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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서영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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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존재와 의미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조선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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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존재와 의미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대한제국은 1897년부터 191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로, 조선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 자체로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강제 해체로 인해 대한제국의 역사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잊혀져 가고 있다. 대한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종 황제의 개혁 노력과 함께 새로운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청나라의 종속국에서 벗어나 자주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사회의 구조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며, 양반 중심의 전통적인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는 13년의 짧은 기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은 근대화의 과정을 겪으며,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민의식과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종 황제의 커피 사랑이나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 등은 대한제국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과 국가의 운명이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간판만 바꿔 단' 조선왕조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대한제국의 역사적 맥락과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 속에서 현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번에 대한제국과 우리나라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역사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서영희님의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이었다.

저자인 서영희님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 경기도 문화재 위원, 인천시 문화재 위원을 역임했고, 역사도시서울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관해 연구해 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남긴 유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근대편』,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외에 다수의 공저와 논문이 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프롤로그: 우리는 대한제국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

제1부 대한제국의 탄생과 경운궁

1장 대한제국은 어떻게 탄생했나

2장 새 국호 ‘대한’과 제국

3장 환구단에서 열린 황제 즉위식

4장 제국 최초의 국가행사, 명성황후 국장

제2부 근대 주권국가를 향한 도전

5장 근대 주권국가 선언

6장 ‘대한국인’의 충군애국주의를 고취하다 

7장 근대도시 한성과 경운궁의 확장

8장 경운궁에 세워진 서양식 건물

9장 만국공법의 세계로 나아가다

10장 고종 즉위 40년 칭경예식과 서양식 연회문화

제3부 일제의 국권 침탈과 잊혀진 제국의 기억

11장 통감부위 황실재정정리와 황제권 해체

12장 일제의 황실이용책과 황실가족의 최후

13장 일제의 궁궐 훼철과 덕수궁 궁역의 축소

에필로그: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


현대 사회에서 역사란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본다. 대학 때 읽은 E.H. 카(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생각 난다. E.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학의 본질과 역사 연구의 방법론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한 책으로, 역사학계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는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가의 해석과 선택이 개입된 것으로 본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가가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주장하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역사가의 주관적 견해가 역사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만, 동시에 역사가들은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역사는 사실의 선택과 해석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 지며, 에 따르면, 역사는 항상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같은 역사적 사실이라도 시대적 변화와 시기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달라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진보와 보수의 극심한 대립이 진행되고 있다. 윤석렬 정부 집권 이후,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이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임시정부를 인정하느냐에 대한 해석 차이로 광복절에 대한 논란, 독립기념관 관장의 역사적 인식에 대한 정치적 대립,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등 독립군·광복군 흉상 이전 논란과 관련해 육사가 홍 장군 흉상은 외부로, 나머지 흉상들은 교내 다른 장소로 이전하겠다는 입장에 대한 극심한 대립 등 수많은 곳에서 대립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은 무엇을까? 우리 역사에 대한 재대로 된 교육과 토론, 고민이 없었기 떄문인 것 같다. 특히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큰 변동성이 있었던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역사에 대한 심도깊은 교육이나 논의는 없었던 것 같다. ㅇ번 신간은 그런 측면에서 우리 나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역사적 배경, 주요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사회적 변화 등과 대한제국이 현대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을 심도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근대 한국의 출발을 알리는 장엄한 서곡이었다. 조선의 유구한 전통 위에서, 그러나 조선이었던 과거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이 짧은 제국의 꿈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근대적 국가 형성의 기원을 담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조선이 중국의 번속국이 아니라 대등한 주권국가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선언한 사건이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던 날의 하늘은 어땠을까. 환구단에 울려 퍼진 의식의 소리 속에서, 황금빛의 장엄한 의장물 사이로 선 고종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했을까.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질서를 거부하며 근대적인 만국공법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도전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대한제국 역시 ‘황제국’을 자처하며 조선이 지나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려 했다. 이는 지난 수백 년간 지속된 외교적 관계와 국가 운영 방식에서의 본질적인 변혁을 의미했다.


국호 ‘대한’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중국이 하사한 명칭이었고, 이는 명·청과의 외교 질서 속에서 조선이 자리했던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하며 새로운 이름을 내세웠다. 이는 외교적이고 법적인 선언인 동시에, 한국인이 더 이상 기존의 세계 질서에 머물기를 거부한다는 결단이었다. 대한제국이 출범한 순간, 한국은 단순히 조선의 연장이 아니라, 근대적 주권국가로 나아가려는 몸짓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한성이 전통과 단절한 공간이었을까. 독일인 궁중 의전관 엠마 크뢰벨이 바라본 한성은 전통과 근대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거리에는 전깃불이 켜졌고, 전화선이 연결되었으며, 전차가 다녔다. 그러나 동시에 한성 곳곳에는 여전히 조선의 유교적 관습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근대 문명의 첨단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며, 대한제국의 짧은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이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대한제국은 국가 체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시기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정은 역설적이었다. 그들이 쫓던 것은 서구의 근대적 국가 체제였으나, 고종과 황실이 선택한 모습은 여전히 전통적인 군주제의 위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환구단에서의 황제 즉위식, 서구식 연회 문화의 도입, 화려한 황금빛 장식물들은 동양적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은 서구의 열강들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황제정은 근대 국가의 외피를 두르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조선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이 대한제국의 가장 큰 한계이자, 그 운명을 가른 지점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남긴 흔적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3.1운동에서 대한제국의 유산은 다시 깨어났고,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을 수립하며 그 기억을 이어갔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나는 대한국인이다’라고 외친 순간, 대한제국은 단순한 과거의 나라가 아니라,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뿌리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태극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떠올릴 때, 그것이 대한제국 시기부터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이 완벽한 국가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실의 결정과 정책이 근대적 질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세계의 변화를 체험했고,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에서 시작된 근대 한국의 꿈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이 품었던 이상과 좌절, 희망과 절망은 오늘의 대한민국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대한제국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묻는 과정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제국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것은 현재의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이야기이다. 대한제국의 꿈이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다. 환구단에서 태극기를 앞세우며 황제 즉위식을 치르던 그 순간부터, 만원 전차 위에서 근대 문명을 경험하던 여인들의 표정 속까지, 대한제국은 근대 한국의 출발을 알리는 문이었다. 그 문을 지나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대한제국의 역사에서 배우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대한 회고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짧은 역사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이루려 했던 근대 국가의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지만, 그 꿈의 불씨는 이후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대한제국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과정일 것이다.

