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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중일록』_ 1619년 심하 전쟁과 포로수용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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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위정자들의 무능함과 안일함 그리고 일본의 야욕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그로인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고1598년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다시 일본을 쫓아냈지만,하지만 조선의 기득권들은 여전했다.광해군이 재건을 위해 구군분투 했지만대다수를 차지한 기득권층들은 반성과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다시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데 급급했고, 자국의 국방력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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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위정자들의 무능함과 안일함 

그리고 일본의 야욕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로인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다시 일본을 쫓아냈지만,

하지만 조선의 기득권들은 여전했다.


광해군이 재건을 위해 구군분투 했지만

대다수를 차지한 기득권층들은 반성과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다시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데 급급했고, 

자국의 국방력을 강화시키기보다는 

그저 대국 大國인 중국의 명나라에 기대는 것이 

유일한 방책으로 생각했다.



1618년 아직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비극은 다시 이어졌다.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을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 (努爾哈赤, Nurhachi, 1559~1626)'가 

무순 撫順과 청하 淸河를 기습점령함으로써 

명나라 토벌군을 동원하여 심하 전쟁이 발발했고,

강력한 원병 요청에 결국 13,000 여명이 파병되었다.




위의 도서 『책중일록』을 읽어보면 그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 있지만,

이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전공에 눈이 먼 명나라 장수들의 재촉에 휴대한 군량과 무기를 땅에 파묻었으며,

(※ 명나라는 기병이 대부분이고, 조선군은 보병만 5천 명이 넘었다. - 『광해군』p206)

전쟁의 기본인 보급은 10여일 넘게 오지 않아서 결국 명나라에 빌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명군 지휘부의 불화 와 전략의 부재 및 열악한 무기와 장비 등 헛점 투성이었다.


결국 1619년 3월 4일 부차싸움에서 명군과 조선군은 패배했고,

이후 저자 이민환의 17개월 간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었고,


이후 고단한 포로생활을 끝내고 귀환하여 위의 도서 제목이기도 한

<책중일록 柵中日錄> <건주문견록 建州閔見錄>이 저술되었다.



도서 『광해군』(한명기 지음)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긍정적인 입장이었고

심하전쟁 파병 참사 후유증에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위의 도서 『책중일록』을 읽고선 그 참담함을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을 하지 않은 죄를 면하기 위해서 각종 모함을 씌웠던

평안도순찰사 박엽 朴燁분호조참판 윤수겸 尹守謙 외에

여러 비겁한 자들의 행적을 보며 비루함을 느꼈다.

이런 자들은 당장은 편히 살았을지 모르지만, 

더러운 행적으로 이름이 남겨져 후대에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비극은 자강의 노력은 외면하고

그저 힘있는 외세를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꼼수가 원인이라고 생각되었다.


삼국시대 신라가 그러했으며, 고려시대를 넘어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우금치전투에 외세를 끌어들여 큰 비극을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노무현 정부와 현재의 문재인 정부의 '전시작전권 회수' 노력은 당연한 조치라고 본다.

외세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외교적 협력은 협력대로 진행하되

자주적인 자강에도 힘쓰는 정상적인 국가가 되어 이제는 이러한 비극이 없길 희망한다.


https://youtu.be/uHnyu2qSHc8 - 노무현 대통령 "전작권"

 



https://youtu.be/pHLjD9xpacM - 문재인 대통령 "압도적 힘의 우위" <YTN>

 


끝으로 위의 도서 『책중일록』이 포로생활을 했고 인조반정으로 다시 정계복귀한 

'이민환'의 기록이라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을 수 있지만,

아래의 도서 『광해군』(한명기 지음)도 함께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입체적인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정군 가운데 1만은 조선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훈련했다.

이제 장수와 병사들이 서로 숙달하게 되었노라.

그러니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 광해군 『광해군』 p 202






p.s.1 추천도서 : 『광해군』(한명기 지음)


광해군
한명기 저
산성일기
김광순 역
책중일록
이민환 저/중세사료강독회 역
예스24 | 애드온2


p.s.2 참고영상

https://youtu.be/M4ZHBles4LY - 이상한 밀지 <역사채널e>

 

https://youtu.be/ThLqnB0UE80 - 강홍립 <EBS 기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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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환 李民[1573(선조 6)~1649(인조 27)].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獵巖,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1600년(선조 33)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603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 영천군수로 나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자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 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울에 올라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1636 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장현광張顯光의 종사관이 되어 참전했다. 

그 후 동래 부사·판결사判決事·호조참의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고 

1645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자암문집紫巖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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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초기에는 후 금이라 칭함)는 우리 민족과 악연이 많았다.

