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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공원은 왜 서울이 아니라 과천에 있을까
그런 입장에 서서 진정서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춘을 불러 한국 안보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자주국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만 의존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핵무기를 비롯한 신무기를 독자적으로 연구발전 시켜야할 단계에 도달했다. 그런 문제를 연구하는 전쟁과학연구소 설치를 위하여 과천면 청계산 서북쪽 산허리 약 200만 평을 시급히 구입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것을 정부를 시켜 구입하면 미국 정보기관 등이 눈치를 채서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으니 김장군 (김재춘)이 자기 농장을 확장하는 것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땅을 구입하시오라고 하명했다. 토지구입자금은 박 대통령이 제일은행에 연락하여 주선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략) 신무기 생산을 위한 단지조성이 대전 근교로 결정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김재춘이었다. (중략) 김재춘의 은행부채는 매일 이자를 더해가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으니 박대통령 또한 방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중략) 김재춘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이 현지시찰에서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수준도 향상되었으니 이제 국민을 위한 대규모 휴식처도 필요해졌다. 이곳을 서울시민을 위한 대공원으로 개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신무기를 연구할 목적의 땅이 필요해서 과천땅을 모았는데, 다른 곳에 그 단지가 조성되었다. 개인의 명의로 된 땅이니 부채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마침 서울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은 부족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서 서울대공원은 서울이 아닌 과천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재개발하게 된다면 원주민은 주택과장 양경균을 대동해 나온 강서구 부구청장 유래봉은 세입자 지원대책의 배경과 내용, 서울특별시의 획기적인 배려를 설명하고 미진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유도했다. 그런데 쏟아진 질문은 세입자 지원대책이 아니라 가옥주 아파트 무상잉여에 관한 것이었다. (중략) 그날 밤 10시 40분 경 시위에 가담했던 주민 400여명과 학생 100여명이 목동지구내 한국건업 매립현장 사무소로 몰려가 불을 질러 2층 가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 시위 및 방화사건도 TV 라디오 신문을 통해 상세히 보도되었다. 1984년 8월 27일에 목동시위가 처음 일어나고 7개월간 매스컴의 보도자세는 철저히 중립이었다. 시위자들의 시위가 지나치게 극렬하다든가 그 요구사항에 무리가 있다든가 등을 느끼는 일이 있더라도 “빈은 곧 선이다”라는 개념이 보도국 편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3월 14일 초등학생 등교저지, 19일의 부구청장 납치, 20일의 현장사무소 방화사건 으로 이어진 사태는 메스컴의 태도변화를 촉구하고 있었다. 취재기자들도 폭행을 당했고 보도용 카메라가 탈취되기도 했다. (중략) 납치 방화사건을 계기로 언론의 보도자세가 확 달라졌다. 갈수록 더 큰 보상을 고집하는 주민의 태도와 끌려다니는 서울시의 자세를 맹렬히 비난했다.
“빈은 곧 선이다”라는 개념이 아니더라도, 원래 살던 곳에서 비자발적으로 나가야하는 원주민들이 안타깝게 느껴져서라도 보도를 중립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재개발하며 원주민에게 파격적인 보상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것에 이어 납치 방화 폭행까지. 이 책에는 없지만 모 유튜버가 해준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재개발하는데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을 무력을 이용해서 내보내는 것도 있었지만 한여름 날씨에 그들의 집 앞에 오물을 두는 방식도 쓰고 정말 별 방법을 많이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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