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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모 기업 PR광고에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카피가 문득 떠오른다. 그렇다. 세상은 언제나 승리자의 것이다. 패배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말이 없다. 설사 패배자의 삶이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걸 인정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현실에선 승리자의 삶이 그리고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패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었는가. 언제나 승자의 말에 그리고 그를 칭송하는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승자의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는가 말이다. 다행히도 요즘 국사학계에서 패자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기존의 관념을 깨트리는 과감한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어 반가울 따름이다. 특히 조선의 국왕으로 지내다가 패배자가 되어 죽어서도 평가절하되고 소외되었던 광해군을 '뛰어난 외교정책가'라는 시각으로 재해석한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사실 나 역시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알고 있었다. 친형인 임해군과 8세의 영창대군을 죽였고, 인목대비를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국왕들 중에서 친인척이나 형제들을 죽인 왕이 어디 광해군 뿐인가? 태종은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처참히 죽였고, 세조는 조카와 아우 둘을 죽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폐위되어 폭군이 된 왕은 광해군 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역사란 뒤에 집권한 사람들에 의해, 즉 승리자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광해군의 과오를 두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의 국왕으로서의 능력과 업적마저 그늘지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과를 철저하게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조반정은 광해군 시대에 집권한 북인세력과 당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정파간의 갈등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는 만큼 어느 한 쪽에 중심을 두고 역사를 보려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광해군 시대에 정치가 새롭고 그리고 정당하게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을 보면 그가 과연 어떤 왕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행동들의 이면에 깔린 심리적 배경같은 것들도 이해가 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세를 역전시키려 고군분투하였고, 전란후에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대대적인 복구사업을 벌였다. 이것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근거로도 사용되었는데, 그의 토목 사업이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봉건질서의 안정은 왕권의 안정에 있었다. 왜란을 겪으면서 약화되기 시작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해군은 왕권의 상징적인 의미로서 궁궐을 재창건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물론 방법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광해군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볼 때 왕권에 대한 그의 집착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 안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가장 힘껏 발휘한 외교분야. 책 제목에서 이미 나와 있듯이 그는 탁월한 외교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줄곧 자주적인 실리외교로 국제정세에 항상 민감하게 대처하면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명의 요청을 들어주는 듯 하면서도 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뛰어난 외교술은 현대 외교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그것은 마치 외줄타기와 같다. 명으로부터 벗어나 자주국으로 독립하기엔 조선의 국력이 약하기에 겪어야 할 시련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해서 명의 하수인 역할을 하기엔 누르하치의 세력이 두렵다. 근본적으로 조선이 국력이 강한 자주국이면 이러한 고민도 필요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이 옳은 선택이 될 것이다.
당시 광해군에게 가장 시급했던 과제는 전란의 복구였다. 그 과정에서 친인척들을 희생시켰지만 봉건적인 사회에서 그것이 그를 폭군으로 볼 수는 없게 만든다. 오히려 그는 전란 후 복구에 힘을 쏟았고 청나라의 침략위기로부터 조선을 구해 낸 국왕인 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정권이 1년만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보면 더욱 더 광해군의 평가를 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 이 땅으로 돌아오자. 등장 인물들은 변했지만, 사건 내용은 변한 것이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대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간섭. 그 속에서 늘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리. 늘 한반도의 평화와 동아시아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열강들의 자국중심적 이익추구. 하지만 우리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 존립할 수 있는 국력이 없다면 비굴하게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광해군처럼 실리적 외교를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며 반미감정이 높아졌을 때 정부가 적절히 SOFA개정을 추진함으로써 미국을 자극하지도 않으면서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이 때 정부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반미감정이 극도로 분출되어 국가적인 대립상태로 치달았더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졌을 것이다. 과연 미국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겠는가. 즉시 경제적으로 위협을 가할 것이며, 극단적으로 전쟁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온갖 경제적 협박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질것이고 또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강대국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가 말이다. 자주독립이라는 명분을 위해 국가의 존망을 걸고 국민들의 삶까지 흔들어 놓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자. 어쩌면 명분이라는 것은 한낱 껍데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역사는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발씩 나가는 것이다. 어쨋든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우리에게 '실리'라는 것의 의미를 강하게 심어준다.
