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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것이 역자의 신념인지 실수 인지는 몰라도...
이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한국의 개신교도들의 구교에 대하는
그들 나름의 구분을 짓기 위한 명칭인데...
그당시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이런 신교도적 용어를 사용할리는 만무하고,
만약 의도적인 끼워 넣기라면,
이는 풍광이 좋은 바위에 또는 문화유적인 건축물에
슬그머니 자기의 흉물스런 이름자를 새겨넣는
파렴치한들의 행각인데...
역자가 고의로든 아니면 지나친 종교적 신념에 의한
도를 넘어선 무의식의 소산이던
이는 명작에 흠집을 내는 소행이라 하겠다.
원본에 대한 완역이라는 훌륭한 취지를 무색케하는
이런 몰염치한 언행을 어찌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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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돈키호테가 삐적 마른 명마(?) 로시란테를 타고 산초와 함께 세계를 구하기 위해 편력기사로서의 위대한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돈키호테와의 인연은 거의 끊어졌다. 인간 돈키호테는 과대망상형의 상징으로서, 작품 <돈키호테>는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로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작품이 가진 수백쪽에 달하는 외적 위압감이 번번히 내가 돈키호테를 만나려는 의욕을 압도해 버렸다.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같이 모두 절세미인이라는 점, 주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수십년전에 헤어졌던 형제, 자매, 연인이었다는 기막힌 사연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점은 아직 고대설화의 느낌을 풍기고 있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 하나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본성의 문제를 담고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근대소설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는지도 모르겠다. 과대망상과 돌출행동으로 주위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한몸에 받고 있는 돈키호테도 가끔씩은 진지한 이야기로 좌중의 관심을 끌어모으기도 한다. 이 때의 돈키호테 이야기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이다. 사회적 정의, 계층간의 평등, 올바른 삶의 문제에 있어서 세속적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의 말로서 다가온다.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돈키호테를 만나는 기쁨을 나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 뿌듯하다. 형태는 다르지만 삶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은 오래오래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가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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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돈키호테의 표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도레 화가의 삽화가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각장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종전의 번역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훌륭하였습니다.
우선 작품의 내용이 읽기 쉬우며, 활자체나 편집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라서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었으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작품 해설을 보니 지금까지 생각했던 돈키호테에 대한 해설과는 달리 새로운 내용을 접하여 좋았습니다. 돈키호테 작품이 갖는 심오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왜 인류 최고의 명작인지를 어렴풋이 알게되었고, 왜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돈키호테 발간 400년을 맞아서 이같은 번역이 나올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꿈을 키우는 청소년과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Pinetree80
[인상깊은구절] "진정한 사랑은 깨지지 않으며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것인데, 여러분들은 왜 제게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줄 것을 강요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
| 너무나 유명한 책. 따라서 설명이 필요없는 책. 돈키호테가 누구며 그 소설의 내용이 어떤건지는 누구나 다 알지만, 실제로 나부터도 제대로 책으로 읽어본 적은 없었던. 어렸을때 티비에서 본 돈키호테 만화가 기억난다. 별셋 아저씨가 불렀던 주제가와 함께... 초저녁 샛별도 내마음 알아주네 (돈키호테 돈키호테) 달려라 돈키호테 정의의 기사여~ 세계 유명 작가들이 최고의 소설이라 손꼽던 바로 그 책을 드디어 읽었다. 처음 책을 본 순간 700페이지 이상되는 그 두께에 압도되고 손으로 들었을때 그 묵직함에 또 한번 압도되고. 과연 끝까지 무사히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슬쩍 밀려오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책은 어느 이슬람인이 쓴 이야기를 세르반테스가 우연히 입수하여 전한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당시에 주로 통용되던 수법으로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 회피의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란다. 내용은 라만차 귀족 돈키호테의 모험담이다. 