p****r 2025.03.1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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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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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   _서영희 / 사회평론아카데미 (2025)한국사에서 대한제국은 다소 소외된 감이 있다. 일제의 침탈과 무관하지 않다. 1897년에 탄생하고 1910년 일제에 의해 병합되어 불과 13년 만에 사라져버린 대한제국. 많이 아쉽다 못해 안타깝다. 대한제국의 생명력이 길었다면, 그 후 한국의 위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분명한 것은 대한제국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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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
   _서영희 / 사회평론아카데미 (2025)



한국사에서 대한제국은 다소 소외된 감이 있다. 일제의 침탈과 무관하지 않다. 1897년에 탄생하고 1910년 일제에 의해 병합되어 불과 13년 만에 사라져버린 대한제국. 많이 아쉽다 못해 안타깝다. 대한제국의 생명력이 길었다면, 그 후 한국의 위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분명한 것은 대한제국은 우리의 마지막 왕조유산이자 근대 한국의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지은이인 국사학자 서영희 교수는 이 책을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대한제국이 차지하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규명해보려는 의도로 집필했다고 한다. 


“우리는 대한제국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라는 제목의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3부로 편집되었다. 1부 「대한제국의 탄생과 경운궁」에선 새 궁궐 경운궁에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제국이라는 호칭 속에 ‘자주독립’과 ‘자강(自强)’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2부 「근대 주권국가를 향한 도전」에선 「대한국국제」선포 이후 대외적으로 근대적 주권국가를 표방하면서 황제권이 중심이 되어 근대적 방식으로 충군애국주의를 고취해 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3부 「일제의 국권 침탈과 잊혀진 제국의 기억」에선 대한제국 황제정이 일제의 국권 침탈로 물적, 인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박물관 속의 역사로 사라져 가는 과정이 서술되었다. 


에필로그인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을 주목한다. 우선 대한제국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대한’이라는 국호를 남겼다. 아울러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중화체제에서 이탈한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겠다. 1899년 청과 동등한 주권국가로서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902년에는 최초로 베이징에 대한제국 공사관을 개설했다. 고종은 4천 년 만에 대등한 나라가 되었다고 감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주권국가로 나아가기엔 힘이 많이 부쳤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면과 친일단체 일진회를 주도한 합방론자들 때문에 결국 한국인들의 삶에 식민지경험이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대한제국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기억은 복잡하고 심란하다.” 이 언급에 깊이 공감한다. 대한제국의 실패와 좌절에 준엄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심리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 하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치욕스런 역사를 마음에서 밀어내다보니 대한제국의 역사도 같은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닐까? “근대 한국의 출발점이기도 한 대한제국은 오늘을사는 한국인들에게 어떤 역사적 단계로 기억되어야 할까? 만국공법이 지배하는 근대세계에 나아가고자 주권국가를 지향했으나, 참정의 주체로서 근대적 ‘국민’형성에는 미흡했던 대한제국은 그만큼의 정도로만 근대에 도달했던 이행기의 국가였다.”      


특징적인 것은 기존의 대한제국 연구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새롭게 문화사 분야까지 연구 시각을 넓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진 자료가 많이 실려 있다. 청소년 자녀가 있는 가정에선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록으로 「대한제국 주요연표」가 실려 있다. 



#근대한국의탄생대한제국 #대한제국 #근대한국
#사회평론 #사회평론아카데미 #서영희 
#쎄인트의책이야기2025









s******5 2025.04.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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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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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대한제국을 포커싱해서 밀도있게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저에게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은 완전 취향저격!  약 180장의 사진자료 덕분에 대한제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구요. 고종의 즉위식, 3.1 운동 당시의 모습까지!고종이 커피를 좋아하고,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이야기... 처럼 일반적인 역사적 조명에서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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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대한제국을 포커싱해서 밀도있게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저에게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은 완전 취향저격!  약 180장의 사진자료 덕분에 대한제국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구요. 고종의 즉위식, 3.1 운동 당시의 모습까지!

고종이 커피를 좋아하고,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이야기... 처럼 일반적인 역사적 조명에서 벗어나,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렇게 개인적 일화들을 함께 보니까, 역사 속 인물들이 더 입체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역시~!

그 외에도 태극기의 원형이 대한제국의 자체 행사에 사용됐다는 사실에서,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찾으려는 대한제국의 모습이 엿볼 수 있었는데, 아주 인상깊었어요! 어쩌면 대한제국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 특히 대한제국의 복잡한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려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이 책을 통해 근대 한국의 시작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기대 넘어서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역사가 조선왕조에서 곧바로 일제강점기로 넘어간 게 아니고, 해방 후 대한민국도 갑자기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근대 한국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은 대한제국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안은 채 대한민국이 출발했다." - 본문 중에서 -






d*****9 2025.03.2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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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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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박사이자 교수이면서 여러 국사,역사 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서영희 저자의 책이다. 근현대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연구되었고 덜 조명된 측면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특히 대한제국 초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사료와 분석을 한 교양서적이다. 어려울 것 같지만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부분이라서 쉽게 다가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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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박사이자 교수이면서 여러 국사,역사 편찬위원회로 활동하고 있는 서영희 저자의 책이다. 근현대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연구되었고 덜 조명된 측면이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특히 대한제국 초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사료와 분석을 한 교양서적이다. 어려울 것 같지만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와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부분이라서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로 근대화를 맞이한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노력이 있었으면 실제로 어느 정도는 오히려 일제강점기보다 먼저 도입되고 발달했지만 도로 일제에 의해 약화된 흔적까지도 알 수 있다. 비록 짧은 황권 국가이자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고투하던 시기이지만 그 시기가 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왕의 나라로서의 개념이었지만 그래도 그 개념을 선진 문물에 맞게 바꾸려 했다는 것도 엿보인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이 그냥 일어난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대한제국의 탄생시기와 그 때의 근대화 노력을 다시 잘 알 필요가 있다.



**알면 알수록 사극에서 보는 경복궁과 법궁의 모습은 생각보다 약화된다.

***실제로 왕들은 선호하는 처소와 궁이 따로 있었고, 집무를 보는 공간도 왕의 취향에 따라 달랐다.

****그런 디테일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 표현하기에는 제작비의 한계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경복궁 및 한국의 고궁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너무 많이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또 파괴되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왕조에서 근대 국가로 현대 국가로 넘어오게 되는 부분이 묘하게 자연스러웠다.

