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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와 은혜 사이의 괴리
"역사적 예수와 은혜 사이의 괴리" 내용보기
며칠 전, 페친 목사님께서 ‘여리고성(城)’ 이야기를 올리셨다. 가볍게 읽을 글이 아니었는데, 그만 여리고성에 꽂혀 엉뚱한 댓글을 달았다.“여리고성이 얼마나 큰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에 일곱 바퀴 돌 수 있는 크기이어야 할 텐데 (마지막 날 한 번이기는 하지만), 하룻길이 30km인 걸 감안하면 둘레가 4km 조금 넘는 수준이지요. 그러면 가로 1km, 세로 1km 정
"역사적 예수와 은혜 사이의 괴리" 내용보기
며칠 전, 페친 목사님께서 ‘여리고성(城)’ 이야기를 올리셨다. 가볍게 읽을 글이 아니었는데, 그만 여리고성에 꽂혀 엉뚱한 댓글을 달았다.

“여리고성이 얼마나 큰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에 일곱 바퀴 돌 수 있는 크기이어야 할 텐데 (마지막 날 한 번이기는 하지만), 하룻길이 30km인 걸 감안하면 둘레가 4km 조금 넘는 수준이지요. 그러면 가로 1km, 세로 1km 정도. 그 둘레를 20열 종대 앞뒤 간격 1m로 유지해 걸었다 치면 8만 명. 남녀노소가 걸었으면 그보다 훨씬 느렸을 것이고. 하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런 방정식 하나 못 푸시기야 하겠습니까.”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이, 그것도 남자 어른만,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 일어난 사건이다. 성경은 엿새 동안 하루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돌다가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니 여리고성이 무너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갖은 고생 끝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문턱까지 인도해 온 모세에게 정작 가나안에 들어가는 건 허락하지 않으신다. 다만, 느보산에서 모세에게 그곳을 보여주셨을 뿐. 그때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을까 싶어 느보산은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막상 느보산에 오르는데, 모세의 마음을 헤아릴 새도 없이 눈 앞에 펼쳐진 모압 광야를 보고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마지막 설교를 전했다는 벌판이 고작 십만 명도 수용하기 벅찰 만큼 좁았기 때문이다.

지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 어디 거기뿐일까. 그래도 그것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지만, 아무튼 성경은 성경 신앙은 신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던 게 아니었나 싶다.

페북에서 신뢰할 만한 목사님 두 분이 “간결하고, 쓸데없이 변증에 얽매이지 않고,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신앙의 중요한 개념을 잘 정리”한 책이 발간되었다는 글을 올리셨다. 두 분 때문에 내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두게 되었던지라 그 글을 읽고 바로 전자책을 사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두 분께서 평하신 그대로였다. 공감하면서 읽었던 몇 구절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었다. 복잡한 구원의 교리나 신학적 체계를 이해하고 믿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칭한다. 개신교 이전의 그리스도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희망을 담은 것인데, 지금 개신교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대목이고, 그런 시각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유대교의 신과 관념적으로는 같지만, 예수와 바울의 새로운 해석으로 이해된 신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자기 삶과 가르침으로 표현했다면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신에 대한 이해를 체계화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판단이 아니라 열왕기 저자의 판단이지만, 단순한 도덕적 판단은 아니고 유대인의 경전인 신명기 사관을 기준으로 내린 것이다. 신명기 사관이란 순종-불순종이 심판의 기준이며, 지도자에 대한 평가 또한 정치적 성취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느냐가 기준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종’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다. 따라서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한 말씀이 좋은 소식(복음)이며,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예언에 부합하는 메시아’는 누구인가 하는데 모였다. 따라서 복음서는 단순히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문헌이 아니라 예수가 구약의 메시아 예언에 부합하는 인물임을 논증하는 신학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 단적인 예가 공관복음에 공통으로 기록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이다.”

“‘천국’이란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말한다.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온,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메시아로 인식했으며, 그래서 유대 종교체계와 충돌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 죽음을 단순히 세상 구조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죄와 사망의 세력을 극복하고 인간을 진정한 자유로 이끄는 구속적 행위로 이해했다. 따라서 자기 죽음은 물리적 억압에 대한 해방이 아닌 죄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하는 신학적 사건이었다.”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종교 기득권자들의 기득권 수호와 희생양 찾기의 결과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권위와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로마 당국과 민중의 힘을 이용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출애굽 서사에서 발견되는 해방의 이야기를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 서사로 확장하는 사건이다. 이로써 유대교적 유월절 해방은 그리스도적 십자가 구원으로 재해석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중심을 이뤘다. 부활은 단순한 생명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신원하고 그의 삶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사건이다.”

두 분 목사님께서는 이 책이 교회의 초신자들이나 기독교에 지적이고 진지한 관심이 있는 비신자들에게 유용할 것 같다고 추천하셨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정작 교인 대다수는 이를 이단이나 사탄의 소리쯤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메시아로 인식한 분”이라니 말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다.

두 분 목사님 때문에 역사적 예수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동안 관련 서적도 몇 권 읽었다. 그러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이 책에서 거론된 내용 상당 부분이 일맥상통하다 보니 나로서는 저자의 주장이 낯설지도 않고 대체로 공감할 만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알아 온 것을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기독교는 철학과 신학의 대상이지 더 이상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나 긍휼하심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나는 이 때문에 모순을 느꼈다거나 신앙에 회의가 들지는 않았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심해 본 일이 없다. 예순을 넘어서니 인도하심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고, 칠십을 앞두고서는 그 인도하심을 빼놓고 내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나는 사라지고 나를 감싼 은혜만이 남았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비로소 그동안 ‘역사적 예수’를 만나고 나서도 신앙과 아무런 괴리를 느끼지 못한 게 큰 모순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삶과 ‘역사적 예수’로 이해하는 신앙의 본질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가? 내 삶을 섭리하시고 이끌어 주신 은혜와 ‘역사적 예수’라는 키워드로 이해되는 철학적 신학적 깨달음은 어디서 만나는 것일까? 혹시 영영 만나지 못하고 내내 평행선을 그리는 것은 아닐까?



YES마니아 : 로얄 b*****3 2025.04.02.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