조선 중기였던 1627년과 1636년에는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두 전쟁에도 조선 왕조는 명맥을 유지했으나, 

많은 사람이 죽고 포로로 잡혀갔다. 

우리 민족이 입은참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철천지원수처럼 증오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은 조선이었다. 

1619년(광해군 11) 2월에 조선은 명나라와 연합하여 

후금의 수도 허두알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해 3윌 4일 심하深河의 부자富車들판에서 진격하던 조선군은 

후금 기병의 습격을 받고 부감히 패배했다. 

전군 1만3,000명 중에서 7,000여 명이 죽400여 명이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소수의 패잔병들만 도망쳐 살았을 뿐이다. 

포로가 된 조선군 장수와 군졸들은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로 잡혀갔다. 

장수들은 목책을 둘러친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군졸들은 민가에 노비로 분양되었다. 

그들은 조선이 후금과 강화해 어서 빨리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지만 

고국은 그들을 저버렸다.



심하 전투의 패배는 우리 해외 파병 역사에서 유례없는 대참변이었다.

1619년의 사르후(薩爾湖) 전투와 심하 진두의 실상이나 

조선군의 항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아직도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공정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패전의 주된 요인은 전체 병력을 네 갈래로 분산하여 공격을 시작한 

명나라 지휘관들의 전략 실패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명과 조선 연합군의 빈약한 무기와 군량 고갈 

그리고 허허벌판에서 후금의 기병과 맞붙었던 작전도 결정적 폐인이었다. 

후금에 대한 조선의 선제공격은 뒷날 두차례 호란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외면하고 버려둘 문제가 아니다.



이 비극적인 줄병의 자초지종을 충실히 기록한 종군 자료들이 남아 있다.

당시 도원수의 종사관으로 따라갔던 이민환李民의 

<책중일록 柵中日錄>과 <건주문견록 建州閔見錄>이 그것이다. 

이 두 자료는 당시의 전투 상황과 조선군 포로들의 수용소 생활, 

조선과 후금의 강화 협상 등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만주 지역의 역사, 지리,정치·사회, 군사 등의 실상도 두루 기록되어 있다. 

는 청나라 초기의 사회 모습과 국제 관계 연구에 매우 긴요한 자료가된다.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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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4월 누르하치는 무순撫順과 청하淸河를 기습하여 점령했다.

이에 명나라는 대규모의 토벌군을 동원하면서 조선과 몽골에도 원병을 요청했다. 

당시 광해군은 이 요청을 모면하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강요를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조선은 그해 7월 강홍립과 김경서를 도원수와 부원수로 임명하고 

이민환李民寅등을 종사관으로 차출하여 원정을 준비했다. 

조선은 전국에서 군사를 징발했는데, 

경상도·강원도·함경도 지역 병력은 두만강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대기시키고, 

경기도·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 병력 중에서 

1만 3000명을 뽑아 원정군으로 편성했다. 

그들은 1618년 10월 집결지인 창성에 도착하여 

부대 편성과 군수품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군은 독자적으로 출병한 것이 아니고, 

명나라에 의해 징집되어 제독 유정 劉綎 이 지휘하는 동로군東路軍에 배속되었다. 

후금 원정군을 총지휘했던 요동경략 遼東經略 양호 楊鎬는 

원정군을 네 개의 군단으로 나누어 분산 배치했다. 

그것은 산해관총병 두송杜松이 지휘하는 주력 서로군酉路軍, 

요동총병 이여백李如柏이 지휘하는 남도군南路軍, 

개철총병開鐵摠兵 마림馬林이 지휘하는 북로군 

그리고 요양총병 유정이 지휘하는 동로이었다. 

이들 군단은 각기 2만에서 3만 명의 군사로 편성되었는데, 

동로군은 명군 1만여 명과 조선군 1만3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부대를 편성하는 도중에 경략 양호의 요청으로 

강홍립은 평양 출신 포수 400명을 두송이 지휘하는 서로군에 보내기도 했다.



그해 2월 양호는 이상과 같이 공격군을 편성하고 네 길로 나누어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赫固阿拉Hetuala)로 진격시켰다. 

이들은 3월 1일에 모두 허투알라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전 병력 6만 명을 

분산하지 않고 명군의 주력인 서로군 타파에 집중했다. 

다른 세 곳에는 500명 정도의 소수 병력만 보내어 감시와 지연 작전을 펴도록 했다. 

