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다닐 때 동아리 동무 한 명 고향이 암태도였습니다. 덕분에 식민지 시대에 발생한 대규모 소작쟁의로 유명한 동무의 고향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름 방학을 이용해 남해안을 돌다 들렀는데 동무는 만나자마자 개펄로 성큼성큼 나섰습니다. 삽을 어깨에 걸고 고무장화를 신고 양동이까지 들고 앞장서는 동무를 어정쩡하게 따라나서는 모습은 가소로웠겠지만 진짜 어촌에 발을 들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펄에 다다르자마자 동무는 구멍이 숭숭 뚫린 어느 한 곳을 골라 삽으로 움푹 파낸 뒤 손을 집어넣어 낙지를 끌어냈습니다. 그렇게 동무가 손을 집어넣는 곳마다 낙지가 어김없이 딸려 나왔습니다. 그것을 흉내내려고 했지만 초보자에게는 어림없었습니다. 그러니 동무의 손은 신비의 손이었거니와 개펄은 무진장한 생명의 보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안학수 시인의 개펄은 그 무진장한 생명의 보고 개펄을 떠올리게 합니다. 낙지네 개흙 잔치 핥아먹고 키가 크는 고둥 조개들 찍어먹고 모래 빚는 칠게 방게들 갯지렁이 개불 쏙 짱뚱어까지 개흙을 좋아하면 아무나 오라. 솜씨 좋고 너그러운 낙지 아줌마 손톱 없고 뼈도 없는 빨판 손으로 즐먹즐먹 개고 이겨 부풀린 반죽 부드러운 진흙 요리 차진 버무리. 바특하고 때깔 나니 보기도 좋아 맛도 있고 몸에 좋은 자연산 개흙 오늘도 개펄 마을 푸짐한 잔치 목마르고 배고프면 누구나 오라. 값도 없이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도 몰려온 청둥오리 떼 눈치 보며 서성이는 하얀 두루미 가족들을 불러오는 괭이갈매기. 시인에게 개펄이 무진장한 생명의 보고임은 개펄 마당에 찍힌 다양한 생물의 발자국을 그린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개펄 진흙을 주물러 여러 형상을 만들 듯 우리말을 주물러 빚은 솜씨가 맛을 더하는 「개펄 마당」 전문(‘밀릉슬릉 주름진 건 / 파도가 쓸고 갈 발자국, / 고물꼬물 줄을 푼 건 / 고둥이 놀다 간 발자국. // 스랑그랑 일궈 논 건 / 농게가 일한 발자국, / 오공조공 꾸준한 건 / 물새가 살핀 발자국. // 온갖 발자국들이 모여 / 지나온 / 저마다의 길을 펼쳐 보인 개펄 마당. // 그 중에 으뜸인 건 / 쩔부럭 절푸럭 / 뻘배 밀고 간 할머니의 발자국, // 그걸 보고 흉내낸 건 / 폴라락 쫄라락 / 몸을 밀고 간 짱뚱어의 발자국’)을 보면 그것은 확연합니다. 그런데 개펄이 무진장한 생명의 보고인데 견줘 그것을 대하는 인간은 생명의 파괴자입니다. 사람들이 간밤에 불꽃 터뜨리며 노랫소리로 떠들썩했던 해수욕장의 아침은 ‘터진 과자봉지 / 뒹구는 소주병 / 널브러진 담배꽁초 / 우그러뜨린 깡통 / 씹다 뱉은 오징어 발’과 ‘쏟아진 컵라면 / 깨어진 맥주병 / 찢어진 깔개자리 / 젖은 양말 한 짝 / 짓밟힌 폭죽 껍데기 / 심술스런 도깨비 장난친 자리’(「해수욕장의 아침」)입니다. 해수욕장뿐만이 아닙니다. ‘산열매 푸짐한 싱그러운 숲 속에 / 먹다 남은 도시락’이나 ‘뚜껑 없는 소주병을 던져 놓았’(「쓰레기 동산」)습니다. 그러니 시인은 실제 생활에서도 바닷가를 가면 ‘차 트렁크 안에서 쓰레기 봉투를 꺼내어 들고 개펄에 널브러진 폭죽껍데기, 고무조각, 빈병, 스티로폼, 비닐봉지 등을 주워 담’(「생명을 사랑하는 시인」)습니다. 아울러 인간이 만든 ‘굴삭기’의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일부인 ‘황발이’의 무욕을 닮기를 기원합니다. 황발이랑 굴삭기 닮았대요, 많이 닮았대요. 흙을 빚는 황발이랑 둑을 쌓는 굴삭기랑 힘세고 붉은 왕발 하나씩 가진 점이 닮았고, 열심히 흙을 파내는 점이 서로 닮았대요. 다르지요, 아주 달라요. 왕집게발 치켜들고 가위놀이 하는 황발이랑 파 엎고 쌓느라고 소리만 요란한 굴삭기는 달라요. 욕심이 하도 없어 개펄 진흙 한 가지만 조금씩 찍어 먹고 사는 황발이랑 욕심이 너무 많아 산 파 먹고 강 퍼 먹고 바다까지 잘라 먹는 굴삭기는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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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같은 복잡한 책을 한 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머리도 식힐 겸 어린이 동시집을 찾게 된다. 대부분 교과서 수록 도서에 있는 시집을 많이 읽게 되지만 가끔은 재미있는 시집을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은 침튀기지 마세요라는 마주이야기 시집인데 그 책 말고도 어린이 동시를 읽으면 짧은 독서 시간에 비해 긴 여운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아이들에게 동시란 글 쓰기 싫었을 때 빨리 한 페이지 찍~~ 하고 갈겨놓고 가는 몇 줄 안되는 짧은 글이다. 하지만 동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행간의 깊은 의미란...