광해군과 같은 실리적 외교로 강대국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면서 국익을 도모하고 안으로는 실력을 양성하여 자주독립국가로 강대국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국정원을 인권탄압의 요새로 쓸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활용하여 열강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앞날에 대처하고, 안으로는 국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일수록 '패배자'의 역사로 남겨진 광해군의 행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해군만큼 열심히 주변 열강의 동향을 살피고, 기민하게 국제정세 변화에 대처하려 했던 군주는 없었다. 그의 외교목표는 분명했다. 국가의 존 [인상깊은구절] 포학하거나 방탕했던 정도로 치면 광해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했던 연산군은 '그냥 쫓겨 날만 하니까 쫓겨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더 이상의 고의적인 격하나 매도를 당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에게만은 달랐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조선후기의 역사책이나 개인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이나 '폐주'라는 명칭은 예외없이 광해군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쫓져난 세 사람 가운데 광해군이 가장 문제가 많은 임금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를 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치적이 형편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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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권의 해당 도서 중에 굳이 광해군을 선택한 것은 이런저런 인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본 영화는 대부분 흑백영화였는데, 최초로 본 천연색 영화가 <인목대비>였다. 당시에는 황홀하게 보였던 영상과, 광해군의 야비한 모습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첫 발령을 받은 학교의 관내에는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의 생가인 손이곡(孫伊谷)이 있었다. 그런 사연을 생각하면서 광해군과의 낭만적인 만남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했다. 그의 역정을 다룬 흥미로운 소설 정도로 기대했는데, 이 책은 정치 역정에 대한 무거운 평전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버거우리라는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내 생각은 곧 기우로 바뀌었다. 저자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안목을 보이며 소설 못지 않은 흡인력으로 독자를 유인한 것이다. 저자는 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왕위에 오른 인물, 여러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왕권강화와 국가의 재건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인물로서 광해군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광해군의 어린 시절부터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기까지의 과정을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되살리며 책 속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임진왜란에서 한국전쟁을, 조선에 참전한 명군을 통해 오늘날의 주한미군 문제를 반추해보기도 하고 광해군의 군비강화책에서 한·미간의 미사일 협상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모습과 광해군 시대를 대비하는 그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광해군 시대의 암담함이 지속되는 무섭도록 닮은 조국의 현실에 가슴을 치며 통탄하기도 했다. 왜구와의 임진왜란의 전장에서 겨우 숨통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조선을 옥죄는 명나라와 후금, 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며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하는 광해군, 그런 광해군을 공격하는 조정의 붕당과 사대부들……. 반대자들은 끝내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지만 정묘호란으로 국토는 잿더미가 되고 치욕적인 삼전도 패전을 맞는 조선. 그러나 사직을 망친 자(당시 기득권자)들은 아무도 심판을 받지 않고 여전히 이 나라의 주류로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이것은 한국전의 소용돌이에서 겨우 일어섰지만, 아직도 북과 대치하면서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의 현실과 일치한다. 화합과 상부상조로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헐뜯고 훼방을 놓으려는 반대세력과 언론에 둘러싸인 현 정권의 모습에서 광해군의 딜레마를 보는 듯했다.
17세기에 나름대로 국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하고, 국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하려던 광해군은 끝내 무너졌다. 자신은 왕위를 빼앗겼고, 이 땅은 병자호란의 전란에 휩싸였다. “지금 이 땅의 우리 역시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기적처럼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한반도에 미치는 열강의 입김은 여전하다. 그들은 한반도 문제가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 내부를 추스르고 열강의 입김을 넘어서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이 절체절명의 과제를 앞에 둔 우리 모두에게 역사로서의 광해군과 그의 시대는 분명 소중한 거울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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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3종 세트 리뷰 최근에 영화 "광해" 히트를 치면서 더불어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아주 신이 납니다. 이렇게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논쟁이 있으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솔솔해서요. 자 그럼 광해군 3종세트에 대한 독후감을 시작해 봅니다. 최근까지 광해군에 대한 저서는 한명기의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가 있었고 최근에 오항녕의 "광해군 : 그 위험한 거울"이 출간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 전문가이지만 색다른 해석을 내 놓는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중 "광해군 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도 빼 놓을 수는 없겠습니다. ( 사실 재미는 박시백의 책이 제일입니다. 만화에요. )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논점은 크게 1) 실록에 대한 평가 - 광해군 일기에 대한 평가 - 공정한가? 후대에 많이 조작이 되었는가? 2) 외교정책 - 중립 외교 의도된 전략인가? 후대의 인식때문인가? 3) 민생정책 - 폭군인가? 전제 군주의 한계인가? 