*******왕조가 강했던 나라들은 그 과정에서 시민혁명이나 민란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다른식으로 견뎌내고 거쳐낸 것이다.

********물론 그게 좋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타의에 의해 사라진 면면이 있다.

*********생각보다 우리 근현대사는 많이 다뤄진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덜 다뤄진 면이 많다.

**********아직도 민감한 많은 부분때문에 제대로 다뤄지지 않거나 대충 뭉뚱그려 다뤄진 면도 많다.

***********게다가 역사 과목이나 역사책에서도 덜 다뤄진 편이고 최근에 더 발굴되고 더 연구되는 측면 탓도 있다.

************제작비가 무리인 시대가 아니라면 근현대사를 제대로 다시 다루는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

*************또한 언젠가는 제대로 우리 궁의 크기와 규모를 제대로 복원한 드라마를 보고도 싶다.

**************지금 경복궁과 고궁의 복원 기준이 고종때라고 한다. 하지만 그 때도 이미 화재나 전란등을 이유로 많이 소실된 후인데 그 이전을 복원하기에는 주변 땅이 이미 사유지로 팔리거나 개발돼서 다시 되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것들은 모두 규모가 굉장히 축소된 상태이다.

****************이 책은 사실상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우리가 근대화를 추구했고, 꽤 근대화 됐었다는 걸 증명하는 자료이자 연구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얼마나 일본이 치밀하게 우리를 침략했는지 새삼 다시 열받게 된다.

******************드라마'미스터 선샤인'의 배경과 관련 흔적도 엿보인다. 이 사실에서 따다가 저런식으로 만들었구나가 보인다.

*******************유달리 화재 사건이 많았던 것을 보아 당시 방화도 많았을 것으로 의심된다. 우리 문화를 파괴하는 일환중 하나로 일종의 밝혀지지 않은 테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특성인 빨리빨리가 이 때도 적용되는데 뒤처져 있었지만 개항하고 근대국가로 전환하려고 마음을 먹자 어느 동아시아 나라보다도 빨리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변화려고 한 흔적이 역시 확인된다.

*********************우리 민족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결정되는 순간 빨리 바꾸고 혁신하는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사람들도 막상 불만을 막 갖다가도 막상 시작되면 얼른 다 바꾸고 따라한다. 그것이 유행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많이 훼손하고 바꾸기도 했지만 우리도 한국전쟁을 거치고 민주주의 국가와 현대 국가로 거듭나면서 왕권에 대한 것과 문화에 대해 조금 소홀했기에 방치되거나 여전히 엉망이 된 채 남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경복궁 같은 고궁을 중심으로 다시 살려내는 모양새이다. 월대도 최근에 다시 발굴하고 세운 것이다.

*************************실제로는 더 많은 것들이 훼손되거나 파괴되거나 옮겨졌다. 

**************************언제나역사를 보면 장점만 있지도 않고, 단점만 있지도 않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뒤에 다른 일은 더 좋아지기도 하고 더 나빠지기도 한다.

****************************만약에를 제거한다면 어쨌든 그 결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만약에를 넣는다고 해도 같은 결과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항상 안좋은 시기가 있다면 좋은 시기도 온다는 것이다.

*******************************도시 개조사업도 먼저 시작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얼마나 하나하나 궁을 훼손한 것인지를 알면 알수록 화가 난다.

*********************************지금의 도로나 광장도 그 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래서 고종시대의 경복궁을 중심으로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있긴 하다.

***********************************어쨌든 그때가 우리의 근대이자 대한제국의 뿌리이니까.

************************************그때도 미국이 알게 모르게 꽤 엮여있었구나 싶다.

*************************************'미스터 선샤인'도 그 부분을 더 주목한게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과거보다 그 때가 더 가장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시대가 아니었나도 싶다.

***************************************왜냐하면 대한제국보다 과거에는 전보라는 것도 없었고 시간차이가 있었지만 전기가 설치되고 전보가 설치되는 순간부터는 거의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시간으로 세계로 소식이 전달되기에 더 치열한 세계 열강들의 간섭과 눈치 싸움이 있었을테니까.

****************************************그나마 유럽은 가까운 나라들이 많아서 그런 경험이 많았다지만 우리는 전란외에는 거리도 상당했고 그런 일이 적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삼면이 바다인 이유가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삼면이 바다여도 더 빨리 개항당하지 않은 것도 영향을 줬다.

*******************************************애매모호한 위치와 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보면 그 당시 세계는 전쟁 직전의 첨예한 시기였다.

*********************************************1,2차 세계대전에 우리도 크게 영향받은 것이다.

**********************************************항상 혼란기를 틈타 큰 변화가 일어난다.

***********************************************당장 큰 나라라고 생각했던 옆나라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옆나라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그 변화에 소용돌이 앞에서 정신없었을까 싶다.

************************************************그런면에서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나마 그 정도라도 된게 아닐까도 싶었다.

*************************************************여러모로 지정학적으로 애매모호한 위치이다.

**************************************************그래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변화를 해냈다.

***************************************************앞으로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삼아야 한다.

****************************************************그래서 100여년전인 그 시기가 요즘 다시 중요해지는 것 같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100년 전의 복고풍이 돌기 시작한다.

******************************************************지금은 정말 몇년 전 말로만 외치던 뉴노멀 시기이다. 기후위기든, 무역 문제든, AI이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이 시기의 변화와 수용, 선택이 앞으로의 100년을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상적인 문구들##


##대한제국의 탄생은 새 궁궐로 경운궁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정동에 위치한 경운궁은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의 공사관과 인접하여 일본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군이 머물렀던 장소로서 국난 극복의 상징성도 지니고 있었다.