나도 어린 시절에 독서를 조금 한다고 했지만 동시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어릴 때 제법 똑똑했다고 칭찬 깨나 듣던 나였지만 동시의 행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으니 자연스럽게 시와는 멀어지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요즘 가끔 접하는 아이들 시집 한권 한권은 나의 마음을 다시 깨워 놓는다. 마치 그전에 내가 읽던 책 습관들을 비웃기나 하듯이 말이다.
아까 리뷰를 쓴 탄광촌 아이들 시집이 처철할 정도로 슬폈다면 이 낙지내 개흙잔치에는 환경이, 생명이 살아있다.
새만금 방조제로 없어져버린 생명이, 서해 기름유출사고로 사라진 생명이 여기에서는 꼬물꼬물 꼼지락대며 숨쉬고 있다. 또한 이 시집을 읽고나면 도시화 되어 삭막해진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작가의 투명한 마음이 느껴진다.
내가 무식해 이 작가 역시 교과서 수록 시인일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교과서가 바뀌어서 더욱 모른다.) 하지만 교과서 수록 도서만 좋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시집 한권으로 우리 아이들과 순수한 생명의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 |
| 아이들에게 동시를 지도하면서 그들이 써온 동시를 보면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어른들의 눈에는 유치(?)하다고 보이는 것들이 그들의 눈과 손에서는 귀엽고 기발하고 역동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의 시에서는 화려한 꾸밈도 없습니다. 새냇물을 은빛 쟁반에 굴러가는 옥구슬이라고 빗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은빛 쟁반이 무엇인지, 옥구슬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찬란한 비유와 미사여구로 장식된 동시를 좋아합니다. 두 번 세 번 꼬인 것이 마치 훌륭한 풍자인 양, 대단한 글인 양 착각에 빠집니다. 아이들은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고 보이는 그대로 적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책 속에 있는 모든 시들이 아이들의 시선을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만져지는 느낌 그대로 옮겨놨습니다. 그리고 시의 생명이 운율이 살아있습니다.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소박하고 순수하며 참다운 동시의 느낌을 얻고자 한다면, 좋은 시집을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다면 "낙지네 개흙 잔치"를 강력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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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손이 가는 책이 있다. 한번 읽고 저기 먼지 쌓인 책장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가까이 두고 보면서 읽을 때마나 글의 맛을 느끼고 싶은 그런 책 말이다. 안학수님의 <낙지네 개흙="" 잔치="">가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잘 다듬어진 우리말로, 갯벌의 작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점차 황폐해져가는 시골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삶의 쓸쓸함을 다독이며 껴안고 있다. 읽는 동안 나도 함께 위로 받았다고나 할까?
동시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동시집으로 구분되지만 나 또한 치유받음을 느끼고 작가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동시란 아이들이 독자인 시라고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 동시란 무엇일까? [인상깊은구절] 밀릉슬릉 주름진 건 파도가 쓸고 간 발자국 고물꼬물 줄을 푼 건 고둥이 놀다 간 발자국 스랑그랑 일궈 논 건 농게가 일한 발자국 오공조공 꾸준한 건 물새가 살핀 발자국 <개펄 마당=""> 일부개펄>낙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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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28 동시를 어떻게 쓰면 아름다울까 ― 낙지네 개흙 잔치 안학수 글 창비 펴냄, 2004.11.30. 경운기가 지나가면 큰소리가 한참 울립니다. 경운기 소리가 퍼지는 동안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트랙터가 땅을 간다든지, 경운기 앞쪽을 떼내어 땅을 뒤집을 적에도 다른 소리를 못 듣습니다. 자동차가 지나가거나 버스가 지나갈 적에도 바람이 나뭇잎을 살랑이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경운기가 멈춥니다. 트랙터가 멎습니다. 자동차도 버스도 이제 길에 없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노래를 듣습니다. 나뭇잎과 꽃잎이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봄꽃 곁에 앉으면 꽃송이에 내려앉아 꽃가루를 먹는 벌과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봄은 온통 소리입니다. 맑은 소리가 흐릅니다. 밝은 꽃내음은 산뜻한 꽃노래와 같습니다. 