이러한 누르하치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사르후(薩爾滸, Sarhu)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p 012, 013

        심하深河출병의 역사적 배경

           1619년의 심하 출병과 그 기록

              책중일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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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3월 5일 두 원수와 이민환 등을 비롯한 4,000여 명의 

조선인 패잔병은 포로로 잡혀 노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3월 6일 노성 밖 10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누르하치는 즉시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를 불러 일종의 항복을 받았는데, 

두 원수는 설을 하지 않고 읍揖만을 했다가 누르하치의 분노를 샀다. 

누르하치는 조선군 장수와 군졸을 모두 죽이라고 했으나, 

그 아들 귀영가貫盈哥가 말려 겨우중지되었다.



이후 두 원수와 이민환 등 장수 여덟 명과 그들의 하인은 

도성 안에 마련된 수용소에서 거처하게 되었고, 

나머지 병졸은 성 밖 민가에 분산 수용되었다. 

3월 23일 누르하지는 조선인 병졸 중에서 

양반 출신만 추려내어 400-500명을 모두 죽였다. 

당초에는 누르하치가 포로 전부를 죽이라고 했으나, 

귀영가 등이 말려 양반만 죽인 것이다. 

후에 조선군 장수들 군관과 노비 50여 명을 더 끌어내 죽였다.



1619년 3월부터 시작된 이민환 등의 수용소 생활은 

다음 해 7월 송환될 때까지 1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강홍립 등의 장수들은 엄중한 감시속에 노성 안의 임시 수용소에 있었고, 

일반군졸은 여진족 민가에 분양되었는데 도망간 사람들이 많았다. 

당초에 포로로 잡힌 군졸은 4,000여 명이었는데, 

두차례에 걸쳐 500~600명이 살육되었고, 

도망가다가 추위와 허기로 죽은 사람이 많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사람은 2,700여 명이라고 전한다.

1만 3,000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가 겨우 3,000여 명만 돌아오고 

1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p 016, 017

        조선군 포로의 압송과 학살 그리고 수용소 생활

           1619년의 심하 출병과 그 기록

              책중일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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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619년 심하 출병에 참가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 <건주문견록 建州閔見錄 <월강후추록 越江後追錄

을 번역, 해설한 것이다.

<책중일록>은 그가 1619년 2월 도원수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면서 겪은 

행군 경로, 전투, 포로수용소 생활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다.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크다.

1619년의 심하 전투에 관한 최고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은 그의 문집인 《자암집 紫巖集》 제5권에 수록되어 있다.



<책중일록>은 이민환이 창성에서 출병을 준비하던 

1619년 2월 16일부터 만포에 돌아온 1620년 7월 17일까지 쓴 일기다.

일기의 앞머리에는 출병의 배경이 된 후금의 무순 함락, 

이에 대한 명나라의 군사 동원과 조선에 대한 징병 요청, 

조선 정부의 대응책 등이 기술되어 있다.

초반의 일기는 매일 기록했으나, 

포로가 된 이후 장기간에 걸친 수용소 생활 중에는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기록했다.



<책중일록>은 일상적인 보통의 일기라기보다,

원래의 초본을 사후에 정리하여 편집한 일종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책중일록>에는 훗날의 사건이 앞 날짜에 기록되어 있거나 

여러 가지 참고 자료들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일록의 저술은 당신의 군사 활동과 자신들의 포로 생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기려는 뜻도 있었지만, 

조선군 지휘부의 전투 패배와 항복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기 위한 의도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은 다른 자료와 비교,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건주문견록>은 이민환이 1620년 7월에 돌아와 

조정에 바친 일종의 정보 보고서다.

여기에는 당시 후금 지역에서 저자 자신이 직접 듣고 보고 경험한 

지리, 풍속, 군사 등의 여러 사항을 기록하고, 

조정에 후금 방어 대책을 건의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문견록은 《자암집》 제6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책중일록>의 부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중일록>이 하나의 편년체 역사라면,

<건주문견록>은 일종의 지리지 地理誌와 같다.






<월강후추록>은 이민환이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한 이후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자암집》 제6권에 수록되어 있다.




     p 019 ~ 023

        이 책에 수록한 자료들

           1619년의 심하 출병과 그 기록

              책중일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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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2월


원수 강홍립이 군사 편성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연영장 蓮營將 청성첨사 情城僉使 이찬 李禶은 

마군 馮軍 5,000명을 거느리게 하되, 

10개 영으로 나누어 진격로에 열을 지어 진을 치고 

순찰사[평안도순찰사 박엽 朴燁]와 분호조[분호조참판 수겸 尹守謙]

의 지휘에 따라 함께 계속해서 군량 수송을 담당하게 했다.