풍차를 괴물이라 생각하고 돌진한다거나, 잘 알지도 못하는 한 평범한 여성을 공주라 여기고 그녀에게 충성한다거나, 산초와의 모험, 그의 말 로시난테 등등은 조금씩 알고 있었던 얘기뿐아니라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액자 소설 구조를 취하고 있어서 책속에 또다른 이야기들이 열편 가까이 들어 있었다. 400년 전에 씌여진 소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귀족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한다거나, 오늘날의 양성평등운동과 비견될만한 사랑이야기 등의 사회 의식도 담겨 있다. 돈키호테의 비정상적인 행태에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한데, 과연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일까 생각도 하게 만든다. 덧붙여. 돈키호테 앞에 수식어로 '편력기사'란 말이 늘 따라다녔는데, 편력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어도 그 이미를 정확하게 알진 못했다. 대충 '여성편력'이라는 용어로 많이 들어보긴 했는데...사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다. 편력(遍歷)[펼―][명사][하다형 타동사] 1.널리 각지를 돌아다님. 편답(遍踏). ¶여러 고장을 편력하다. 2.여러 가지 경험을 함. ¶여성 편력. |
|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온전히 자신의 의식을 100% 확신하면서, 그 의식을 바탕으로한 결단에 찬 행동으로 살 수만 있다면 행복한 삶일 것이다. 그의 의식의 내용이 맞던 틀리던.. 또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맞다 틀리다고 하는 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개인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의식체계가 틀린 세계에 살면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있는 것일까? 여름휴가기간 가볍게 읽어보리라고 선택한 소설이였는데..제법 긴 여운이 남는다. 400년 전의 세상에서 기사도를 비웃고, 수도사를 비웃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고자 했던 세르반테스의 일반인과는 달랐던 다른 시각이 이런 작품을 탄생시켰으리라 생각해본다.세상의 시류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의 삶과 내 삶이 그렇게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는 요즘의 나를 되돌아 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또한 돈키호테를 미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 미친 사람의 내부는 하나의 목표로 충실한 삶이다. 온전히 이성과 감성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돈키호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면서 행복했을 것이다. 머리와 가슴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삶. 얼마나 내가 꿈꾸었었던 삶이였었는지.... |
| 그냥, 읽지 않고 지나치고 싶은 작품이나, 꼭 읽은 것만 같은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경우 모두에 속한다. 범박하게 얘기하면, 읽기는 읽었다. 안 읽는 과거 또는 현재의 어린이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장면에 머문다. 그것이 돈키호테의 전부인 줄 알았다. 여기서, 가끔은 완역을 읽을 필요가 생긴다. 돈키호테는 돈키호테의 기행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 많은 이야기들이 가지를 친다. 중요한 것은 그 가지들 한 둘이 없어도 줄기가 존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은 가지 하나하나는 각각 줄기가 되어 수 많은 우주를 이룬다. 독자들은 작은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스페인 사회의 이면과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 보게 된다. 작은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당대 관습적인 모순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다. 작은 가지 이야기들이 겪는 고통과 돈키호테의 광기를 대비시킨다면, 독자들은 돈키호테의 광기를 자연스러운 그 무엇으로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세상 참 살기 팍팍한데, 선거를 통해 좋은 대통령 뽑으면 뭔가 바뀔 것 같은 환상을 같는 것처럼, 독자들은 돈키호테를 통해 이룰 수 없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안 읽었으면 했던 책이지만, 다른 책을 읽다보면 자꾸 언급이 되다 보니 안 읽을 수 없었다. 번역된 문장이 읽기에 수월하지 않았다. 오자도 조금 보인다. 중간에 삽입된 삽화가 읽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돈키호테의 광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을 읽다보면 광인 아닌 인물은 없다. 어쩌면, 일상성이라는 짙은 장막 저편을 볼 수 있는 가는 틈은 광기라는 지점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광기가 대낮에 약 먹고 칼부림하는 광기가 아니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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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스페인을 다녀올 계획입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한 여행지가 인기를 끈다고 합니다만, 꼭 예능프로그램 때문에 스페인을 고른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가 보려는 계획이 있어 스페인에 관한 책에 관심을 두다보니 자연스럽게 찾아가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행사 상품을 고르다 보니 돈키호테의 무대가 된 지역도 포함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시공사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어판을 저본으로 한 완역판이 나왔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돈키호테하면 주막을 성(城)으로 오해하고 창을 들고 풍차로 뛰어드는 등 해프닝을 벌이는 얼척 없는 장면만 인식되어 있어 그야말로 엉뚱한 사람의 표본이 되어왔습니다.
