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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는 아니지만 디자인과 미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가 22,000원이나 하던 책이 이 정도 할인률의 재정가로 나왔는데 안살 수가 없었어요. 표지에서 엿보이는 환상적인 배경만 봐도 설레는 색감의 향연. 도착한 책은 원 가격에 걸맞게 판형 큼직하고 묵직한 유광지를 사용하고 풀컬러 인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섯 작가들의 도시와 거리를 묘사한 그림으로 넘쳐 흐르길 기대했던 생각과 달리 책은 작가들의 완성샷 몇 개를 보여주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내용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단계별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 작법 설명입니다. 요즘에는 수작업 일러스트레이션 위주로 하는 작가들도 마지막 단계에는 디지털로 원화에 세부 묘사를 더하거나 수정, 합성, 리터칭 등의 ‘가공’ 작업을 거치는 게 대부분이라 수작업과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긴 하지만, 풍경 갤러리 위주의 내용을 기대했다가 작업 소프트웨어 스크린샷이 연달아 나오니 좀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현역 일러스트레이터나 지망생들에게는 이런 구체적인 내용이 더 도움이 되기는 하겠구나 싶어요.
일본 작가들이라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배경으로 보았던 익숙한 스타일의 사실적 묘사의 풍경이 많은데 현존하는 실제 장소를 답사해서 다양한 각도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한 다음 각각의 부분 부분을 한 그림 안에 원근만 맞춰서 편집해 넣는 식의 작업 방법을 소개하길래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작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예 Blender 3D라는 프로그램으로 건축가가 빌딩과 도시 설계를 하듯 3D 기반으로 구도를 짜고 작업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도시 풍경이라는 주제 때문에 고안한 방법이겠죠.
작가에 따라 판타지 세계관에서만 존재하는, 완벽히 가상의 도시를 구현한 작품도 있고 실제 장소의 느낌이나 특징을 빌려 제3의 공간을 창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윗 사진은 1980년대 맨해튼을 연상시키는 도시의 풍경을 염두에 둔 작품인데 그리고자 하는 도시의 이미지를 일단 문서로 작성한 후 러프를 그리고, 근경 원경 중경 레이아웃을 그린 후 블록별로 세부 묘사, 광원 설정 후 음영을 넣고 원근을 더하고 그림자와 반사를 더하는 등 단계별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이렇게 완성된 결과에 텍스처를 더하거나 필터를 적용해서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 아날로그 그림 느낌을 주는 요령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손으로만 그린 아날로그 그림인지,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인지 점점 구분이 잘 안가고 경계가 희미해진 이유이기도 하겠죠. 6인 작가의 대표작 그림들을 많이 보고 싶었는데, 제작 과정 스크린샷이 더 많이 등장해서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일본 일러스트레이션 대가들의 작업실을 슬쩍 목격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예쁜 결과물만 보는 것보다 ‘대체 어떻게 그렸느냐’를 밝혀주는 책, 이것 또한 의미가 있다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