이렇게 세가지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첫번째 실록에 대한 평가 한명기는 책 25쪽에서 [인조반정 이후 거의 전멸해버린 북인들의 행적은 오롯이'승리자' 서인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들은 서인들이 기록한 '자신들의 실록'을 다시 검토하거나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광해군과 북인들이 남긴 행적,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역사적 모습은 서인들의 눈과 평가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 ] 이라고 말하며 일차적으로 실록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오항녕은 책 27쪽에서 [ 첫째 <광해군 일기>가 서인들이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은 '의문'이지 논리적으로, 사실적으로 참인 명제가 아니다. 논리적으로 서인이 편찬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라는 말은' 누구 말이니까 믿을 수 없다 말만큼이나 비약적이다.] 28쪽부터에서 [한편 사실의 차원에서 볼때, 광해군일기의 편찬에는 서인 만이 아니라 남인은 물론 반정 이후 조정에 들어온 북인도 참여 했다. 그러므로 서인이 편찬 했기 때문에 믿을수 없다는 의문은 훨씬 제한적으로 타당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둘째 <광해군일기>에 실린 기록 자체의 성격을 보겠다. <광해군 일기>의 기본사료는 인조반정 이후 편찬할 때 작성 한것이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기록된 사초, 국왕에게 보고하거나 관청끼리 주고 받은 문서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95퍼센트 이상이 광해군 당시 사관이나 관리가 남긴 사료이다.] [셋째, 이점이 재미 있는 대목인데, 광해군 재평가의 시조인 일제 식민학자 이나비에서부터 최근 민족 통일의 비전을 줄 수 있는 존재로까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참고하고 논거로 삼은 연구 자료의 90퍼센트 이상이 <광해군일기>이다] 일단 이 부분에서는 한명기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먼저 오항녕이 주장한 첫째 주장에서 인조반정 이후 들어온 남인, 북인이 자신들의 주장을 생각을 쉽게 밖으로 보일 수 있었을까요? 당연이 숨 죽이며 서인들의 주장에 따랐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혹은 살아 남아 서인정권에 합류한 사람들인데 이미 없어져 버린 광해군을 위해 자신과 가문의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료의 문제점은 오항녕이 말한 95퍼센트이상의 자료의 신빙성이 아니라 그 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그 자료의 해석이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자 서인들이 북인들의 선조실록을 재해석해서 "선조 수정실록'을 만들었고, 남인들의 "현종실록"을 서인들이 수정해서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했고, 소론들의"숙종실록"을 " 노론들이 "숙종실록 보궐정오"를 편한 한것 입니다. 광해군의 일기를포함해서 저 세편의 수정실록도 실록 작성의 기본 자료는 같은 자료였을 것입니다. 단지 해석에 따라 엄청난 역사적 의미가 바뀌기 때문에 그리고 역적과 충신이 변하기 때문에 실록을 수정 한것이지요. 셋째는 약간 비꼬는 말투가 들리네요. 중요성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 실록의 신빙성이 없다라기 보다는 실록 자료의 해석적인 면에서 평가가 갈리고 그래서 역사적인 평가가 바뀌는 것인데 '사실적'인 면에서있는 자료 가지고 쓴책인데 왜 있는 그대로 읽지 않냐라고 주장하는 오항녕은 모순되는 면이 보입니다. 반정에 성공한 (한명기는 반정이라는 말에도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서인이 쓴 실록이기에 - 아니 서인이 해석하고 서인의 시각이 들어갔기에 "광해군 일기"는 사료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의 해석을 생각하고 행간을 읽으면서 신중하게 읽어야 된다라는 말이 정확하겠습니다. 1Round 한명기 1 : 0 오항녕
두번째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 먼저 오항녕의 광해군에서는 이 외교분야에 대한 내용이 너무 적습니다 원래 오항녕의 촛점은 광해군의 내정실패였지만, 그래도그 당시 조선의 가장 중요한 문제중 하나였던 명,후금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습니다. 책 339쪽에서 342쪽까지 겨우 4쪽에 걸쳐 정말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책341쪽에서부터 [광해군은 줄곧 밖으로는 기미책, 안으로는 자강책을 추구한 것처럼 말을 했지만, 그의 대후금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첫째, 심하전투에서의 실리주의는 실패로 돌아 갔다. ~~~~~둘째, 광해군은 자신의 입장이 후금과 화친하는게 아니라고 극력 부인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장계에서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돌아갈 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광해군 자신이 보낸 장군인 강홍립의 장계에서 나온말이다. 국왕에게 올리는 장계에 이런 말을 쓰는것이, 과연 국왕과 사전 교감이나 논의가 없이 가능했으리라고 믿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광해군의 대후금 정책은 기조나 원칙, 그리고 상황을 제어할 능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숱한 옥사가 벌어지다 보니 조정에서 일할 인재가 없고, 대동법은 흐지부지되고 궁궐 공사에 국력을 낭비하다 보니 자원가 군비가 허술해졌기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결과였다.] 이에 반해 한명기의 "광해군"에서는 책 155쪽부터 251쪽까지 100여쪽에 이르는 분량이 명과 후금과의 관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장점을 크게 부각하자는 의도 인것 같습니다. 주제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입니다. 그중 책 200쪽에서 [광해군은 왜 명의 징병 요구를 왜 거부 하려고 했을까? ~우선 그는 전쟁의 참상을 잘 알았다. 임진왜란 직후 왕세자가 되자마자 전장을 주유했던 그였다. ~더욱이 당시는 왜란이 끝난지 겨우 20년. 아직 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시기였다.~~ 다음으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자신이 추진하고 있던 일련의 사업들이 전쟁 때문에 방해받게 되는 것이 싫었다. 비판 여론을 무릎쓰고 한창 짓고 있던 인경궁과 경덕궁의 공사도 걱정이었다.~ 그 밖에 광해군이 지녔을"반명감정"을 생각 할 수 있다. ] 그리고 213쪽에서 [역사학계에서는 '심하 전투'에 출전했던 조선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주로 조선군이 애초부터 후금군에게 항복하려고 예정하고 있었는지의 여부, 그와 관련하여 최고 통수권자인 광해군이 도원수 강홍립에게 미리 밀지를 내려 항복하라고 지시했는지의 사실여부를 따지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필자는 여기서 어느쪽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를 따지지 않겠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하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강홍립 등 조선군 지휘부가 뚜렷하게 싸우려는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고, 후금군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강홍립등은 '역적'으로 몰렸고 끝내는 광해군까지 '명을 배신한 폐륜한'로 몰려 폐위당하는 빌미로 이용되었다. 240쪽 [광해군은 '심하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더이상 재징병 요구를 못하도록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243쪽 [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들의 동태까지 감시하라고 비변사에 지시했다. 1623년에는 아에 명사들을 접견하는 것을 회피했다.]