##영조는 선조가 피난길에서 환도한 1593년 이후 ~계사년인 1773년(영조 49년)에 경운궁을 찾아 기념하고 '즉조당'이라는 현판을 걸게 했다. 인목대비 당시 별당 또는 서청이라고 불리던 전각에 인조의 즉위를 기념하여 즉조당이라는 현판을 직접 쓴 것이다. 또 나중에 임금이 예전에 머물렀다는 뜻으로 석어당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게 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왕조를 지켜 왔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선조가 즉조당에서 16년간이나 청정했던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고종이 새 궁궐로 경운궁을 선택한 것은 이러한 국난 극복의 상징성을 차용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으로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창덕궁이나, 을미사변의 참혹한 현장인 경복궁으로 되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반정으로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돌아간 후 경운궁 내 전각들을 대부분 철거하고, 땅을 원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나머지 왕실 보유지는 명례궁이라 해서 왕비의 재용에 쓰이는 궁방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지도나 지리지 등에 이 일대를 경운궁 혹은 명례궁이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각국 공관들이 들어서서 글로벌 외교타운으로 변모한 정동지역은 '공사관구역'혹은 '공사관거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서양 각국의 공관이 정동지역에 들어서면서 정동은 자연스럽게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이들이 운영하는 배제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 근대적 교육시설과 병원이 들어섰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했을 당시 옛 경운궁 터에는 즉조당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고종은 1904년 4월 14일 밤 함녕전에서 시작된 대화재로 경운궁의 전각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을 때 특히 즉조당의 소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병신년(1896년)에 이어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즉조당 하나뿐이었다.~참으로 아쉽기 그지없다."라고 했다. 이후 곧바로 궁궐 재건 사업에 들어가 1906년까지 대부분의 전각을 복원했고, 그 과정은 현재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사실 조선은 이미 1880년대부터 중국의 연호 대신 개국기년을 사용하거나 대군주 칭호를 씀으로써 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해 왔다. ~환궁 이후 고종이 주도한 칭제는 갑오·을미년간 급속도로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고 실제로 군주권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건양 연호는 을미사변 이후 김홍집 내각이 태양력 사용을 채택하면서 제정한 연호이다. 조선은 그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없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왔으나, 개항 이후 서양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할 때부터 청의 연호인 광서와 함께 개국기년을 사용하기 시작다.~조선 건국의 해인 1392년(태조 1년)을 개국기원 1년으로 하여 1894년(고종 31년)을 개국 503년으로 삼은 것이다.


##칭제 상소들에서 자주 거론된 만국공법은 이 시기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근대적 국제법 체계로 인식되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미국 국제법 학자 헨리 휘튼의 저서『Elements of International Law』를 윌리엄 마틴이 한역한 책 『만국공법』을 지칭하기도 한다. ~『만국공법』은 1886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재로 쓰이기도 했고, 『공법회통』도 1895년 학부 편집국에서 간행한 바 있다.


##고종은 대한이라는 국호 선택의 근거로 조선이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과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이미 '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호 논의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칭제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심순택의 주장에 보이듯이,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을 칭하는 마당에 중국에서 내린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쓸 수 없다는 논리이다.~만국공법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 당당한 독립국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대한'이라는 국호에 담고자 한 것이다.


##하늘에 제사 드리는 환구제는 고려 성종 2년(983년) 정월에 처음 시행되었으나 조선왕조에 들어와 제후국이 제천의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폐지되었다.~이제 황제국으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구단을 새로 만들기로 한 것이고, 그 위치는 남교가 아닌 도성 안, 그것도 경운궁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옛 남별궁터였다.


##천지신에게 고하는 제례가 끝난 후 의정 심순택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고, 고종이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으면 황제의 복장을 입히고 옥보를 올림으로써 황제로 즉위하는 절차였다. 참석한 관료들은 국궁사배와 삼무도, 삼고두, 만세 삼창으로 황제 즉위를 축하했다. 삼무도와 삼고두는 과거 중국 황제의 조칙을 받들 때만 하던 의례였으나, 이제 고종황제에게도 이러한 최고의 예를 올린 것이다. 산호로서 "만세"를 외친 것도 제후국의 "천세"와 달라진 점이었다.


##조선왕조시대 국새의 손잡이는 거북모양이었으나 대한제국의 황제국 선포로 용 모양으로 바뀌다. 제고지보는 칙임관을 임명할 때 사용하였다. ~정작 주한 외교사절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자주 선언은 곧 내정간섭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선포에 대해 정작 국제사회에서는 서구열강의 경우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미비함을, 중국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에 위반됨을 지적하며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일본은 고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강 중 가장 먼저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아무래도 을미사변 이래 약화된 반일 감정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국 선포를 직접적으로 승인하며 축하 공문을 보내온 것은 러시아와 프랑스였다.~청은 후술하듯이, 지리한 외교협상 끝에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결국 대한제국을 승인했다.~아무래도 을미사변 이래 악화된 반일 감정을 무마하려는 의도가 앞섰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제국 선포를 직접적으로 승인하며 축하 공문을 보내온 것은 러시아와 프랑스였다.~청은 후술하듯이, 지리한 외교협상 끝에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결국 대한제국을 승인했다.~대한제국 선포와 황제 즉위식 후 최초의 국가적 행사는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명성황후 국장이었다. 을미사변 이후 2년 2개월이나 지난 1897년 11월 21일과 22일 양일간, 제국 선포 후 황후로 추존된 명성황후의 국장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을미사변 당시 왕후의 사체는 경복궁 건청궁 옆 녹산에서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타다 남은 사체 일부는 훈련대장 우범선이 연못에 넣으라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가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쪽 봉우리 아래에 임시로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운각은 건청궁 바로 뒤 경복궁의 후원이었던 경무대, 즉 현재의 청와대 경내에 있던 전각으로서, 그 위치는 옮겨졌으나 지금도 오운정이라는 현판을 단 정자가 남아 있다.


##윤석우는 11월 14일 법부협판 이주희, 일본어 통역관 박선과 함께 불경죄로 친일내각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을 왕후 살해의 하수인으로 몰아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조처였다.~국장 절차를 모두 마친 후 공로자를 포상한 기록에 의하면, 장지인 홍릉까지 전화기를 가지고 수행한 전보과 주사도 등장하는데, 장지와 경운궁 사이에 긴급한 연락을 해 임시 전화도 가설된 것으로 보인다.


##성대한 명성황후 국장은 자주독립을 내세우며 새롭게 출범한 황제국으로서 대한제국의 위상을 한껏 드러내는 행사였다. 더불어 반일을 기치로 충군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주한 미국공사 알렌도 명성황후 국장에 참여하여 철야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근대적인 국가기념일 행사는 갑오개혁 인 1895년 7월 16일,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날인 개국기원절을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국경일에는 각 관청과 학교, 민가에 태극기를 게양하게 하고 황제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축하연을 벌이게 했다.


##국경일 축하 행사에 보이듯이, 새로운 황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나게 된 대한제국의 인민들은 국가행사 때마다 등장하는 태극기를 국가상징물로, 대한제국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었다. 이제 태극기는 관청은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국경일이나 행사 때마다 게양하는 국가적 상징 기호가 되었다.~1882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박영효가 최초로 국가적 표식으로 활용한 이래, 태극기는 황제 즉위식에 가는 환구단 행차, 명성황후 국장, 기타 황실 경축일 행사에 등장했다. 또 독립문에 새겨지고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 신문 제호, 대한제국의 우표나 여권에 등장했다. 