1619년 2월 18일


분호조참판 윤수겸이 창성에 도착했다

[순찰사 박엽은 여러 번 재촉했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원수가 직접 만나서 약속하지 못하고 강을 건넜다.]



     p 037 ~ 039

        1618년 4월 ~ 1619년 2월 18일

           1. 심하 출병의 배경과 준비

              <책중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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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2월 27일


3영이 가져온 군량은 다 떨어졌지만 

후속 량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보졸이 행군하면서 정강이가 부르트고 

피가 흘러 명나라 군대와 이어서 진을 치지 못하니,

우 수비(우승은)가 홍기 泓旗를 가지고 원수의 앞에 와서 

찼던 칼을 빼고는 소리쳐 말하기를

"유 제독이 조선 군대가 뒤떨어져 있다고 장차 나의 목을 치려고 한다" 

라고 하면서 교 유격의 표문 票文을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조선군에 군량이 없지 않은데,

머물러 관망하면서 두려워하고 위축된 것이 매우 심하다"

라고 쓰여 있었다.



원수가 부득이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고 

각 영에서 600명을 뽑아 노영 老營을 설치하고 

숙천부사 이인경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보병들이 짊어진 무기와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를 모두 풀어놓은 후,

다음 날 새벽에 행군을 재촉하여 

명나라 장수가 도착한 곳으로 따라가도록 했다.


[유 제독이 양 경략에게 미움을 받는지라 

기간을 어기는 것으로 죄를 짓게 될까 두려워하였는데,

매번 조선군이 뒤떨어져서 전군이 쉽게 진군하지 못한다고 탓했다.

장차 우리 군으로 죄를 돌려 자신의 죄를 모면하려고 한 것이다.


이에 원수는 부득이 굶주린 군졸을 재촉하여

위태롭고 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갔다.


연영장 이찬의 군마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군량은 도착하지 않았으며

또 후원도 없으니 낭패할 걱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1619년 2월 29일


원수가 제독 유정을 보러 가서

"사졸이 굶주리고 군량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앞으로 진전하기만 하면 크게 낭패할 것입니다" 라고 힘써 말했다. 


제독이 

"작전 기한이 이미 정해져서 잠시 주둔하는 것도 불가하지만 

원수의 체면을 보아 하루만 머물겠다" 라고 했다.


원수가 역관을 보내 쌀 열 자루를 교 유격에게서 빌려 우영에 지급했다.






1619년 3월 1일  


아침에 군량이 비로소 도착하여 우영에 나누어주었다.


[우리 군이 강을 건너고 지금 10여 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연영장 이찬의 보급 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기에 

운송을 독촉하자 비로소 가지고 왔으나, 군량은 겨우 수십여 석이었다.]




분호조의 군관 김준덕 金峻德이 비로소 나타났다.


군량이 도착했는지 물으니 

"오래지 않아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원수에게 

"전군이 먹지 못한 지가 지금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군량을 관리하는 군관이 뒤늦게 나타나서는 '마땅히 도착할 것'이라며

속이는 짓이 이와 같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참수한 후 각 군영에 머리를 돌려 굶주린 군졸의 마음을 위로하십시오" 

라고 했다. 


원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지금은 일단 용서할 것이니, 속히 돌아가 군량을 운반해오라"하고 타일렀다.


[나는 분호조참판 윤수겸에게 편지를 보냈다.

"삼가 편지를 받으니 매우 위로가 됩니다.

외로운 군대(懸軍)가 깊숙이 들어온 것이 이미 300여 리인데,

적병이 나타나지 않으니 유인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아니면 서로西路의 대병 大兵이 바로 적의 소굴을 공격하여 

적군이 모든 병사를 데리고 막느라 동로東路로 올 여유가 없는 것일까 합니다.

다만 아군은 강을 건넌 후에 명나라 장수가 행군을 재촉하기가 성화와 같습니다.

그러나 보급 부대는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운반한 군량은 겨우 수십여 석이라,

전군이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지금 이미 여러 날입니다.

자고로 굶주린 군졸을 재촉하여 갖은 고생을 다하며 겨우겨우 행군한다면,

적중으로 깊이 들어간다 해도 그 뒷일을 잘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차례 제독에게 군량을 기다리자 청했지만,

곧장 지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냐고 말하니,

전군의 상황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다 늙은 서생이 전장의 시체가 되는 것은 운명이니 어쩌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이번 출정이 잘못되면 변경의 근심이 끝이 없을 것이니,

모르겠지만 형께서도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염려하고 계시겠지요?

군관으로 하여금 이곳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게 하여 보냈으니 반드시 사실대로 아뢸 것입니다.

