서-본-결론으로 구성 짜임이다. 우리가 그 쓰는 궤도에서 이야기 속 이야기 매트릭스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 넘어 비욘드 스토리, 메타 픽션! 객관화 메타 인지하는데 뭔들 못하겠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고 안 될 것 없다. 음.. 포스트 다음의 더 강력하게 사로잡는 그 무엇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공기 중으로 지구라는 별이 사라질 운명이어도 그것도 역사라면 역사, 마무리 장식이 될 것이다. # 그럼에도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주의가 품은 문제의식과 해방적 과업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과업을 급진 민주주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급진 민주주의 구상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이면서 동시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한다. (117-118) [오탈자] 116쪽 밑 5줄 : 있지도 한다 / 있지도 않다. @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깜깜이 뒷공작 허튼짓이나 하고 다니던 먼저것들 보다가 @ 똑똑하고 바른 인성의 사람들이 리더가 되고 국정운영의 핵심에 포진되니 나라 퀄리티가 그냥 넘사벽이 되네
김영대 음악 평론가가 <겸공> 금요 코너에 다시 나온다. 책 코너도 재개되었다. 나는 원더걸스 멤버였던 이가 진행하는 다른 금요 코너를 통해 김 평론가의 케이 팝 소개를 접한다. 케데헌 ost 들으며 심쿵, 책거리 기념 고고. 씽. 추가로 한미정상회담 즐감~ 의자 빼주며 펜며든 세계로 |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전선은 반본질주의적anti-essentialist이다. 주어진 초월적, 필연적 ‘본질’(에센스)로 보는 것에 등 돌린다. 12:30 시계 바늘처럼. 사회는 이질적인 것들의 사회적 적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특정 체계와 질서 또는 집단적 정체성으로 통일된 모습을 취한다. 각기 다른 요구들을 ‘보편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9장은 좀 각잡고 시작한데다가 다른 장보다 길어 난해하게 다가온다. 우선, 사회 구성과 정치 변동을 살핀다. 이질적인 것들이 특정 질서 하에 각각 존재한다. ‘실정적이고 차등적인 관계’가 (부득이) 도출된다. 그렇더라도 구성원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정체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가만히 주는 것만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기성 질서에 대항하고 전복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이번 장의 핵심 주제는 차이와 등가라는 두 논리이다. # 전자는 이질적인 것들이 각각 자기 충족 상태이자 고립된 상태로 / 서로 차등적으로 연결되는 ‘차이논리logic of difference’가 지배하는 과정이며, // 후자는 사회적 적대가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으로서 ‘등가논리logic of equivalence’가 지배하는 상태다. (92) 앞에서 슬쩍슬쩍 들었어도 생소해 머리가 쭈뻣 벼슬처럼 선 채 덜렁덜렁하다. 덩어리 표현들이 맞물려 있어 책 그대로 덜어 조금씩 정리해보겠다. 대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나 대중 정치로 접근하면 이해 가속력이 붙을 것이다. 반본질주의 아래 가지치기된 용어 뭉치들이 달린 것으로 보면 되겠다. # 차이와 등가 두 논리는 라클라우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담론 이론에서 / 담론적 질서, 헤게모니 구성체, 정치 논리로서 포퓰리즘의 동학(동접)을 / 반본질주의적으로 설명하는 핵심 논리다. (92-93) 학부 시절 언어학 공부할 때 접한 소쉬르. 구조주의자인 그는 “언어의 양극”을 말하며 1) 계열적인 것과 2) 통합적인 것으로 나누어 본다. [나는 이 특성을 동시, 통시적인 것으로 분류해 기억했던 것 같다.] 계열적인 것para digmatic인 것을 ‘등가 논리’로, 통합적인 것syntagmatic을 ‘분리와 배제’로 설명한다. 알 듯 모를 듯한데 더 퍼담아 꼭꼭 씹어 먹어보자. [윤건희 정부를 거치며 나는 언어가 몹시 중요함을 피부로 느꼈다. 상식이라는 공통 감각은 공통 언어의 힘, 즉 파급력 없이는 널리 이롭게 도울 수 없다. 세종과 한글 창제, 김대중과 인터넷 보급과 영어 연수. 웅, 그걸 매개로 집단지성과 지혜가 폭발적인 분기점이 생겼다.] # 등가 논리는 서로 다른 요구와 정체성 사이 등가를 구성하면서 / 사회적 관계를 대립하는 진영들을 기준으로 나누는 차원을 가리키는 ‘계열적인 것’의 차원과 같다. 차이 논리는 등가 사슬의 요소들을 탈접합해 고립시켜 / 단순한 차이로 재배열하고, 그 결과 사회적 적대와 사회적인 것들을 사회 주변으로 분리하고 격하하는 것을 가리키는 ‘통합적인 것’의 차원과 연결된다. (◎93)
위의 인용은 ‘사회적 적대’가 구성되고 관리(?)되는 방식을 알려준다. 기성 담론 체계로 통합되지 못한 채, 체계를 위협하는 ‘부정적(부정된 포함?) 정체성들’을 위한 장소가 마련된다. 말은 있어보이는데 따로 분리 고립시킴을 뜻한다. # 등가 논리는 바로 이 부정적 정체성들이 각각의 차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 기성 체계에 대한 적대적 정치 전선을 형성하는 논리이자 장소이다. 이와 정반대로 차이 논리는 기존 등가 논리를 해체하고 / 기성 질서를 확장해 적대적 정치 전선으로서 등가 사슬에 접합되어 있던 부정적 정체성(과) 요소를 / 기성 질서의 실정적이고 상식적인 속성으로 흡수하는 논리다. (93-94) 풉, 아는 만큼 보이고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도화선이 된다. 한국과 북한은 흡수 통일하는 진공 청소기 돌릴 생각 없다가 겹쳐 보인다. 마치 정치전선 짜며 어떻게든 운동장 넓게 쓰고(‘외연 확장’) 척지지 않는 외교술로 임하는데, 한국 정치 소음과 소요 보자면. 애쓰는 자만 애쓰는구먼 싶다. 원로란 원성사는 노인 에헴 정치 ㅠ [조국은 뇌맑은(학)자, 정치에서 퇴장하세요. 한동훈과 뭐가 다릅니까. 윤한, 김한을 상기시켜 트라우마가 된다고 치우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뭐하는거임? 찐따임? 한심 관종 나르계임? 정무감각 제로들 집합소 같다고 했다. 이재명의 시간~♡ 주요한 외교 행사 중인데 꼭 지금이어야 하냐며 분을 삼킨다. 같이 나댈수록 같이 좀 꺼져주라 불을 지르고 만다. 누구를 위해 그러는거니들. 좀 자중하고 잊히세요. 소셜미디어 정치와 사진전 안물안궁 노잼, 醜해요.] 앞 장에서 적대 없는 백프 퓨어인거 없다며 ‘순수한 적대’를 말한 바 있다. 사회적 적대는 만족을 원하는 갈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 표출되는 편이다. 모두가 다 드러내며 살진 않는다. 개별적으로 남아 ‘민주적(정치?) 요구’가 차이의 논리에 의해 기성 질서에서 관리되고 있을 때는 사회적 적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뽀글거림 정도에 그친다. 이래서 정준희 언론학자 등이 최저 퍼센트로 깎아내야 한다고 피력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던(따로 놀던?) 민주적 요구들이 공통된 것들과 “등가적으로 접합”하면 ‘고통의 요구’가 된다. ★민주적 요구가 ‘인민적 요구’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인민적 요구를 “보편적 재현”하는 것이 과제라 할 수 있다. 여러 이질적인 민주적 요구를 ‘결절점’으로 “등가적으로 연결”하는 방책이 필요하다. 뿔뿔이 집단들에게 ‘공통 이름’이 (잠시) 부상한다. 이것은 포퓰리즘의 특징이자 ●‘인민의 이름’이 된다. 민주주의 회복, 기후정의, 차별 철폐 등이 한자리에 결집함에 대입된다. 반면에 인민적 요구의 주체가 요구 실현을 못하게 반대하는 집단에는 ‘사회적 적대’가 모인다(꼬인다). 사회적 적대에 참칭 태극기부대를 대입하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 등가와 차이 논리를 살펴보면, 서로 순수하게 대립하는 양극단의 논리란 없다. 기억할 점이 등가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등가 사슬은 모든 차이를 폐기함이 아니기에 그런 경우 등가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의 차이를 등가 사슬 안에서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등가가 (필요시 동력으로) 구축될 수 있다(94-95).” 순수한 통일체거니(의 드림)가 위험한 이유 ㅋㅋㅋ 하다가 웃음끼 뚝- 정색하고 말한다.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이며 지세상 통일체랑 잠자는 숲 속 고인돌은 좀 빠지세요. Shut up Boy~ You don’t know us~~ 세상 위험한 뇌와 얼굴에 개기름 낀 자들 번들bundle은. “이것은 다양성과 차이가 등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 모든 차이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전체주의 논리로 귀결할 수 있다(95).” 누구든 우리가 일정부분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적이고 특권적인’ 주체이,자 그 목적(성) 지님을 인정합시다. 우리안의 파시즘 없나 먼저 살피자던 성찰과 맥을 같이한다.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요구, 정체성, 투쟁 등)이 어떻게 등가적으로 연결되는가? 각각 분리된 채 기성 질서에 재배열되는가? 이 ‘공동체적인 연결’을 우리가 얼마나 희구했는지. 십년 안에 두 명의 대통령을 끌어내리며 이 트라우마를 다시 또 반복할 수 없음을 새긴다. 이 모두를, “보편적인 수준인 것처럼” 재현하는 누빔점이자 결절점을 우리 키세스단이 해낸 것이지요. ‘지배와 해방’이라는 모든 것에 적용되는 이해관계와 과제로 ‘전환’해내는 힘겨움. 긍정적 사고와 비폭력적이라서 할 수 있는 일하며 인내이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의 상징”을 여~러~분이 찾아 나선 걸음이었어요. 공통적, 보편적으로 연결점을 찾는 데는 ‘비유적 전치’가 사용된다. 뭔말인가 싶을 텐데 우리가 개딸에서, 그것을 넘어서 응원봉과 키세스단이 되어 설득과 파장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 결절점이나 누빔점으로 볼 수 있으나 나는 ‘전치’의 예로 보고자 한다. ★“어떤 특수한 것의 이름이 ‘모든 것을 재현’하는 ‘보편적인 것의 이름’”으로 거듭남이 바로 전치이기 때문이다. (위헌적) 정치권력에 대항한다는 함의를 지닐 때 ‘민주주의 확장’과 함께 연대한 집단들의 수평적 연결이 완결된다. 다양한 집단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5.18 광주’, 2016년 겨울 ‘촛불’, 그리고 2024년 겨울 ‘응원봉’을 맥락화하여 타당한 상징이 될 때 비로소 우뚝 설 수 있다(를 다 같이 보았다). 좌절과 환멸, 위기의 순간마다 글말로 우리의 보편적 이름을 고쳐 세워 전의를 상실하지 않게 이끈 유시민 작가에게 훈장 수여하노라. 내란성 신경안정제 특허도. 결론이 어째 뇌섹의리남은 무조건 무죄~ 다음에도 –성을 –화로 유연화하는 전략을 강조한다. 그러니 (의자) 좀 비워두시라. “여기서 이질적인 것들은 사실 하나에 등가적으로 연결하는 / 등가 사슬을 구축하는 보편화 과정은 / ‘비어 있는 기표’의 이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96).” 앞 장들에서 흩어져 있는 말뭉치들이 조합되니 마징가Z처럼 멋지다. 형형색색, 이런 철학과 이론 조하~ㅎ 비어 있는 기표는 완전히 채울 수 없다. 허나 그래서 ‘부재하는 충만함’을 지닌다. 톡, 뚜껑cap 땄으면 본격적으로 마셔 보자. 어떤 것의 속성이나 일부로 ‘전체를 표현’하려면 (고리 연결이 되는) 인접성에 바탕을 둔 비유법(환유, 제유, 남유 등)이나 수사학 논리가 유용하다. # 특정 정체성, 요구, 투쟁의 이름은 이러한 수사학적 방식을 통해 / 자신과 등가적으로 연결되는 이질적인 것들 모두를 재현하는 보편적인 것의 이름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실상 실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 불가능한 수사학적(담론-헤게모니적) 보편화 과정이다. (96) 이것을 국민 말뜻 알아듣는 잼통이 국민이 알아들음에 힘입어 하고 있음 요, 알아주삼 >ㅅ< 보편성 획득 과정을 자세히 살핀다. 보편‘화’는 비유적으로 치환해 다른 것들을 묶는, ‘계열화’ 과정을 요구한다.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포개짐 일치가 얼마나 어렵게유. ●서로의 동일화는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 실천은 ‘비유적’이라네. 완전한 동일화 재연이 가당키나 한가. 남용된 은유abused metaphor, 남유 카타크레시스를 포함해 오로지 비유적 관계로 맺어진다. 남유(돌싱 프로에서 맺어진 커플의 아드님 이름 아니던가)는 처음 관념에 부여된 기호를 새로운 관념에 부여한다. 왜? 새로운 관념에 상응하는 기호가 없어서! 해당 언어 기호가 없기에! 강제적으로, 폭력적으로 특정 기호의 외연과 확장을 감행한다. ㅋㅋ 이를 데리다는 “빼앗은 타인의 거주지를 자기 집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찰떡 비유하였다. 빈집 턴다는 국짐아, 기호 은유 좀 잘해라. 라클라우의 남유는 언어, 수사적 차원의 남유 개념을 ‘물질적, 수행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비유적 전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재현적 보편화’가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직접 재현이 불가능하기에 “여러 이질적 특수성을 ‘경향적으로’ 재현”하면 오케이다. 결절점으로서 특수성은 각각의 차이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동시에 등가 사슬로 결합한다. “등가와 차이가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는 없지만, 긴장 관계 속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99).” 앞서 건강하고 건전한 힘의 작용은 시소 타기라고 말했다. 누가? 내가! ^^ 등가 사슬이 형성 되자, 이질적인 것들의 ‘기표와 의미’를 구분하던 ‘실정적 차이’는 해체된다. 결절점으로서 특수한 기표가 상징하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는 결절점으로서 특수한 기표와 이름이 지니던 원래 특수한 의미가 약해지면서 / ‘비어 있는 기표’의 상태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98-99).” 결절점으로 ‘재현’을 담당하는 기표는 ‘경향적으로’ 비어 있는 기표이다. 등가 사슬이 커지면 기표 의미는 점점 비어 있는 상태에 이른다. # 등가적으로 접합하는 접착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등가 사슬이 해체되기 쉬워지며, 이 사슬에 접합되어 있던 / 이질적 요소들이 기성 질서에 다시 고립된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등가 사슬에 연결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99) 뭔 동굴에 기회주의 박쥐가 이리 많다가 화들짝 튀어나오나 싶다. ㅠㅠ 우리가 겪는 정치 현실과 겹쳐 이해에 속도가 붙는데 다리 힘은 빠지고 ㅋㅋ 자유, 평등, 박애, 보통선거, 1인1표, 인종차별 반대.. 이 아름다운 말들이 ‘등가 사슬’을 형성하고 의미를 만들다가도, 자유시장 경쟁, 공정, 국적, 국가 경쟁력, 재정 건전성 등 목록 나열되면 발목 잡히고 발 걸려 넘어진다. ㅠㅠㅠ 왜? 구체적이고 특수한 내용을 채우고 명시하는데 실패! 했기 때문이다. 의미가 흐릿해지면 생동감과 활동력을 잃어 ‘정치적 실천’이 구현되지 못한다. 탈 접합이 발생하여 조직체가 거물 흐물해진다.