완역본으로 732쪽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이야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아직 이유를 파악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4개로 구분된 52개의 이야기는 마치 천일야화를 읽는 느낌입니다. 돈키호테의 활약을 기록하면서 단조로울 것을 우려한 듯 등장인물이 겪은 일을 돈키호테가 듣는 형식으로 모두 일곱 개의 이야기를 엮어 넣고 있는데 이를 삽입소설이라고 한답니다. 이야기가 방대한 만큼 등장인물도 만만치 않아서 총 659명의 인물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가운데 여자는 52명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세르반테스 시대의 스페인, 아니 유럽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역시 다양해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이나 신부와 같이 상류층도 나오지만 건달, 매춘부, 깡패, 심지어는 이민족까지 등장시키고 있어 당시의 스페인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의 우상인 둘시네아 공주(?)는 이름은 자주 등장하지만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편력기사로 활동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난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처음 들른 주막을 성(城)으로 착각하고 성주(?)인 주막주인에게 기사임명을 요청하는 해프닝이 시작되는데, 주막주인은 그저 그날 저녁의 웃음거리로 즐길 요량으로 돈키호테를 기사로 임명하는 것이 장대한 서사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살짝 맛이 간 돈키호테의 편력기사 흉내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가는 모티브가 될 뿐이고, 실제로는 엇갈리는 운명의 길에서 헤매는 남녀가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에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해피 엔딩을 시사한다는 것입니다. 옮긴이는 <돈키호테>의 큰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상징되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갈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돈키호테와의 대립은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히게 되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의미하고 있다.(723쪽)”
요즈음에도 약물, 도박, 게임 등 다양한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만, 우리의 돈키호테 역시 당시 유행하던 기사소설에 빠져들다가 결국은 이성을 잃는 지경에 이르러 이토록 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즉,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편력기사가 되어 무기를 들고 말 등에 올라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속 편력기사의 모험들을 직접 실천에 옮겨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길이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41쪽)” 그리고 보니 젊었을 때 유행하던 무협소설에 빠져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탈리아 프로렌스에 사는 기사가 절친을 동원하여 아름답고 현숙한 아내를 시험하는 장면을 읽다보면 사랑하는 이를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경계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여자는 유리로 만들어졌다. / 그러니 시험하면 안된다, / 깨지는지 안깨지는지. / 모두 깨지고 말 테니. / 깨지기는 쉽고 / 다시 붙일 수는 없으니 / 깨질 위험이 있는 곳에 두는 것은 / 사려 깊지 못한 일 / 모두들 이렇게 생각하고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다나에가 세상에 있다면 /황금의 비도 또한 있을 것이다.(454쪽)”
저자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당시의 문학 혹은 공연계에 대한 비판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문제가 지금 상영되고 있는 연극에 대한 저의 원한을 불러일으키는군요. 그것은 기사도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툴리우스에 따르면 연극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거울이며 관습의 표본이며 진실의 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것들은 엉터리의 거울이고 우둔함의 표본이며 방탕함의 상입니다.(668쪽)” 즉 지나친 상업주의를 경계하고 순수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 요즈음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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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책을 사더라도 책 두께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재밌고 흥미로울 것 같아 샀는데 막상 책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바로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책 두께에 주눅이 들었나보다. 3,400페이지까지 그냥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데.. 6,700페이지가 되면 그저 책장에 진열해놓을 따름이었다. 언제 읽지.... 좀 시간적 여유가 나면 읽어야겠다... 하고^^ 근데 역시나 책의 호흡과 흐름은 재미와 유익함이란 두가지 토끼를 다 잡을 경우 페이지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을 느낀 책을 나는 읽었다. 스페인 문학의 정수, 미켈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이다. 돈키호테.... 어렸을적에 텔레비젼에서 방영해주었던 만화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낯익었다. 700페이지나 되는 책 두께는 상관이 없었다. 단지 내 눈에 확연히 드러난 부분...
세계최고 작가 100인이 선정한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 출간 400주년 기념, 국내 최초 스페인어판 완역으로 만나다!
