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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에서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4개의 출판사의 책을 2만원이상 주문하면 미니북세트를 준다는 것이었다. 읽을 책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미니북세트에 홀려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4개의 출판사 가운데 현대문학의 책이 마음에 들어 고르고 있었는데 김춘수의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주문했던 이유는 시집을 좋아한다는 사실 이전에 김춘수의 시집이 한권도 없음이 부끄러웠다.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야 시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낯선 시인들의 시집이 책장을 채워가는 것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시인이든 낯익은 시인이든 개의치 않고 시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당대의 시인들을 알지 못하고 그 시대의 슬픔을 모른다는 것이 조금씩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인들이 수두룩하겠지만 이벤트에 현혹되어 그제서야 시를 읽겠다고 나서는 내가 한심해 보이는 건 왜일까.
나는 시를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 것보다 쭉쭉 읽는 편이다. 한 음절, 한 귀절 정성들여 썼을 시인들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천히 읽는 것은 더 많은 공백을 두는 것 같아 빨리 읽는 편이다. 그러다 걸리는 글귀가 있으면 그제서야 속도를 늦춰 음미해보기 시작한다. 시는 여전히 나에게 만만한 장르가 아니기에 한 두편만 그런 시를 만나고 책을 덮더라도 뿌듯한 마음이 그득이다. 그런면에서 김춘수의 '달개비 꽃'은 제동이 많이 걸리지 않은 시집이다. 나의 공감을 끌어 내기 힘든 어려움이 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세계로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그 안에서의 모험은 난해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것들, 또한 오랜 시간 내면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들을 끄집어 내었을 때 그 주변을 겉돌아야 했던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시집은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다. 그 이전에 쓴 시도 있긴 하지만 삶의 끝을 향해 가면서 썼을 시인을 생각하면 이런 느낌들은 사라지고 그저 마음이 먹먹해질 뿐이다.
달개비 꽃을 읽다 보면 백지가 한장 나온다. 그리고 백지의 끝에는 알라메르가 말했던 백지의 공포가 아니라 저자가 느끼는 것은 언어로부터의 해방,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해방이 즐겁지 않은 것 같다. 백지가 주는 것은 불안이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은 것이 불안할 정도로 저자에게 시는 특별하리라. 그런 특별함이 왜 내게는 온전히 전해오지 않았던 걸까. 내가 혹여 놓쳐 버린 것은 없는지 그의 시집을 다시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느꼈던 감정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무언가가 안정된 느낌. 시가 시작되고 끝나는 부분에서 마주치던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의식하면서 읽으니 교묘히 연결되는 것 같은 기분. 그의 시를 다시 읽었을 때 조끔씩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시인의 시에 온전함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그의 궤도를 맞춰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 속에서 그의 시를 읽고 났을 때는 그가 세상에 없다는 것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와 시 사이에 시인과 독자만이 존재할 뿐, 그 공백은 서로가 채워가면 되었다. 시는 그대로이니 거기에 나를 맞추면 되었다. 그럴때에 시인과 다른 의도로 통함을 느꼈더라고 시의 진가를 하나하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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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했지만 시가 들어 오지 않았다. 시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시적 언어를 닮고 싶었다' 라는 말이 좀 더 정확할 정도로 함축적으로 길지 않게 말도 하고 쓰고 싶었다. 요즘 난무하는 언어들을 나도 안 쓰는 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듣기 싫어도 들리고 내가 말하는 언어가 스스로 인상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았다. 시를 읽고 좀 더 가까이 하면 시적언어를 닮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중에 < 달개비 꽃 > 을 만났을 때 이게 시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다.
한 단어 하나에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해서 말을 삼키게 만드는 그 언어유희.
비망의 뜻이 모르는데도 울컥해서 글을 쓰다듬으면서 '봄에 잘 어울리는 글귀다.'그리고 알 순 없는 감정이지만 덤덤한 내 가슴에 한 줄기를 빗겨냈다. 그러면서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가는 이때에 떠나간 네가 생각이 났다. 너는 봄처럼 싱그러운 나이에 갔다. 그렇게 아까운 나이에. 그런 너를 떠올리게 했다.
죽음. 그건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일이었다. 그 일이 네게 일어나기까지는. 그래서 꽃봉오리를 보면서도 지는 꽃잎을 보면서도 나는 네가 생각났다. 일찍이 떨어지는 꽃잎은 네가 살다간 삶을 말해주듯 너는 여기있어야 하는건데 정말 착했던 네 죽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어떤 형태로라도 바람, 휘날리는 꽃잎, 그래, 시처럼 숲종다리일 수도 있겠지. 이런 생각에 한 구절 한 구절이 삶에 투영되었다.
그리고 일만번 이상 책을 읽은 김득신은 그렇게 책을 읽고 시를 썼다고 한다. 나도 그처럼 읽으면 시인 김춘수처럼 쓸 수 있을까? 시때문에 발걸음을 멈추고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들까, 시공간을 초월해 그 기억속으로 나를 데려놓을 수 있을까? 모처럼 만난 시는 너무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언젠가 나도 그와 같은 시를 쓰고 싶고, 그와 같이 위로를 건네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