오항녕은 광해군의 후금과의 화친의지가 강홍립에게 전달 되었다고 보고 한명기는 중요한 논점이 아니라고 발을 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두사람의 관점은 전쟁의 결과에서 갈립니다. 오항녕은 후금과의 패배가 광해군의 내정실패로 원인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의 외교정책은 전쟁의 실패로 별 볼일 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입장을 주장합니다. 그에 반해 한명기는 국력의 규모에서 후금과의 전쟁을 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후금과의 전쟁을 회피하려 했던 모습과 전쟁후 추가적인 명의 징병요구를 피했던 광해군의 모습에서 외교적 장점을 강조합니다. 일단은 후금과의 전쟁이 터무니 없었던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전투에서 바람이라는 돌박적이고 불운한 요소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광해군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후금과의 전쟁을 극력 피하려고 했던것도 사실이고요. 그렇다면 400년이라는 시대가 지난 오늘날 그의 외교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그 뒤에 이념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합니다. 반명외교라는 것이 반미혹은 탈미라는 그림자에 투영되면서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추숭되고 반대쪽에서는 극단적으로 실패라는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현대사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보면서 400년전 명과 조선을 떠올리고 그 시대에 명에게 이리저리 피하며 "싫다"라는 주장을 한 광해군에게 통쾌함을 느끼고 자주외교라는 이념에 가슴이 벅차고 인조와 그 서인세력에게 친미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에 대한 저항 논리로 광해군은 내정에 실패하고 그에 따라 외교에서도 실패한 반면교사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역사를 평가할때 현 시대의 이념이 투영되니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광해군 외교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을 400년 후에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미국의 압력에 굴한 파병이라고 할까요? 미국의 압박에도 비전투부대를 안전지대로 파병한 외교적 수완이라고 평가할까요? 두번째 판은 승부를 가를 수가 없네요. 역사 평가의 사실이라서 누가 옳고 그르다라고 말할 수 없고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의견이 다를 수 밖에 없고 또, 의견이 달라서 학문 연구가 발전하는 것이니까요. 2 Round까지 한명기 1 : 0 오항녕 세번째 내정에 대한 평가 광해군의 내정은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를 봅니다 워낙 변명할 여지가 없게 궁궐 공사를 크게 벌여서 내정이 피폐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동법에서는 조금 의견이 갈립니다. 한명기는 대동법의 단초를 만들어 낸것을 평가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고, 오항녕은 대동법이 광해군때 방납에 의해 엄청난 이득을 보고 있던 북인들의 의해서 저지되었다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다른 대동법에 대한 연구물들을 보면 광해군때의 대동법은 실패라고 보이며 의미도 거의 무시 되는것으로 보입니다. (이정철의 대동법에서)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재벌들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민생경제가 망가진거죠. 폐모문제도 광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인 라이벌이고 또 역모세력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명기는 광해군에 궁궐공사에 대한 집착을 왕권강화 측면에서 약간 옹호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역시 너무 공가를 많이 벌였죠. 하지만 광해군에게 유독 평가가 박한 것은 아닐까요? 조선 시대 전체를 볼때 광해군의 내정 실패는 본인과 그 당시 정권의 책임이 있지만 다른 왕과 정권에 비하면 그렇게 박하다고 볼 수 없을 듯합니다. 즉 그의 실패는 조선 전제군주의 한계가 아니 었을까 합니다. 여러 원인에 의해서 궁궐 공사를 벌여 조선 경제 규모를 뛰어넘는 지출을 해서 경제가 파탄 났지만 다른 정권을 살펴보아도 경제가 백성들의 삶이 살기 좋았다고 볼 수 있는 조선시대는 없습니다. 성군이라고 말하는 몇몇 왕이 있지만 백성의 삶은 약간의 부침은 있지만 그대로고 그 왕의 다른 업적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단점이 가려지는게 아닐까요? 광해군에게는 그런 업적이 없기에 평가가 박할 수 밖에 없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광해군의 실정의 비판 받을때 가슴이 아려옵니다.좀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왜 그렇게 했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듭니다. 광해군의 내정면에서는 오항녕의 비판이 신랄하네요. 3Round 까지 오항녕 1 : 1 한명기 광해군에 대한 대중적인 연구서가 두권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서로 상대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책이 두권이 되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행복해 졌습니다. 더 많은 연구와 좋은 책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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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부인할 수 없는 변하지 않는 과거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실에 논쟁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의 다름이 아니라 해석의 다름존재할 뿐이다. 오늘날 사회에 발생하는 매일매일의 사실이 역사이고, 이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은 주어진 입장, 시각, 살아온 환경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 사실또한 수천년전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럼으로 기록된 사실에 기반한 해석이 중요하고, 동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다차원적인 접근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집 아이들의 논쟁에서도 큰녀석의 말과 작은 녀석의 말이 다를때 객관적으로 서로를 들어주는 판단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하물며 작은 일도 이러한데 역사를 읽는데 이와 관련된 다양한 근거, 주변정세의 판도, 내부의 권력, 이권, 배경의 이해를 바탕으로 퍼즐을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선왕과 관련된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 이덕일의 조선왕을 말한다보다 명지대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은 일독을 권할만 하다고 말하고 싶다. 