내 생각에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고, 충분히 책장에 멋드러지게 비치할만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어릴때 만화로 만났던 돈키호테와 산초판사 그리고 돈키호테의 애마 로시난테. 어떤 장면들로 꾸며지고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궁금했다. 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함에 이른 돈키호테의 광기. 결국 광기어린 편력기사가 되어 모험을 떠난다. 시골농부 산초판사와 함께^^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싸움을 걸었다가 심하게 부상당하는 어이없는 첫 모습에 알고도 웃음이 터졌다. 오히려 만화에서보다 글로 표현되어진 부분에서 충분히 상상이 되니 역시나 범상치 않은 책이었고 비범한 작가임에 놀라게된다. 돈키호테가 이르는 곳마다 그곳은 성이었고,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은 기사이고 왕족이며 공주였다. 이상주의에 너무 심취된 돈키호테에 비해 아주 현실적인 산초판사. 돈키호테와 함께 하는 모험과 여정을 통해 산초판사 또한 현실과 이상을 구분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됨을 본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습을 통해 우리 속에 내재된 공통된 성정들을 마주치게 되는 듯 하다. 꿈과 이상에 집착하며서 쫒으려는 모습 이면에 내재된 현실적 불합리와 모순에 흔들리게 되는 인간 근원적인 모습들.
<돈키호테>의 이야기 속엔 돈키호테와 산초의 기묘하고도 기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이야기들이 삽입되어있다. 바로 액자소설의 모범이 <돈키호테>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속사정 이야기가 짜임새있고 재미난 이야기로 재구성되어진다. 연인들이 사랑이야기와 눈먼 사랑 그리고 빼앗은 사랑과 빼앗긴 사랑이 얽히고 설켜 나중에 그 주인공들이 한 곳으로 집약되어 모이게 되는 기막힌 이야기들이 어쩜 이렇게 타고날 수 있을까.... 연인을 위해 바치는 노래(소네트)는 너무 아름다웠다. 시적인 감수성과 예술미가 세르반테스의 기사소설 <돈키호테> 속에 흐르고 있었다. 기사소설에 걸맞지 않는 의외의 부드러움과 세련미, 절제미가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에 흐르고 있어 읽으면서도 그나마 마음의 위로와 함께 감흥이 새로웠다.
광인 돈키호테... 그가 비록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받지만, 종교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는 모순된 사회구조와 기득권층이라 불리는 당대 기사와 귀족과 왕족들에 대한 비판도 돈키호테의 모습과 행동, 말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엄격한 사회분위기 속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세태속에서 자유로이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문학 특히 소설(허구로 빚어낸 이야기의 산물)이 가장 탁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작가 미켈 데 세르반테스의 지적 영악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아닐까 생각도해본다. 세계최고 작가 100인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되었는지 이해되어지는 것 같다.
이야기 발상의 기막힌 전환. 중세 기사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 꽃피운 문학의 전성기란 호황 속에 미켈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었다.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여전히 중세 기사 시대의 봉건주의적 사고들이 우리네 정의에 불타오르는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광기에 의해 낱낱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심판대로.....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에 걸맞는 주인공들이 있기마련.... 세르반테스에겐 돈키호테로 인해 자유로이 의사를 피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졌던 것이겠지. 지금도 어느메 어느 곳에 돈키호테와 같은 엉뚱한 기사지만 로맨스를 아는 진정한 기사가 있을까? 약자 편에 서서 자기 한 몸 위험에 노출될지언정 정의를 불태울 수 있는 돈키호테와 같은 기사를 만날 수 있을까? 엉뚱한 논리이지만 그럼에도 참 인정있고 배려있는 말 솜씨를 뽐낼 수 있는 데 라만차의 재치있는 시골 귀족을 만날 수 있을까? 400여년전의 <돈키호테>를 만나서 유쾌했다^^ 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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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 유명한 '이름', 혹은 실존, 아니 존재, 그 대척에 햄릿이 있다. 출신성분으로는 (선입견과는 달리)크게는 딸릴 것이 없다. 과연? 덴마크, 그것도 잘나갈 때의 그 나라 왕자인데? 왕위 상속권이 불확실한 왕족의 경우 대영지(領地) 등 확실한 물적써포트가 없으면 평범한 귀족만도 못할 수가 있고, 이분의 경우 나이는 좀 자셨다고 하나 라만차의 명망 있는 히달고인데다 먹고사는 데 딱히 걱정 없는(다만 상속자 문제가 불투명하나 일단 제외하고)장원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르게니예프의 (현재에 이르기까지)인기있는 그 이분법적 병치는 그 지나친 과감함, 단순함과 그에 따르는 일정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유효하고, 또 인기있는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살인행위를 타인(그것도 존속)과 자신에게, 분별 없는 조준으로 저지름으로써, 그 과정에 아무리 '햄릿적(헉)' 고뇌가 깃들었다 한들 결과에 있어 광인 조승희의 테러와 차이 없는 꼴이었다면, 인간의 사유 능력과 이성, 지혜, 그리고 교육의 산물인 지식은 대체 그 용도가 무엇이겠는가. 해서, 부질없이, 간지 하나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햄릿보다야, 모양새 하나가 안 난다 해서 하릴없이 조롱 대상이 되는 돈키호테에 나는 훨씬 마음이 끌린다.