##고종이 기꺼이 서양인들의 카메라 앞에 선 목적은 비숍의 알현 사례에서 보이듯이, 대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이 근대 문명세계의 일원임을 알리는 수단으로 자신의 사진을 나라 밖 세상으로 내보내려 한 것이다.~1900년 10월, 한밤중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셔둔 진전인 선원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한 후 다시 추존한 호칭), 헌종 등 7대 임금의 영정이 모두 불타버렸다. 고종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이처럼 큰 사태가 없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전통을 따르는 어진 봉안 행사에서도 새로운 시대적 변화는 감지되다.~어진 행렬이 지나오는 코스의 도로와 교량을 정비하고 길 위에는 황토를 깔았다.~1900년 3월, 태조 어진을 다시 준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장거리 출장길을 떠나는 의정 윤용선에게 고종은 중간 도착지마다 상황을 보고할 때 전화기를 사용하라고 조언했다.~어진 봉안이라는 전통적인 황실 행사에 근대문명의 이기가 동원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보훈 기념물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장춘단이 1900년 설치되어 을미사변 때 순직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장병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배향했다. 장춘단이라는 비석의 글씨는 황태자가 직접 쓰고, 뒷면의 비문은 황실의 측근인 민영환이 칙명을 받아 지은 것이다.~일제강점기에 장충단이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건물들은 모두 훼철되고 그 터에는 현재는 신라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고종은 1902년 1월 27일, 조령을 내려~마땅히 나라의 노래를 제청하라라고 지시하고 가사를 지어 바치게 했다. 가사가 지어지자 에케르트가 서양식 음계와 리듬을 사용하면서도, 한국풍이 나는 애국자를 작곡하여 1902년 7월 1일 완성했다. 그리고 8월 15일 『관보』에 고종이 1월 27일에 내린 조령이 실림으로써 애국가의 제정은 공식적으로 선포된 셈이다.~국제사회에서 근대적 주권국가로 인정받기를 갈망하던 대한제국답게 서양식 국가가 제정되자 가장 먼저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외교관에게 전달한 것이다.~가사의 내용은 황제의 만수무강과 권위, 복록이~상제가 도와달라는 측면에 불과했지만, 일단 그 형식은 나무랄 데 없이 서구적이었다. 


##대한제국기에 수도 한성은 근대도시로 변모를 시작했다. 고종이 서양인 집단 거주지인 정동으로 거처를 옮겨 새 황궁으로 경운궁을 건립하면서 한성부의 중심이 경복궁에서 환구단과 경운궁 권역으로 옮겨졌다. ~미국 워싱턴 D.C.를 모델로 경운궁을 중심에 둔 도로 체계를 세우고 각종 기념물과 공원 설립을 계획한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의 결과라는 평가였다.


##비숍의 여행기~197년 1월 말 한성을 떠날 때는 시가지의 모습이 깜짝 놀랄만큼 달라졌다고 기록했다. 비숍이 마지막으로 한성을 방문한 것이 1896년 10월 20일부터 1897년 1월 23일까지였으므로, 이때의 한성부 모습이 1894년이나 1895년에 비해 획기적으로 달라졌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도로들은 최소 17미터의 폭으로 넓혀졌고, 길 양쪽에는 돌로 만든 하수구가 설치되었다고 했다.


##경복궁-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한성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운종가(시전 등 점포가 많아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의 종로 일대) 중심의 기존의 가로망은 새롭게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방사상 도로망으로 변해다.~그런데 무엇보다도 한성부의 도시 경관에 경천동지할 변모를 가져온 것은 전차의 개통이었다. 1898년 1월, 고종황제가 출자하고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9월 경희궁 흥화문 앞에서 전차궤도 기공식을 거행했다.


##전차 개통 후에는 1900년 3월, 종로거리에 가로등 공사가 시작되다. 1887년 3월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서 발전을 시작하고 건청궁에 전등을 밝힌 지 13년 만에 종로에 가로등까지 설치한 것이다.~에디슨이 1879년에 백열전구를 발명했으니 불과 7,8년 만에 조선의 궁궐에 전등이 켜지고, 또 그로부터 10여 년 후에 한성부에 가로등이 점등된 것이다. 


##특히 일본인 주거지역인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지역)를 중심으로 치안 확보를 위해 거리와 상점에 점등이 개설되었다. ~버튼 홈즈는 이전에는 베이징보다 열악했지만 지금은 동양의 어느 토착 도시보다 낫다는 평가와 함께 한성부 주요 거리와 사람들의 사진을 제시했다.~그야말로 '전차 혁명'이라고 서술했다.~전차는 한성부민의 생활문화를 확 바꾸어 놓았다.~1902년 말 베이징 근무를 마치고 대한제국에 부임한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로 로세티는 한성은 중국의 진흙탕 거리와 달리, '한쪽 끝에서 맞은 편 끝까지 가로지르는' 매우 넓고 끗한 4개 내지는 5개의 큰 간선도로를 보유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도로는 서대문에서 시작해서 직선으로 4킬로미터 이상 뻗어 동대문에 이르는 동대문로라고 기록했다.~전차로 인해 한성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확보한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는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주지하듯이 독립협회 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처럼 경운궁 인화문 앞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회'라는 이름으로 시위 군중이 모여 황제를 궁궐 밖으로 나오게 한 의미 있는 장소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민의 창달의 장소로서 상징성을 가진 시청 앞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의 기원이 1898년 경운궁 인화문 앞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화문이 철거된 후에는 자연스럽게 동문인 대안문이 경운궁의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다.~대안문 앞은 현재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볼 수 있듯이,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 건너편에 환구단까지 보이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1898년 월 이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1919년 고종이 사망했을 때 망곡 처소가 된 곳도 대안문이 이름을 바꾼 대한문 앞이고, 3·1 운동 당시 만세 군중이 시가행진을 벌일 때 찾아간 목적지 중 한 곳도 덕수궁 대한문 앞이었다. ~대화 이후 경운궁을 재건하면서 대안문의 편액을 대한문으로 바꿔 달았다.~소운은 하늘, 운한은 은하수를 가리키므로 결국 '대한'이라는 새 이름은 '큰 하늘'이라는 뜻을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대한제국의 정궁 경운궁의 정문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경운궁 내 최대 규모의 양관인 석조전은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1897년부터 건립 계획이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이미 경운궁 안에 서양식 건물 건립을 위한 측량을 실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석조전 설계가 끝난 후 실제적인 착공은 1900년에 시작되었다. 