바라건대 부디 군량 수송을 최대한 재촉하여 

굶주린 군졸을 구제해주신다면 천만다행하겠습니다."]




     p 043 ~ 049

        1619년 2월 19일 ~ 3월 2일

           2. 압록강을 건너 심하까지의 고달픈 행군

              <책중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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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5월 28일


통사 하서국과 황연해, 오랑캐 차사 소농이가 돌아왔다. 

우리 국왕(광해군)이 누르하치에게 전한 말을 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보내온 서신은 말이 극히 유순하여 후의를 볼 수 있으니 

진실로 회답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자가 요동으로 달아나서 

'조선은 막 건주와 서로 통하여 소금, 쌀, 소를 수송한다'

고 말했으므로 요동에서 사람을 보내 힐책하며, 

심지어 명나라 관원이 강변을 순시하기까지 한다. 

지금 만약 회답하다가 도중에 발각되면 반드시 대사를 그르치게 될 터이니, 

이런 뜻을 자세히 전하는 것이 좋겠다. 

녹봉을 만포로 옮겨 지급하는 것은 본래 어렵지 않으나, 

요동에서 힐책하는 때라 극히 난처하다.

먹을 것을 청하면서 때때로 왕래하는 것은 좋지만, 

많은 녹봉을 옮기는 것은 도리어 내통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금년에는 이미 함경도로 보냈으니 우선 회령에서 받는 것이 마땅하겠다. 


두 나라는 전부터 원수진 것이 없으니 이렇게 서로 화친하는 것은 

한두 장수가 잡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장수들이 있고 없는 것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에 불과하니, 

죽이든 돌려보내든 오직 그쪽의 뜻에 달렸을 따름이다. 


근래 도망한 여진족 남녀 약간 명이 우리나라에 투항해 왔으나, 

서로 후대하는 처지에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함께 보낸다."



누르하치가 재삼 묻고 크게 기뻐 하며 말하기를, 

"도망한 여진족은 마땅히 목을 베어 죽여야 하나, 

조선에서 심지어 쌀과 소금을 주면서까지 살리려 했는데 

내가 곧장 그들을 죽인다면 그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죽이지 말고 그 주인에게 돌려주되, 

다만 그 주인들에게는 혹독하게 부린 죄를 물어 다스리라"

라고 했다 한다.




     p 110, 111

        1620년 4월 24일 ~ 7월 17일

           8. 외교의 진전과 귀환

              <책중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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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6월 20일


누르하치와 여러 장수들이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회의했다.

귀영가와 사가 말하기를,

"조선이 실로 명나라를 두려워하여 답서를 보내지 못하지만,

도망친 여진족을 잡아 돌려보냈으니 성실하고 신의가 있어 의심할 것이 없다.

저들의 장수들을 가두어 두는 것도 무익하고, 살해하는 것도 무익하니,

모두 돌려보내 신의를 보여 주는 것이 낫겠다"라고 했다.

홍타이지 등은 말하기를, 

"조선에서 끝내 답서를 보내지 않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비록 도망친 여진족을 잡아서 돌려보낸 신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장수들을 모두 보낼 수는 없다.

지금 우선 하급 장수 몇몇을 보내고 나서 회보를 

기다려 본 다음 전부 보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한다.



1620년 7월 4일


누르하치가 언가리와 대해를 수용소에 보내 말하기를

"귀국에서는 비록 답서를 하지 않았으나, 나는 국서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그 국서를 내보였다.


[국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도망간 여진족을 돌려보내준 것은 대국 大國(조선을 지칭)의 처분이 참으로 공정하니,

후의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장수 3인과 종 7인을 돌려보내겠다. 운운."]



원수가 묻기를,

"지금 두 나라 사이에 신의의 약속이 이미 정해졌는데,

또다시 우리를 잡아 두는 것이 무슨 이익이 되는가?" 라고 했다.

언가리가 답하기를 

"장수들을 모두 다 돌려보내지 않는 것을 불평하지 마라.

지금 이미 길이 열렸으니 오래지 않아 마땅히 모두 돌려보낼 것이다"라고 했다.



대해 등이 드디어 다섯 개의 목판(木牌)에 각기 우리 장수 다섯 명의 이름을 쓰고,

오랑캐 군졸을 시켜 그 목판들을 손으로 잡아 머리에 이고 

하늘에 기도한 후 목판 세 개를 뽑았는데,

나와 정주목사 문희성 그리고 순천군수 이일원의 성명이었다.

대해가 언가리를 돌아보며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했다.


[대개 오랑캐들은 문희성이 벼슬이 높고 나는 문관이기 때문에 내보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비뽑기가 이와 같으니 대해 등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언가리 등이 우리에게 "이제 돌아가게 되니 기쁜가?"하고 물었다.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는 강화하는 일 때문에 오래 잡혀 있었는데, 

이제 화친의 약속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두 원수를 구류하고 

단지 우리만 돌려보내니 어찌 족히 기뻐하겠는가"라고 답했다.


