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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위해서 잠을 잔다. 피로한 심신을 달랜다는 잠. 정신의 피로를 달래는 방식은 망각을 통해서 일 것이다. 분노, 증오에 의해서 흔들리는 영혼에게 있어서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이러한 극단의 감정이 누그러져 조금이나마 편안한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라는 이러한 망각의 완료형이 아닌지.
그런데 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잠을 잃은 사람들은 죽음도 잃었다. 죽었으되 삶의 저편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억에 발목이 잡힌 사람들이 있다.
『백년여관』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제주 43항쟁, 그리고 80년의 광주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일들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삶 그 자체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말이다. 이들은 삶의 구석 구석에서 이러한 사건들을 마주치며, 회한, 분노, 부끄러움으로 몸부림친다. 20명 남짓한 가족의 전부를 잃은 어미에게,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7살의 소년에게, 불타는 도청에서 도망친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행복을 찾아올 수 없다.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과 그에 따라오는 감정의 콜라주는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의 나락으로 밀어 넣고 만다.
정상인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과잉기억’ 환자들이 뿐이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의 ‘과잉기억’은 우리의 ‘과소기억’과 동의어이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기에 이들은 악착같이 비극을 끌어안고 산다.
기억의 짐을 덜어주는 방식은 물리적인 짐을 더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들의 기억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기억을 나눌 때, 즉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 그들은 망각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얘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한다면 『백년여관』의 속편은 세상에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억을 위한 투쟁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있다. 또 역사청산을 얘기하는 부류도 있다. 청산의 마지막 단계는 망각일 것이다. 한 사건에 또 한 시대를 과거화하는 것이 역사청산이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청산이 응당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의 순서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청산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차곡차곡 정리해야 한다. 정리하지 않으면 선 과악, 휴머니즘과 전쟁, 민주와 독재 이 모든 것이 뒤섞여 버리고 말 것이다.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백년여관』을 펼친다.
아 기억이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구나...... [인상깊은구절] 그는 세상과 싸우려고 했을 것이다.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는 이 비정한 세상의 망각증에 맞서서 그는 죽는 날까지 싸우려고 했을 것이다. |
|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그것은 결코 환상도 허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렇게 시작한 이 소설은, 또 이렇게 끝이 난다. 영도라는 섬... 그 섬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은 ‘아직 살아 있되 실은 벌써 오래 전 죽은 자들’ 혹은 ‘이미 오래 전 죽었으나 차마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자들’이다 그 그림자 섬에,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실은 무의식이 그 기억을 거부하는 사람), 그럼에도 끝없이 “시간이 없어, 어서 돌아와, 때가 되었다” 라는 환청을 듣고 재미교포 요안이 찾아 온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어, 시간이...라는 환청에 시달려 온 소설가 이진우도 그 곳을 찾는다. 그들은 백년 여관에 묵게 되고, 그 백년 여관을 둘러싼 인물들과 마주하면서 모두 동일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곤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 짐승만도 못하게 원통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하는 진혼제로 막을 내린다. 소설의 소재에도 시효가 있는 것일까? 유통기한 말이다. 이젠 6.25나, 광주의 5월은 이 시대에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처분해야 할 소재일까? 