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부정성(+반론 제기? rejection; object)을 상실하고 만다. 긍께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쏘 왓? 무슨 의미 있을까!”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지지 철회, 잘 계시게. 다시 원래로.. ㅠ 죽 쒀서 개 주는 일 만들지 말자. 저자는 말한다. 너무 멀리 가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극우 파시즘이나 반지성적 혐오에 가깝게 변질된다. [조혁당이 제2의 정의당이 될까봐 주의하자고 제동 거는 게 아닌가. 각각 실정적인 차이를 내세우며 기성 질서에 포섭되고 말. ㅠ 허언 이야기는 고마 치아뿌라. 국민은, 호남민도 경남민도 바보 아니당께. 국민이 멍~하니 듣다 네네네 슨상님 하는 학생 노릇하던 시절 지나갔다.] # ‘민주주의’와는 전혀 다른 극우 파시즘이나 반지성적 혐오가 / 담론적으로 만들어내는 등가 사슬과 ‘아주 비상식적이고 충격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99-100) 서로 양극단은 붙기 쉬운 속성을 띠니 조심하고 깨어있자. == 연속선상에서 차이 논리와 등가 논리를 비교 정리해두겠다. ‘차이 논리’는 구성적 실천이 기존 사회적 통일체를 ‘재생산’한다. ‘등가 논리’는 기존 사회적 통일체에 적대가 형성되어 ‘도전과 전복’을 일으킨다. 새로운 보편적 질서를 제안하고자 한다. 그러나 억압 정권에서는 서로 다른 특수한 요구들의 등가 관계를 끊어, 각각 특수하게 ‘고립시킨다.’ 윤씨가 추구한 말만 개혁(이고 난폭한 군림), 특히 노동개혁에 이것을 악용했고 이잼통이 이것을 바로잡고자 우선 과제로 상정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편성이 아니라 (그나마) ‘상대적’ 보편‘화’만 존재한다고 보는 쪽이 이롭다. 조합적인 계급에서 헤게모니 계급으로의 이행이 ‘보편화’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람시의 ‘진지전war of position’을 자세히 다룬다. 그람시의 변형주의 전술은 ‘수동혁명passive revolution’으로 분류되며 ‘혁명-복원’을 목표로 한다. 저자는 이탈리아 근대국가 형성 과정의 ‘리소르지멘’을 예로 든다.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인 흡수(또는 동조)를 추구한다. 다양한 동맹 그룹이 생성되고 호전적 흡수가 일어난다. 적대적 정치세력 ‘포섭’과 함께 대중 지지를 얻는 소극적 합의 방식을 병행 감행하게 된다. 설명이 그렇다는 얘기고, 나는 잼통의 수석비서실장 임명과 한미 협상에 합류가 생각났다. 한국사, 세계사 잘 모르고 한국의 허리 충청 정치는 더 모른다. 그니까 모르면서 하는 소리 전술 용어에 빗대어 “전면 공격”과 “진지전”을 대조한다. “기대와 희망의 기간”을 만드는 진지전과 달리 전면 공격은 기동전으로 반대파를 공개적으로 공세한다. # 따라서 진지전은 등가 관계의 확장과 마찬가지로 / 정치적 표면에서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의 구축과 함께 / 기존 (억압적) 질서의 전복 또는 그 유기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 시도되는 / 도전적인(도덕적인^^ 아니고요) 신화의 공간을 형성함으로써 / 새로운 정치 경계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02) 앞서 말했듯이 그람시의 ‘진지전’에 라클라우는 변형주의를 가미한다. 변형주의에서 전지전은 (공격 측면에서) 수동혁명의 전략이다. 결과론적으로 지배 블록을 키워 역사적 통일체나 통합 국가를 이루냐에 포커싱한다고 볼 수 있다. 수동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나 프로그램(화)이 아니다. “다른 능동적 요소가 지배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해석의 기준이 된다(102-103).” 하지만 변형주의와 진지전의 ‘헤게모니 신화’는 수동혁명 방식을 취해 무관심주의, 운명론, 역사적 패배주의의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급진화 과정이, 비타협적이고 격렬한 대립인 나머지 도리어 ‘정치 공간’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패배주의 단어를 지지난 대선부터 40-50대 패배주의를 말할 때, 20-30대는 또 다르게 공공연히 덧씌웠다. 오해 주의나 효능 상실 등 구체화시켜 세대별 특성‘화’ 해야 할 것 같다. 그리 단순하게 축약해 버릴 수 없으니 동시적, 통시적 맥락 이해가 바탕이어야 한다.] 분절시켜 낱낱이 해부한 개념들을 노선처럼 이어보자. ‘차이 논리’로서 “변형주의”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헤게모니 블록을 형성하고 지배 블록의 강압적 장치를 강화한다. 헤게모니 전술로서 수동혁명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기존 사회 질서 내에서 주체의 위치를 “실정적으로 고정”하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등가 논리’로서 “진지전”은 역사적 사회적 통일체의 경계 넘어 ‘적용 공간’을 확장한다. 수동혁명과 ‘대항-수동혁명’이라는 두 대립적 순간을 포함해 전체 정치 변혁의 총체적 동학을 일으키고자 한다. # 따라서 진지전은 상부구조와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띠는 총체성에서 / 파생된 ‘경향적으로 관계적인 정체성들’이 ‘집합 의지’를 생산하면서 /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유일하게 상대적으로 통일된 집합체인 / ‘헤게모니 구성체’ ‘역사적 블록’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104) (황급히 착지 ㅎ) |
|
실내 온도가 30도를 넘지 않는데도 선선했다가 다시 끈끈해져서인지 더 힘들다. 에어컨 켜는 집은 괜찮다는데 관리비가 배 차이난다. 날짜 일로 머릿수로 나누면 틀고 사는 것이 탈 미개, 문명인 맞다. 내가 가는 마트에선 환타 파인애플맛만 밀어 얼음 든 커피와 함께 연신 들이켜 배가 살살 아프다. 앞에 다룬 내용의 이합집산이라 별 어려움 없이 읽었다. 그렇더라도 막상 글로 옮기려면 사설이 길어진다. 되도록 짧게 끊어보겠다, 다짐. 비어 있는 기표는 헤게모니 개념을 구체화하거나 확장하는 용도로 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라캉의 누빔점을 ‘결절점’으로 갈아 끼운다. 결절점은 “담론성 영역을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 특권적 담론 지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완전히 봉합되고 자기 규정적인 총체성으로서 사회”는 달성 불가능하다(82)고 주장한다. 지역 사회를 다룬 금주 <토요토론>은 패스하고 댓글로 분위기 파악만 하고자 스윽 봤다. “통합 말고 연결~”이 책 내용과 딱 맞물린다. 와, 와우~ 82쪽 내용이 깔끔해 아래 길게 적어두겠다. # 개방성과 우연성 그리고 무한성이 지배하는 담론성 영역에 / 복수의plural, multiple 의미들과 담론들이 범람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결절점은 이러한 담론성 영역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해 “차이들의 흐름을 억제하고 / 중심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인 ‘접합’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사회적 차원에서 결절점을 중심으로 / 사회적 질서를 구성하고 안정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82) 1994년 라클라우는 “왜 비어있는 기표들이 정치에서 중요한가?”Why do empty signifiers matter to politics 물었다. 부러 결절점 대신 ‘비어있는 기표’라 한다. 둘 다 사회의 질서 구축의 ‘기표에 대한 은유’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름, 가늠하는 작업이다. 이 양축은 ‘해소 불가능한 긴장’을 만든다. 특수성을 유지한 채 보편성을 대표하는 것(‘본체 변형’과 균형)이 관건이다. 이쯤에서 괜히 당신은 제너럴리스트입니까, 아니면 스페셜리스트입니까? 묻고 싶어진다. 장꾸 뚝딱거림과 다른 장꾸미 잼통 ㅎㅎ 저자는 “공통의 참조성common point of reference”이 결절점 중심으로 ‘상징적 틀’을 보존하게 이끈다고 말한다. 보편성을 커먼 포인트라 한 것 같다. 해서 급진 민주주의는 보편적 담론에 대한 포기를 함축한다고 보았다. 여담을 보태자면, <더살롱> 뉴멤버가 한달을 못 한 것이 못내 아쉽다. 친구는 그냥 자기자랑 겉멋이 도드라져 위험한 ㅈㅇ당에 속할 사람 아니냐고 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조금만 다르게 진보적이고 획기적이면 견제하고 배제하는 것이 난 좀 안타깝다.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욕망이나 자의식이 뻥튀기 되지 않는지 살필 필요는 있다. 방송인의 감각일 터,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새로운 코너를 꾸릴 때 다시 넣어봄직하다. 또다른 겉만 파격 급진이고 안은 기득권적이면 곤란하겠지만.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노동 계급에 ‘보편적 지위’를 부여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특수한 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담론의 보편적 차원은 확보되어야 한다. 어떤 기표가 사회적 질서를 구축하고 추동하는지 등 사회에 대한 “보편적 인식틀”을 제시하는 이유와 필요에서다. “보편에 대한 호소가 항상 특수성 속에서 우발적으로 구현된다(84).” 이 속성을 간과하지 말자. 바꿔 말하자면 보편과 특수의 ‘연결고리’가 비어 있는 기표인 것이다. 기성 질서의 전면적 위기는 ‘탈구의 계기’가 된다. 기성 질서에서 “배제되고 결핍”되었던 요구들을 전면‘화’하는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진다. 쎄고 찌를 듯한 전장 용어를 주로 쓰는 국힘당이 마르크스나 포스트 마르크스의 안을 보려하지 않음이 자기모순이고 패착 아닐까. 군필자도 아니면서 군대 가야 하는데 참전을 바라는 요상한 무뇌자와 사고가 유사하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가 아니 뛸 수 없다는 듯이 점 핑 점 핑 에브리바디(노래는 죄 없음;;) 한다. 어떻게 헤게모니 투쟁이 일어나는지 사회주의 전략 차원에서 이론을 세워 나간다. 예전 같다면 ‘인민적 요구?’ 했을 텐데 찬탄을 범국민대회 페스티발 양식으로 치르고 나니 이해가 쏙 된다. 허상이나 허구의 말이 아니라 발 달린 말 같달까. 공분 식의 공공의 ‘사회적 접착제’가 필요함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빵, 토지, 평화 등 각각의 요구들을 모아 차르주의라는 공통의 적에 대항하라, 가 허황된 슬로건이나 외침 같지 않다. # 기성 질서에서 배제되고 결핍되었던 / 요구들이 전면화하는 헤게모니 투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각각의 요구들이 사회 질서의 전면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인민적 요구popular demand 의 차원으로 나아가려면, 그 목소리들이 한데 묶일 필요가 있다. (84) 각각의 다른 요구들은 ‘결핍’으로 기표가 비어있다. 그 주변으로 우연히 결핍들이 집결하는 지점이 생긴다. 그러면 그것들이 앞서 등가 사슬 개념을 다룰 때 비유했듯이 어깨동무를 하고 행진하거나 스크럼을 짠다. ★85-86쪽 내용도 다 옮기고 싶을 정도로 유익하다. # 다양한 요구들 사이의 연대, 즉 등가 사슬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구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결핍’ 그 자체이며, 이 결핍이 등가 사슬과 접합을 만들 수 있게 한다. (85-86) 특수 기표가 배제, 결핍된 요구의 ‘보편적 기표’가 아래 인용처럼 응집된다. 이로써 특수성이 보편성을 대표하는 “헤게모니적 관계”로 들어선다. ●비어 있는 기표는 “헤게모니 정치가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인 것이다. 나는 응원봉과 키세스단이 떠올라 응응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 비어 있는 기표는 비유와 전치의 작용 그리고 특정 의미와 이데올로기를 / 필연적, 보편적 표상 관계로 해석하게 하는 / 독해 코드의 ‘신화의 생산’을 통해 “다른 이질적 의미와 요구들을 포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보편적 힘”을 띠게 된다. (86) 설명 순서가 뒤바뀐 듯한데, ‘비어 있음emptiness’이란 담론성의 영역에서 기표와 기의가 본질적으로 대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일대일로 서로 작대기 매칭이 아니라는 말로 들린다. “따라서 기표는 어떤 의미와 접합되기 이전에는 / 어떠한 담론과도 접합 탈접합될 수 있는 (가능성의) 부유하는 기표floating signifiers다(86).” 기표가 어떤 의미와 접합되더라도 그 의미로 완전히 고정되거나 가득 차 버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새로운 내용이 들어올 공간void; empty space을 비워둔다. 건축학 같자나 # 즉 기표는 언제나 ‘경향적으로 비어 있음’이라는 특성을 띤다... 특정한 요구와 접합되어 있는 기표더라도 다양한 요구들을 / 결핍을 중심으로 묶어 내고 인민적 요구를 보편적으로 대표할 수 있게 된다. (86-87) 주요한 핵심 내용이다. ●특정한 요구와 접합하는 경향tendency을 보인다. 개별적 요구들의 차이도 드러내면서 동시에 담론 안으로 끌어들일 새로운 질서를 제시한다. 이때 ‘우발적 명명’ 행위는 인민적 요구를 급진적으로 구성하곤 한다. 요새 한국 양당제는 민주당이 보수이고 국힘당은 더 오른쪽 far right이라고 규정된다. 맛이 확 가버렸. 급진적 래디컬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민족이라 ㅋㅋ 유튜브 의약 광고 보면 메디컬은 진짜 가짜 가리지 않고 방치하더만. 지젝이 말했다고 하면 좀 받아들일까나. 여~러~분 ㅇrㅇr 지젝은 ★공산주의라는 기표가 결절점 혹은 비어 있는 기표로서 ‘민주주의’ ‘국가’ ‘자유’ 등의 다른 요소들을 묶어낸다고 판단했답니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우리가 함께 본 바가 이론으로 뽀대나게 액자(틀)화 된다. 별 세 개 이상 그릴 것. 고딩 때 색색으로 별 기똥차게 잘 그리는 녀석이 있었더랬지, 지금 뭐할까 ㅎ # 공산주의라는 기표는 단순히 다른 요소들을 대표하는 것을 넘어 / 민주주의에는 ‘참된 것’으로서 ‘공산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의미를, 국가에는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의미를, 자유에는 ‘계급과 경제’라는 함의를 부여했다. (87) 이제라도 바로 알자. 계급과 경제, 자유. 문제는 개별적 요구들은 등가 사슬에서 이탈하기 쉽다. 더욱이 개별적 요구들의 자율성만 강화되면 ‘인민적 등가 사슬을 붕괴’되고 만다. G자유만 외치며 주먹질하던 2, 잘 있는(내 착각일지도) 나라를 쪼개고 갈라치기해 G안사람이 통일하고 재건하도록 꿈꾸지 않았던가. 거기에 부역한 자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인민을 받아들이기 역하고 불손 불순 사상 같다면 국민 피플, 포퓰러로 고쳐 읽어 주시라. 피플과 포퓰러 싫어하는 자 없지 아니한가, 최 뭐시기 장모 발. 헤게모니 정치에는 언제나 긴장이 감돈다. 과히 긴장감이 나쁘지만은 않다. 어떤 운동의 동력이 되어주니까. 역학에서 역동적으로 긴장이 돌고 존재해being 고여 썩지 않도록 한다. 나는 위의 구절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못한(?) 하고자 했던 이행을, 2024년 겨울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착각 환시인가. 우리에게 저런 이론은 없(었)지만 실천이 실재했다는 사실에서 뭉클, 더해 살짝 감격이 감돈다. ♪소녀시대 ‘Gee’ + 엑소 ‘으르렁’
@ 사실 문이나 조한테 관심 없네요. 지금은 오직 이재명과 국익 이것만 보여요.