광해군편과 관련하여 내가 느낀 생각은 첫째책은 사실의 나열에 기반한 교과서보다 자세한 책, 둘째책은 조금 자극적인 주제의 접근과 특정 사관에 집중된 해석이라면, 마지막책이 보다 다양한 근거, 중국의 입장과 조선의 입장을 좀더 많이 반영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저자가 시대의 해석과 현재의 해석을 교차시키는 점이 어쩌면 위험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역사의 반복이란 명제속에서 교훈과 계승발전의 측면에서 되짚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광해군과 같이 평하된 군주는 노산군(단종), 연산군 3명이다. 후자의 두 군주중 단종은 불운의 역사를 상징하고, 연산군은 폐륜과 흥청망청이란 말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왜 광해군은 군이 됬을까는 재미있는 사실이다. 어렸을때 만화책에 나오는 연산군의 중종반정, 인조반정이 시대적 흐름인 신군부 쿠테타와 함께 부각된 기억이 세월이 지났는데 기억이 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책에서도 지적하듯 광해군의 재해석이 일제식민시시설 만선사관(만주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가 단위로 성장발전했다는 식민사관의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이나바 이와키치와 다카와 고조에 의해 시작되었고, 1959년 우리나라 역사학의 태두라 일컫는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글(광해군의 대후금정책)에 의한 것이라니 아니러니가 아닐수 없다. 그 연장선산의 일로 혼동스럽긴하지만, 책은 사실을 기반한 재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광해군시대의 업적이라면 단연 명말청초시기 중립외교, 대동법시행(경기도), 동의보감의 발행 정도이고 폐해라면 삼강오륜을 저버린 인목대비 폐위, 이복형제이자 첩이아닌 정실의 후손인 영창대군의 살해, 궁의 건설이란 과도한 재정지출을 지적한다. 주자가례를 신주단지 모시던 성리학기반의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 충분히 군이란 이름을 붙일만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주제들이 제시되는 과정의 사실을 통한 재해석은 책처럼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광해란 주제가 시대를 넘어 다시 부각되는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해석을 하고있다. 선조의 과도한 출산장려책속에 첩의 둘째아들로 임진왜란당시 왕세자에 오른 광해. 그리고 임진왜란속에 분조를 통한 왕권연습을 오랜기간 수행함과 동시에 몰락한 왕권의 처참함을 뼈져리게 느끼고, 아비로써 명에 호시탐탐 망명을 기도하는 선조, 환궁후에도 붕당으로 인한 난관을 왕위계승이란 명목으로 돌파하는 무능한 아비, 왜란당시에는 명으로부터 왕권이양이란 부담감을 받고, 난이 끝나고 명으로부터 왕위계승을 저지받은 불우한 왕이 광해이다. 젊은 시절의 아비의 견제, 참담한 전쟁의 실상과 왕권의 몰락, 명과 후금사이에서의 현실등은 그에겐 상처이자 극복할 심리적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연인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생존의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리한 궁의 증축은 왕권의 회복에 대한 심리적 트라우마, 인목대비의 폐위는 선조가 죽자 언문교지로 그를 왕으로 올린 공이 있는데 인면수심의 권력욕이라 보긴 힘들다고 생각이 든다. 또 그 못지않게 평양성전투빼고 변변한 공도 없는 명이 재조지은을 위시에 온갖 술책으로 은을 통해 재정의 상당부분이 수탈됨에도 명분과 사대를 따지는 사대부의 문제인지 왕의 문제인지 참 가름하기 어렵다. 조세를 내는 백성은 과도한 증세에 힘들고, 권력만 누리고 조세의무에 면천을 권리라 생각한 사림의 폐해, 명분에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군권을 갖은 문관중 서북방면으로 가기를 죽기로 싫어한 이률배반적인 사림의 행태는 당연히 비판받아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동법의 시행도 기호지방의 확장도 방해한 사림의 목적이 공물로 통한 기득권의 침탈을 방어하기 위함인지, 백성을 위함인지, 정부를 위한인지 명확하다. 화폐제도도 빈약한 나라가 경제수단을 한가지도 통합하고 백성을 위무하기 위한 선혜지법(대동법)으로 인한 방납폐해의 개선은 당연히 공이라 생각한다. 탈세자들인 사림과 사대부의 이권에 문제가 생긴것이라 봐야하고, 이 근본적인 조세문제는 조선후기에 더욱 심해지는 그 과정에 있을 뿐이다. 책에서 대북파의 충과 효중 충을 먼저 취하여 인목대비의 폐위를 주도한 것을 정치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효가 우선되어야 할일인데 그것의 바뀜은 당연히 정치적인 해석이다. 선조의 유지도 있었고, 광해가 훗날 인목대비의 아비 "김제남의 덕을 오래보았고, 이젠 신기하지도, 듣기에도 피곤하니 그만둘때가 되었다"라고 대북파에 내린 교지로써도 주도적 주체가 광해인지 동인에서 갈라선 대북파의 소행인지 가름해볼만한 일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시대에 대북파의 정치적 지도자 남명조식이 남인들로부터 노장에 가깝다는 치욕적인 언사를 받은 것은 이념중심의 사회에서 아이덴터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반작용이란 측면도 고려해 볼만하다.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책속에 잘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숭명정책을 반한것을 인조반정후 폐위명분로 삼았디. 책에서도 말하듯 인조다 숭명배금정책을 썼다기 보단 숭명정책을 강화하고 배금정책의 실질적 시행은 없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점은 광해의 외교정책의 계승으로 보는 점도 그렇다. 다만 내가 역사학자가 아님으로 이 부분은 오고 있는 책에서 찾을 기회를 찾아봐야겠다. 결과적으로 빨간색 글씨가 원인이 되어 인조반정은 시작됬다. 성공한 구테타는 처벌받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역사에 쿠데타는 사실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한다. 그리고 인조반정의 주체인 서인과 심리적 동조자 남인들의 상황과 반정을 통해 그들이 도모한 것이 "국혼(왕의 외척)을 잃지 말자는 것과 산림을 올려쓰자(勿失國婚, 崇用山林)"라는 것은 그들의 정당성이 얼마나 파렴치한것인지 세겨보아야할 일이다. 소중화 사상의 외사랑을 바탕으로 국가의 존망, 군신의 예가 아닌 신권 아닌 본인들의 기득권에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반증은 조선후기의 외척들의 문제와 연장선산에 있다고 생각이 든다. 또 역사는 정말 재방송이 되는것 같지 않은가? 