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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면증이 있고, 그래서 산책하기를 즐긴다. 물론 내가 사는 곳은 서울 특별시의 번화한 남쪽에 자리 잡아 동네 주변에 낮은 구릉이 아담한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열 발자국 간격으로 느티나무와 미루나무가 번갈아 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제는 목재소였던 곳이 오늘은 10채가 빼곡히 들어찬 다세대 주택으로 변하는 광경을 체크하고, 오늘은 만화방이었던 곳이 내일은 삐까번쩍 DVD방으로 바뀌는 광경에 심취해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어쨌든 난 산책하기를 즐긴다. 어쩌면 불면의 모든 순간들을 산책으로 이겨낼 작정에 오기처럼 뱅글뱅글 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낮이고 밤이고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온 동네를 길게길게 원을 그리며 산책하다보면 뜻밖의 사건들에 직면하는 일도 흔하지 않지만 일어나고는 한다. 아마도 그때 나는 플라스틱 피플의 사거리 연가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책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마를 스쳐 구두코를 맴도는 바람에게 물어 사거리, 내가 갈 곳은 어디 아무도 돌아보지 않지만 길은 언제나 내 발걸음 따라 가만히 하루를 속삭이네...’ 그리고 이제 막 이스탄불 골목이라고 맘대로 이름 붙힌, 오른쪽과 왼쪽으로 장미 넝쿨이 붉게 도열한 그곳을 막 우회전 하려는 찰나였다. 하늘색 쉬폰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와 내가 부딪친 것은, 그리고 그녀는 고개 꺾인 개나리처럼 쓰러졌다. "괜찮아요?" "아, 네." “저기 그런데 수아씨?” 그녀는 수아였다. 우리 동네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친구의 출판사에서 들렀다 그곳에서 편집을 담당하는 그녀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 그녀와 사귀고 싶어한다던 그가 했던 말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녀는 너무 자주 넘어져, 정말 열심히 하는데 막상 교정을 봐오면 오탈자 투성이야, 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즐겨, 술에 취하면 자동차에 발을 걸겠다고 나서고, 그리고 항상 책을 들고 다니지... “여기요 책을 떨어뜨렸네요.” “우리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죠?” “네, 수아씨. 출판사 대표가 제 친구잖아요. 그건 그렇고 윤대녕이군요.” 나는 손톱만한 의자가 그려진 책의 표지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거론했다. “네. 소설가이고, 산문도 간간히 쓰는 것 같아요.” “볼만한가요?” “<이태리 다방>이라는 제목의 산문이 제일 그럴 듯해요.” “그런가요?” “네. ‘밖으로 나오자 사십대의 어느 가을이었다’ 라고 말하는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윤대녕의 특기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구나, 여기게 되죠.” “그렇군요.” “빌려 드릴까요?” “아니오. 저는 속독을 할 줄 알아요. 산문이라면 책방에 서서도 금세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이태리 다방>이라는 제목의 글을 가장 먼저 읽게 되겠죠.” 그리고 그녀와 나는 헤어졌다. 5월의 햇살 속으로 파랗게 걸어가던 그녀가 잠깐 뒤로 돌아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나를 향해 눈을 찡그리는 것 같았다. 다시 그녀가 뒤로 돌아선 뒤에도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얼마 뒤 나는 친구에게서 그녀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녀는 눈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교정을 보면서 계속해서 오탈자가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와 헤어진 친구의 오른쪽 뺨을 향해 이유없이 한 방을 날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유없는 봄과 이유없는 여름조차 모두 흐른, 이유없는 가을 어느 날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는 여전히 산책을 하는 중이었고, 엊그제까지도 숯불 바비큐를 팔던 곳에 새로 들어선 미용실에 들어가 머리를 자른 참이었다. “이리오세요. 샴푸해야 해요.” “어, 수아씨?” “네. 이제 전 미용사예요.” “편집일은 그만 두셨어요?” “글을, 문장을 잘라내는 일이 제 적성에 맞지 않았나봐요.”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적성에 맞을 것 같아요?” “전 아직 견습생일 뿐이에요. 머리카락을 씻기는 일을 하죠. 그게 다예요.” 나는 잠자코 그녀의 손에 내 머리카락을 맡겼다. 그녀는 손가락을 곧게 펴서 내 정수리를 꾸욱 꾸욱 두차례 눌러줬다. 마술에 걸린 것처럼 난 잠이 왔다. 여전히 산책을 하는 중이었지만, 갑자기 내가 어쩌면 꿈 속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제 산책을 하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 윤대녕의 책을 읽으면 맞이하게 되는 감정들의 중의 하나는 ‘나도 쓰고 싶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뭐 조금쯤 새로운 독후감도 필요한 것이니... 그러니까 윤대녕의 책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은 위와 같은 몽롱한 사랑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열두 편의 산문 모음집이다. 이미 위의 글에서 밝혔듯이 <이태리 다방>이라는 꼭지가 제일 재밌었다. 특히 마지막 문장, “밖으로 나오자 사삽대의 어느 가을이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까짓 울어버릴 걸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