30 가튼 50 거니 |
|
(공공사 사담 마나요~ 척척 중 월척 ㅎ)
의미의 체계는 ‘경계’를 함의하고 ‘배제’를 함축한다. 완전하고 고정된 정체성은 없다, 불가능하다. 다른 기호(와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다. 그래서 경계 안팎을 살피면 ‘적대적’인 것이 있기 마련이다. 배제된 것들은 체계의 안정성을 위협하기에 예외를 제외하고 등식처럼 확고히 하려한다. # 의미의 체계는 부분적으로나마 안정화될 수 있지만 / 체계 외부 때문에 최종적으로 안정화할 수는 없다. (70) 책에서 의미를 말하자 <맥베스>의 5막 5장을 가져다쓴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가 떠올랐다. 거기 signifying nothing이 있었던 것 같다. 근대영어에? 찾아보면 될 것을 최대한 미룬다. 친구의 주장에 따르면 김은희 작가의 <킹덤 2>를 보면 이잼이 잼통되(어 보이)는 리더(십)와 좀비 정권을 비교해 볼 수 있다고 한다. 한자리에서 6부작을 다 봤다며 작가가 현실 정치판을 다 꿰뚫어 (내다)봤다한다. # 사회적인 것은 담론과 결절점을 통해 의미를 부분적으로 고정한다. (70) ‘사회적인 것’의 차원에서,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든) ‘구축’하려는 노력이 붙는다. 사회적인 것은 “차이들의 무한한 놀이”라고 보고, 놀이를 제한하고 질서의 유한성으로 포괄을 시도한다. 마침 놀이가 나와 삼천포로 잠시 빠지겠다. 김어준 총수에게 방송은 놀이라는 친구의 말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범벅 상태다. 그에겐 다들 선수일 뿐 언제든 판을 짤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보기엔 정치 방송과 여론조사에 이어 아카데믹 교육 사업을 계획하는 것 같다. 친구는 이런 건 대형 스피커로서 괜찮다 했다. ‘사회의 관절’은 언제나 삐긋 어긋날 수 있다는 말이 콕 박힌다. 처음 만난 미용사와의 이십분이 몇 회분 대화량을 응축한다. “그랬다” 했더니 친구는 미용을 배우고 싶단다. 아이들 어렸을 때 직접 잘랐고 지금도 어머니 헤어 담당 가위손이다. 미용사 언니가 남은 인생을 완죤(피죤 아니고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놀랐는데 이 무슨 연속극인가. 언니들의 열정과 에너지 모두 부럽소. # 사회적인 것이 담론적으로 접합한, 대상을 구축하는 불가능성의 시도로서 사회구성체는 / 늘 탈구의 계기를 내재하고 있다. (71) 앞장의 판타지(‘사회적 상상’)에 이어 이번 장에서는 실제와 현실을 긴밀하게 파고든다. 저자가 “의미와 담론의 수준에 맞춰 ‘현실’이 구성된다”는 라캉의 말을 인용했다. 20대 대선에서 우린 국민 수준에 맞는 리더를, 시대정신에 가닿는 지도자를 선택했던 건가. 친구는 국민의 바보짓은 박근혜를 뽑고 최순실을 낳을 때 이미 그랬다(엉망진창)고 일갈했다. 의미의 그물망과 담론 내에서만 ‘의미있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왜 이리 서글프고 쓰나. 현실은 유의미한 것으로 ‘길들여진’ 실재의 일부이다. 극히 일부만 드러난다, 로 들린다. 그리고 ‘객관적 현실 재현의 불가능성’은 현실 구성의 ‘교란’에서 파생한다. 이것을 “현실 구성의 ‘우연성’”이라 할 수 있다. 폭로 가능성을 뻐금 머금은 상태랄까. # 즉 탈구는 사회적 균열과 불협화음 없는 / 완전한 총체성으로 봉합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71) 끊기면 드러나는 관계가 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로니에 28회>의 사이섬 코너만 시청했다. 긁(히다) 유행가고 끊(기다) 올 것 같다. 누군가와 뭘 더 잘해보고자 애써 본 적 없다. 불편이나 이상 기류를 느꼈을 땐 마음이 떠나고 없어서다. 더 잘해볼 생각이 들기 전에 최선을 다하는 성격인 것도 같고. 변측은 좀 그러니까(뭐가? ㅎ) 대략의 원칙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빈칸에서’ 그 빈칸이 새로운 질서의 “구성 공간”이 되고 새로운 정치적 실천 공간이 열린다. 언젠가 유시민 작가가 ‘권력의 공백’ 상태를 차지한 거니 기‘세’ 등등 비선에 대해 말한 적 있다. 검찰청 해체를 앞둔 시점에 비워둔 검찰총장이 드러낼 움직임과 힘빼기 전략을 지켜보는 흥미가 쏠쏠하다. 저자는 탈구는 두가지 면이 있다고 풀이한다. 트라우마적이거나 생산적으로 치료제 혹은 독극물일지 패를 일단 던져봐야 안다. 급락해도 대통 지지율이 50%를 웃돌아 그냥 웃는다. 비교할 것도 아니지만 윤뚱이 24% 찍었을 때 반등이라며 20프로 박스에 내내 갇힘에도 극적으로 빨아주던 Alone 욕본다. ㅋㅋ 정치검사들과 어울리면서 지들도 그 급인 줄 안다더니 부끄러움도 모르고 짖어댄다. 북한보다도 귀엽게 못 봐주겠다는. 가까이 문통 때 정책 실패 시즌 2를 또 찍고 싶지 않은 국민들의 생체 본능 경고음이라는 건 알아야 한다. 친구 말로는 12월 주요 주식 정책이 있어 대거 빠진 결과이기도 하단다. 요즘 청년들 국내외 투자 관련 취미나 공부 모임이 기특하다 쓰려니.. 2000년 초반부터 대학생들 관심이 높았다. 친구는 제로 아이스크림, 나는 브라보콘 사먹는데 “뭐가 3,200원이나 해” 이러고 자동으로 민생지원금 결제돼 원시인은 신기했다. 경제나 돈의 흐름에 둔한 이유 있것쥬 유미 작가니임 :) 정체성과 담론에 균열이 가야 새로운 주체성을 주장할 수 있다. 국민 주권 시대의 상징(적 사진)으로 <다뵈>에서 박구용 교수가 수해 현장을 보여주었다. 농민이 뒷짐지고 잼통이 우산을 씌워주고, 옆 행안위 장관의 우산 크기와 쓰는 방식을 나는 놓.쳤.다. 자기 우산은 자기가 든 사람이 인간적이고 소탈하면서도.. 트집잡히면 안 되는 벌떼 방지 그가 가끔 안쓰럽다. ‘탈구의 시간’은 “일시적이고 정태적인 균형 상태”를 조달한다. 줄다리기가 팽팽한 순간을 stop & stay? hangman?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그람시는 이 균형 상태를 카이사리즘caesarism이라 한다. 말이 짧은데 (내가 어설프게 알기론 제왕절개 어원의) 위인 카이사르가 어느 한쪽이 이길지 기다리는 상황에 빗댄 명명인가보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기류와 동시에 반동하여 원상복귀하려는 두 운동의 ‘경합’이 일어난다. 갈등의 세력들이 파국적 방식으로 ‘서로 균형’을 짓는다고 설명한다. 그렇‘담’ 이 전지구적 양상 좋게 보자요, 끝이 좋으면 다 좋아. # 탈구는 적대적이거나 타협적인 정치 실천이 시작되는 공간을 열 따름이다. (72-73) 프로타고니스트, 안타고니스트에 나 알레르기 있나. 적대antagonism를 통해 어떤 ‘객관성도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 머리 쥐날 태세 ㅋ 이것은 “사회적인 것은 사회가 불가능한 한에서 접합” 한다. 이것은 탈구의 ‘상징화’와 유사하다. 적대가 있어 객관성을 잠시잠깐이라도 잡은 듯,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객관‘화’ 작업임이 드러날 뿐이다. -성과 –화 차이 미세하고 섬세한 언어화 배틀이다. # 사회는 고정된 것으로 (금 나와라 뚝딱) 주어진 것이 아니며 / 의미들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고정하는 결절점의 구축으로 구성된다. (73) 필요성은 우연성을 제한하는 일련의 ‘노력’(수고로운 수작업) 끝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날 실마리 같은. 헌법 Constitution도 구성constitute; construct과 수정revision을 담는다고 알고 있다. # 모든 대상은 담론적 대상이며 완전한 객관성에 도달할 수 없다... 탈구는 사회적 정체성의 분열과 재구성이라는 이중의 메커니즘을 함축하며, 적대는 분열된 사회적 정체성을 부분적이고 불안정하나마 객관화한 결과다. (★73★) 긍께 적대는 ‘정치적 귀결’인 셈이다. 실제적 대립도 모순도 아니라며 선을 긋는다. “실재적 대립과 모순(A not A)에는 갈등이랄 것이 없다(74).” 완전하거나 독립적이지 않다. 반면 “적대 관계에 있는 두 사물은 서로 관계적으로 있다.” 뜨 아, 이게 뭔소리여 싶을 텐데 칸트의 개념을 빌려와 풀이한 것이다. 주관적인 느낌으로서 기쁨은 ‘정체성과 관련’된 결과이다. 동일선상에서 아들이 전사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죽인 적군은 “사회적 적대의 출현”이자 어머니의 ‘비존재적 상징’이 된다. # 다시 말해 적대는 내 정체성의 완성을 가로막는 것이다... 적대는 “최종적 봉합의 불가능성에 대한 증인”이자 “사회적인 것의 한계에 대한 ‘경험’이다. (75) 비올 듯 말듯해서, 아니면 이런저런 사건 사고thought 탓인지 어두운 대입을 하게 된다. 둥이가 보낸 영양제를 박스 개봉도 안한 채 반품하라 하고, 지인이 주는 옷을 받아오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족한테 잘하는 소질 없어 속상;; 스텐 멘탈 단속기 채 해병의 사인은 언제 규명되나. 투스타를 무엇이 개입해 무리해 보호하고자 한 것일까. 윗선은 무슨 연유로 어떻게 연루되었을까. *성근은 퇴직해 연금을 받는다, 화아악. 사람마다 생명값이 다름이 암암리에 공고하다지만 너어무하다. 청년이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따랐을 뿐인데 미친민간인거니 치맛바람. 윗선 알선 위선은 왜 안 캐나! 힘깨나 쓰는 학부모가 낀 교실 문제처럼 잠잠히 덮는 건가. 적대적 존재가 없어진 나는 완전한 정체성에 도달하나?! 그럴 리가 ㅋ 없GBe. 윤건희 정부에서 책 속 식민지인이 타자처럼 느껴지지 않아 롤러코스터에 매달려 세상이 뒤집힌 듯 몹시 불안했다. 유대인과 나치의 수용소 앞을 서성이며 걱정했던 삼년 반. 친구는 이 점에 대해서도 그보다 더 앞으로 쭉빼 넓게 잡아야 한다고 했다. 아하 모든 실체( 앎의 통각이)여 앞자락을 길게 깐 이유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지젝이 인용한 것을 읊기 때문이다. 노예가 욕망을 단념하는 단계. 다음 인용에서 나는 한뚜껑((<해시라이브>에선 한사람))이 윤에게 복종해도 이름을 부르는 누나의 지령을 더 받고 싶지 않았다고 본다. 즉 왕세자는 탐나지만 통일대통 독재를 노린 것이나 그 부속과 종속은 참을 수 없어서 아킬레스건희에 능통하기에 분리를 선언했다고 본다. # 즉 한 사람의 주체성이나 정체성 혹은 완전성은 본래부터 봉쇄되어 있고 억압되어 있고 부정되어 있다. (75) 이 기본과 본성 구성조차 모르고 잠도 안자고 전화돌린거니. 가스라이팅에 먹힌 윤씨가 걔가 순수해서? 순진해서? 박정하지 못했다고 핑계됐던가. 한.사.람 잘 들어~ 내 완전성을 부정하는 ‘적대적 존재’는 “단지 나 자신의 자기 부정이 ‘외화’된 것에 불과”하대. 서로 목줄 쥔 쥔장 젠장 환장들.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동료시민도 아닌 것을 모르고옹 아무리 거니나 후니나 동종 관종 나뿐인 나쁜 나르라고 해도. 뜯어보고 이해해보련다. 이런 휴머니스트. 남편이 아끼는 후배 나베를 즈려밟은거니에 비춰보면 뚜껑이 ‘잡은’ 게 있어, 아니면 한배의 키맨이라 두려운거니.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이유를 밖에서 찾는 격 = 판타지! 와장창. 한뚜껑에게 윤씨란, ”적대적 존재와의 투쟁 승리 = 최대의 상실“에 대입해 왕과 왕세자 ㅇㅈ => <킹덤2> 빨려들어‘감’ 긍데 당신이 박탈당한다고 믿었던 것을 당신은 결코 소유한 적 없었엉. 사과 대신 러브레터 띄우고 대선 치른 거니는 지금도 구치소에서 광화문 특검 나들이를 하고 있다. 또다른 ㄱㅐ사과 찍고 있다는. 국민 어질 기분 더럽 # 노예는 도대체 어떻게 (노예 눈에) 주인이 노예 자신의, 욕망의 자기 봉쇄를 단지 구현할 뿐인지 / 경험하는 때에만 스스로를 주인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지젝). (76) 쟤도 하는뎅 왜 난들 못행 하향평준화 통일천하. 계엄 전후 북한과 21대 대선 이후 일본에게 고마운 국민들. 뭐가 고맙냐면 멍청하고 어리‘석’지 않아서. 정보뿐 아니라 뭔가 겪으면 깨닫고 행동 고침하자나. 덕분에 곳곳에 만연한 냉동인간들과 바퀴 벌레가 죄다 튀어나오는 중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다는 걸 모오올라 사회 현실에서 적대와 ‘순수한 적대’를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위에서 언급한 아들의 전사 소식에 어머니의 상실감을 ‘적대’라고 칭한다. 아들의 전사와 같은 ‘외화된’(윤건희 특기: 남 탓, 덮어씌우기) 적대는, 어머니가 애초부터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가로막힌 ‘순수한 적대’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건 발생과 무관하게 본연의 나로서 이미 나는 나의 순수한 적대라는 말이다. 라클라우는 이에 대해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의 ‘영역’ 사이에는 ‘구조적 틈’이 있다고 주장한다. 외부의=외화된 적대와 순수한 적대는 포개지지 않는다. 순수한 적대 + 외화된 적대 = 색마귀 요괴 수괴 양날(개) ?? # 다시 말해 모든 의미와 존재의 지평이 되는 존재론적인 것과, 그것 위에 서 있으며 / 특정한 실체를 띠는 대상으로서 존재를 가리키는 존재론적인 것이 / 일치되는 순간은 없고 항상 어떤 잉여가 있으면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77)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씨와 김씨는 시대착오적 가스라이팅과 자기 매력 어필과 영악함과 효능감에 (도)취해 겹친 부분이 많으나. 서로 참고 견디지 못하는 ‘틈’과 ‘잉여’가 생기고 말았다(고 이해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니까 오래 버틴헌신이자 배신(땡)감인가. 틈과 잉여는 “주체의 장소”로 개념 포착이 어렵고 물리적 세계에서 부정성이 불가피하다. 긍데 그 부정당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눈총을 무시한다면. 청와대 기피한 것 보면 지운명을 안 무당ㅆ팔자 같긴 하다. 이론적 교착에 빠지지 않으려면 순수한 적대와 특정 사회의 외화된 적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저자는 적대적이지 않은 원시 공산주의 사회가 있었고.. 생산성의 역사로 흐르면서 ‘계급’으로 나뉘어 사회의 역경을 극복하겠다는 환상성 공산주의가 도출 도래했다고 한다. 그람시는 이 같은 환상성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결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적대 축만 남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조승연 커뮤니케이터가 분석한 대로 (대한국민) 우리는 양반성 충전과 재벌 보호주의에 산다. 