또한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속에서도 그들의 뿌리가 대의가 아닌 소의에 있음을 반증한 일이라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사실은 이괄의 난때 경기방버사 이흥립이란 자가 투항을 하는데, 그가 훈련도감에서 인조반정 1000명의 무리에게 궁의 문을 열어준 자이다. 그리고 인조는 기금기준으로 공안, 공작정치의 내정(기찰의 강화)과 숭명정책을 하다 2번의 호란을 맞이하며 삼전도의 치욕을 맺는다. 권력자는 매번 바뀌나 백성들은 죽어나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피지배자가 원하는 곳에 역사성이 있고, 그것에 부합한 권력에 정당성이 있다고 한다면 선조, 광해, 인조의 삼대에 어디에 역사성과 정당성이 더 있을까 생각해볼만 하다.물론 백성을 사림으로만 보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우린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인조로 이어지는 맥락과 함께 본다면 대외적 자주적 생존의 외교정책과 신권의 나라 조선에서 내치에서 고립된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면 아쉬운 일이다. 결국 고려의 문화가 남아 있던 조선초기를 제외하고 사대부가 꿈꾸런 신권의 나라는 유지된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라의 백성이 사대부만인지, 수단으로 살아온 많은 백성들의 꿈은 무자비하게 강탈된것인지도 모른다. 그런점에서 조선왕중 가장많이 궁이 아닌 곳에서 백성을 보아온 광해의 정책중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광해도 16년의 재위와 이후 19년의 유배속에 자식의 죽음, 며느리의 자진등 모진 인생과 함께 그가 지은 시와함께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한 자연인으로써 그의 편중된 재능, 그렇게 밖에 발현되지 못한 시대적 배경이 아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미없는 역사의 가정은 더욱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된다. 다음에 오고 있는 광해는 논조가 다르다니 기대해 보려한다. 다만 광해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책은 꼭 권해보고 싶다. 달리 10년넘게 스테디셀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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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광해 왕이된남자를 보고 책으로도 읽고 싶어 서점으로 바로 달려가서 사버렷다. 최근에 제일 흥미롭게 읽은 책이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조선 제 15대 왕이며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되어서 1608년 왕위에 올랏다고한다 대동법실시와 동의보감 편찬등 몇가지 업적을 남겻으나 허나 인목왕후를 가두게 되고 임해군도 죽이게 된다 .. 간신들의 잘못 악행으로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가지고 왕위에 쫓겨나서 유배지에서 죽음을 마지하게된다 참 기구한 삶을 살다가 광해군 그래도 읽으면서 광해군이 어떤한 업적과 어떤한 사람인지를 꼼꼼하게 알게되어 궁금증을 다 해결하엿다 영화로 보고 나서 관심을 가지게 된 거 지만 역사소설을 좀 더 가까이 해야겟다는 생각도 들엇다 사는게 바쁘다는 핑계로 역사에 대한 위대한 업적등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가는게 많으니까
광해군은 어머니를 가두고 가족들을 모두 죽인 것에 대해서는 폭군으로 인정이되지만 대동법이나 동의 보감등 청나라와 화친을 맺는 중립정책을 실시하는 면을 봐서는 폭군 보다는 상황이 간신들이 광해군을 그렇게 만든거 같다 어찌보면 성군이 더 맞는 듯 하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참 멋진 왕이 엇다고 나는 생각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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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군주 광해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눈을 감은 광해군의 가슴엔 '혼군' '폐주'란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아무리 반정으로 물러난 왕이라지만 너무도 초라한 그의 묘소,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다시 죽은 것이다.
상아탑에 갇힌 진실은 만질 수 없는 허상과 같은 것.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말은 여러분이나 나나 이해하기 어렵다. 어찌나 어렵게들 쓰시는 지, 커다란 안경알 너머로 권위의식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학자라는 무리들의 특성인 것을 어쩌랴?(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다.) 그 때문인가 작금의 일반 백성들은 그에게 주목하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이런 가운데 내 머리를 둘러싼 무지와 편견의 딱딱한 호두 껍데기를 박살내 준 10톤짜리 쇠망치가 바로 이 책이다.
명과 후금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실리 외교의 선구자,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외교 전문가……. 이런 외교적 측면에서 그의 업적들은 충분히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사대주의에 매몰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광해군은 줄타기의 노름마치와도 같았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묘기를 부리며 이쪽에서 저쪽 끝을 오가는 그의 외교력은 암운의 시대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광해군 시대의 이야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은 구한말과 한국전쟁 직후, 그리고 현재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당시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되풀이되듯 커다란 줄기는 변한게 없다. 조선의 역사와 근대의 역사를 폴짝폴짝 넘나들고 오버랩 시키는 저자의 재주에 재미가 쏠쏠하다.
왕권 강화의 의지와 집착, 그로 인한 무리한 궁궐 건축…….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다.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취약한 기반에 서 있던 외로운 인간으로서 광해군을 바라보면 측은지심도 우러난다.
결국 역사는 반정이라는 빗나간 획을 긋는다. 반정의 명분은 무엇인가? 핵심은 재조지은을 배신했다는 것. 그 명분은 지켜졌는가? 아니다. 인조의 배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저 현상유지에 그쳤다. 오히려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을 계승한 것과 다름없었다. 저자의 예리한 시각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도드라진다.
