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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도무지 맛있는 음식이 없었다. 뭘 먹어도 그저 그랬다. 한 끼 식사란 허기를 채우는 것도 아니었고 맛으로 먹는 것도 아니었다. 가리는 음식도 별로 없었고 맛에 그다지 민감하지도 않았던 내게 있어, 식사는 그저 오래되어 몸에 익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몇 시간 동안 차를 달려 찾아가서라도 먹고 와야 직성이 풀리는 식도락가들을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라면 그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낮잠을 잤을텐데… 그런데 마흔을 넘기고부터는 먹고 싶은 음식들이 불쑥불쑥 생각이 나곤 한다. 쌉싸름한 두릅이나 더덕, 갯내음 진한 멍게나 해삼 등이 그런 것들이다. 어릴 적 집안 어른들의 생일 잔칫상에 단골로 오르곤 했던 그런 음식들을 나는 얼마나 탐했던가. 어릴 적 먹던 음식을 찾기 시작하면 늙고 있는 증거라는 이문재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조금 쓸쓸해지는데, 그런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입에는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라면 이렇게 입에 고인 침을 달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곳곳에 소개되어 있는 이름난 맛집들을 찾아가면 어릴 적 바로 그맛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비슷한 맛은 즐길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낯선 이국 땅에서 내 입에 익숙하지 않은 남의 나라 음식들에 둘러싸여 사는 이민자의 처지라면 문제는 사뭇 심각해진다. 여기서는 아무리 시장을 둘러보고 훑어보아도 두릅, 더덕, 멍게, 해삼은 절대로 찾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멍게 한 접시 먹자고 비싼 비행기삯 들여서 고국을 다녀올 수도 없는 일이다.
내게 보기에 이민자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의 절반 이상은 가슴이 아니라 이렇게 혀끝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나 우리 맛에 민감한 미각의 소유자인 경우 외국에 나와서 사는 일의 어려움은, 속시원하게 의사소통하는 것을 방해하는 미숙한 외국어 실력이나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문화적 차이에서도 비롯되겠지만, 이렇게 우리 음식을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는 부분도 적지 않을 터이다. 그런데 결핍이 상상력을 자극하듯이 우리 음식을 접하기 어려운 여건은 우리 맛에 대한 감수성을 오히려 발달시키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마흔을 넘어 여기 뉴질랜드에서는 구할 수 없는 우리 먹거리들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것이 꼭 나이 탓만은 아닌 것이다. 최근에 읽은 흥미로운 책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의 탄생 배경에도 어쩌면 그런 면이 작용했으리라. 즉, 프랑스 혁명의 단두대를 피해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던 저자의 인생 역정에서 이 책의 기획이 싹튼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그 싹이 꽃을 피운 것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프랑스의 미식을 마음껏 즐기게 된 뒤의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2.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이자 ‘미식의 경전’으로서, 처음 출판된 지 2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의 저자는 요리사도 아니고 작가와도 전혀 무관한 법률가여서 흥미롭다. 딱딱한 법조문을 읽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틈틈이 사냥과 음악, 독서와 식도락을 즐겼던 프랑스의 한 판사가 자기 생애를 아퀴 짓는 유일한 저작의 주제로 왜 하필이면 ‘미식법’을 선택했을까 미식법(la gastronomie)은 인간이 식생활을 영위하는 한에서 인간에 관계되는 모든 것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미식법의 목적은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음식을 수단으로 하여 인간의 보존에 주의하는 것이다. 미식법은 음식물로 전환될 수 있는 사물들을 찾고 공급하고 요리하는 모든 사람을 지도함으로써 그 목적에 도달한다. (79쪽) 이처럼, 그에게 있어 ‘미식법’이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비싸고 맛있으며 몸에도 좋은 고급스런 요리를 먹는 방법’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도모하고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서 음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지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고 넓은 창문으로서 미식법을 고른 것은 대한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가 살았던 시공간이,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려는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야심찬 기획이 드높았던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맞물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 더욱 그렇게 여겨진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분야는 거의 모든 분야로까지 뻗어나간다. 미각, 식욕, 소화작용과 같은 생리학의 수준에서부터 음식 재료의 분류, 분석, 조리법 등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불의 발견에서 레스토랑의 탄생에 이르는 식생활의 역사에서부터 음식이 휴식과 잠과 꿈과 죽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이다. 그런가하면 음식과 관련하여 저자 자신이 체험한 일화들과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 맨뒤의 ‘모음집’에서는 유머러스한 저자의 문학적 풍미까지 맛볼 수 있으며, 체험에서 우러난 경구들을 모아놓은 책 맨앞의 ‘잠언’에서는 촌철살인적인 저자의 기지에 감탄하게 된다. 이 책이 단순히 미식법을 주제로 한 ‘백과사전’으로 불리기보다는 미식법의 ‘경전’이라고 상찬을 받는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 스스로가 미각 쾌락을 주관하는 열번째 뮤즈인 가스테레아 여신에게 매일 경배를 드리는 열렬한 신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먹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다른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라고 믿는데 그치지 않고, 우주 전체가 가스테레아의 제국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한 진지한 통찰과 일상의 세심한 발견들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지나친 열정에 사로잡힌 독실한 경배자들이 가끔씩 저지르는 무리한 억측과 주장들도 눈에 띤다. 