둘 중에 그 한쪽으로 마음이 끌린다 뿐이지, 그를 추종,지향한다는 게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차피 양극단형의 원형으로 (다소 속물적 위인이었던)그 러시아 작가가 꼽았던 두 사람이니만치 뭐 하나를 본받고 하나를 배척하는 식의 사고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느 한 극단을 취사함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인생의 전 영역에서(예외없이) 위험 가득한 일이 어디 있겠나 이거다.
세상에는 그러나, 제 현실과 이상을 꽤나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조화시키지 못하는 인간형이 너무 많다. '조화'란 말에는 상당히 낮은 수준의 '타협'이 또한 포함된다. 성인군자의 경지야 바라지도 못하지만, 최소한 정신병 레벨까지는 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이상(대부분 개인적 가치라고 불러줄 만한 수준도 못되는 한심한 게 많다)과 엄연한 현실 사이에 현격한 갭이 생기지 않도록 최소한의 눈금 조정 작업은 해 주어야 한다. 근데 타고난 어리석음과 성격파탄에 가까운 똥고집으로 인해 그런 최소한의 '성실함'마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남한테야 그렇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는 짓은, 최소한의 약음조차 갖추지 못한, 자기파괴적 테러행위이다. 정신병이라고 하는 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런 자는 상대를 하지 말고 혼자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 아니면 일정 거리를 두고 우월적 거리에서 계속 무시를 해 주어야 한다. 행여 불쌍히 여겨서 마음의 한 곁을 내어 주면, 그동안 당해 온 울분을 그 good samaritan에게 '드디어 미끼가 걸려 들었어!'하고 은반위수하듯 한 몫에 쏟아낸다. 우리 말에 '인간 못된 건 잘해준 사람에게 악으로 갚는다'고한 게 다 이런 인간형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돈키호테의 좌절과 불운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조화로운(음!) 코스모스와 현실의 라만차 평원에 있는 카오스 사이의 갭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잘못은 타락한 세상에 있는 것이지 미치되 좀 착하게 미친(ㅋㅋ) 광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는 사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햄릿보다 덜 범죄적이고, 사고가 꼬이지 않고 정직하며 티없이 순진무구하다는 점에서 영적 우월성 역시 덴마크의 피곤한 왕자에 비해 더 갖추고 있다.
문제는 돈키호테가 아니라, 그와는 전혀 상관 없는 유형으로 미친, 그냥 한국형 광남이 광년이에게 있는 것. 이들은 대체로 현실에 제게 닥친 문제를 잘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부여한 페르소나에 맞춰 일종의 연극을 하며 산다. 돈키호테는 스스로 상정한 조화로운 우주에 봉사하는 자세로 살아가기에, 미쳤을 뿐 그 의도는 선하기 짝이 없지만, 이들은 그 심적으로 제 못난 욕구의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 먹잇감을 찾아 그 꼬이고 꼬인, 뒤틀리고 뒤틀린 심사를 풀기 위해 행동하는 것으므로 그 의도가 악하기 이를 데 없다.
이들이 키하나 노인과 닮은 것은 오직 하나, 그 끝없는 시도에 있다. 이미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걸 보여줬음에도. 광인 특유의 지치지 않는 정력으로 그 잘못죈 환상과 터무니없는 페르소나를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그 미친 쑈를 하고 하고 또 한다. 안 되면 이제 제가 하나 미친 시나리오를 지어내서, 초딩 백일장처럼 뭘 써서 발표하기까지 한다. 아마 제 딴에는 이걸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 정작 짱돌 하나 잡아보지 못한 허접 양심불량이었던 주제에 말이다.