##정관헌은 휴게 공간 외에도 잠시나마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으로 사용되었고, 고종과 황태자의 어진과 예진을 그리는 장소로 사용된 적도 있다. 정관헌은 건물의 정면과 양 측면에 베란다가 있고 로마네스크식 기둥이 설치되어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하지만 팔작지붕 형식이나 세부 장식에는 한국적인 요소도 많이 가미되어 있는, 동서절충과 신구융합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을사늑약 후에도 고종은 계속 수옥헌에 머물렀다. 화재로 불타 버린 경운궁의 주요 전각들이 재건된 후에도 가끔 준명전 등으로 나아가 접견 업무를 수행할 때를 제외하면, 1907년 7월 강제 퇴위당할 때까지 수옥헌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미국 공사관과 담장을 같이 한 수옥헌의 입지적 조건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수옥헌이 사실상 고종황제의 편전이 되면서 명칭도 1906년 이후 어느 시점부터 중명전으로 바뀌었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박제순은 처음에 임시로 공관 건물을 임대해서 사용하다가 다른 나들과 대등하게 보이기 위해 황제의 내탕금을 들여 미국이 사용하던 건물을 사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청의 반대에도 끈질긴 교섭 끝에 조약을 체결하고, 그로부터 3년이나 지나 어렵사리 공사관을 개설한 만큼, 박제순은 현지 외교활동을 통해 대한제국이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청 황제에게 국서 봉정 시에도 과거 조공사절이라면 3궤9고두례를 해야 했으나, 이제 서양 열강과 똑같이 건청궁에서 국궁례를 행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유럽 열강과 외교를 강화했는데, 1899년 무렵까지는 한 나라에 단독으로 공사관을 개설하지는 못하고 몇 개국을 묶어 순회대사를 파견하는 체제였다. 1898년 5월 성기운을 영국·독일·이탈리아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윤용식을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전권공사로 임명한 것은 현실적으로 6개국을 순회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3개국씩 담당국을 나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유럽 열강 중 프랑스와 러시아에는 단독으로 공사를 임명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국과 이탈리아에는 겸임 공사를 파견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하지만 현재까지 유럽 각국에 개설한 대한제국 공사관 관련 사실은 아직도 정확히 정리되어 있지 않다.


##유럽에 파견된 외교관들은 대부분 고종황제의 측근 친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주미공사와 주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씨척족이었다. 이들이 높은 지위를 내세워 외국과 교섭하는 데 유리하고, 또 민씨들은 고종의 처족, 혹은 외척으로서 내밀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파리박람회 참여는 단지 대한제국의 문화와 물품들을 유럽에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장차 국제사회에서 프랑스의 정치외교적 지원을 기대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의 막대한 지원과 관심하에 진행되었고~1883년에도 미국 보스턴 만국박람회에 비공식적으로 몇몇 공예품을 출품했고, 1893년 시카고박람회에도 공간을 마련해 출품한 경험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이제 독립 전시관을 세우고 한국 물품을 소개하게 된 것이다. 47개국이 참여한 시카고박람회 때는 6~7칸의 기와집을 지어 전시관으로 삼고 옷감, 발, 나전칠기 장롱, 수놓은 병풍 등을 전시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고종황제 즉위 40년 칭경예식은 끝내 거행되지 못했다. 근대 주권국가로서 면모를 과시하고자 기획했던 성대한 국제행사는 몇 차례 연기를 거듭하고도 끝내 거행되지 못했지만, 관병식과 원유회 등 근대적 국가행사 양식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취소된 칭경예식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이 실질적인 국권의 강화 없이는 아직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고종은 1880년대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당시부터 서구문물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895년 1월 경복궁 내 처소인 건청궁에서 명성황후와 함께 여행가 비숍을 만날 때부터 이미 서양식 식문화를 즐기고 있었고, 심지어 궁중에서 스케이트 타기 행사까지 열었음은 비숍의 여행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흔히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했다고 평가하지만, 굳이 무게중심을 따져 보자면 '구본'보다는 '신참'쪽이었다. 


##서양인들이 연회에서 전통적인 의례 절차를 준수하기 쉽지 않았으므로 거의 서양식으로 연회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궁중 연향에서는 진연청과 같은 임시기관을 설치하여 연향을 준비하고 왕과 왕비가 주인노릇을 한 것과 달리 외빈을 대접하는 연회는 대부분 외부대신이 주관했다.~고종황제가 외국인들을 접견하는 경우, 대부분 양관인 수옥헌과 돈덕전을 활용했고, 근대식 연회도 두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황궁에 초대받은 서양인들이 유럽의 궁정에 초대받은 것처럼 느낄만큼 생활문화가 서구화되었다고 기술했다. 대한제국이 서구 열강에게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만큼 음식문화에서도 이를 보여고자 애쓴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식 드레스 차림의 사진을 남긴 엄비가 초대받은 유럽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유럽의 관습과 예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보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서구문물 수용에 적극적인 모습에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이 동아시아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무참히 깨지는 과정을 엠마 크뢰벨 역시 경험한 것이다. 


##갑오개혁기에 궁내부를 설치한 것은 왕실과 국정 업무를 구별하고 국가재정과 왕실재정을 분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실제로 갑오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군주권의 회복과 함께 궁내부는 애초의 설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궁내부가 핵심적인 국정운영 기구로 떠올랐다. 궁내부 산하에 우후죽순처럼 신설된 물품사, 통신사, 철도원, 서북철도국, 예식원, 경위원, 광학국, 수륜원, 관리사, 평식원, 수민원, 박문원 등은 대부분 황실사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근대화 사업 추진기구였다.


##대내적으로는 절대권력을 확립한 황제권이지만, 열강의 외압에는 무력했고, 정부대신들은 각자 강력한 외세를 입지의 안전판으로 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황제는 외세의존적인 정부 대신들을 배제하고 측근 심복인 궁내관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고, 내장원 재정의 팽창은 이러한 대한제국의 특수한 통치구조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일제가 황실의 조상 제사에 쓰이는 재산을 비롯하여 궁방 소속 궁장토 등 황실의 사유재산까지 모두 국유화한 조치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일제가 주장하듯 국유와 제실유의 구분이 모호하고 혼효되어 있어서라기보다는 1907년 고종황제 강제 퇴위 후 황제권 해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아예 그 물적 기반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병합 단행 이전에 이미 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황족으로 흡수하기 위해 재정적 기반부터 해체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1910년 8월 22일의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황제국에서 다시 조선왕실로 격하되었다.~불과 13년 만에 일본 천황의 책봉을 받은 창덕궁 '이왕'과 덕수궁 '이태왕'이 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구성원들은 일본 천황가의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조선의 왕공족이 되었다. 그런데 왕공족은 엄밀히 말하며 일본의 황족이나 화족과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왕가에 대한 예우는 단지 형식에 그쳤을 뿐, 어디까지나 일본 천황의 통치를 받는 신민으로 편입시킨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순종 사망 후 형식적으로 그 뒤를 이어 '이왕'으로 책봉된 영친왕이 도쿄에 거주했으므로 영친왕의 도쿄 관저가 경성의 창덕궁을 대신하여 중심시설이 되었고, 고종 사망 후 비어있던 덕수궁은 1933년 공원이 되었다.