이를테면, ‘말을 잘 하는 기술과 잘 먹는 기술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동맹관계가 있었다’라는 통찰은 참으로 빛나는 것이지만 ‘언어가 생겨나고 발달된 것은 바로 식사 도중이었다’라는 단언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라는 주장에는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요리는 모든 기술들 중 문명 생활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기술이다’라는 주장에 쉽게 동의할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러한 지나친 단언과 주장도 책을 다 읽고난 뒤에는 어느덧 별 저항감없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은 고풍스러운 멋이 담긴 은근한 유머와 쾌활하고 낙천적인 세계관이 글의 갈피마다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익숙한 양념으로 알맞게 간을 하고 먹기 좋게 잘 익힌 음식이라면, 비록 그것이 낯선 것이라도 우리 입에서 술술 잘 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3. 그렇다. 음식에 관한 한 대단히 보수적이었던 나는 여기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한 동안은 한국 음식만 고집했었다. 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외식을 하더라도 내 입에 익숙한 한국 음식만 찾아다녔었다. 그러다가 이곳의 낯선 풍경에 조금씩 눈이 익어가고 이곳의 익숙지 않은 언어에 조금씩 귀가 뚫리면서, 내 입도 조금씩 조금씩 이곳의 음식을 맛보며 낯선 음식들에 맛을 들여갔던 것이다. 낯선 땅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내가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기는 했지만, 이 책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 예찬>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 뉴질랜드에도 ‘먹을 수 있는 우주’가 내 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꺼렸던 양고기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고, 가스 불에 통째로 굽는 뉴질랜드식 소세지 구이도 즐겨 먹게 되었으며, 향이 너무나 강해 입에 대지도 못했던 코리앤더도 지금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라도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달래야만 하는 음식들이 있는 것이다. 두릅과 멍게처럼 내가 고국에 두고 온 음식들, 여기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들 말이다. 특히 입맛 도는 봄철이면 그런 향기로운 음식들이 더욱 간절해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도리가 없다. 수퍼에 가서 두릅 대신에 아스파라거스를, 멍게 대신에 초록입 홍합을 사와서 대신하는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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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 그것도 맛있는 먹을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밤중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다가 음식 얘기가 올라와 있으면, 테러를 당할 줄 알면서도 기어이 클릭해서 남이 먹은 치맥 콤보 야식의 아리따운 사진을 보며 절규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죠.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가들의 대부로 여기저기서 자주 거론되는 사람입니다. 국적은 프랑스, 게다가 앙시앵 레짐 하의 상류 집안에서 태어났지요. 미식가의 출생으로는 완벽하지 않습니까. 이리하여 그의 저작은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잖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합니다.
브리야 사바랭은 정말로 음식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 태도가 있겠지만, 브리야 사바랭의 음식에 대한 사랑은 신격화와 숭배에 이르렀습니다. 미식의 뮤즈 가스테레아라는 존재를 만들어내어 찬양할 정도인 그의 열정은, 그야말로 미식을 예술과 신화와 역사의 반열에 올립니다. 그에게 있어 음식은 모든 것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기대한 대로 책을 읽으면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되는데, 고풍스러우면서도 멋드러진 음식 묘사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군데군데 들어가는 음식 외의 맛깔나는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식을 연구와 학문의 대상으로 보는 이 책이, 고전이 될 만큼의 의의가 있다는 점도 수긍이 갑니다. 하지만 일면으로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책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음식에 대한 18세기적 편견이 그대로 진리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류는 남성적이고 지배자 기질을 북돋우며, 채소는 여성적이고 복종적 기질을 만든다는 식이지요. 동그스름하고 포동한 생래적 미식가들과, 거의 장애를 타고난 것처럼 가엾게 묘사되는 음식 맛 모르는 사람들의 대비도 그렇습니다. 브리야 사바랭에게 있어서 음식이란 사람의 천성과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며, 음식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운명적으로 타고 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골상학이나 믿는 시대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아주 엄숙하게 서술하고 있지요. 18세기 교양인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보는 재미도 썩 괜찮기는합니다만, 역시 시대의 한계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거창하게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동시에, 음식에 대한 철학을 신화의 반열에 올리는 저자의 거드름피우는 태도는 일면 우습기도 하지요. 정말이지 너무나 진지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이 15세가 다스리던 시절의 프랑스에서 태어난,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는 영감님만이 자아낼 수 있는 종류의 재미입니다.