이와함께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저자는 자상한 당부를 잊지않는다. 지나친 평가절하도, 일방적인 찬양론도 모두 경계하라는 것이다.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유가 가미된 탓이다. 일방적인 광해군 깍아내리기는 앞서 말했듯이 승자의 논리에 갇혀 역사 인식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무조건 추켜세우는 것 또한 자칫 식민사관으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말해 광해군의 외교 업적을 만선사관의 틀에서 부각시켜 조선의 자주성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여행은 갇힌 마음을 열어주고 좁아진 시야를 넓혀주고 굳은 생각을 풀어주며 소중한 양식도 가져다 준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난 아주 멋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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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하면 중립외교의 달인이라고 칭찬을 받는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에서 신흥강국 청나라와 비틀거리는
거인 명나라 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외교정책을 구사하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나라보다는 훨씬 더 청나라에 마음이 기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숭명 사고방식을 지닌 집권층 사대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청과는
필요이상의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
에서 중립을 표방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감히 누가 광해군을 욕 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의 군주이자 어버이인 선조가 의주와 평양으로 도망가서 명나라로
망명을 하느냐 마느냐 할 때, 광해군은 사지에서 의병들과 조선군들을
위무하며 전선을 오고갔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광해군은 조선의 군주로서 위엄과 책무를 다하였다고
보아진다.
광해군을 패륜이라고 하며, 이복동생과 어머니를 폐서인시킨 천인공노할
불효라고 하지만, 그것은 저 입만 살은 집권층 사대부들의 주장일 뿐이
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 역시 이복동생들을 참살하였으며, 아버지 태조 이성
계와 권력다툼을 하며 칼을 서로 겨눴으며, 동복형을 귀양보냈다. 또한
그의 계모인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와는 견원지간이었다.
세조는 어떠한가.. 자신의 동복형인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사실상 죽였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태종과 세조 모두 승자였기 때문에 광해군과
달리 위대한 제왕이라고 숭상을 받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의 재위기간동안에 전란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칭송을 받지 못하였다. 아니 칭송은 커녕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칭송과 멸시의 대상이었는 광해군이 물러나자 어찌되었
는가..
인조와 그 반정세력이 광해군의 대 후금(청)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다고
는 하지만 이미 대외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고 그들의 정권이
청 타도를 표면상으로 내세웠으니, 청으로서는 이 정권의 조선을 손봐
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광해군이 그토록 염려하고 우려하던, 전쟁을 터져버렸고, 정묘호
란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무시하던 여진족들과 형제의 예로 그들을 대하
게 되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군신관계로 전락되어버렸다.
과연 인조와 그 반정세력은 감히 광해군을 욕할 자격이 되었는가...
왜 그들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혀를 깨물고 자결하지 않았는가..
그들로 인해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고초를 당했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광해군은 이들을 보고 제주도에서 크게 웃었을 것이다.
내가 옳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수백년이 흐른 우리도 크게 외친다.
맞습니다!!!!! 광해군!!! 그대가 옳았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군주이며 저 용렬한 인조보다 백만배 천만배 더 뛰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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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덕일은 불운한 천재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인물들을 복원하는, 왕과 선비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파헤쳐 그들의 신원을 풀어주는 대중역사서 저술가다. 이덕일의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풍부한 사료에 빠져서 그의 다른 책을 뒤지다 [광해군]을 발견했다. 이덕일의 책은 아니지만, 패자 혹은 폭군으로 인식된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한명기 교수의 재해석이 궁금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광해군을 폭군으로 배웠다. 친형인 임해군과 8살의 어린 영창대군을 죽인 폭군으로,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패륜아로. 그러나 조선의 국왕들 중에서 친인척이나 형제들을 죽인 왕이 어디 한둘인가? 포학하거나 방탕했던 정도로 치면 광해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했던 연산군은 '그냥 쫓겨 날만 하니까 쫓겨났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더 이상의 고의적인 격하나 매도를 당하지는 않았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조선후기의 역사책이나 개인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이나 '폐주'라는 명칭은 예외없이 광해군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쫓겨난 세 사람 가운데 광해군이 가장 문제가 많은 임금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를 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치적이 형편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한명기 교수의 시각이다.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 뒤에(형인 정종을 내치고 동생을 죽임) 왕이 되었으며, 세조는 조카와 동생들을 죽였고, 영조는 자신의 아들까지 죽였다. 이러한 임금 가운데 유독 광해군만 폐위되었고 폭군이라는 꼬리표가 사후에도 그를 끄질기게 따라 다닌다. 무덤 역시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초라하다고 한다. 역사란 승자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역사는 승자에 의해 충분히,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영민하지 못했던 선조는 임란이 나자 서둘러 궁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급한 마음에 후궁 소생의 관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전통성 결여로, 또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세력들 때문에 광해군은 늘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툭하면 세자 책봉을 백지화 하려는 선조 때문에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내정과 대외정책에서 남긴 치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일선에서 전쟁을 직접 겪었고, 그것이 남긴 참상을 직접 보았으며, 또 분조를 이끌고 전란을 전란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그이기에 국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란 뒤에는 대대적인 복구대책사업을 폈으며,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는 탁월한 외교능력을 지닌 외교정책가였다. 그는 자주적인 실리외교로 국제정세에 민감하게 대처했다. 명의 요청을 들어주는 듯 척면서도 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그의 외교전술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광해군 스타일의 외교정책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 조선이 양대국 사이에서 조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궁궐 재건창과 실리외교로 인해 그가 폐위되긴 했지만, 광해군으로선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광해군 곁에 그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슬프고 안쓰러웠다.
