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만인을 기다리며]라는 존쿳시의 대표작을 먼저 읽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2/3쯤 읽고는 KTX에 두고 내렸다. (책을 잃어버렸을 때가 제일 아깝다.) 언젠가 다시 사서 보리라.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변방에서 호시탐탐 성안을 노리고 있는 야만인의 공격을 막는 것이 가장큰 목표인 성내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담고 있는 책인데, 사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언제 한번 공격해오지도 않는 성밖 야만인들보다 성내의 지도층의 차별과 억압이 더욱 야만스럽다는 것이었을 것이다.(끝부분에 반전이 있었으려나?) 에너지가 폭발할 듯이 강렬한 상황을 무미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하는 멋진 책이었다. 저자인 존쿳시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다가 만나게 된 [마이클K]는 억압받는 최하위계급, 그 중에서도 언청이에 지능이 떨어지기까지하는 마이클K의 하루하루 생활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도층이 판단하는 것처럼 "제도에 저항하고 반기를 들기 위해" 울타리를 벗어나서 직접 야채를 키워먹고 풀뿌리를 씹어먹고 구덩이를 파고 노동을 거부하며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앞에 울타리가 있어 넘을 뿐이고 배가 고파 풀뿌리를 씹고, 잘 곳이 없어 구덩이를 팠을 뿐이다. 자신을 빨갱이로 판단하고 취조하고 고문하고 감금하는 지휘단 앞에서 그는 단지 숨을 쉬고 잠을 자고 먹을뿐이다. 계급제도가 지휘관을 멍청이로 만들었고, 계급제도가 마이클K를 빨갱이로 만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이클K만의 계급에 대한 저항방식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명의 사랑을 담뿍 받고 살아가고 있는 나, 혹은 우리의 눈에는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잠을 자며 3일에 한번씩 나와 풀뿌리를 씹어 즙을 먹는 그의 모습을 담담하고도 속도감 있게 보여주다가 책의 80%쯤 되는 지점에서 난데없이 다른 관찰자가 등장하게 된다. 책 자체가 관찰자 시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요양소의 주치의라는 문명인의 필터를 통해 다시 한번 걸러서 그를 보게 만든다. 당연한 그의 삶이 전혀 당연하지 않아 못마땅한 주치의의 눈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는, 주치의의 손길을 통해 마이클K가 부디 그 무엇인가로부터 ''회복''하기를 바라게 되어 갑자기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 (결말은 얘기하지 않겠다.) 진실을 향한 도스트예프스키적이고 카프카적인 치열함과 열정으로 존재의 중추신경을 건드리는 존 쿳시의 최고 작품 이라고 책 뒷편에 새빨갛게 적혀 있는데, 도스트예프스키적인 것고 카프카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그 평가에는 동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강렬하고 충격적이며 그러면서 투명한 최고의 작품임은 인정. 게다가, 표지디자인 정말 멋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여,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다시 읽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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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게을러 졌는지. 책 읽는 권수만 줄어 든게 아니라 이젠 읽었 노라 라는 작은 흔적 남기는 것 조차 귀찮아 하고 있다. 이런 자판 몇마디가 아닌 다시 독서 감상문 공책 시절로 돌아 가야 하지 않을 까란 생각을 해본다.
200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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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마이클 의 인생은 비참하고 무기력하기 그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려는 나에게 있어서, 그의 행동과 삶의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는 들판의 잡초도 아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인생에 비관을 느끼고 죽지 못해 발버둥치는 인간도 아니다. 그의 인생은 목적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냥 거기 있지만, '자유의 빵'만을 먹고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인생의 목적을 잃고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은 무기력하고 게으르다. 게다가 인간의 본능마저도 희미해진 그의 인생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다윈이라면, 인간이란 종의 번식을 위해 산다고 했을 것이다. 톨스토이라면, 인간은 사랑으로 산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쿳시는, <마이클 K>를 통해서 인강은 자유를 찾아 산다고 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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