[언가리가 누르하치의 말을 소농이에게 전하기를,

"조선 장수 셋과 군관 넷, 통사 하나는 걸어서 갈 수 없으니,

가는 길에 말을 주며 역참을 지날 때마다 바꾸어 타게 하라.

너는 모름지기 공손하게 행차를 호위해야 할 것이다. 운운" 했다.]






1620년 7월 17일


50리를 가서 황성 皇城(集安)을 지나고, 압록강을 건너 만포에 도착했다.


[당초에 포로로 잡힌 군졸이 거의 4,000여 명이었는데,

두 차례에 걸쳐 살육된 사람이 500 ~ 600 명이나 되었다.

지금 들으니, 전후로 도망쳐 돌아간 자가 2,700여 명이라고 한다.

도망쳐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지나온 산과 계곡에 굶어 죽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p 113 ~ 116

        1620년 4월 24일 ~ 7월 17일

           8. 외교의 진전과 귀환

              <책중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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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의 정예화


셋째, 군사를 정예하게 택하는 일이다. 

듣건대 "군사는 정예한 데 힘쓸뿐, 많은 데 힘쓰지 않는다”라고 했다. 

군사가 정예하지 않으면 많을수록 더욱 폐단이 생긴다. 

옛날에 진실로 적은 군사를 가지고 많은 적을 격파한 사례가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정예하면 용맹해지고, 

쓸모없는 군사는비겁해져서 그 차이가 현격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군사 제도는 본래 직업 군사가 아니라 

농민을 모집하여 전장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근래는 군역의 고통 때문에 열 집에 아홉 집이 파산하는 지경이다. 

이 때문에 백방으로 빠지기를 도모한다. 

양반 노예, 아전, 생도 生徒, 장인 匠人, 역졸 등등 

각종 명색을 들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데, 

이것이 모두 군역을 기피하는 구실이다. 

한 속오법 束伍法으로 공노비公奴婢와 사노비私奴婢를 막론하고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신역身役을 지워서 수탈이 극심하니, 대부분 파산한다. 

이 때문에 부유하고 건실한 장정은 갖은 수단으로 군역을 면탈하고, 

힘없는 사람들로 구차히 수만 채우니 실로 쓸모가 없다.



이렇게 되자 널리 무과 武科를 시행하여 뽑으니, 

그 수는 지나치게 많지만 모두가 약하고 무능한자들이며, 

씩씩하고 건장하며 무예를 갖춘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 지금까지 무과에 급제한 사람은 수만명도 더 되지만, 

벼슬길로 나아갈 희망은 거의 없고 

변방에서 방어해야 하는 고역 苦役만 있으니, 

비록 재능 있는 용사라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오지 않는다.



법규가 느슨해지자, 

혼잡하여 진위를 식별할 수 없는 간사한 무리가 

요행을 바라고 전혀 활을 쏠 줄도 모르면서 

남에게 대신 쏘게 하여 무과에 급제하고 있다.

이러한 무리를 가지고 적을 막게 한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군대에서는 용사를 뽑지 않으면 패배 한다고 했다. 

내가 실제 전투에서그 폐단을 보았으므로 

더욱 정예한 군사를 선발해야 하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병법 兵法에서는 

"큰 상을 내리면 반드시 사력을 다하는 군사가 나온다" 라고 했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변경 방어에 나가지 않으면 

평생 안락과 현달을 이룰 수 없고, 

죽어서는 처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면, 

반드시 군대에 다투어 들어가려고 할 것이다. 

전국에 명을 내려 사족士族이나 공노비, 사노비 , 잡류难類를 

따지지 말고 건장하고 무예에 재능있는 자들을 정밀하게 선발하고, 

부역이나 조세를 일체 부담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 처자식의 생계를 안정시켜야 한다. 

변방에 투입한 후에는 

복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따뜻하고 배부르게 하며, 

절대로 졸병이 하는 일을 시키지 말고, 

날마다 말을 타고 전투하는 훈련을 할 일이다.



방어에 투입한 지 몇 달이 지나면 품계를 올려 주거나, 

노비 신분을 벗어나게 해 주거나 

또는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도록 한다. 

그 방어한 달수를 계산하되 규정을 명확히 하고 

남발하거나 거짓이 없게 하고, 

번을 나누어 차례차례 변경 방어에 투입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매년 변방을 방어하여 승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 주고,

6품에 이르면 병조 兵曹에서 그 재능을 보아 능력에 따라 

내직으로는 시위 侍衛나 장사將士, 

외직으로는 변쟁邊將이나 변방 수령에 임용토록 해야 할 것이다. 