이 말은 친자본주의, 친미에 우호적임을 시사한다. 긍데 웬 급진 좌파, 중공 몰이! 어불성설 무식 탈로. 친구가 <킹덤 2>를 말하던 끝에 물에 들어간 좀비가 환생하지 않고 싹 죽어야 끝난다고 했다. ^-ㅠ 그니까 윤건희를 포함해 저들이 짜는 판에 동조하며 2찍인 사람들이 ㅈㅇㅇ 끝난다는 엔딩 처리다. 그래야 나머지가 산다, 살림 정치. 나는 그때까지 나라가, 내가 남아있어야 할텐데 했던가. 사변에서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 존재론적인 것(이론)과 존재적인 것(실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틈’이 있다. 건널 수 없는 끊은 다리랄까. 이론적 함정에 빠지지 말 것이, 그 어떤 것도 보편적 계급(성)을 대변하지 못한다. 보편성 역시 “‘우연히’ 구축된 것”이고 자연히 주어진 것도 아니다. 이놈의 판타지에 쩐 특수계급들아 그람시는 전통 마르크스주의가 말하지 않는 “사회적 이질성”과 헤게모니를 다루었다. 복기해두자. ‘비어 있는 기표’는 공동체의 ‘부재하는 충만함’을 표상하고, 비어 있던 것에서 “헤게모니적 기표”로의 전환을 맞는다. 헤게모니( 처방)에 의한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사이의 ‘불가능한 공백’ 메우기를 시도한다. 두 적대적 진영의 이동은 불가하다. 틈의 급진성 때문에 경사 기울기가 심한 이유에서다. 개념적 포착도 표상도 불가능한 넘사벽 맞고요. 우리가 명심할 사안은 “모든 주체는 결핍”되어 있고 이로써 ‘적대와 배제는 끝까지’ 해소되지 못한다.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에서 ‘결핍의 경험’이 생기고, 상대가 (적대로) 부각된다. 대개 내 요구에 응하지 않는 상대라는 “이분법적 분리”로 끝난다. ㅠ 결핍된 존재로서 또는 집단과 적대적 관계에 놓임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배제된다. 그럼에도 잊지 말자, 나는 본래 이미 부정되어 있다. 결핍 됨(의 존재)인 거다. 그렇다면 적대하는 타자는 나의 결핍이 아니다. 또한 객관성은 불가능성이라서 ‘탈구’를 시사한다. 탈구가 ‘적대의 조건’을 이루기 때문이다. # 즉 모든 사회적 관계는 불안정하며, 불안정한 관계 안에서 주체가 그 결핍을 채우고 완전한 정체성을 희구하는 과정에서 적대가 일어난다. (79) 살아 있는 한 끼는 이끼 같은 거라고, 고뤠? 그렇담 순수한 적대는 상수로 두고 외부에서 온 적대는 가급적 낮추고 깎아 결핍도 덜고 불안정도 덜어야, 나와 세계가 평화로운 것이 된다. 세상 대부분이 단면이 아니라 양면, 다면이라는. 그 흐름 속에 나를 두고 트이게 사는 수밖에 별 수 없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의.외.로 세상 변화보다는 나부터 자알 살자는 현실적 자기 구명 방안을 밀착해 알려주는 듯하다. ♪레드 벨벳 ‘싸이코’ + ‘내 여자라니까’ |
|
톡 ♪산소 같은 너 신화라는 말 앞에 ㄷㄷ 얼어붙는 1인이다. 구조 뜯어보는 풀이에는 혹하면서 이상하게 미스myth하면 미스 테리, 미스 테이크. 영감~ 왜 불러 타령 같아 정색하곤 한다. 철학은 회오리 화법이라서 신화는 너무 짜맞춘 작위성 폴폴이라 가깝지 못하다. 그러면서 유명 아포리즘(:경구)은 즐겨 쓴다. 신화 뒤에 붙은 '사회적 상상'을 밀고 나가 보자. 신화도 솟았다 사라지는 ‘경합’을 펼치는 것을 아시는가. 신화에도 유행fashion이 있다아. ‘탈구적 계기’가 생기거나 오면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해석력을 소진하면 그 신화는 잠잠해진다. 그러니까 신화도 헤게모니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채색) 옷을 입는다. 저자는 “신화의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 신화는 ‘새로운 재현 공간’을 구성해 기존 통일체의 탈구된 공간을 봉합하려 한다. (58) 단단한 이야기 구축물이다 보니 빈 구석이나 난 자리는 채우는 속성이 있다. 알다시피 완전하고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탈구적 계기가 바람을 넣어 신화적 (재)해석을 허용한다. 저자는 이것을 “부재하는 충만함”에 빗댄다. 어떤 구조물 안에(든) 꿈틀대는 움직임을 포착한다. # 이 과정에서 특정 신화가 궁극적 인식 지평을 재현하는 것으로 / 사회적으로 여겨지면, 그 신화는 사회적 상상이라는 판타지 효과를 내는 이데올로기적 지평으로 자리잡게 된다. (58) 위의 인용에서 인식 지평과 이데올로기적 지평의 대구가 부각된다. 신화는 당연히 개인이 아닌 ‘사회적’ 차원을 강화해 판타지를 유지하거나 (다시) 만들어낸다. 여기 신화 왔어요, 띵동. 배달 경로를 모르고 마시는 식탁 위 우유 같달까. 음 몸에 좋은 것이여 6장은 신화를 말하겠다고 하고선 의외로 판타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프로이트는 판타지가 상상에, ‘무의미한 욕망’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게 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 이론을 받아 뒤집거나 덧대는 라캉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 판타지를 영화 스크린에 고정된 이미지와 비교하면서, 판타지란 그 고정되고 부동하는 특질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 언제나 하나의 의미화signifying 구조로 작동하는 이미지 집합으로 존재한다고 언급한다. (60) 라캉의 초유 관심사, 상상계와 상징계를 판타지에 적용한 듯 보인다. 영화 플레이(: 재생)만한 판타지가 작동하며 먹히는 세계도 없다. 거울도 그렇고 스크린은 냉정한 상징 질서, 즉 외부의 시계가 작동을 멈추거나 감춘 매개 상징물이다. 인간은 ‘상징 질서 안에서 결핍’ 상태가 된다. 어둠 속 다른 평행 세계를 통해 고양이처럼 핥거나 할퀸다. 결핍은 질서 안 주이상스(: 향유)의 상실과 억제에서 기인한다. 나라는 주체는 끊임없이 큰 타자The Other를 의식하고 반응한다. 결핍과 욕망은 부족을 채우는 판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개입된) ‘거세 두려움’은 주이상스를 꺾고 억눌려 주체의 결핍을 두껍게 한다. 이는 다시 욕망을 일으킨다. 사회적 거세에 손절을 넣어도 될까. 결핍과 욕망 사이에서 ‘판타지’는 실재계를 완전히 반영하지 않는다. 현실을 잊거나 버티기 위한 임시 방책으로 만들어진 가공 산물인데 당연하지 않은가. # 이때 판타지는 상징계의 상징적 실패를 은폐하고, 애초 도달할 수 없던 실재계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그 상징적 실패에서 비롯된 상징계의 틈새를 메꾸기 위해 요청된다. (60) 어렵게 표현됐지만 현실이 내 생각과 다를 때, 또 따로 놀 때 판타지를 찾게 된다. 당장의 갈증을 (간편) 해소하는 상상적 매개라서 비용이나 수업료가 덜 든다고나 할까. 인간을 만물 중 하나로 보자면, 경제적 효능을 만면에 추구하게끔 만들어진 인간 구조물(가구 ㅋ)이 놀랍지 않은가. 김거니만물설 빼고 라캉은 주체가 큰 타자를 끊임없이 갈망한다고 보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알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이다. 큰 타자 개념이 낯설 땐 <더살롱>에서 류근 시인이 말한 너무 헤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전우용 역사학자의 “내가 남편‘들’과 다시 살 수 있을까, 버티시라”를 떠올려보자. 다른 이야기, 외설ㅋ로 풀면 귀에 쏙 꽂힌다. 너무 헤픈 욕망은 욕망이 아니었음을~ 한참 전 멤버였던 강 대변인이 했던 말, ‘그녀는 자아가 없다.’ 자기다움으로 근본과 줏대 있게 다져야 하는데 덕지덕지 짜기워 애쓴 꾸밈이나 치장으로 보기에 엽기적이다. Just be yourself는 Know yourself와 같은 말이 아닐까. # 주체의 결핍은 채워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큰 타자의 욕망에 대한 이 질문은 / 끊임없이 반복될repetitive 수밖에 없다. (60) 상상을 상징 질서 안에 맞게 구축하지 못하면 흘러내리는 (세기말) 추악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되고 만다. 상상의 이카로스 날개도 현실에서 펼쳐져 균형 있게 날갯짓하지 못하면 도리어 추락의 지름(길)이 되고 만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어째 윤건희가 국민을 지난 장에서 말한 ‘남유의 대가’로 빚고 만다. ^^ 자기 환상과 상상을 YUJI하고자 자기만의 성(역)에 갇혀 저 꼴이 되었다나 모라나. 둘러친 주위의 사람들 보면 그(의 면면)를 알 수 있다. 동종 교배만한 도태와 부패 수순도 없다고 자연 세계가 그리 알려주었건만.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만 본(뜬) 모양이다. 극우 세력이 극악무도하게 날뛰지만 그에 맞먹게 생태 민주 의식을 가진 구성원이 는다. 그걸 모르교옹 # 결국 판타지는 ‘거세’의 두려움에 대한 답변이며, 주체는 항상 판타지와 자신을 동일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을 없애려 시도한다. (60-61) 선순환이 아닌 악순환 문 고리들. 밖에 있을 땐 장님 무사의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였던 한통속이 옥에 들어가서도 그 짓이다. 어마무시한 사태 속에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 살던 대로 굴어 정준희 언론학자는 ‘순진하다’ 했다. 사악한데 배우지 못하는 멍충이라는 말 같다. 특검 재판을 받는 건지 알 수 없게 언플한다. 지가 총괄 통솔 메신저, V0 판타지를 유지해야 무너지지 않음을 전시한다. 수수깡 허수아비는 지가 아직 신분이 왕인 줄 안다. 특검 거부하면 범인이라더니 모든 추태와 패악질을 보이며 법꾸라지처럼 (국민을 가지고) 논다. 이런 식으로 보니 한뚜껑, 햄 안띨수, 김문순대 다 파악이 된다. 그 굴절된 확대 거울에 비친 그대들을 연신 보는 시민들이 괴롭다. 눈과 귀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내란성 학대와 고문 어똑행 # 정치의 영역에서 판타지는 (상징) 질서의 구성적 결핍을 은폐하고, 그것이 구성되는 주변에서 / 기표와 기의를 연결하고 어울리게 하는 결절점(라캉의 누빔점에 대응)을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61) 막상 읽을 땐 딱딱하고 거리감이 있더니 윤건희 머저리 모조리 팍팍 때려 넣으니 이해가 싸악 된다. 그 결절점 누비느라 스파이더콜걸 부엉이 생활한거니. 그 가족들에겐 인당수 효녀려나. 참 희한하게 더럽. 어디 저딴걸 레이디 맥베스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가져다 대냐던 성토가 빵빵 울리네 # 지젝에 따르면 판타지는 ‘상상적 시나리오며, 주체의 구성적 결핍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실정적 지지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61) 브이 제로면 뭐하나. 남들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해. 오로지 지가 기획한 무대와 촬영진, 행인들, 중 노년 가촉민 앞에서나 입 놀리면서. 실질적 내란 수괴도 걔라는데 그럼 외래 진료 받은 것도 알리바이 작전 주인거니. 술통, 먹통에 버금가는 들통 잔머리 라이어. 그래도 검찰총장과 대통령 만드는 프로젝트는 달성. 내실 부실 공사로 족족이 말아먹고 나라곳간 털어버림. 알박기 (관직) 인사들 걷어내고 검언 개혁하고 사이비 잡탕 종교 단속하면 새 날 오고 차차 나아지겠지 판타지도 두 얼굴을 지녔다. 긍정적으로 활기차게 살게 하는 특효약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적대’ 개념에 대응하게 돕거든. 책에선 ‘쾌락의 충만함’이라 하는데 나는 즐거움 가득, 잼통의 행복과 희망의 나라로~ 에 대입하고 싶다. 사회 구조의 “빈 공간 즉 결핍을 채우려 하는 시나리오”가 되어줌에는 피플(: 국민) 판타지 환영하고 장려한다. 이런 시나리오, 받아듦 GPS(A.I.에선 GPU ㅎ) 안내 받지 않고 어떻게 살나 싶다. 크게는 국가 비전. 주권자 국민과의 눈물겨운 약속. 국민이 하는 정치 이행. 판타지가 착취적, 종속적 형태만 가지지 않는다고 보.고. 싶.다. 동일화와 차별화 과정에서 결핍을 채운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비교 대상, 참칭 보수라는 집단의 말로와 계속된 악질 똥~볼 차기. 반칙 선언하고 퇴장 시키자.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 눈동자가 따뜻하다”(이성선)쟈나 어떻게 기승전 정치 ㅎㅎ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가 판타지의 양면을 정리해보겠다. 먼저 “우연하고 결정 불가능한 주체의 사회-상징적 정체성을 고정”하는 기능을 한다. 정치 질서를 유지하고자 사회적 ‘적대’를 제거하는 성질이 도드라진다. 긍데 이게 다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탈구’가 일어나면서 동일화가 부정되고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판타지를 원하고 공동의 이야기, 신화까지도 달라진다. 트랜스 포메이션. 저자는 판타지를 “결핍을 채우는 실제적 해결책”은 아니라면서 ‘절충물’일 뿐이라고 한다. 결핍의 은폐 용 임시막 정도로 바람을 빼 부피를 줄인다. 던지면 펴지는 텐트 같네그려 # 결국 판타지가 주체에게 제공하는 것을 잘못된 동일화일 뿐이다. (62) 지젝이 위와 같이 단호하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구조와 주체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적대”를 보지 못하도록 판단을 흐리기 때문이다. “정치 질서와 고정된 사회적 관계를 영속적으로 유지”하는 힘으로서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상상적 시나리오’가 “실증적 도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작용과 반작용 주거니 받거니 # 즉 ‘판타지는 그러한 공포를 은폐함과 동시에 그것이 은폐하려고 하는 것, 피억압적 지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판타지는 질서의 전복 가능성을 억제함으로써 / 우리가 연대와 협동을 통해 조화를 이루는 유기체적 전체로서 / 사회에 대한 관념에 빠져들게 한다. (62-63) 사람들이 괜히 지젝~ 지젝 노래하는 게 아닌가보다. 반(대)탄(핵)과 찬탄 집회를 통해 무수히 확인한 성질이 판타지 기저에 깔린다. 어떤 판타지를 받아먹고 네가 되었니 답하게 이끈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가위 바위 보로 끝나지 않아 놀이가 될 수 없구나. 판타지 얘기하다보니 환타 생각난다. 판타스틱에서 왔나. 다른 탄산음료도 여러 과일 맛인가. 한모금씩 다 맛보고 싶넹. 지금 여기 캔음료의 계절, 닥터 페퍼 마시는 잼솔솔 했는데 제로가 더 단 것 같으. 진한 웰치스 파 입맛 바뀌나 다시 판타지로 돌아가, 그것은 대중 통제와 질서 유지와 재생산을 뒷받침한다. 큰 타자의 그림과 공포를 ‘접합’하여 도출된 효과를 노린다. 이 과정에서 일어났던 야만적 폭력들의 기억은 제거하고 ‘질서의 역사’만 보(이)게 편집 조작한다. 자꾸 끼어드는 여담. 악귀 요괴를 낳은 조작의 달인 검찰. 정치검사들이 한직으로 물러났다고 기사 뜨던데 사실일까. 정치보복 프레임 냄새나는. 검찰청이 행정부 소속, 검사가 공무원인 거 아는 사람 별로 없다. 대통령이 행정부 수장인 것도. 국회가 입법부인 것도. 조직 구분과 알림이 먼저일 듯하다. 그렇다. 신화는 기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판타지 효과를 마술봉처럼 부린다. 반면 ‘사회적 상상’이 전환되면 탈구적 계기가 되어 새 신화로 거듭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한계가 드러나면 통일체를 유지해온 기존 판타지에 ‘도전’장을 던지게 되어있다. 또 여담. 동일성.. 누적되고 체화된 한몸 잠식.. 직업병. 정청래 대표의 독립기념관장의 망언에 대해 ‘역사 내란’이라고 명명했다. 턱 턱 걸리며 점핑하는 한뚜껑이 이에 대해 윤미향 사면을 갖다 붙이며 역사 ‘잡는’다고 했다. 머릿속이 온통 피의자 잡기여야 가능한 발언 아닌가. 윤씨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그 정부 법무부 장관이자 국짐 대표였음을 잊은 듯하다. 잡힌거니 # 판타지는 야만적 폭력에 대한 기억들을 동원하고 끊임없이 재생산함으로써 / 대중이 현존하는 질서에 저항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억제한다. (63)