꽃노래를 듣는 사람들 마음에서 저절로 삶노래가 흘러나옵니다. .. 핥아먹고 키가 크는 고둥 조개들 / 찍어먹고 모래 빚는 칠게 방개들 / 갯지렁이 개불 쏙 짱뚱어까지 / 개흙을 좋아하면 아무나 오라 .. (낙지네 개흙 잔치) 시골에 농기계가 들어선 뒤로 시골에서 노래가 사라집니다. 시골에 노래가 있을 적에는 농기계가 없었습니다. 농기계를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볼 일은 없습니다. 다만, 농기계가 들어서면서 시골은 노래를 잃고, 노래를 잃은 시골에서는 이야기가 흐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은 이야기를 낳지 않거든요. 손전화도 이야기를 낳지 않아요. 컴퓨터도 이야기를 낳지 않습니다. 자가용도 경운기도 이야기를 낳지 않습니다. 콤바인과 이앙기가 이야기를 낳는 일은 없습니다. 이야기는 삶이 낳습니다. 이야기는 삶에서 샘솟습니다. 이야기는 빙그레 마주보며 웃는 얼굴에서 태어납니다. 이야기는 흙에서 자라고 풀빛으로 싱그럽습니다. 이야기는 도란도란 나즈막하게 속삭일 수 있는 곳에서 기지개를 켭니다. .. 진흙 속에 살아도 / 나는 안다 .. (참갯지렁이) 이제는 시골에서 일노래를 캐지 못합니다. 모내기노래가 없고 베틀노래가 없습니다. 방아노래라든지 빨래노래가 없습니다. 자장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아직 있으나, 먼먼 옛날부터 내려온 자장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어요. 스스로 삶에서 새로운 자장노래를 빚어서 부르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어요. 삶에서 노래가 사라진 까닭은 살아가며 노래를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며 노래를 부르지 않는 까닭은 노래를 부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척척 일을 끝내는데 언제 노래를 부를까요. 농약으로 풀을 다 죽이는데 무슨 풀베기노래를 부를까요. 소를 뜯기지 않고 사료를 먹이는데 무슨 소먹이노래를 부를까요. 지게를 지지 않고 짐차로 실어 나르는데 무슨 노래가 나올까요. 노래란 몸으로 움직이고 손으로 일하는 어른이 부릅니다. 노래란 몸으로 뛰고 손으로 노는 아이가 부릅니다. 노래란 어른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노래란 아이 스스로 동무들과 어울리면서 짓습니다. .. 깨어진 유리 조각들이 / 조가비처럼 파도랑 노는 건 / 고운 자개 빛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 (소문난 바닷가) 예부터 노래가 이야기요 시입니다. 예부터 이야기가 시요 노래입니다. 예부터 시가 노래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한테 따로 동시를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따로 동시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동시책을 꼭 사다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꼭 동시를 써서 읽혀야 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모두 노래이면서 시입니다. 아이가 동무하고 어울리며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노래이면서 시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가 언제나 노래이면서 시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이야기가 늘 노래이면서 시예요. 곧, 모든 어른이 시인입니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시인입니다. 모든 어른은 아이와 함께 시를 쓰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아이는 어버이와 함께 시를 쓰듯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 오빠도 가지런한 / 밀알 글씨 또박또박 // 언니도 곱다라니 / 깨알 글씨 조솜조솜 // 나도 시원시원 / 콩알 글씨 사삭사삭 .. (글씨 쓰기) 안학수 님이 쓴 동시를 그러모은 《낙지네 개흙 잔치》(창비,2004)를 읽습니다. 낙지는 개흙에서 언제나 잔치입니다. 게도 쏙도 조개도 모두 개흙에서 잔치입니다. 물고기도 바다도 개흙에서 잔치요, 갈매기도 바닷새도 개흙에서 잔치예요. 언제나 잔치이니 잔칫날 이야기가 감돕니다. 언제나 잔치이니 잔치노래를 부릅니다. 너도 나도 잔치를 생각합니다. 너와 함께 잔치를 즐기고, 나도 같이 잔치에 섞입니다. .. 공기알이 춤춘다 / 손 따라 콩당꽁 / 한 알 따기 조막손은 / 모이 쪼는 꼬꼬닭 .. (공기놀이) 동시를 쓸 적에 이래저래 꾸미지 않아도 됩니다. 동시를 쓰면서 글잣수를 맞춘다거나 예쁘장한 낱말을 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시골살이를 도시 아이한테 꼭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 아이가 하나도 모르는 숲과 들과 바다 이야기를 굳이 섞어야 하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넋을 들려주면 될 이야기요 노래이며 시입니다. 삶을 아끼는 꿈을 보여주면 될 이야기요 노래이며 시입니다. 삶을 즐기는 웃음을 함께 나누면 될 이야기요 노래이며 시입니다. 삶을 가꾸는 땀방울을 서로 북돋우면 될 이야기요 노래이며 시입니다. 안학수 님이 책상맡에서 동시를 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뛰놀고 조금 더 웃으며 조금 더 노래하면서 동시를 쓰면 한결 홀가분하면서 싱그러우리라 생각합니다. 깔깔 웃고 노래하는 하루를 스스럼없이 또박또박 적다가 새근새근 잠들면 한결 아름다우면서 빛나리라 생각합니다.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동시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