그러나 작가는 작중화자를 통해서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겐 망각되었어도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전 생애이거나 평생의 족쇄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것이 끝내 벗겨질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그 저주받은 시간에 사로잡혀 평생을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자면 이 책은 그 저주받은 기억을 갖고서 평생을 유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6.25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제주도의 4.3사건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 코메디중의 코메디인 보도연맹 사건이나, 베트남 전쟁, 광주의 5월의 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들은 악몽이 아닌, 살아 있는 동안 천형처럼 짊어지고 갈 저주의 기억들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노을은 아름답지만, 붉은 핏빛 노을은 산처럼 쌓여 있는 시체와 핏물로 강을 이룬 지옥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을을 보면 정신을 놓고, 헛소리를 해야 하는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억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40여 년 동안 선연한 기억들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 설분네도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기억은 결코 과거의 시간이 될 수 없다. 그는 살아 있으나 또 한발은 지옥에 걸쳐놓고 살았다. 그 지옥은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언제나 동일선상에서 공존하고 있다. 석탄보다도 더 검고, 바닥도 보이지 않는 늪보다 더 깊은 심연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 백여 년도 안 되는 이 한반도 땅에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 광기의 시절을, 인간이 인간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개돼지만도 못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광주항쟁의 후유증으로 앓다가 죽은 진우의 친구 케이는 말한다. "그래 결코 지난 날들을 잊어서는 안 돼. 망각하는 자에게 미래는 존재하지 않아, 기억해, 기억해야만 해. 하지만 친구야. 그 기억 때문에 네 영혼을 피 흘리게 하지는 마." 라고... 작가들마다 각기 자기 색깔이 있다. 박경리가 써야할 소설이 있는가 하면 황석영이 써야 할 소설이 있고, 공선옥이 써야 할 소설이 있다. 이 책은 작가 임철우라는 이름을 보지 않고 글만 읽어도 이 분의 작품이란 것을 알 것이다. <아버지의 땅>이나 <붉은 방>, <봄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은 이 시대나 역사를 비껴나가지 못하고, 외면하지 못하고 글로 토해낸다. 아직도 그의 펜대는 날카롭고, 분노와 슬픔이 서려 있다. 그 펜 끝은 영원히 무디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 기억들이 소멸되지 않는 한... 그리고 우리도 기억해야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기억들을 공유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신열을 앓듯 아파했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이렇게 빨리 이 책을 읽어도 되는 것일까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진혼제는 끝났지만, 내 마음 속에 묵직한 돌 하나 얹어 놓은 것 같은 이 무거움은 또 무엇일까? 좀 더 오래 아파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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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8) 백년여관. 임철우, 한겨레신문사, 2004 한 학기 동안 나름의 관심을 갖게 되었던 4.3 사건. 현대비평의 이해 수업을 통해 알기 시작한 4.3사건은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시는 서중석 교수님이 또 한 이번 학기에 수강했던 '한국사개설'의 담당교수라는 것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 '순이 삼촌' 까지 하여 그간 모르고 있었던 문자기록 자체의 '4.3사건'이 아닌 그 안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진정 인간이 아님을 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종강을 맞이할 즈음, 성대사랑을 살짝 뜨겁게 했던 '성균'지 논쟁으로 '성균'지를 읽어보았고 그 중에 비평가로 이름날리시는 고명철 선생님의 서평이 있었다. 그것이 '백년여관'이었다. 이 책은 소설 첫머리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환상도, 허구의 섬도 아닌 '영도'를 배경으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한 곳에 담아놓은 책이다. 과거 일제시기에 곡물반출 용도로 성화를 이루었던 이 곳 영도는 지금은 여름에야 피서객 몇 몇이 찾아오는 그런 조용한 섬이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섬 안에는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4.3 사건을 시작으로 동족 상잔의 6.25 전쟁과 1980년 5.18의 씻을 수 없는 비극과 공포가 서려있는 곳이다. 