● 현재의 판타지 공간에서 탈구의 순간에 새로운 신화가 등장하면, 통일체의 새로운 정치 시스템과 새로운 재현의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 새로운 정치적 투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존의 판타지에 도전하는 신화의 출현은 / 주체의 위치를 새로운 정치적 동일성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한다. (64) 신화도 흔들어 깨워 다시 쓰는 마당에, 마당으로 나온 암탉(: 한씨)을 포함해서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쓰길 바란다. 새로운 역사 지평은 말할 것도 없고. YS가 탈 군사정권이긴 하지만 보수 쪽에 속해 DJ가 제2의 건국을 말한 것도 널리 알리면 좋겠다. 광복절이면 광복절이지 건국절과 둘 다 취해는 뭐야, 법기술자 수사반장놀이 징(글)하다. 점 점 연결해 논리 튐 주의 ☞<해시라이브 129회> 참고. 투쟁을 주도하는 정치적 주체와 앞 장 ‘등가 사슬’(스크럼ㅋ)이 짜이면 신화를 “전유”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세력이 된다는 말이다. 신화는 새로운 통일체를 재생산하고 그에 따른 의미와 행동의 궁극적 지평을 제공한다. ‘유일한 독해 코드’로 지배적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우리도 돌아볼 건재하는 판타스틱 미스가 필요 행 # 유일하고 진정한 독해 코드로서 지배적 판타지가 될 때까지, 탈구된 공간에서 표현한 / 다양한 신화 중 일부는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사회적 상상이 되고 판타지 효과를 발산한다. (64) 기존 질서가 신뢰를 유지하지 못할 때 ‘사회의 불가능성’에 빠진다. 거기서 사회 질서의 탈구에 대한 ‘담론적 대응’이 발생하고 동일성을 부정한다. 즉 “사회적 적대”는 ‘탈구적 계기’에 대한 신화의 대응이 만들어낸 효과라 할 수 있다. # 적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내부 동일성을 구성하고 / 구성적 외부의 존재를 드러내는 서사로서 신화가 동반되며, 이것이 ‘우리’의 동일성 그리고 적대적 타자와의 정치 경제 구축을 위한 정치 공간을 발생시킨다. (65) 위의 정의에 따르면 신화는 “헤게모니적 실천”이자 ‘사회적 상상’의 위치를 차지한다. 사회적 상상이 될 때까지 다른 신화와 ‘경합’하거나 “적대적 관계” 속에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인다. 그니까 신화는 (고)생물인데 잠시 고정된 기틀로 쓰이며 쓰임을 다한다. # 헤게모니 투쟁 과정에서 신화와 사회적 상상은 사회와 사회적 행위를 / 실정적이고 완전히 봉합된 동일성으로 구성하려는 담론의 이데올로기 형태를 의미한다. (65) ‘부재하는 / 충만함’을 주는 신화는 이야기로서 보편성을 얻고 다시 사랑받는다. 애용 됨 # 충만함과 보편성의 부재한 상태 즉 비어 있는 장소void를 채우려는 시도가 / 그 신화의 특수한 내용에 의해 계속해서 주도될 때, 신화는 의미와 행위의 궁극적 지평을 제공하는 사회적 상상으로 탈바꿈한다. (65) 그렇게 신화는 “사회적 탈구를 봉합”하는 새로운 ‘독해 원리’를 제시한다. 사회적 요구를 새로운 신화적 질서 안으로 통합한다. ‘사회적 상상’으로 근간 판타지의 위상이 전환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차원에서... 탈구적 계기, 위기의 상황에서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신화가 점차 사회적 상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66).” 등가, 헤게모니, 정치 논리는 포퓰리즘 운동의 구성 요소라며 장을 마무리한다. 여기에 판타지를 넣어두자. Humid & Hot 됐고 어디든 떠나보자~ ♪Need a Break @ 나참... 내 차례 돌아올까봐 은근히 긴장하면서 보고 있다 ㅎㅎㅎ ++ <알북 19회>가 정치비평~ 제 모습으로 ㅎ 돌아왔다. 앵앵거림에서 신입사원의 초고속 적응마냥 정치인으로 거듭난 박은정 의원님(의 역량)이 더 잘 보이는 시간이었다. 2부가 남아 있어 여는 말 정도 남길까 한다. 검사는 나와 적 ‘이분법 안’에 살기 쉽다. ‘선서 뽕’을 맞은 정치검사 집단. 그 구성원이 선거 뽕까지 맞는다면?! 어질하다. 검사의 10%가 특수부나 공안 검사인데 그들이 검사‘장’을 다 해먹는다. 대법원장과 마찬가지로 기관장들이 “어쩔건데!” 저 높은 성역에 계신다. 지상으로 끌어내릴 타임(두가지 뉘앙스)이다. 판검사 합해 오천 몇 명. 국민은 오천만을 웃돈다. 소수 카르텔에 맞서 얼음공주 따라 웃으며 싸워 보자. 윤씨와 한씨.. 주씨 등의 말은 ‘대체 무슨 말이야!’ 궤변으로 들린다. 그것이 공소장을 작성하는 그들의 말버릇이자 사고 습성이란다. 사실이 아닌 상상을 투입해 본질을 흐려 물타기로 사상을 검증하려든다. 법왜곡죄. 공작새의 꼬리 날개 펼침이 주특기이다. 캐비닛을 빌미로 협박 정치질을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직권 남용과 직무 유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최고로 잘나서 외부의 중재('감찰')나 남의 말을 듣질 않는다. 상상계의 비틀린 판타지로 상징계를 왜곡하기 십상이다. 누군가에겐 중대 비위이고 ‘검란’인 것이 다른 집단에겐 ‘추, 윤 갈등’으로 포장돼 먹힌다. 입틀막, 눈가림, 정치적 무력감과 갈라치기 조장이 계속되고 있다. 소름끼치는 부분이 용산 멧돼지가 ‘개선장군’처럼 풀려나는 장면이 (우리가 아는 것만) 두 번째이고, 망상일지언정 세 번째 도래, 윤 어게인을 외친다. 이것도 반향실 학습 효과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2는 코바나와 도이치 수사 무마를 발판 아니 빨판 삼아, 패밀리 사조직을 꾸려 브이 제로 행세를 했다. 지금도 기획 전시 중이다. 마포대교 순시와 캄보디아 아이를 구겨 안은('빈곤포르노') 장면은 기리 보존, 옥체 보중하소서 어맨 |
|
(포퓰러 나무 아래 도피 각 @.@)
선거철이면 귀 따갑게 듣는 포퓰리즘. 어느 진영할 것 없이 서로에게 포퓰리즘이라고 삿대질한다. 미국은 트럼프가 소셜미디어 공포ㅋ 정치를 하면서 포퓰리스트로 떴고.. 한국은 어쭙잖게 윤뚱이 카피해 지금까지 후려쳐 닳을 대로 닳아버렸다. 그래서 5장이 반갑고 의미있다. 참 얼굴을 (알아)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Remix 위에 내가 떠든 대로 저자도 정치 세력이나 언론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딱지를 “비방의 의도”로 붙인다고 평한다. 딱지를 스티커 꾸미기로 탈바꿈, 다시 만들어보자며 읽어나갔다. 저자의 지적처럼 학술적 내용 규명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포퓰리즘에 대한 정의하기 시도가 교착 상태에 빠진 듯 보인다. # 어떻게 정의하든 그 정의를 거스르는 예외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46) 내가 라클라우에 대한 소책자(팜플릿)를 읽게 된 데는 김내훈이라는 공저자에 힘입은 선택이었다. 극우 양산과 청년의 정치 언어를 조망한 <토요토론 29회>에서 그는 레거시 미디어를 질타했다. 듣고 보는 것의 상당한 지배와 노출 수위의 수렁을 전면에서 말했다. 번역서 <인싸를 죽여라> 다음 두 번째 책이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저자는 모든 ‘표현과 의미’에 명민하다. 나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이 (형성formative) 지배 담론과 포퓰리즘에 유독 인색하고 부정적이라고 본다. 아마 중공몰이, 공산당 치부와 아픈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군사 독재 정권에 불만 있는 운동권 학생들이나 아는 개념쯤으로 금禁해온 것이다. 아니면 소수 엘리트들이 다수 인민 대중의 의견을 폄하하고 무시할 때 포퓰리즘 딱지를 붙여온 관성적 그림자가 드리우나보다. # 캐노번은 이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족적 유사성으로 / 금권정치(=이권) 정치인과 엘리트에 대항하는 풀뿌리운동을 이야기하면서, 포퓰리즘에 두 가지 보편적 특징이 있다고 지적한다. (46-47)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반대로 뒤집어 봐야 할 수도 있다. 첫째 인민에 대한 호소이다. 둘째 반엘리트주의다. 사회적, 정치적 내용이 고정되거나 귀속되지 않는다면서 ‘미결정성’에 대해 더 논의되지 못했다. 긍데 구조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닌 이상 그 ‘밖’의 포스트(후기 혹은 탈)- 이론이 갖는 공통적인 특색(대거 찌찌뽕 사태 ㅎ)이 미결정성이지 않은가. 해서 나는 아쉽기보단 이제라도 열린 긍정으로 말하면 된다고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한 이론적 해소를 제공하지 못하고, 많은 정의들을 때려 넣어 이상한 잡탕이 되었다는 말의 취지는 이해한다. 요즘 나는 엘리트(주의)에 믿음이 가기는커녕 불신하고 의심하는 쪽이라 저들이 말하는 엘리트가 진정 엘리트 맞나? 아주 찰나 한때? 영영 철밥통 특수 계급? 요런다. 나이-테라는 게 좀 생기길 바라까지 찍고 온다. 포퓰리스트의 스타일 24개 중 “도덕주의적(개뿔ㅋ), 반지성적(맞고ㅋ), 비체계적, 충동적, 인종주의적”을 스윽 훑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버드 출신 이준ㅅ과 조정ㅎ을 대입하니 소개된 스타일에 모두 동그라미가 쳐진다. 그대들이 이 시대의 진정 포퓰리스트~ (반어법임돠) 이 대목에서 참칭 언론이 유시민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겹친다. 침팬지 알파메일의 난폭함과 그 운명을 예언할 때는 조용하다가, 김문순대 처가 꽃받침하며 헛소리한 걸 제정신이냐고 평한 걸 (가지고) 인격 겸 노동운동 겸 여성 모독한 것처럼 여론 몰이했다. 이보다 편집증 강박에 사로잡힌, 집어 먹힌 광포 집단이 있을까. 참 쉽고 편‘리’하게 산다. 포퓰리스트의 특징을 나열하고도 몇 개여야 포퓰리스트인지는 불분명하단다. 대체로 화가 나 있고 과격하고 무례하며.. 절망, 분노, 공포, 원한 등의 부정적 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한다. 누구게? 친구가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 번지는 극우적 사고와 준동을 알려줬었다. 이것을 <토요토론 29회>에서 딱 집게로 잡아 보였다. 파워 엘리트 타워 보존 욕구와 요구가 꽉 막힌 구태인 줄도 모른다. # 이러한 시각은 포퓰리즘 지지를 감정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 축소할 위험이 있고, ‘대중은 너무 감정적’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답습한다. (47) 그러니까 포퓰리즘을 부풀려 가져다쓰면서 정작 자신들은 빼거나, 상대가 하는 것만 포퓰리즘이라고 덧씌우는 선택적 불합리함으로 중무장한다.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말로 현란한 혀 꼬임으로 홀린다. 정치공학적이라며 부추기는 채널 스피커가 더 나쁘다. 마르크스주의에서의 포퓰리즘은 대중과 연결되며 ‘결집’하는 슬로건 같이 쓰인다. 지금 우리가 동행 체제로의 정치를 응원하지만 동원이, 동원령 뉘앙스 없이 행동과 실천이 짜일 순 없다. 글쓴이는 포퓰리즘 정의의 연이은 실패에서 어떤 편견을 감지한다. 수사(레토릭)에 대한 폄하하는 시선이라는 해설이다. 고고한 말솜씨나 고등 교육의 흔적으로 레토릭을 대하는 듯하다. 어떤 이는 수사와 이데올로기를 비교한다. 전자는 ‘지적으로 비워 있는 것’(골빈 아무생각 막말ㅋ)으로 포퓰리즘 운동과 직통이라고 낮춰 말한다. # 이러한 관점은 수사가 꾸밈 언어일 뿐이며, 내용에는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는다고 파악한다. ◎수사에 대한 편견은 포퓰리즘적 상징을 중심으로 결집한 사람들은 / 비합리적 동기로 움직이며 동원된 세력이라고 보는 그릇된 이해의 원인이 된다. (48) 군중과 대중은 다를진데 군중의 두 얼굴은 언론의 양비론처럼 말해진다. 내가 그 대중 안에 속하고 해당 포퓰리스트(과격한 앵무새)일 땐 위의 접근이 세상 섭섭하다. 기틀이나 근본 없이 질러대는 무리로 무지성 무지렁이로 분류되는 듯해서다. 누구보다 이유 있고reason able 나름 면밀히 들여다본 후 따르며 따라하는 거라구용 헤헤 아래와 같이, 라클라우는 수사의 기능을 폄하하지 않고 “수사는 이데올로기의 구조”라며 오히려 더 조하~ 한다. # 라클라우는 ... 