근엄하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교수' 라고 지칭하는 것도, 객관적이고 엄숙하게 보이고 싶었을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웃겨 죽겠습니다. "교수는 이 일로 명예(숭배, 존경, 명성, 등등등)를 얻었다." 같은 문장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웃지 않고 배깁니까. 본인을 3인칭으로 쓴 글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 않기란 쉽지 않죠. 그 글을 쓴 사람이 갈리아 전기를 쓸 때의 카이사르쯤 된다면 모를까.
색다른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밤에 야식 쟁반이라도 옆에 두고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냉동 닭을 사흘 묵은 기름에 튀긴 프라이드 치킨 같은 걸 야식으로 먹으면서 자기 저작을 읽는 현대인을 보면, 브리아 사바랭은 뒷목을 잡고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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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이 고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1800년 즈음까지 인류의 식생활사를 총괄하고, 음식에 얽힌 다양한 경험과 성찰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미식이란 단어를 맛에 대한 인간의 생물학적 반응이라는 점을 부인하면서
사회, 문화, 예술이 주는 모든 기쁨을 농축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능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것이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늘 식욕에 대해 고민하고 식욕을 만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늘 미식. 즉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노력하고 고대로부터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갈망해왔던 것이다.
저자는 이에 맞추어 음식에 들어가는 문화, 사회, 예술적인 면도 강조하고 있다.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의 미식을 탐구할 수 있는 책이기에 르네상스 시대의
생활상과 사회를 잘 알수 있는 책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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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좋다.
우선 이 책의 원제 [미각의 생리학 (Physiologie du gout)], 혹은 출판 전의 원제인 [미식성찰 (Meditation Gastronomiques)]을 염두에 두자. 본래 제목에 저자의 의도가 잘 나타나는 법이다. 번역본의 제목은 아마도 흥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출판사측에서 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1755년 프랑스 동부 벨레의 유복한 가정 (아버지가 지방법원 검사장)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과 음식 속에서 자랐다. 1778년에 리옹 또는 디죵 (두 도시는 프랑스 미식의 수도로서의 파리의 위치를 내려다보는 곳들이다. 리옹은 로마시대때부터 황제들이 주로 머물던 곳이며 중남부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도시이며 디죵은 부르고뉴공국의 오랜 수도로서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의 삼각점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지금도 국립 미식대학이 있는 곳이다)에서 법률 수업을 마치고 고향의 민사법원 판사가 되었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일, 스위스를 거쳐서 미국에서 망명했다. 혁명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비서가 되었으며 중년 이후에는 최고법원인 파기원의 판사가 되었다.
이런 인생역정을 잠시 들여다보면 이 사람이 다양한 경험을 했으며 상당한 지적 능력과 교양을 갖춘 사람임은 금방 알 수가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생리학'이라는 단어를 포함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시대인 18세기와 저자라는 교양인이 교차하 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과학'의 이름으로 설명하려했고 우리같이 문과 이과의 교육을 따로 나눠서 시키지 않는, 대학과 교육의 권위가 최고조에 이른 환경에서 자신의 책을 어떤 의미있는 과학의 영역으로 정립하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과연 생리학에 관한 내용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다만 현재의 생리학 교과서와 같이 복잡한 분자식과 라틴어로 된 기관과 물질명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라틴어 문학이나 저자의 라틴어로된 작품들은 자주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당시의 자연과학의 수준에 걸맞는, 경험적 관찰과 주석이 그다지 충실하지 못한 다른 학자들의 연구결과, 다소 속류적인 가정 등이 주류를 이룬다. 2세기 가까이가 지난 지금 보기에는 퍽이나 유치한 내용들도 눈에 띠지만 자기 시대를 살은 것이 그 사람의 허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즐겁게 읽고 또 주목하는 이유는 이 책이 종합교양인의 종합저서라는 점이다. 이 책에는 생리학과는 별 관련없는 내용들도 많다. 젊은시절의 추억, 망명시에 있었던 일, 음식이나 요리와 인생에 대한 성찰, 짧은 문학적 시들이나 만담조의 이야기들, 쓴웃음이 나올 정도의 프랑스인으로서의 자부심 등등이 한데 버무려져서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한 권을 이루고 있다. 짐작컨데 출간 당시의 성공도 이런 종합교양인의 종합저서라는 성격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라 믿는다.