작가는 조선의 군주들 가운데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을 들라면 단연 그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 탁월하고 일관성 있는 대외정책가라는 저자의 주장에 백번 공감하는 바이다. 이 책은 우리 주변에 중국이 그대로 있고, 일본이 여전하며, 세계 최강 미국의 입김이 무시무시한 오늘의 한반도 상황을 광해군 시대와 대비시키며 결론을 맺는다. 오늘의 우리는 주변 열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경제적 실력, 문화적 역량, 군사적 잠재력 등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377년 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에게서 가장 확실하게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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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책을 도서관 에서 읽어 보았다..
너무나 감명깊게 읽어서, 지금 책을 살가 고민중이다..
먼저 나는 광해군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새롭게 재해석 하게 된 사건이
드라마 '왕의여자' 라는 걸 보고 나서였다..물론 본방이 아닌
종영후 몇년이 지나고서 한 케이블 티비에서....
예전 에는 광해군,연산군 하면 무조건 폭군,폐륜아 라고 알고 잇었다..
그러나, 이책을 일고나 이해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느걸 깨달았다..
광해군 나름대로의 외교노선,정치적 기반이 잇었다..
그리고 서인들에 의해 군주가 된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보라..
광해군의 외교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아마도..인조가 청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소식을 귀양을 떠난
광해군이 들었다면.......만감이 교차 했을것이다..
정말이지..그동안 광해군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조명이 비추어지게 하였던 책이다..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이 취급하는 분들에게 이책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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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깨달음을 얻은 계기가 되었다.
자존심을 무작정 내세워도 안되고 비굴하게 보여서도 안된다는 것을......
17세기초 외세의 영향력은 지금 현재의 모습과도 매우 유사하다. 과거는 현재와의 대화라고 한 칸트의 역사정의가 거의 맞아 떨어진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광해군이 누구인가? 조선 27명의 왕중 연산군과 함께 왕의 존칭을 후대에 받지 못하고 군이라는 직함을 그대로 유지한 비극적인 왕이 아니던가
시대를 잘못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16세기말 17세기초는 훈구집단이 서서히 세력이 약화되고 사림들이 정치적기반을 탄탄히 다져간 시기였다. 이이,조식,이황등 성리학대부들을 스승으로 두었던 제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조선사회를 바꾸어나가려고 했다. 조선초기를 고려시대와 다를바없는 그 연속성이라고 평가한다면 중,후기는 주자가례, 즉 성리학의 이념이 본격적으로 퍼졌던걸 보면 그 변화양상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군으로 된 이유는 자신의 어미니뻘인 인목대비를 폐모로 강등시키고 감금했으며, 영창대군을 숙청한것에 그 까닭을 두고있다. 당시 성리학이념을 인지한 조정신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또 한가지더 임진년때 위기의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에대한 광해군의 외교노선이 명분을 잃었던것도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연산군에 대한 재조명은 전무한데 유독 광해군이 역사의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서 일본의 학자가 일제시대때 만선사관을 정당화하려고 광해군에 대해 재평가를 했었다고 하는데 일제에 의해 우리역사를 마구흔드는 그들에게 분이 치밀어 오르지만 그때가 시초라고 말하고 있다.
명이 망해가는 기미가 보이고 청이 대두했던 그 시기에 광해군집권기의 주변판세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판세를 얼마나 심각히, 심도있게 판단할 수 있었는가는 당연 광해군이 당연 으뜸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당시 직접 일본과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전투에 참가했음은 물론 자신이 직접 전쟁터를 지휘하기도 했다.
스무살도 안된 그가 엄청난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느끼고 배웠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은 비극이다! 특히 조선에게는 잘살지도 못하고 약한나라에 전쟁이라니'' 이런 걸 배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조가 광해군을 자신의 뒤를 이을 왕으로 여겼던것은 그가 어렸을때부터 다른 형제들보다 똑똑하고 총명함이 남달랐던 것을 둘째치더라도 임진왜란을 통해 선조자신이 뼈져리게 느낀 전쟁의 참상을 광해군이 직접 전투를 하면서 축적된 경험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게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삼하전투가 있기전 명나라가 재조지은의 명분으로 조선 일 만명의 원군을 요청한다.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받아들이고 대신 강홍립에게 ''주변의 향배를 바 판단하라''는 밀명을 내리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광해군 예상대로 명은 대패하고 강홍립은 청에 항복을 하게 된다. 굴욕적이지만 청이 조선에 반감을 품지 않게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외교는 사술을 피하지 않는다'' 라는 대목이 맞는 순간이다. 10여년뒤 병자호란을 맞게 되는 순간을 조금은 늦출수 있었던 계기가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점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에서 인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유리한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기만과 술책에 전력을 다하고 나중에 이득을 챙기는 한마디로 야생의 밀림과도 같은 것이 외교라는 것을......
또한번 약소국의 비애를 느꼈는데 지금 현상황도 이와 다르지않다.
역시 주체적이고 유리하게 외교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나라가 부강해야한다.
몇차례 반복된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나라는 더더욱 발전해 나가야 될것이다. 정말 우리나라가 부강한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상깊은구절] 마지막으로 유연한 외교를 통해 얻어진''평화의시간''동안 자강책을 마련했던 광해군의 자세다. 오늘의 우리 역시 주변열강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되 그 원만한 관계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시간동안 능력을 길러야한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경제적실력,문화적 역량, 군사적 잠재력 등에서 주변열강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럴듯한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370여년전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에게 가장 확실하게 배워야 할 점은 바로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