수사와 이데올로기를 구별할 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와 운동을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48) 입이 열리면 발도 같이 움직인다는 말 같다. 남들이 결여로 언급하는 ‘반지성주의나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을 굳이 중심에 두지 않는다. ‘일반화된 수사’가 곧 “헤게모니”라며 격발적, 결절적 운동 생성을 내세운다. 이전 관념이나 관습에서 풀려나(해방 됨) 정면 돌파, 솔 직구를 날린다. # 포퓰리즘을 비합리적이고 지적으로 빈곤한 운동 혹은 이념으로 파악하는 데서 / 벗어나려 다른 접근법을 도모한 것이다. (48) 그는 어떠한 사회적 현실과 상황의 표현인가 억지로 묻지 않는다. 부수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남기를 거부한다. # 포퓰리즘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내용만 논의 대상으로 남고 / 왜 그것이 포퓰리즘으로서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포퓰리즘을 변칙적 사회 현상에 귀속시키거나 서로 다른 여러 운동으로 포퓰리즘에 (모조리) 구겨 넣을 수밖에 없게 된다. (49) 라클라우는 기호 작용(‘표현과 의미’화)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는 포퓰리즘의 ‘모호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낮은 단계의 논리라는 폄하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제부터 ★49-50쪽은 여러 번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 담긴다. # ◎포퓰리즘의 모호함은 사회 현실 자체가 모호하고 미결정적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포퓰리즘을 ‘단순화된’ 정치나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는 논의들을 거부하고 / 사회과학 담론의 주변으로부터 구제한다. 모호성과 미결정성을 주어진 전제로 두고 / 수사가 구조적 응집의 매개라는 데서 출발함으로써, 포퓰리즘이 정치적인 것의 구성을 파악하는 첩경(=방편)이라는 명제를 도출한다. (49-50) 이래서 정치철학과 법철학 전공 박구용 교수가 폭력에 맞선 자유의 빛, 빛의 혁명에 주목하나보다. 발빠르게 이론화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 발동 중이다. 남의 말과 일인 것처럼 썼지만 나의 바람과 갈증과 허기와 겹쳐 눈여겨보고 있다. 현상과 운동에 대한 통시적, 동시적 정립과 정의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다만 너어무 성급히 멀리 가버리지 않기를 조마조마하게~(민주당 지지자 다움 ㅎ) 바라본다. 조심조심 신중하되 갇히거나 굳어 녹슬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다고 운동을 앞질러 가지 마, 급하며 탈나 한다. ^^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낯설고 난데없고 처음 겪는 일이라 과민 과잉 반응하는지도 모른다. 모호성ambivalence과 미결정성은 보유하되 ‘응집의 매개’로 “정치적인 것”의 구성함에 포퓰리즘의 용도와 쓰임을 적극 활용했으면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이데올로기에 못 미치는, 하수 수사면 뭐 어떠리 한다. 외국의 대학에선(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수학하는 곳) 수사학을 필수 코스로 삼고, 셰익스피어 전공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들었다. 수사 우습게보지 말지어다. ㅇㅣㅎㅣ 수사 별로 안 좋아하면서 이런다. 라클라우 발? 혹은 표? ‘포퓰리즘 이론’의 접근 범주는 네 가지이다. 책에선 담론, 비어있는 기표와 헤게모니, 수사를 언급한다. 첫째 담론은 단순히 발화나 씀이 아니라 ‘관계로서 구성’되는 체계를 가리킨다. 소쉬르의 ‘언어는 차이’라는 명제를 차용한다. # 기호 작용에는 조합과 대체만 있으며 / 차이의 놀이를 넘어서는 것은 없다고 전제한다. 어떤 요소가 다른 것에 비해 ◎특권을 가질 이유는 정해져 있지 않고 / 오직 차이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50) 특권을 정해놓고 기득 화한다면 그것도 후속으로 사회가 만든 것이다.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나 이권 패권 다툼이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친 권리 보장인 셈이다. 누가 부여 부역했니 둘째 비어 있는 기표와 헤게모니에선, 잠시 임시로라도 ‘차이들의 연쇄’ 속에 “고정하는 결절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대상을 포착하기 위한 접근법이다. 재현 불가능성을 띠나 그럼에도 반드시 필요한 총체성의 표상이다. # 재현 불가능한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총체성의 표상이 된다... ◎특수성이 옅어지고 점차 보편적인 것의 표상이 되면서 / 비어 있는 기표가 된다. 비어 있는 기표가 (꽈악 채워져) 보편적 기호 작용을 하는 메커니즘을 ‘헤게모니’라고 한다. (50) 셋째 수사이다. 키케로는 수사는 명명해야 하는데 경험이나 데이터 부족 시 일어난다고 보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택도 없는 소리로, 라클라우는 경험의 많고 적음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 언어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명명하는 것이다... 표상이 불가능하지만 / 반드시 표상되어야 하는 대상을 명명해야 할 때 비어 있는 기표가 부상하는 메커니즘에서 공통적으로 남유catachresis가 일어난다... ◎마땅한 이름이 부재하기 때문에 일련의 비유 연쇄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인민’의 정치적 구성은 본질적으로 남유의 산물이다. (51) 수사의 근간을 남유로 본다. 명명할 특정어가 없기에 비유적으로 걸쳐 말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 영어의 셰익스피어 극이 운문 시로서 각운이나 커플릿couplet 사용으로 구조적 통일감을 주었구나. 바로 전할 길(ㅋ 錢한길 얼씨구)이 없으니 우회하고 걸친 덩어리 표현이 많구나 한다. 책에선 의자 다리를 예로 든다. 나는 ‘인민’이라는 어휘와 개념 자체가 남유의 누적이자 그 안의 테트리스 게임 같은 운영 구조에서 남은 기틀과 뼈대로 느껴져 귀하게 다가온다. 인민 너는 엑기스였엉. 인민은 관계로서 형성된 것이고 동시에 어떤 집단이 만들어지는 방식인 것이다. 저쪽 국민 팔이 타령 쯧 내쳐야 한다. 미결정적 요소가 담론적 접합을 가능하게 하고 포퓰리즘을 낳는다. 저자는 ‘정치적 결집’의 최소 단위가 요구demand라고 말한다. 단위 unit는 언어학에서 쓰는 덩어리를 해체하고 구속하는 개념이라 흥미롭다. #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이란 ‘인민’이 관계로서 형성되는 것이며, 어떤 집단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포퓰리즘이 people+ism 즉 인민주의라고 직역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 라클라우가 말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란 인민이 형성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52) 오늘 기사에 서울에서 살기좋은 구 순위를 보았다, 책에서 든 판자촌의 위생, 안전 문제 해결에 대한 요구는 요청request이 될 때 정책으로서 실효성을 얻는다. 교육, 의료, 교통 등 “요구들 사이의 ‘등가적 관계’”’가 뭉칠 때 비로소 움직이는 정치적 힘이 된다. 대조적으로, 민원 ‘사주’ 류씨나 한씨나 김씨 너어땡, 꽝. 어따 대고 복제 매트릭스 찍냐 # 다수의 요구는 등가적으로 접합되어 더 넓은 사회적 주체성을 형성한다. 이것을 ‘인민적 요구popular demand’라고 부른다. 이제 역사의 행위자로서 ‘인민’이 만들어진다. (52) 역사적 성립, 정립. 구성체 완성이 ‘인민’이라는 말 같아 울컥한다. 위의 인용에서 ‘사회적’ 주체성의 수식어 사회적이 유독 눈길을 끈다. 합의에 이른 흔적과 증언 같아서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의 도출 경로로 인민과 권력 집단을 가르는 ‘내부적 적대 전선’의 형성을 든다. 또 다른 경로로는 인민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요구들의 등가적 접합’이다. 앞서 말했듯이 동행 정치를 말하는 우리들이라서 다소 투박하게 들린다. 정치적 동원과 결집은 다양한 ‘요구들의 통일’이 그 핵심이다. 이때 “연대의 느낌을 넘어선 안정적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원한다. 그랬구나, 연대 넘어선 안정적 시스템을 나는, 우리는 갈구한다. 그래서 내란 종식이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여전히 스트레스이고 불안한 모양이다. 등가 관계의 연결은 그냥 저절로 되지 않는다. 등가 사슬chain of equivalence; equal+value을 연쇄 사고마냥 단단히 채운다. 담쟁이처럼 어깨동무로 걸쳐 서로 응원하며 힘을 낸다는 말 같다. 위에서 말한 ‘남유’가 필요한 이유와도 맥이 닿는다. 더 연장될수록longer 결집의 규모는 커진다. 단단한 결속 체는 끝이, 꼬리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도마뱀 콜 걸 너언 ㄱㅐ서랏 이질적이고 다양한 구성요소들이라서 결집의 지구력이 떨어질 수 있다. 등가 사슬의 결절점을 두어야 지구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힘 내Lift up U. 여러 요소가 붙어 있는 비유적 ‘표현’이 앞으로 애틋 남다르게 보일 듯하다. # 그 표면적 동기는 매우 다양하되 그 근저에는 평등을 바라는 무의식적 반응, 자본주의에 대한 직관적 반감이 깔려 있다... 그 자체로 고유의 표상을 가지지 않지만 / 어떤 단어나 이미지 등으로 비유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단어나 이미지 등이 라클라우가 말하는 헤게모니적 기표로서 기능한다. (53) 포퓰리즘의 헤게모니, 정의는 꽤 근사하다. 인민의 바람 사슬 띠라 무단 폐기하거나 끊어내거나 도용이나 남용이 가로막힐 것만 같다. 힘있다. 김건희 엄마 최은순의 말대로 돈 싫어하는 사람 있겠냐만은. 자본주의에 대한 직관적 반감이 다른 형태로 녹아 들 필요가 있다. 공유재 물, 햇빛, 바람, 땅~ 공기처럼 누리고 있넹 <최경영TV>에서 기재부 모피아 아니랄까봐 경제부총리가 국장 말아먹나를 말하자 채팅 창에 주식을 통해 돈을 번다기보단 돈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한다가 떴다. 현실적인 애잔한 슬픔이 밀려왔다. 국장을 선택한 이유를 다듬는 포퓰리즘 정치 언어가, 우리의 헤게모니가 필요한 시기이다. 주식 전혀 모르지만 (투자)하는 사람들이 솔솔한잼을 맛보면 좋겠다. 행복감은 유지력과 성장감에서 싹트니까. ++ 21일 <겸공>에선 한미관세 협상 치러야 하는데 힘빼지 말자는 의견도 달렸다. @ 스피커는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인정하고 사과했어야 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애증하는 대상이 되는 것 아닌가? # 포퓰리즘은 특정 집단의 특정한 운동이나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정치적 논리’다. (53) 현실 생존과 생계, 생활 필수템이라는 소리로 들린다. 포퓰리즘 위에 쌓인 수북한 먼지를 털어내고, 지독한 악마화도 거둬내고 바로보기 수지Q. 박구용의 현실 철학 알림 운동을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유가 대신 설명된다. 좋은 의미의 포퓰리즘, 빛의 혁명의 엇박자 엇나감 없는(그럴 땐 수긍과 수정을) 이론화를 계속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쟁여둔 책들 언제 읽Na # 사회적 논리는 어떤 대상이 표상 가능하고 / 어떤 대상이 불가능한지 가르는 지평을 그리는 규칙 체계와 정치적 논리를 그다음 층위, 사회적인 것의 제도화와 관련된다. ●사회적인 것의 제도화란, 앞서 말한 요구들의 경합과 접합의 결과로 / 형성된 특정 정치적 공동체의 정체성이 / 제도권 정치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sur face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회적 요구들의 다양한 등가적 접합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열려 있다. (53-54) 제도화 됨은 타자의 배제와 전선의 구축을 발생시킨다. 라클라우는 이러한 기제가 작동할 때 “그 운동이 어떤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가지든 / 그것이 포퓰리즘”이라고 매듭짓는다. 이쪽저쪽 어느 면이 같거나 나비의 양날개, 반쪽 사과 접촉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문장 완성의 질과 맥락은 달라도 쓰는 용어가 ‘저렇게 쓴다고!’ 싶게 동일 반복적이다. 흠칫하면서도 헤게모니, 포퓰리즘, 담론이 그리 작동한다는 데 어쩌리 주저리 한다. 그래도 폐쇄적인 밀실 정치, 암실 지하세계는 부패하게 되어 있다. 저들만의 잔치와 독식 배부름. 작정하고 시작된 공동정부에서 통일 대통ㄴ의 꿈.. 흉악한 그림을 내린 시민들, 열대야 물럿거랏 ♪SING ALONG! |
|