루신이 이야기했듯 미친 개에게는 페어플레이라는 사치스러운 원칙이 적용될 수가 없는 거고, 광견에 의해 건강에 치명적인 해를 입기 전에 내가 자기방어를 취하는 수밖에 없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광견은 나 개인에게 위험요소요. 사회악의 일종이기 때문에.
소설에서 스페인 문학 특유의 아름다움, 더군다나 스페인 문학 정수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이 명작(막스 베버가 그리도 감탄했다고 하는)의 진미를 한국어 번역본으로 올곧게 감상한다는 건 애초에 무망하다. 그런 식으로 기대치에 상한을 긋고 출발하면, 이 번역본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어차피 펭귄이나 옥스퍼드 클래식도, 가장 안전하고 또 원어에의 가장 근사한 재현이기는 하지만, 영어라는 언어 역시 세르반테스(와 그 동시대인들)의 요란하고 분방한 미적 센스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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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에셔의 그림 ‘프린트 갤러리’를 보면, 회랑에서 한 사람이 그림을 보고 있는다. 그는 바다위 기선을 보고 있다. 기선의 연장선상 바다는 항구에 다아있고, 항구에 많은 건물들이 있다. 그 건물들 중에 회랑이 바로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장소이며 그 사람의 시선으로 우리들은 그림을 보고 있다. 그림 속의 인간은 가상이다. 그 가상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가상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듀안 마이클의 사진 ‘이상한 사물들’을 보면 첫번째 사진은 화장실이다. 세면기 위의 액자에 주의하라. 두번째 사진의 인간의 다리, 다음엔 구부린 인간. 자아 3번째 사진은 4번째 책 속에 삽입된 한 장의 사진이다. 그 책을 더러운 손톱의 장본인이 읽고 있다. 책은 어디에 있는가. 따라가 보자. 책을 읽는 인간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액자로 세면대 위에 걸려 있다. 어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잠든 왕을 깨우려하자 옆에 말린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왕의 꿈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이 잠에서 깨면 앨리스는 사라진다. 또 왕은 앨리스 있어야만 존재한다. 도대체 누가 실체이고 누가 가상인가. 동양 장자에서도 이런게 나온다지. 아마. 나비 어쩌구저쩌구 하며... 보르헤스의 '원형의 페허들'을 보면 한 승려가 죽기 기를 쓰고 하나의 중(승려)를을만든다. 그 만들어진 승려의 절간이 불타는 사건이 생겼다. 이를 지켜본 사람이 찾아와 건물이 활활 타건만 절 안에 있는 중은 타지 않더라고 한다. (당연하지. 가상의 인간이니까) 며칠후 주인공 승려의 절에 불이 났다. 중은 생각한다. 이미 자기가 이미 만들어 놓은 중(제자)도 있고 하니 오래 살아 무엇하랴하며, 타죽기를 자처한다. 그러나 승려도 불에 타지 않는다. 이미 그도 누군가가 만든 가상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혹시 나도 누군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인간은 아닌지. 이 일련의 이야기들이 메타 소설인가. 이야기 속의 이야기. 도대체 누가 독자이고 누가 작가인가. 내가 읽는 이 소설에서 나는 과연 진정한 독자인가. 한 없는 의구심에 빠져버리는 이 가공할 픽션들. 400년전에 이미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써 먹은 수법이다. 돈키호테 2권에 나오는 사람들은 돈키호테 1권을 읽은 독자들이다. 그들이 돈키호테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돈키호테가 듣는다. 내용은 물론이요. 평론까지. 이발사는 돈키호테가 만든 가상의 인물로 이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 자기를 만든 돈키호테에 관하여 논한다. 소설은 세르반테스 이후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다. 유주현의 역사소설을 읽고 평론가들이 '역사 속 즉 과거를 현재로 끌어낸 위대한 소설가'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유주현 연구).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 미친 평론가들은 돈키호테를 읽지 않은 촌놈들이었다. 아직도 '조선의 지식인들은 책도 안 읽고, 읽은 척하는 모리배라'는 내 지론에 변함이 없지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허구속의 독자나 관람자인 우리도 허구적일 수 있지 않을까. '세계사는 모든 사람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한 권의 신성한 책이며, 그 책 속에서 사람들은 책을 쓰고 있다.' 칼라일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