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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여성 없이 살았다. 기록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각종 교육으로부터 여성들은 배제됐다. 버젓한 이름을 갖지 못해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만 존재했다. 여성의 노동은, 지금도 그러한데,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반면 너무도 당연해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하등 지니지 못한 걸로 폄하되곤 했다. 특출난 역량을 지닌 여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우했다. 중세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유럽 대륙에서 태어난 여성은 혹독한 마녀사냥으로부터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허난설헌이 만일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품격 높은 글을 쓰는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았을 수도 있다. 처음부터 저자가 세상이 잊은 여성들을 주목하려 들었던 거 같지는 않다. 그보다 앞서 뒤틀린 식민 시기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요, 현재를 가능케 했던 수많은 이름들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을 느꼈지 싶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무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하나 파고들기에는 많은 부담이 따랐다. 여행 에세이 형식은 취할 수 있는, 왠지 가장 손쉽게 보이는 방법이었다. 쉽다고 말했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아 거의 전국을 떠돌았다. 하남 스타필드에서 출발했는데, 춘천, 경주, 문경, 당진, 안산. 참으로 많은 도시를 거쳤다. 심지어 국경을 넘나들기도 했다. 여정은 계획에 따른 것이었으나 동시에 부는 바람을 따르는 것과도 같았다. 상상 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만남들이 성사됐고, 코끝이 찡한 경험 또한 그렇게 저자를 웃기고 울렸다. 나는 저자의 친절에 편승했다. 나름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자부했기에, 이번 독서는 그저 즐기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낯선 이름과 마주했으니 느낀 당혹감은 컸다. 과연 ‘안다’는 말은 어느 때에 사용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역사를 알지 못했다. 역사의 엄연한 일원인 여성에 대해 내가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의병장 윤희순을 아는가. 물론 익숙한 인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난 정말 처음 이 이름을 접했다. 독립운동을 꼭 남성만 하라는 법은 없으므로 그녀와 같은 이는 아마 여럿 존재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욕심을 거두고, 저자가 제시한 인물에 집중키로 했다. 기질이 남달랐다고 보아야 할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듬뿍 받은 건지. 어느 쪽이건 그녀의 삶은 숭고했다. 의병활동을 위해 남장을 했으며, 아이를 떼어놓은 채 집을 비웠다. 의병에게 공급할 탄약소를 운영하는가 하면, 동네 아낙들에게 의병 노래를 만들어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 노래 가사엔 자신의 이름 석 자가 포함됐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나의 온몸엔 전율이 흘렀다. 절대로 무너질 거 같지 않았다. 경술국치의 부끄러움 앞에서 시아버지가 자결하려 들었을 때에도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자며 다분히 현실적, 의지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녀다. 가족은 그녀를 버티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굴레였다. 아들을 잃은 어미로서 그녀는 한시도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저자는 삶을 갈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향해 걸어 나가는 영화 속 정약전의 모습과 그녀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남겼다면 그녀는 ‘해평윤씨가정록’을 기록했다. 기록이 차마 다루지 못한 것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독립 만세운동의 주역 유관순, 영화로도 만들어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가네코 후미코,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최용신 등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일 거다. 어쩌면 안다는 게 착각일지라도, 그 이름들을 한 번 이상 들어본 것만은 사실이다. 나의 시선은 그 외의 인물들을 향했다. 김향화, 권애라, 심명철, 어윤희, 신관빈, 임명애. 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서대문형무소 여옥사로 끌려왔다. 기본적인 먹거리는 당연 기대가 불가했으며, 시시때때로 악랄한 고문이 자행됐다. 살아서 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매일 울부짖기 바빴을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를 챙겼다. 금식 기도를 이유로 제 몫의 식량을 양보하는 그 마음을 나는 좀체 상상이 어려웠다. 내 앞길 도모도 힘든 상황에서 함께 가려는 그 정신을 세상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방치한 건 아닐지. 모성. 본능인지, 노력에 의해 학습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느 쪽이건 모성은 여성에게 족쇄처럼 작용하곤 했다. 여성이 마땅히 감당해야만 하는 일,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 이를 당연시 하는 건 다름 아닌 모성이었다. 단지 아이와 가족을 돌보는 차원을 넘어 모두를 돌보는 공동체적인 모성을 저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살피며 발견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사회의 기본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도 그 정신이 부디 유효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