결국 정치적 개입의 우연성은 애초에 필연적 법칙의 효과를 제한하는 한에서만 가능할 뿐이며, 필연적 논리의 잔여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35) *한계 이렇게 헤게모니가 엄격하게 계급주의적으로 개념화되면서, 대중 운동의 민주적 잠재력이 확대될수록 / 정치의 권위주의적 실천이 더욱 조장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37) *모순 그람시에 따르면 지적이고 도덕적인 지도력은 좀더 수준 높은 종합, 즉 집단 의지will를 구성하는 것이다... 집합 의지는 분산되고 파편화된 역사적 세력들을 / 정치-이데올로기적으로 접합한 결과다... ●이로써 ‘정치적 접합’은 그 이름을 얻고, 이론적으로 사유되면서 / 사회적 행위자의 정체성 구성을 설명하기 위한 형식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38-39) *집합, 접합 헷갈림 주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 구조 모델을 탈구축해 헤게모니 개념의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제시하려 했다. (40) 라클라우 사상에서는 이러한 (정치적, 이론적) 보증 없이 / 어떤 부분적 해방의 요구들이 보편적 해방들emancipations의 요구들로 만들어지면서 /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는지가 다루어진다. (41) *해방 주체 *일반적 ‘제너럴’general과 관대한 제너러스generous, generosity 여기서 비어 있는 기표는 특수성이 불가능한 대상인 보편성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 헤게모니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절점 기능을 한다. (41) *작은 것들의 신 요컨대 라클라우는 후기 사상에서 자신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기획을 / 민주주의 혁명 이후 정치적 근대성modernity이라는 조건 위에서 재구축하려한다. (42)
==
용어 개념부터 살펴보자. “주도권, 패권”을 가리켜 헤게모니라고 하고, 특정 집단과 문화의 ‘지배적 위치’를 설명할 때 쓴다. 쎈캐 헤게모니는 ‘정치적,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헤게모니만 떠도 주변이 딱딱하게 굳는 듯하다. 사회주의 정치에선 ‘노동자 계급’의 역할과 ‘정치적, 이론적 지도력’에 주력한다. 계급 지배와 지도력이 곧 파워 타워랄까. 문제 대응의 실천적 차원은 (역사적) 필연성보다 ‘우연성의 논리’에 주목하게 이끈다. 자본주의의 조직화와 복잡성을 보며 ‘사회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사회적 행위자들의 ‘파편화’를 유념하고 내다보았다.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적 행위자’의 파편화와 분화((전체를 못 보게 쪼갬))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과제 앞에 (주체의) “자율적인 정치적 개입”에 봉착한다. 그러면서 정통orthodox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담론의 ‘통일성을 붕괴’하고자 했다. 담론의 불연속적 사고에 착안해서, “분산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일성”을 ‘재구성’하는 형식을 찾아낸다. 그러다가 자체적으로 이것이 ‘계급’ 통일성 맞나? 의구심을 갖는다. 정치적 접합 과정에서 논리와 설명의 한계를 맞고 만다. 4장은 헤게모니 개념이 레닌주의, 그람시를 거쳐 라클라우로 이동한 경로를 추적한다. ++ 어째 통일 외교 당면 과제와도 맞물려 나열된 단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게 된다. 20일 <겸공>의 박구용 편 정 장관 깜짝 조수 행 유익했다. 북한을 향해 그렇게라도 짖어야지 아구 구여워 봐주게 한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 시대의 부산물로 계급적 본성과 실제, 역사적 행위자를 정의하고자 했다. ‘계급투쟁’에서 발생하는,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들”에 필요한 ‘새로운 정치적 계산’의 근본이 되었다. “계급 동맹” 내에서의 ‘정치적 지도력’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런데 혁명적 정당성을 노동 계급에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냐는 의심을 샀다. 저자는 레닌주의의 헤게모니가 “적대들과 단절 지점들”의 다원성과 ‘정치적 유효성’을 인정했다고 말한다. 이 점이 ‘대중 투쟁’의 민주적 차원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가능성과 달리 실제로는 전위적(이땐 권위적 뉘앙스)이고 반민주적인 사회주의 경향에 치우친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을 지도, 반 지도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음.. 계도. >> 잠시 옆으로 새겠다. 저쪽은 대놓고 눈치봄 따위 없이 해먹었고 이쪽은 조금만 먹어도 조마조마하게 내버려진다. 두 진영의 양극화라고 보기도 뭣하고 급 차이가 심각하다. 당원이나 지지자들의 기대치(수준이라 하고 싶지만 꾸욱)도 엄청 다르다. 민주당은 당원 주권 시대에 부합되게, 집단지성과 지혜를 모으고 자정 능력과 판단력을 기르고자 고군분투한다. 최강욱 전 의원이 국회 밖에서, 여의도 문법 탈피해 체득한 노하우와 식견을 바탕으로 직책 수행을 잘해주길 바란다. 국힘 의원들을 향해 제기된 의혹만 키워드로 정리해도 볼만하겠다. 비꼬는 장관. 108석에서 탈당도 있었고.. 범죄 레이더망을 피할 자 몇이나 될까. 말하는 꼬라지는 더 가관. 조국 전 대표가 반으로 줄이겠다는 근거일까. 댓글에선 무슨, 해산시켜야지! 혀를 차기도 했다. 누가 정리해뒀을 것도 같고. 기본이 억이고 수십억을 웃돌아도 검경 언론이 쉿!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언제부터 국민이 수사반장과 탐정이 되었나. 이걸 윤씨가 해냈다고 치적 삼아야 하나, 허나 국민 초불안 개피곤 행
레닌 다음에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말한다. 레닌 편은 금시초문이나 그람시는 비일비재하게 인용되어왔다. ‘계급 동맹’의 차원에다가 “전술적, 전략적 용법”을 더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다양한 계급과 ‘동맹 체계’를 결성해, ‘지도적’이고 지배적인 계급이 되고자 했다. 여기까진 레닌과 별반차이 없어 보인다.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지적이고 도덕적 지도력’을 추구한다. 관념과 가치 공유로 넘어간다. 헤게모니 계급에 의해 ‘접합된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잠시 우연이나마) 필연적인 계급 속성에서 벗어난다. 반대로 한계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원론에 그침이 지적된다. 그리고 어떤 단일한 통일 원칙이 과연 존재하는지, 그것도 오직 계급을 주장할 수 있는지 등에 봉착한다. ‘경제 영역’을 ‘필연 법칙’으로 보고 우연성의 논리를 제한하고 만다. (운명 결정론적) 자연주의적 편견을 (자가당착) 양산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레닌의 헤게모니는 ‘노동’계급이 계급 동맹에서 ‘정치적 지도자’로 간주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를 역사적 블록의 ‘접합적 핵’으로 간주한다. 어쨌든 경제주의적/ 반 경제주의적, 필연성/ 우연성의 이분법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나, 둘다 의구심을 남긴다.
이에 반해 라클라우의 헤게모니는 ★접합적이고 재구성적이다. 모르겠어도 와~ 얼쑤~ 입맛에 맞게 탄성 내지르시라. 주의 환기 모먼트이닷. 그토록 노리던 ‘정치적 접합’ 일반의 논리가 성립된다. 이론적, 정치적 보증(서)과 함께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이론적, 정치적으로) 획득한다.
** 비어있는 기표empty signifier의 수행 기능이 강조된다. [☞<해티티> 기호학 편 참고]해서 말하고 지나가겠다. 맛보기 서비스가 무려 한시간, 정미정 박사가 기호 싸움을 현생 정치에 담가 지루한 줄 모르고 흠뻑 빠져 시청했다. 기호랑 친분 쌓고 싶은 분, 스윽 보시라.
소쉬르에 입각하여 윤씨 패거리가 국민에게 어떤 모욕감을 주었는지, 기호의 끔찍한 붕괴에 빗대 설명한다. 언어의 자의적 관계 망인 껍데기와 의미, 시니피앙 기표와 시니피에 기의, 요샛말로~ “표현과 의미”를 다룬다. 표현된 말의 의미와 편집의 ‘의도’와 저의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병도 여러 예시들을 통해 전한다. 기의는 고정됐다기보단 가변적이다. 누가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징(체계)의 ‘약속’은 무참히 흔들리고 무너진다Fall apart.
때마침 <최경영TV> 커뮤니티 글에도 다큐라도 “편집은 편향이다.”라며 의도 낌과 (범)기득권 수호와 객관의 가면을 저격했다. 정 교수의 말에 따르면 처음 매개된 봄과 노출이 똑바르지 않으면 해석의 해석의 재해석이 개판을 부른다. 어느 소스 출처를 인용하느냐로 다음 이야기가 그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반가운 우연인데 마르크스의 “시각은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를 인용한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정보에서 무엇을 선택해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그것에는 권력과 계급 관계, 개인의 (물적 지적 영적 ㅎ) 기반이 작용한다. 같이 보고도 거슬림의 차이가 생기는 요인을 알기 쉽게 전한다. 나는 또다른 우연의 일치로 내가 시리즈나 유사 연속 기획물에 별로 끌리지 않음을 알았다. 한번 경험으로 족한가보다. 대충 어떤 맛인지 알았으니 얼른 다른 거 알아보자, 토끼자나 시간 부족 행 ++ 그러니 잡탕 우려 올리는 김 여사 기사 쏠려 물려. 종합 특검 중인 자를 향한 언플 구려. 영감 언감 땡감 곳곳에 줄줄이 증말 시렁. 최경영 정보분석가 말대로 내란청소와 개혁하자, 정.신.차.려
언어학적으로 어떤 나무tree diagram가 그려질지, 또 어떤 파생 효과를 사회적으로 부를지 상상하게 만든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 이어 <포퓰리즘 이성에서>는 하나의 차이가 그것과 통약 불가능한 총체성을 재현할 수 있냐를 따져 묻는다.
결절점을 단절점과 혼동하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일반적인 정치철학적 접근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을 중심에 둔다.
단절점이 있다기보다 ‘시대에 따라’ 사상의 강조점이 변화했기 때문인 것으로 둘러말한다. 고로 시대정신에 따라 악센트가 달라진다. 떼창이 호흡과 발성의 싱크를 요구하듯이. 요새 정치 기사와 뉴스보는 맛이 붙어 좋으면서도, 멧돼지 무당 정권에서 쌓은 탄핵 적립 포인트가 차곡차곡 복기되는 피로감이 있다. 공개된 국무회의만큼이나 드러나는 장관 등의 실력, 실무능력이 안타깝나보다. 기회를 위기로 먹칠하진 말자 요. 검찰 독재와 내란 종식은 ‘김건희 패밀리 해체’로 종합된다. 임명과 사인만 한 술통과 먹통 말로란. 뒷배 커미션 검은돈 얼룩 언제 다 닦아내나. 미친거니 없인 안 가, 못 해. 돈거니 다발 감추는 자가 (모조리) 범인이다아 하늘 날씨가 해와 구름 와리가리. 정치 격변기에 딱 맞게 연출인가. ♪비스트 12:30 (시계 바늘 모양에서 등돌림을 어찌 읽. 대단) 모기향 품목 세일하는 거 보니 여름이 가긴 가나보다. 안 된다는 듯 매애앰 귀청 뚫는 자연의 소리 대 격 돌 |
|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사회를 설립하는 순간을 뜻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24) 라클라우와 무페가 보기에 이제 정치는 더 이상 실정적으로 구분된 ◎계급 행위자들의 각축으로만 읽어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24-25) 이렇듯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의 ‘결정 불가능한 성격’과 급진적 우연성, 그리고 적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정체성과 투쟁의 전장을 가로지르며 진지전war of position을 접합하고 구성해내는 정치에 중심적 역할을 부여했다. (25) 특수한 무언가가 헤게모니를 획득하게 되는 형식에는 그 어떠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고 ◎우연한 접합만이 있을 뿐이다.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내적 법칙에 의해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이거나 접합적인 실천practice의 결과로서만 융합된다. (26) 이 행위자들 사이의 통일성은 이제 어떤 공통의 근본적인fundamental 본질의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구성과 투쟁의 결과가 된다. (26) 정치적인 것을 토대에 대응하거나 그에 종속되는 상부구조가 아니라 / 사회적인 것의 존재론이라는 위상을 띠는 것(이다.) (27) 담론, 언어, 의미, 더 나아가 정체성과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관계적이며 불완전하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고는 하는 ‘완전히 총체적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27) *total과 totalitarianism 연계 주의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용어이자 총체적 사회 구성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 ‘사회’society 대신에 ◎궁극적 구성, 봉합의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28) *추상명사가 아닌 복수형 더 소셜, 더 폴리티컬 추구 정치적인 것에 의한 설립establisment의 순간도 점차 잊히기 마련이다. (28) *반영구적, 반본질적 ●정치적인 것이란 불가능성이라는 조건 위에서 ◎사회적인 것이 설립되는 순간이다. 설립되어 침전되어 온 모든 제도의 ◎우연적 성격이 다시 활성화되는 존재론적 순간이다. (29) ●그러나 계급을 넘어서는 ‘다양한 정체성의 폭발’이 사회 구성의 기본적 조건이 된 오늘날, ... 정치의 우위성(은...)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연적 접합과 투쟁을 / 읽어 낼 “존재론적 이론적 자원”이라는 점(이다.) (30)
==
그러니까 존재는 정치랑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린다. 현재 우리에겐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나 존재와 정치, 존재의 정치성을 한데 묶는 데까지 여러 과정을 지난하게 거쳤다.