무관의 벼슬길을 이렇게 열어준다면, 사람들이 어찌 즐겨 지원하지 않겠는가!



그 사이에 혹시 재능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충원된 사람이 있다면, 

선발한 관원을 엄중히 조사하여 면제받은 조세와 부역을 추징하고, 

그 품계를 삭탈하여 변방으로 보내 방어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무능하고 쓸데없는 무리를 

구차히 충당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를 전국에서 선발한다면, 

비록 극히 엄밀하게 선발하더라도 

그 수가 수만명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충분히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날의 무과 출신이나 속오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나라 어양 漁陽의 돌기군 突騎軍이나 

당나라 위박 魏博의 아병 牙兵은 천하무적의 군대였지만, 

 수효가 많았는가? 

옛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양성하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라고 했으니, 

용감하고 정예한 군사를 뽑아 변방을 방어케 한다면 천만다행이겠다.



...



변방 군사 육성


넷째, 변방의 군사들을 우대하는 일이다.

변방의 요새는 추외가 혹심하고 바람이 강하여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습성이 사납고 용감하다.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일상사다.

내지에서 투입된 군졸들은 

그 풍토를 견디지 못하고 그 지형도 익히지 못하므로,

그 열 명이 토병 土兵(현지 군인)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나는 을사년(1605)에 압록강변을 순찰하면서 의주에서 강계까지 다녔는데, 

토병들이 늙고 약한 자를 포함하여 모두 3,000여 명 있었다.

무오년(1618) 겨울 변방에서 들어보니,

토병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도망하여 을사년에 비교하면 3분의 1이 줄었다.

지난해 심하에서 패전했을 때 토병 중에 죽은 사람이 400~500명이나 되었으니,

건장한 군사로서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군사로 징발한 후에도 그들을 헤아릴 수 없이 수탈했으며,

하물며 그만둘 수 있는 것도 면제해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흩어져 도망해버려 이제 변방은 텅 비게 되었다.



이제 마땅히 평안도 변방의 여러 고을에서 받는 

조세나 부역은 감영 監營과 병영 兵營에서 받는 것이거나 

여러 진 鎭과 고을에서 받는 것이거나 

일체 감면해 주어야 한다.

수령과 변장으로 하여금 무예를 조련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일 외에 

'가혹하게 수탈하는 일(苛斂誅求)'에는 일절 간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변방의 백성들이 아마도 살아갈 희망이 있을 것이고,

내지에서 조세와 부역을 힘겨워하는 

백성들이 다투어 변방으로 이사를 가려고 할 것이다.






기의 정예화


다섯째, 무기를 정밀하게 제조하는 일이다. 

근래에 무기 제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러 고을에 월과 月課의 법규가 있고 무기 조달에 상을 주는 법도 있지만, 

모두가 유명무실할 뿐이다. 

갑주 甲冑는 견고하지도 않고 정밀하지도 않아 

무겁기만 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활과 화살, 칼과 창은 비뚤어지고 약하며 

무디고 닳아서 쏘거나 찌르는 데 적합하지 않다. 

포와 총은 네다섯 번 발사하고 나면 헐어서 깨져버리고 만다. 

기타 여러 무기도 모두 쓸 만하지 않다. 

전쟁터에서 직접 내눈으로보지 않았다면 

무기들이 어찌 이렇게 심각한 상태인 줄을 알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무기가 완벽하고 예리하지 않으면 빈손이나 마찬가지요, 

갑옷이 견고하고 치밀하지 않으면 웃통을 벗은 것과 같다" 라고 했으니, 

이는 무기가 예리하지 않으면 군졸들을 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내가 일찍이 《북사北史》를 읽었는데

"화살이 갑주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활 만든 사람을 베어 죽이고,

능히 뚫고 들어가면 갑주 만든 사람을 베어 죽인다.

이 때문에 무기가 정밀하고 예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랑캐 도적들은 무기를 군졸 각자가 준비하는데, 

누르하치가 직접 점검하여 불량한 경우에는 처형하기도 한다고 하니, 

이는 그들의 습속이 본래 그러했다.



적을 막고 변방을 지키는 무기가 이와 같이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어찌 큰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지금 의당 시급히 고쳐 만들어서 전투에 제대로 사용하도록 하면 천만다행이겠다.




무예 장려


여섯째, 무예를 연마하여 익히는 일이다. 

내가 보건대, 오랑캐의 장거리 무기는 활과 화살에 불과한데, 

가죽 활시위와 나무 화살은 60~70보밖에 날아가지 못한다. 