표준화, 규모화, 중앙집권화가 어느 선을 넘어서 붕괴하기 전에, 즉 소비에트가 붕괴하기 이전에 이미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탈구조적이었다. 그들의 글쓰기는 캔버스에 비구상적인 방식으로 붓질을 더하는 것이든지 혹은 하나의 테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형태가 무너질 때까지 변주하는 현대음악 같다. 그런 전통이 갑작스런 것이 아니었음을 브리야 사바랭의 이 책에서 본다. 철학자들의 책은 어렵지만 이 책은 유쾌하다는 점은 좀 다르다.
앞으로 글쓰는 데에 많은 용기를 주는 책이다.
사족 1 "당신이 먹는 것을 알려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성인이 되면 벌서 수백가지 포도주를 마시고 수십가지 치즈를 먹으며 심지어는 맥도널드까지도 사양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에게 중앙집권주의는 어울리지 않는다. 위대한 프랑스 따위는 잊어도 좋지 않을까? 위대한 포도주는 프랑스가 아니라 보르도, 부르고뉴, 알자스 등에서 나는 것인데 말이다... 중앙집권적 정치, 법률 체제와 이 나라의 매우 잦은 파업간에 분명 어떤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사족 2 근래 리뷰하는 번역본 책 중에서는 번역이 가장 깔끔한 것 같다. 완벽할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서두... 근데 책 해제에다가 과학적 엄밀성 어쩌고, 이 책의 자유로운 구성을 유머와 희화화를 위한 장치 어쩌고... 머 공부라는 게 잘못하면 사람 좀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경우다. 19세기에도 이미 노인이었던 사람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저자가 이 정도 진지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쓴 글이 무슨 알량한 문예사조에 꽤어맞혀서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뒷맛이 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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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미식가는 일반적으로 중간 키에 둥글거나 네모진 얼굴, 빛나는 눈, 좁은 이마, 짧은 코, 두툼한 입술, 둥그스름한 턱을 가지고 있다. 여자들의 경우 통통하며, 아름답다기보다는 어여쁘고, 약간 비만의 경향이 있다. (210)
-미식은 여인들에게 전혀 부적절하지 않으며, 여인들의 섬세한 기관에 매우 적합하다. 미식은 여인들이 절제해야 하는 몇몇 쾌락과 자연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보이는 고통을 보상해준다(202) -여성의 미식 경향은 본능적인 데가 있다. 미식은 아름다움에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고 엄밀한 일련의 관찰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맛좋고 섬세하고 정성들인 식단은 오랫동안 노후의 외적 징후를 연기해준다(203) ...-사교성의 극치가 우리의 가장 절대적인 욕구에 가져온 이러한 커다란 변형인 유혹의 기술과 미식은 모두 프랑스에서 기원한 것임을 나는 자랑스럽게 지적하는 바이다.
-미식은 대식, 식탐, 방탕이 되어버리고, 그 이름과 장점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권한에서 벗어나 도덕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미식을 충고로써 다스리거나 의사의 가르침으로써 교정하고 치료하려 할 것이다.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렝의 '미식예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이 잠언으로 유명한 브리야샤바렝의 얼토당토않은(2016년에 읽으면 그렇단 말씀) 미식 에세이를 다시 읽어본다. 지금도 좀 피식 웃음이 나긴 하지만 무려 1755년에 태어난 이 할아버지의 글은 그 시절 프랑스를 모르고 읽으면(그래서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거다), 잠깐 미국 망명 빼고는 잘 먹고 잘 마신 자의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
샤바렝은 미식에 대한 여성이 타고난 감각을 예찬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유혹의 기술이고, 어느날 자기가 초대받은 곳에서 어여쁜 여인이 자기를 향해 건배를 해 줄줄 알았는데 옆엣 놈에게 빼앗겨서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다는 시답잖은 고백까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뭔 이런 여혐주의자가 있나 싶지만 그 당시 여성들의 욕망을 긍정하는 일은 오래된 지적 행로의 축적이었다. 샤바렝이 보면 나는 타고난 식맹이라고 보면 맞다. 하긴 전생에는 하녀였을 테니.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 이 한 마디 인용 때문에 급한 마음에 읽어댔던 10년 전과 지금은 좀 달라졌다. 미식이란, 어찌보면 지금도 내가 좀 파리리하는(그냥 좀 닥치고 먹어라 주의다)과한 제스추어가 아니다.
이 책에는 당대 기독교에 뿌리를 둔 도덕주의에 대한 반발심. 한참 발견되던 과학(의학, 약리학, 생리학, 화학 등)의 총체로서의 요리와 미식.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만드는 미식행위에 대한 애국적 자부심 등등. . 오래 가는 책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소일 삼아 읽으니 재밌어서 적어둔다. 정색하고 읽으면 어이없는 책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