정치적 우위성primacy을 테제화한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데 그러쿠나~하고 따라 가보자. ㅇㅏㅏㅏ 두야 싶을 땐 Are you with me? 묻는 누군가(‘저요?’ ^^)와 있다고 상상하자. 알다시피 나는 쉬운 건 어렵게, 어려운 건 더 어렵게 말하는 헷 갈림 버릇이 있다.
사회의 ‘구조화’는 정치적 계기라는 ‘특권화’ 시점을 낳는다. 이전의 헤게모니 개념을 재구성이 필요해진다. 어디에 근거하냐면 ‘사회의 불가능성’을 토대로 전개된다. 이로써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구조결정론적 경제환원주의와 계급본질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정치 is 계급 등식을 깨뜨린다. 계급이 “공통의 근본적인 본질의 표현”이기엔 역부족인 (깨달음) 이유에서다.
안을 들여다보자면 ‘상이한’ 파열 지점들의 ‘증식’과 사회적 정체성의 ‘불안정한’ 성격이 지배한다. 그에 따라 “적대의 경계선들”이 흐려진다. 계급 외에도 인종, 젠더, 생태 등의 “다양한 전선 ‘교차’의 진지전war of position”에 놓인다.
계급 중심의 레닌과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비판하고 재구성한다. 우선 총체적 대표성을 거부한다. ‘특수한 사회 세력’은, 좀 더 들어가 노동 계급이나 민족주의나 퀴어 페미니스트 등은, 사회의 “일부”이다. part, partial. 사회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말은, 사회 ‘전체’와 다양한 주체들을 ‘총체적으로’ 대표하지 못함을 뜻한다. 한 부대에 쓸어 담아 꽁꽁 얼릴 수 없다.
정치 공동체가 도달할 수 있는 형식이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형식일 뿐이다. 무수한 “우연적 접합”만이 있을 뿐이다. 26쪽 한바닥 내용은 모두 중요해 표시해둔다. 우연적 접합이나 (그래서) 정치의 우위성은 민주주의 관계 형성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이때 민주주의는 관계의 구조적 ‘다양성’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대표의 원리가 아닌 “접합의 원리”로 일시성을 띠는 것으로 교체된다.
외부의 ‘비교 우위’를 넘어 존재론적 위상이 (그 자체가) 곧 정치가 된다. 여기서 정치적 우위성이 탄생한다(고 이해했다).
담론이 사회적인 것을 구성하(고 설명하)는 것이라서 (총체적 혹은 대문자) “사회의 불가능성”이 성립된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와 담론은 ‘차이’의 체계에 따라 “의미를 생산한다.” 이에 반해, (후기구조주의에선) 담론, 언어, 의미, 정체성과 “사회적인 것”도 이를테면 ★“언제나 관계적이며 불완전하다”(에 입각한다).
사회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불가능한’ 대상인 사회나 제도화는 헛된 시도에 그친다. 다양한 주체와 세력들이 사회를 이루나, 총체적인 사회의 구성, 즉 완전한 봉합suture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앞장에서 말한 결절점nodal point을 통해 ‘상대적으로 고정’된다. 그렇게 ‘불완전하게나마’ 사회를 설립한다, 오케이? ^^
후설의 침전sedimentation과 재활성화reactivation을 차용한다. 후설은 기원의 일상화와 망각을 거론했다. 대안 없이 심지어 우연성의 흔적마저 희미해져 본래 취지나 정신이 사라지고 만다, 페이드 어웨이. 기존의 사회적인 것과 제도가 존속 불가능하다면, 그런 판정을 받으면 앞장에서 언급한 ‘탈구’dislocation의 계기가 된다. 그렇게 정치적인 것이 재활성화된다.
저자는 봉건주의 (절대 위계) 질서와 유지력에 대항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 대목에슬쩍 끼어 넣는다. 정치적인 것에 의한 ‘설립’과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침전’과 ‘재활성화’가 이리 힘주어 들뜨게 할 동요어인가 싶다.
크게 보면 민주주의 사회에, 작게 보면 우체국 시스템이나 영화관 콘서트 등에도 이런 경로가 가동된다. 일이 있으면 일꾼이 있고 노동‘조합’이 따르고 쟁의 행위가 형성된다.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사회적인 모두를 포함한 “존재론적 차원”을 머금고 품기에 이른다. 존재를, 존재를 잠시 보듬는 사회를, 그 정치성을 이리 애틋하게 설명한다. 공연 예술문화의 계절이 다가오누나
이런 논지는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메커니즘을 우회하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정체성의 폭발 지점에서, 그런 판세에서 “우연적 접합과 투쟁” 결속을 설명할 단서이자 존재론적 해설 자원source이 되기에 알아볼만한 이론 사상이다.
여러 번 고백했듯 나는 철학의 안고 안기는 복잡한 회오리 화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 것 같다가 모르겠는 알쏭달쏭 무지개스런 철학. 그런데 요상하게 곱씹다보면 유레카! 탄식하는 순간을, 말이 안 되는 현상을 말로 잡아내는 짜릿함을 아주 가끔 안긴다. 아무려면 어때, 아무렴 믿거나 말거나 하며 가보곤 한다. 앞으로 철학 강좌를 듣는다면 이런 갈증, 이 책의 불 지름이자 지적 자극 탓일 게다. 우연한 접합이로세 (바로 응용 학습 ㅎ) 지난 번 헌법 공부가 나의 지식을 직접적으로 팽창하는 우주선이 되진 못했다. 그러나 안 들은 것보다 나은 (동태 명태 생태 도태되지 않게끔) 조금 더 알아보고 알아듣는 눈 트임과 귀 열림이 생겼다고 믿고 싶다. 그렇다면. 훗 다시 끈끈하고 후덥지근하다. 어느새 간절기인가 싶고. 무튼 건강 또 건강, 안전 운행 뿅뿅 빙빙 돌아 박사급 *신, 걍 햄릿머신 / 제국 안 묻은 케이 에이아이 |
|
이로써 담론 개념은 더 이상 언어적 요소들의 집합만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14-15) 주체의 중심성을 탈구축하면서 어떤 의미와 정체성도 완전하게 구성될 수 없다. (15-16) *파괴와 생성의 주기 앞서 언급했듯 모든 언어적/비언어적, 물질적/비물질적 대상은 언어에 앞서 /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16) *discursive 매력 어필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특정한 담론 구조에 영향을 받으며, 그 담론 구조 바깥에서 실체의 의미에 /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7) *구조적 결정론 아니냐는 그 따위 트집 ◎담론은 모든 의미의 구성을 규정하는 토대ground라기보다는 / 현상학적 의미에서의 지평horizon에 가깝다. (18) *왜 강물 강물 하는지 알것쥬, 바다로 둥글게 물길이 바뀜 오히려 모든 의미와 정체성이 불완전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 결절점nodal point를 구축함으로써 대상의 의미와 정체성을 ◎일시적으로 고정시키려 하는 접합적 실천articulatory practice이 더욱 중요해진다. (18) *언어화 조합 기존의 의미와 정체성이 탈구dis location될 때 담론 체계는 흔들린다. 탈구성 의미와 정체성이 ◎어떻게 재접합될 수 있는지는 오직 헤게모니 투쟁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접합적 실천이란 곧 정치적 실천이다... 다양한 접합적 실천이 경합하는 장... 어떤 실천이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는지... 최종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9) *투쟁과 저항(권) 호도와 오염 심각 낱말 썰렁 >> 정치적 난점((있음을 있음으로 인정할 때 문제 해결 시작. 시작이 반^^))
== ♪BLACKPINK - '휘파람(WHISTLE)' *준비물: 정치병 기퍼, 기뻐
담론談論. 담론의 일차적 의미는 어떤 주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층적으론 논리적 체계가 있는 ‘이론’이나 주장을 뜻한다. 좀 어렵게 들릴 수 있는데, 존재의 (불)가능성 조건을 흡수한다. 언어학 외에도 비-존재론적 요소를 포함한다. 이게 왜 파격이냐면 그 전에는 존재ontic나 실체론적인 것에 주로 천착했기 때문이다.
2장 담론은 내가 참 좋아하는 내용이다. 마주할 때면 가슴이 뛴다. 뛰어라, 대한민국~ㅎ 언어를 단순 도구가 아닌 ‘구성’ 체계로 접근한다. 핵심 용어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 대해 살펴보자. “언어의 본성, 체계와 언어 사이, 주체와 언어 사이에 관한 기존의 이해를 급진적으로 뒤집어 놓는다.”
우리 인간이 애써 인지하지 않을 뿐, 거울 이미지 상상계와 언어 기표 상징계를 차례로 치열하게 거쳐 세상 밖으로 나가 활동한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후기구조주의가 나온 상태이나, 그것을 간파하기 위해선 밑작업 구조주의에 대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살짝 언급한다. 사회적인 것을 상징체계로 정립 풀이했다. ‘기호’의 관계와 차이 속에 의미가 구성된다.
그의 기여는 이런 언어적 모델을 사회과학 연구에 가져다 쓸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레비스트로스는 이 언어학적 모델을 인류학 토테미즘 연구에 접목했다.
그럼에도 구조주의 언어학은 폐쇄적이고 안정적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이유인즉 통일된 인간 주체와 정신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 구조 자체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탈구축deconstruction에 주목한다. 데리다, 라캉, 푸코.. 이름만 들어도 뽀드득 반짝이는 이론가들이다. 이들은 체계 내 내적 논리보다 ‘외부에 작동’하는 “우연적 힘”을 중심에 둔다.
담론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 ‘담론환원주의’냐는 우려와 불만을 샀다. 솔직히 깔대기를 통과한 어느 점으로 돌아가는, 연어 식 환원 아닌 이론이 있(었)던가.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다른 것들과 연계, 연동하다보니 뿔뿔이 흩어지는 끝없이 자유한 경향이 있지 않나.
이래도 문제인, 저래도 문제인ㅋ 결정적인decisive vs 우유부단indecisive, 그것이 문제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좀 나서서 하지 그러셨어요. 자기 보존은 해서 그를 잃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아쉬움에서 이또한 배움이다.
유지와 동시에, 성장감을 행복의 깨알 요건으로 여기는지라 형성, 생성, 진행 중인 정체성 정립에 한없이 끌린다. 기계엔 별 관심 없지만 오픈 에이, 챗GPT가 생성Generative을 품는 순간 나는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내 안에 깊이 자리하는 라이프 워딩( 나무의 뿌리)을 건드렸다. 가지, 가지가지는 아니다. [세상을 기획품으로 보는 정신나간 윤건희 개놀이 징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인간 존재 이전이나 언어 존재 이전에는 물질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니! 라는 비판을 받는다. 긍데 실존한다고 다 의미 있는 대상으로 존재being하는 것은 아니다. 감지하든 인식하든 이미 인간은, 인간의 언어(화)는 ★특정한 담론 구조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전체로서 사회는 어떤 차원으로든 나뉘어 있다.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구조적 결정론 아니냐는 질타는, “유물론자에게 물질의 가능성 조건을 묻는” 꼴이자ㅋ “유신론자에게 신으로 가능성 조건을 묻는” 셈ㅋ 이란다. 대한 국민이 유물과 유신이 어떻게 그물망을 짜왔는지 여실히 보고 있자나.
뭐 안 묻은 순도 백 찾지 마. 기득 권 천지 통일인 거니대로 실시간 보면서. 그래도 괜찮고 안중에 없는 지편한세상 외계인과 같이 살면서. 표피만 껍질만 단일 민족 외치지. 잠시만 같이~ 공분을 소중히 모아 확 뜯어고치는 수밖엔 없을 듯하다. 국가 주요 행사 여기저기에 조희대 비출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란다. 저 해맑음을 후안무치 지들 타워에선 안하무인이라 하지요.
이전의 의미와 정체성의 기원으로의 인간 존재 관념에 도전! 주체가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주체를 생산한다”고 말할 지경이다. 우연적이고 불완전을 전제로 하나 이를 허무주의로 보면 왜곡 곡해다. 복수의plural 주체 위치가 열리자나
헤게모니와 포퓰리즘 용어에 대해서도 내가 단편적으로 단면에서만 봐옴을 깨닫는다. 위에 인용한 “접합적 실천”은 개방적 담론 구조에 속한다. 고정된 중심이 부재하나 역동적 담론장을 만들어 꾸린다. 고정과 센터를 흩뜨리는 데는 ‘의미 과정’ 속에 기존 틀을 벗어나는 힘이 언제나 존재한다. ★고로 의미와 정체성은 부분적 고정화partial fixation이다. [다 부수고 해산시키면 전체로의 그림은 불가능한가 묻고 싶을 것이다. 이거슨 다음 기회에]
독후 감상을 작성하는데 한 장면이 되살아난다. 엠비 때 광화문 시위가 많았다. 과잉 진압과 공권력 장악 시그널의 닭장차과 경찰 병력이 짜악 깔려 있었다. 그때도 견찰 활약 대단. 경찰, 검찰, 판사. 버스 유리창 너머로 생업과 생존이 들리자 눈물이 터져 멈추지 않았다. 애걸 복걸 인간의 비애, 이거 앞으로 좀 나아질까? 나아지고 있을까?
노동부장관을 필두로 반걸음씩. 국무회의뿐 아니라 광장도 “다양한 접합적 실천의 경합”의 장이 되어야 선진 문명임에도. 나도 내 불편과 실리부터 따질 때가 많다. 생각 없이 내뱉고 후회할 때가 있지만. 그러면서도 차차 나아질 것이다. 서로 교육, 재교육과 평생학습. 리박스쿨과 매국 사고 침투와 노림수 얼른 차단하자. 어쩌면 서울대10개 터무니없이 멀리 있지 않다. 시설과 기관은 넘친다. 어떻게 쓰는지, 어떤 내용으로 채우는지, 그것이 심장에서 손발 움직임으로 이동하면 될 일이다.
신자유주의 바람 탄 ‘본질주의’ 저리 가라, 어서 물렀거라. 반클리프 시끄럽던데 반본질주의!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은 그렇게 확장되어간다(고 한다). 쓰면서도 아직 느끼고 할말이 이리 많나 싶어 내 자신에게 놀란다. 너 대체 뭐냐, 나 신바람
++ <해티티> 정 장군니임이 ‘기호학’ 편 방송했다. 담아만 두고 아직. 찾았다, 골뱅이무침과 총각김치 맛. 양념 소스=먹성 인가. 일요일엔 물고기 우선주의, 바닥에선 인어공주~ 유 작가니임 붕어알현 꽝친 풍경낚음. 어복 황교장새앰 3호줄 트리오 마 ㅎ 전문고발러 국힘 시의원 푸하하 그냥 웃지요 @ 늘 한 발 앞서 앞을 내다보시고 프레임 전환과 좌표 설정을 해주시는 유시민님이 고맙고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