보통 한권 분량의 장편 소설을 이틀만에 읽게 되었다. 한달이 넘어도 책갈피를 중간즈음에 걸어둔채 책장속으로 들어가곤 하는데, 어제 도서관에서 그리고 오늘 침대위에서 다 읽어버렸다. 숨가쁜 진행도 아닌데. 여튼 그렇게 읽긴 하였지만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은 일단 무서움이었다. 마치 장르가 공포인듯, 공포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두가지는 먼저 무섭고 잔인한 장면에 대한 직접적 서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포에 대한 분위기. 이 소설은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고 해도 어렵지 않을 정도로 '공포'라는 장르를 좋아라 하지 않는 나에게 좀 버거웠다. 그것도 그럴것이 등장인물들에게 벌어지는 환청, 환영, 그리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알수 없는 기운들에 대한 묘사가 그랬다. 또 한 비록 사실이지만, 무수하게 자행된 양민학살의 그 모습들을, 그리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모습들을 너무나도, 개인적으로는 필요이상으로 묘사했다. 온 천지에 널린 시체들로 하늘을 검게 막아버린 매미만한 파리때며, 인육을 맡보고 미쳐버린 동네 개들 등등 이 점에 있어서 좀 찝찝함이 남아있다. 영도의 허름한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집 식구들과 몇 몇의 영도 주민들, 그리고 알 수 없는 환청에 이곳에 내려와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외지인, 그들은 각각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아픔과 비극, 슬픔, 분노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영도는 그런곳이다.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있는 공간이라고. 오히려 육신이 살아있는 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통과 비극, 슬픔에 죽어있는 사람이고, 죽은 자들은 원통하고 억울하여 정신만큼은 죽지못하고 있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곳이 영도다. 먼저 크게 주축을 이루는 것은 제주 4.3 사건이다. 영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운 섬이다. 그러한 이유로 끔찍이라는 단어의 힘가지고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4.3 사건을 겪어내고 살아남은 자들 중에 도무지 고향땅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어 아무것도 없이 빠져나와 많은 이가 정착한 곳이 영도이다. 그래서 영도에는 제주도 출신들의 외지인들이 많이 있다.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집 남자 강복수와 얼마전 돌아가신 할머니 설분네가 그랬고, 무당 조천댁과 역시 돌아가신 그의 어미 귀복녀가 그렇다. 4.3 사건에 관한 이야기라고 알고 어느정도 읽어나갔다. 물론 4.3 사건을 직접, 간접적으로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로써 이 사건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인지 어느 조금도 실감할 수 없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글자로 서술되 있는 것만 봐도 치가 떨릴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하리라.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지옥'이라는 단어를 연거푸어 써 가면서 인물의 내면심리를 설명하는게 걸렸다. 정말 '지옥'의 남발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건이 정말 무참했다는 것은 알지만 이리 '지옥'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무려 다 섯개의 장으로 설명한 수난사. 즉 4.3사건 당시의 상황 그대로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나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은 이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적는 방법 밖에는 없다. 아무리 표현을 해봐도 잔인, 끔찍, 무모 이런 정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해를 하려해도 전혀 각이 안나올 정도로 광기에 사로잡혀 사람을 죽이는 일이 너무나 쉬웠던 그 순간. 오죽했으면 개돼지만도 못한 가치를 받는 사람이라는 비참한 형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기에, 어차피 길러줄 사람 없는 이 추악한 세상에 살아남아봐야 결국은 바참함 뿐이라며 등에 업인 갓난애와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의 오열이 있을 수 있을까. 당시 집권자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제주도 양민들에 대한 턱없이 모자란 연민밖에는 내 손으로 적어낼 수가 없다. 이런 씻어낼 수 없는 뼈속 깊이 박힌 과거의 충격과 아픔을 평생동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생은 앞서 말한대로 생이 아니다. 이들은 책에서 언급했던 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비평 수업때 들었던 개념, 반죽음에 가까울 것이다. 