철갑을 입은 기병이 달려들어 충돌하고 짓뭉개면 충분히 궤멸할 수 있다.

(만일 강인한 활과 예리한 화살촉으로 

100보 밖에서 제어한다면 예봉을 꺾을 수 있다.)



조총은 지극히 좋은 장거리 무기지만, 장전하고 발사하는 것이 너무 더디다.

만약 성에 의지하거나 험한 지형에 의거하지 않는다면 손쓰기 어려올 것이고,

평원이나 쉬운 지형에서는 결코 승패를 다툴 수 있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 

비록 왜적이 총을 잘 쏜다고 하지만 

직산 전투에서 해종병 解摠兵이 철갑 기병으로 적을 유린했으니, 

이것이 그 증거다 작년에 우리 군은 오로지 포수 砲手를 믿었으나, 

적병과 충돌했을 때 두 번째 장전을 하기도 

전에 랑캐 기병이 이미 진중에 돌격해 들어왔다.

적의 갑주는 매우 견고하고 치밀하여 강한 활이 아니면 

아마도 100보 밖에서는 관통할 수 없을 것이고, 

만일 가까운 데 이른다면 상황을 막을 수 없다.



내가 일찍이 송나라 장수 오린 吳璘의 전기를 보니,

(병사들이) 앞줄에서는 긴 창을 지닌 채 무릎을 꿇고 기다리며,

뒷줄에서는 강한 활과 쇠뇌를 지니고 차례로 배열해 있었다. 

적이 100보 밖에 이르면 서로 연달아 쏘는데, 

화살이 메뚜기같이 날아가 적을 당도할 수 없게 만들어 

사천 四川의 촉 蜀지방이 완전히 보전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여진을 제어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지금 사수의 훈련은 반드시 120보에서 

철제 과녁을 꿰뚫는 것으로 규정을 정해야 한다. 

또한 적은 편전片箭을 가장 두려워하니 멀리 도달하여 갑옷을 뚫기 때문이다. 

내가 진중에서 무인武人들을 보니 다수가 

갑주와 두구를 견디지 못하고 좌우에서 지탱해주어야 하니 

자못 움직이기는 비록 갑주가 불편해서라고 하나, 

사실은 날마다 연습하지 않은 소치다. 

지금 이후부터 무인을 뽑는 시험에서 

활을 쏘거나 말을 탈 때 반드시 갑주를 갖추고 행하게 한다면, 

평소에 연습했다가 전투에 임해 용맹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천만다행이겠다.



이상의 여섯 조목은 본래 기묘한 꾀나 특이한 계책이 아니며,

또한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착실히 준비하여 거행할 수 있다면 족히 적을 막을 수 있다.




     p 136 ~ 142

        <건주문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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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평양에 도착하니 박 순찰사(박엽)가 군관을 보내 위로하여 말하기를, 

“가족들을 가둔 일은 본래 내 뜻이 아니었다" 운운했다. 

그 후에 의 당초 장계를 얻어서 보고 소문을 참조해 보니 

말과 논조가 기괴하고 변화무쌍하며 현란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도장하는 날 원수가 조정에 장계로 품의 했고, 

이찬을 차출하여 연영장連營將(보급 부대장)으로 삼아 

마부 5000명을 거느리고 순찰사와 분호조의 지휘에 따라 

그로 하여금 군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게 했다. 

그러나 순찰사는 여러 번 독촉해도 오지 않았다.

[지금 들으니 3월 초3일에 비로소 창성에 도착했다고 한다] 


삼군이 압록강을 건넌 처음부터 패전할 때까지 

15일간 병참을 맡은 군대는 끝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군량으로 도착한 것은 수십 석뿐이었다. 

그리하여 재촉하는 공문을 보낸 것이 길에 연달았다. 

나는 분호조의 군관 김준덕을 참수하여 

각 영에 효시해 굶주린 군졸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고, 

또한 분호조에도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절실했다. 

후에 나를 모함하는 사단이 오로지 여기에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들으니, 조정에서 순찰사에게 하유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3월 5일 국왕의 유지 有旨에는

"두 원수가 강을 건너면 강변 일대에 지휘관이 없게 되니,

경 卿(박엽)은 창성에 들어가 병참 지원과 방비에 충실할 것을 지시한다.

공문이 여러 차례 왕래했으나,

전월 19일에 원수가 이미 강을 건넜는데 

29일까지도 아직 평양에 있으면서 

위급한 국난에 나설 뜻이 없다"

라는 내용이 있었다.




     p 147, 148

        <월강후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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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한명기 저
산성일기
김광순 역
책중일록
이민환 저/중세사료강독회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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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 2017.12.0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