##각 지방에서 의병투쟁이 격화되고 통감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순종황제의 전국 순행을 기획했다. 통감부 통치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고 문명화의 효과를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한 것이다.~오히려 순종황제에 대한 충군애국주의를 불러 일으켰다는 평가도 많다.~그런데 한편으로는 순행을 통해 황제가 직접 근대문명을 수용한 태도를 일반 국민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준 측면도 있었다. 순행에 나선 순종이 충청도 지방유생들의 흑단령과 상투 차림에 대해 구습에 젖어 새 문물을 거부한 태도라고 꾸짖었다는 기록 등이 그 사례이다. 


##하지만 황제는 평양에서 기자릉, 동명왕릉, 단군릉 등의 유래를 언급하면서 서북지역이 고구려의 옛 강토이며, 을지문덕이 의적을 물리친 과거 역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도 했다.~순행을 추진한 일제의 의도와 달리 순종의 순행이 지방 민심의 회유보다는 오히려 민족의식의 고양을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통감부 통치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계기가 된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1919년 1월,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거국적인 3·1 만세운동이 일어남으로써 안정적인 총독부 통치는 사상누각에 불과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영친왕이 스무살 되던 해인 1916년 8월, 일제는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 궁가 모리마사 친왕의 첫째 왕녀 마사코와 영친왕의 약혼 사실을 전격적으로 발했다. 일본 군부는 한때 히로히토 황태자비의 물망에도 올랐던 마사코가 아이를 낳지 못할 체질이라는 이유로 조선 왕실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한 계략으로 이 결혼을 추진했다고 한다. 원래 일본의 『황실전범』에 의하면 황족의 여자는 황족 또는 화족에게만 출가하게 되어 있었는데, 왕족이나 공족과도 결혼할 수 있도록 전범을 고쳐가면서까지 이 결혼을 추진했다고 마사코, 즉 이방자는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고종 사망 후 삼년상도 마치지 않은 1920년 4월 28일, 결혼식이 강행되었다. 영친왕이 일본 황족의 여자와 결혼한 것에 대해 독립운동가들은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만도 못한 인물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실제로 도쿄의 영친왕 저택으로 연일 투서와 협박전화가 날아들었다.~일제의 대한제국 황실 말살책은 국권의 상징으로서 민족적 저항의 구심점을 완전히 해체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한국인들에게는 일찌감치 왕조의식을 벗어던지고 민주공화정을 채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경우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 내 급진파로서 반정부, 반황제정 운동에 앞장서다가 공화파로 몰려 투옥되기까지 한 경험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실에 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반면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일본군 경력을 가진 영친왕의 귀국에 적극적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정통성 부족을 수식하기 해서 영친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박정희 정부 역시 표면상으로는 영친왕의 귀국을 도와 정권의 호재로 이용했지만, 사실상 역사적 소명이 다한 황족을 우대한다거나 그 존치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황실이라는 단어의 존재감마저 희미해지고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쯤, 1963년 『구황실재산법』은 폐지되고 관련 조항은 『문화재보호법』으로 이관되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과거  역사와 전통문화의 영역으로 넘겨졌다. 


##대한제국이 근대적 황궁으로 건립한 경운궁은 고종의 강제 퇴위를 계기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조 이성계가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머물렀던 궁호를 덕수라고 한 고례를 근거로 궁내부대신 이윤용이 제안한 호칭이다.~대한문 건너편에 덕수궁과 마주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상징 환구단도 1913년 철되었다. 환구단 터에는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으로 한반도 종단 철도 완공을 기념하는 철도호텔이 들어섰다.~현재는 이 자리에 웨스틴조선호텔이 있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상징으로서 환구단이 시야에서 사라짐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기억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의 현장이자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반일 저항의 장소로서 일제 입장에서는 굳이 보존하고 싶지 않은 건물이었을 것이다.~1912년부터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인 서울구락부가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1925년 3월 12일~이때 중명전 건물은 외관만 남긴 채, '거죽은 말쑥'하지만 내부는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다. ~재건된 중명전에는 여전히 서울구락부가 입주해서 활동하거나, 조선 내 특수 외국인으로 조직한 비밀 결사인 프리메이슨 월례모임이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일제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자 순종의 무료함을 달래줄 오락시설 마련이라는 명분으로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했다. ~격봉궁은 창경궁보다도 먼저 1908년 3월 8일, 일반에 공개가 결정되었다. 궁궐중에서 가장 먼저 일반 대중의 관람이 허용된 셈이다.~『북궐도형』에 기록된 경복궁 전각 수는 509동 6,806칸으로~해방 후 남은 건물이 40동 857칸이므로 일제강점기 동안 철거되거나 이건된 건물이 356동 4,648칸이라고 할 수 있다. 


##총독관저는 해방 후에도 경무대라 불리며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가 1960년 4·19혁명 이후 청와대로 이름을 바꾼. 1991년 현재의 청와대 본관이 신축된 후 1993년 10월 철거될 때까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이 관저 및 집무실로 옛 총독 관저를 사용한 것이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망의 시작점이었던 대한문 앞 광장에는 식민통치의 위엄을 자랑하는 경성부청이 신축되어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에 대한 기억을 압도했다.~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 정면에는 식민지 지배권력을 상징하는 총독부 청사가 1926년 완공되고, 덕수궁에는 근대적 문화시설인 미술관과 아동 놀이공원을 설치함으로써 대중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식민지 근대의 위용을 각인시키는  방법이었다.