두번째로 6.25 전쟁의 핏바람 역시 영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4.3사건의 모진 고생을 하고 겨우 들어온 영도. 육체적 피곤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 전쟁이 불어닥쳤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통해 빨갱이를 색출해 내겠다며 인민군에 쫓겨 내려온 주제에, 그리고 또 다시 퇴각해야 하는 주제에 빨갱이를 처단하기 위해 인민군 행세를 하고 나타나 단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을 환영하는 자리에- 안나가면 반동이라 하는데- 나온 양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을 가행하는 국군과 경찰. 빨간 완장을 걷어내고 경찰마크를 보이는 식스센스보다 더한 반전 드라마를 보여준 그들, 진정 죽여버리고 싶은 위인들이다. 한바탕 총부림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내려와 영도를 장악한다. 이미 경찰들은 더 남쪽으로 퇴각한 상태에서 인민군은 또 나름대로 반동이라며 양민을 보복 학살하고, 다시 북쪽으로 진격하는 우리 군인은 또 보복학살을 하는 것이다. 이 역시도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불가능한 무개념 역사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섬을 찾아든 소설가 이진우와 영도에서 살고있는 한 여자를 통해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는 1980년 늦은 봄 오월 광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권력자는 무참히 군대를 도시로 보내고 결국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열어 재껴 무차별적으로 난사해댔다. 군대가 자기 나라 국민들을 죽이라고 만들어진것인가. 그렇게 열흘동안 광주는 '시민'들의 피로 가득찼다. 마지막 도청 진압을 끝으로 마무리 된 80년 광주의 봄은 이 후 지휘하던 이가 최고권력자에 올라서 과감하게 이 날을 조작하고 왜곡시켰고 우리 시대의 시간은 빠른속도로 흘러 그냥 그렇게 있었던 일이라 하며 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잊어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살인마는 감옥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가 당당하게 걸어나왔고, 수 많은 정신병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억울한 영혼들에 의해 미쳐버렸으리라, 제정신이라면 저렇게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기에 미쳐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이 소설의 막바지를 읽어가면서 반전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문학적으로 봤을 때 상당한 묘미를 보여주는 것은 허문태라는 인물의 꿈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한쪽 팔을 잃고 비관을 안주 삼아 술에 빠져 살다 얼마전부터 동생 미자가 운영하는 여관에 내려와서 일을 봐주고 있는 인물이다. 문태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들이 꿈을 통해서 전달됐는데, 그 모습은 4.3 이나 보도연맹이나 5.18이나 다를것이 없었다. 그저 살기위해 총탄에 맞지 않으려고 구덩이를 파고 숨어있는 아낙네와 노인, 아이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안에 수류탄을 집어 넣고, 집으로 가라고 풀어준 어린애를 후임에게 쏘도록 시키는 군인들. 우리 현대의 비극사는 비단 한반도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프롤로그에 보면 '당신'이라고 표현되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변의 출판 업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아직도 옛날 이야기에 집착하느냐고, 언제까지 그때 그때를 생각하며 소설을 쓰느냐.. 틀린이야기는 아니다. 4.3사건은 벌써 50여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이고, 5.18도 20여년이 넘었다. 그 변화한 시간의 숫자 차이보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고 더욱 빠르게 겪어가는 세상인데, 아직도 과거의 오점을 들먹거릴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데로 그것은 절대 과거가 아니다. 비록 전체 국민에 비해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50여년 전이나 20여년 전이나 끔찍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던 사람들은 그날 때문에 아직도 고통받고 있고 가슴에는 굵은 핏덩어리가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런 채로 현재를 살아간다. 이게 어찌 과거의 일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내일도, 그 사람들이 명을 다 할때 까지도 이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5.18때 함께 했던 케이의 장례식장에 모인 동지들. 간만에 함께 역사를 만들어갔던 인물들과 모였던 자리라 과거를 되새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그 모습. 작가는 이 부분에서 반지하의 식장안에 모든 것은 멈춰 있었지만, 반틈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그 순간에도 쉴새없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고 표현했다. 