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이면 네 살배기 아이랑 작은 산으로 산책을 합니다. 일 주일마다 찾는 산이지만 찾을 때마다 새록새록 달라지는 빛이 놀라워 경탄하다 보면 아이는 벌써 눈에 안 보입니다. 어느새 호기심을 따라 달음박질을 친 것입니다. 깜짝 놀라 쫓아갈라치면 민들레 홀씨를 따느라 외진 길에 쪼그려 앉아 있기도 하고 또 다른 호기심을 찾아 쪼르르 앞서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아이의 본성은 호기심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이의 호기심은 왕성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모은 시들은 제가 옆길로 빠졌을 때 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내가 본 것들, 내가 만난 것들, 내가 느낀 것들을 시 속에 진실되게 담아 내려고 애썼습니다’(「머리말」)라고 말하는 시인의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아이의 호기심에 닿아 있습니다. 그런 만큼 시인이 ‘옆길’로 빠져 본 세상의 모습은 농촌과 도시라는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의 화자 또한 다양합니다. ‘한 가족을 벙어리로 만든 죄’(「텔레비전은 무죄」) 때문에 판사 앞에 선 텔레비전, ‘공책 속에서만 사는 건 / 따분한 일’(「‘야호’라는 글자가」)이라고 여기는 글씨, ‘태어나서 딱 한 번 / 지껄이다 사라지는 방귀의 말’(「방귀의 말」)처럼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화자가 아이일 때조차 아이는 물론 엄마 아버지가 특정한 인물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는 땅에서 출발해서 땅에서 끝난다’는 권영상 시인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다채롭습니다. 다채로운 만큼 여러 세상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채로운 세상을 그리되 시인의 지향성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시인은 지향하는 바가 ‘사랑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깨달은 만큼 형상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푸른 트럭을 끌고 다니는 아버지 아버지는 날마다 채소밭을 끌고 나가세요. 아침에 나가서 저녁까지 그 밭에서 살지요. “배추요. 싱싱한 열무요.” 야채가 가득한 밭 그 밭 한 귀퉁이에 앉아 점심을 먹고 찾아오는 사람 필요한 만큼 쑥쑥 뽑아 주고는 저녁 늦게 빈 밭을 끌고 돌아오는 아버지. 빈 밭에 시들시들 남아 있는 호박 몇 개 우리 집 아침 반찬.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그나마 제대로 형상화된 경우는 사랑하는 식구를 노래할 경우입니다. 이를테면 트럭을 몰며 채소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 필요한 만큼 / 쑥쑥 뽑아 주고는 / 저녁 늦게 / 빈 밭을 끌고 돌아오는 아버지’라고 노래한 작품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긍정의 힘으로 너끈히 끌어올리는 넉넉한 사랑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실제 아버지이든 ‘옆길’로 빠져 본 세상의 아버지이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관찰자의 시선을 훌쩍 뛰어넘은 경지에 있습니다. ‘온종일 논밭에서 일하다가 / 잠자기 전’‘로션 대신 온몸에 / 물파스를’(「엄마와 물파스」)바르는 엄마나 ‘돌아가신 할머니가 쓰던 방 / 말린 고추, 콩자루, 쌀가마니가 / 그 방에 대신 앉아 있어도 // 할머니 방은 그대로 / 헐머니 방’(「할머니 방」)이라며 할머니의 부재를 노래한 작품 역시 시인의 호기심이 그저 호기심에 머물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