##대한제국은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대한'이라는 국호를 남겼다. 현재도 국가행사 때마다 펄럭이는 태극기는 대한제국기에도 황제 즉위식 행렬에 앞세워졌고, 황제탄신일과 개국기원절 행사장을 장식했다. ~덕수궁이 대한제국 당시의 이름 '경운궁'을 되찾는 데 실패한 사례에서 보이듯이, 여전히 대한제국의 실패와 좌절에 준엄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심리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국가 구상을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개화파였지만, 자체 역량 미비로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체제 붕괴의 근본적 동력은 1894년 동학농민군의 전국적인 봉기와 이들이 주장한 폐정개혁안에 있었지만, 이를 수렴하여 근대적 개혁 법령으로 입안, 공포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실행에 옮긴 것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개화정권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왕조체제의 근간을 이루었던 신분제가 해체되고,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지배엘리트 선발 방식인 과거제가 폐지된 대한제국은 더 이상 양반지주 중심의 나라는 아니었다.~대한제국 황제정은 왕조시대와 질적으로 차별되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것임은 분명했다.~고종은 개항 이후 개화정책 추진 당시부터 부국강병을 위해 정통 양반 사대부가 아닌 서자나 무과 출신 인사들을 중용했고, 이는 그 자체로 양반 사대부 중심의 관료체제와 신분제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한제국 황제정하의 신민은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결집한 민권운동 세력으로서, 『헌의 6조』를 통해 장정의 실시를 요구하는 등 입헌정치에 대한 요구를 표출하기도 했다.~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수립과정은 대외적으로 민족 정체성이 확립되고 동시에 대내적으로 균질적인 근대 국민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대한제국을 둘러싼 강력한 외압하에서 대외주권의 위가 강조되면서 대한제국 황제정하의 군권대 민권의 대립은 일단 군권의 승리로 귀착되었다.~일제의 국권 침탈로 대한제국 황제정이 일거에 붕괴되었기에 1919년 3·1운동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찍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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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 2025.03.1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대한제국을 재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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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3월23일 #도서제공#근대한국의탄생대한제국#서영희#사회평론아카데미 #역사 #대한제국역사 속에서 대한제국은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였다.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은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지만, 그 의미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우리가 대한제국을 떠올릴 때면, 대개 일본의 침략과 국권 상실의 역사로 연결되지만, 그 이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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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3월23일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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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평론아카데미 
#역사 #대한제국





역사 속에서 대한제국은 가장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였다.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은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지만, 그 의미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우리가 대한제국을 떠올릴 때면, 대개 일본의 침략과 국권 상실의 역사로 연결되지만, 그 이전에 대한제국이 이루려했던 노력과 시도들은 잊혀진 채 희미하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대한제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제국의 역사적 평가는 온전한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의 첫 장을 펼쳤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대한제국이 경운궁을 중심으로 선포되었으며, ‘대한’이라는 국호와 제국 칭호를 통해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과정을 다룬다. 황제 즉위식은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행사였고, 명성황후 국장은 단순한 장례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적 저항과 조선의 자주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려는 정치적 의지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2부에서는 대한제국이 대한국국제를 반포해 근대 주권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태극기·어진·애국가 등의 국가 상징물을 도입하며 국민적 결속을 다졌음을 설명한다. 또한, 경운궁을 확장하고 서양식 건물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근대를 절충하며 도시 개조와 근대화를 추진한 과정도 담겨 있다. 외교적으로는 만국공법을 활용하며 중국 및 유럽 열강과 관계를 맺었고, 고종 즉위 40년 칭경예식을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3부에서는 일본의 국권 침탈로 황실 재정이 장악되고 황제권이 해체되었으며,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궁궐 훼철과 덕수궁 축소가 이루어진 과정을 다룬다. 비극적으로 대한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의 근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읽으며 대한제국을 단순히 패망의 역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도와 도전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비록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겼지만, 대한제국은 스스로 근대화를 모색했고, 독립국가로서의 길을 개척하려 했다. 그 경험은 훗날 대한민국 건국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대한제국을 패배의 역사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계승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다. 이 책은 대한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며, 그 시대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을 바로잡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y****c 2025.03.2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근대 한국의 탄생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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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고 한다며 바로 '대한 제국'일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이어졌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아관파천, 국권 상실의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어쩌면 잊어버리고 싶은 역사이기에 상세히 다루지 않고 기본적인 사항만을 남겨둔 채 묻어두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한 제국 하면 황후 시해 사건과 국권 상실만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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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고 한다며 바로 '대한 제국'일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이어졌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아관파천, 국권 상실의 어두운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잊어버리고 싶은 역사이기에 상세히 다루지 않고 기본적인 사항만을 남겨둔 채 묻어두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한 제국 하면 황후 시해 사건과 국권 상실만을 간략히 가르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렵고 굴욕적인 역사라 할지라도 명명백백하게 끄집어 내어 후대에 역사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며 오히려 영광의 역사보다도 더 주목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굴욕의 역사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서영희 교수님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 공학 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관해 연구해 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남긴 유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근대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신 분들 덕분에 이제 우리는 대한 제국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되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이 책은 근대 한국의 출발점으로 서 대한 제국의 탄생과 해체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3개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제1부 '대한 제국의 탄생과 경운궁'은 새 궁궐 경운궁에서 1897년 대한 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제2부 '근대 주권 국가를 향한 도전에서는 근대적 주권국가를 표방하면서 황제권이 중심이 되어 근대적 방식으로 총군애국주의를 고취해 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제3부 '일제의 국권 침탈과 잊힌 제국의 기억'은 국권 침탈로 인한 물적, 인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박물관 속의 역사로 사라져 가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3가지 중에서 아마도 가장 생소한 과정이 제1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생각나는 두 가지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라는 국치 상황과 함께 요동치는 세계의 정세이다. 그런데 대한 제국이 어떻게 서게 되었는지 격변하는 시기에 대한 제국의 위상을 세계에 어떻게 알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을 새 궁궐로 정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했다. 경운궁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략과 을미사변으로 조성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난 극복의 상징성을 차용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경운궁은 조선 후기 역대 황들에 의해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 기억되어 왔으며 고종 역시 이 점을 활용하려 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지 1년 열흘이 지난 1897년 2월 20일 낮 1시에 환궁했다. 이후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자주국의 지위를 갖추기 위해 제국을 칭하며 황제의 위에 올랐다. 이 과정 또한 수월한 것은 아니었으며 종주국의 지위를 지키려는 중국의 방해와 내부적인 당위성 문제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10월 3일 칭제를 재가하고,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으로 결정했다. '대한'이라는 국호 선택의 근거로 조선이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과 각국의 외교사절들이 이미 '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을 칭하는데 중국에서 내린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명실공히 황제국으로서 열강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국을 칭함에 있어 마지막 절차라 할 수 있는 황후의 국장이 11월 21일에 거행되었고, 하관은 다음날 홍릉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각국의 외교사절을 초빙하여 황제국을 표방하는 외교의 자리로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근대사이자 아픈 과거인 '대한 제국'의 흥망성쇠가 보다 철저하게 고증되어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충분히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라본다.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d***o 2025.04.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