내가 제주도 사람도 아니요, 주변에 5.18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생각하면 책임져야 할 사람은 너무나 잘 살고 있는걸 보고 분노를 느끼니 생각도 싫기도하다. 하지만 이는 분명 우리가 겪어온 역사이며 아직도 그 역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제대로된 평가가 있을까 마는, 그 일로 인해 수 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날에 묶여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CPU속도가 변화하듯 쉴새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그냥 그렇게 잊혀져가는 것만 같아서 무섭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대도 말이다. |
| 책 읽기전의 버릇이 늘 그렇듯이 표지 그림과 제목을 잠깐 생각했었다. 양철문에 못이나 철사처럼 표족한 것으로 긁어서 쓴것같은 글씨가 읽기전과 읽은 후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제목은 잠깐 생각해보다가 영~답이 나오질 않아서 읽은 뒤에 생각해보자 싶었었다. 읽고나니 저절로 답이 나온다. '백년여관' , 블로그에서 발견한 책이다. 줄거리는 정확히 파악안했지만, 뭔가 가벼이 읽어넘길 내용은 아닌것 같아서 약간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시작했다. 외갓집의 기억을 떠 올리게 하는 작가의 고향과 전문내용에서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백년여관을 읽기직전에 읽었던 ‘우부메의 여름’에서의 으스스한 아기혼령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에서 가시기도 전에 다시금 마음속에 들어앉기 시작한 수백명도 넘는 영혼들의 허우적 거리는 손들이 가슴을 쥐어 뜯기라도 하듯이 편하게 드러누워서 읽을 수가 없었다. 집중력 약하고 책 한 페이지 보다 졸다 하던 내가 유쾌한 내용도 아닌걸 이 처럼 내용에 빨려들어 읽어낸 책이 언제나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 놀랐고 너무 빨리 읽어내서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삶과 죽음을 한꺼번에 보듬고서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는 동안 섬사람 이 소설에 주인공정도로 딱 어울릴듯 했던 외삼촌도 먼 곳으로 가셨다. 먹먹한 가슴을 쉬이 털어내긴 힘들었다. 누구에게도 얘긴 안했지만, 백년여관을 읽는 동안 머리끝이 쭈뼛해질 정도로 누군가의 그림자를 느꼈던건 외삼촌을 백년여관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서였을까? 외삼촌에게 미안한 맘이 든다. 아마도 외삼촌을 떠올려질 때마다 백년여관 사람들도 함께 떠올려질 것이다. |
| 정말 잘 읽히는 소설이었다. 읽다가, 덥고, 읽다가 덥고를 몇번 반복하다가, 첫장 건너뛰고 시간을 내어 작심하고 본 소설이었다. 소설에 신경을 쓸 내 여유가 없어서 계속 왔다 갔다를 반복하였지만 그래도 구성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다. 영도... 한참을 헤메이게 한 섬이다. 그냥 가짜 이름이라고 생각했으면 편했겠지만, (하긴 여관이 들어설 정도의 규모이여야 하는데) 잘 모르는 섬이어서 정말 작은 섬으로 이해했었다. 열심히 지도를 찾고, 인터넷을 찾았지만 우리나라의 영도는 부산에 있고, 난 완도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여러 인물들이 여관을 배경으로 복잡하게 나타난다. 다들 하나의 이야기는 갖고 있다. 이 이야기를 잘 살리려면 좀 더 길게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평하기는 아는 것이 없지만 큰 줄기를 살리지 못하고 이것 저것 다 가져온 느낌이다. 예전에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리뷰를 하면서 우리 나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개인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는데, 4.3 6.25 월남전 5.18등이 잘 합쳐지지 않는 느낌이다. 작가에게 바램이 있다면 이 주제에 연속해서 제주 4.3 과 그 후 제주의 이야기를(한국전쟁까지)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 백년여관... 백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우리 역사는 인간으로 죽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죄를 쓰고 죽어가야했던 사람들과 죽음보다 큰 상처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남은자들 앞에서 그 기억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으로 묵묵히 그들의 고통을 바라보아야 한다. 임철우님의 백년여관은 아직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과 그 영혼들을 잊지못하는 산자들의 절절한 슬픔을 담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자식의 살려달라는 애원을 듣고만 있어야했던 화북댁의 미쳐야만 살 수 있던 마음과 ..열자식과 손주 며느리 사위의 죽음을 살아남아 보아야했던 설분네의 죽어서도 이승을 버릴 수 없던 원한이... 긴밤을 세우며 책을 읽고 덮는 순간까지 나의 마음속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옆에 잠든 다섯살난 아들아이와 젖먹이 딸을 바라보았다. 해마다 최루가스로 뒤덮였던 5월 18일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못하고 지나버린 나의 대학시절이 부끄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