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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덴탈리즘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
"옥시덴탈리즘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 내용보기
지금도 다소 뻔한 글을 쓰지만,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반면, 고등학교에서는 점수를 좋게 받아야 했다는 정도? 교사로부터 '요놈, 기특한데?'라는 반응을 받을 만한 글을 썼다. 알아봤자 고등학생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럼에도 논술의 단골 과제는 환경 오염, 빈부 격차, 종교 갈등 - 이건 그 어떤 A급 사상가가 쓰더라도
"옥시덴탈리즘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 내용보기

지금도 다소 뻔한 글을 쓰지만,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는 반면, 고등학교에서는 점수를 좋게 받아야 했다는 정도? 교사로부터 '요놈, 기특한데?'라는 반응을 받을 만한 글을 썼다. 알아봤자 고등학생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럼에도 논술의 단골 과제는 환경 오염, 빈부 격차, 종교 갈등 - 이건 그 어떤 A급 사상가가 쓰더라도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이라는 디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주제다 - 이었고, 없는 배경 지식 최대한 짜내고 짜내서 1,500자를 채웠다.

 

대충 기억하자면 어떠한 주제든 나는 비슷한 패턴의 글을 썼다. 신문이나 책에서 본 실제 사건을 인용하여 글을 시작. 본론에서 이건 모두 근대성 때문이라고 비판하며 동양적 사유를 대안으로 소개. 결론은 본론을 정리하면서 끝.

 

본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들어갔다. 데카르트 - 이놈은 언제나 내 글에서 원죄로 등장한다 - 가 사유하는 나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주체와 타자는 분리되며 모든 사물이 이분법으로 치환된다. 주체와 객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여성과 남자, 백인과 유색인종, 인간과 자연, 서양과 동양 기타 등등. 반면 동양적 사고는 이와 달랐다. 노장 사상이 뭔지도 몰랐으면서 - 지금도 모르긴 마찬가지다 - 베단타 사상이 수냐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눈치채지 못하면서 동양적 사유는 서양의 이분법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거의 2년 내내 우려먹은 글이었는데, 아무도 거기 담긴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던 걸 보면 당시 국어 샘들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에 그다지 관심 없었나 보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쌍둥이다. 구라파 지식인이 비서구 사회를 바라본 시선이 오리엔탈리즘이라면, 비서구 사회 지식인이 서구 세계를 바라본 시선이 옥시덴탈리즘이다. 둘은 모두 '오해', '편견'이라는 뜻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동일한다. 조금 구체적으로 더 얘기해 보자면 오리엔탈리즘은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써 동양'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냈고, 옥시덴탈리즘은 '물질문명이 정신문명을 압도하는 천박한 세계관'이라는 증명된 적 없는 편견을 내놓았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은 서구와 비서구 관계가 제국과 식민지 관계로 바뀐 제국주의 시대가 남긴 상부구조였다. 따라서 제국이었든 식민지었든, 제국주의 역사를 지나온 모든 사회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피할 수 없다.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 리뷰를 쓰면서 책과 별로 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꺼내는 것은 이 책이 바로 옥시덴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본이 침입하기 두 달 전인 1937년 봄, 난징에서 저자인 팡둥메이가 여덟 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정리하여 쓴 것이다. 중국은 식민지가 된 적이 없지만, 서구 열강과 일본에 국토 전역이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중체서용(조선은 동도서기, 일본은 화혼양재)으로 맞선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진보를 선취한 서양에 대한 박탈감의 표시다.

 

강상중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받아 들여,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동북아를 오리엔탈리즘으로 분석했다. 일본제국-조선은 실제로 서구-식민지 관계와 비슷했다. 아마 일제-중국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왜 팡둥메이가 중국 민족에 중국 전통 사상의 우수함을 역설했는지 알 만하다.

 

책의 본문을 보자.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중국인들은 다수의 인도인들, 특히 불교도들처럼 가치의 결핍으로 현실 세계를 저주하거나 원망하는 민족도 아니고, 서양 중세의 열광적인 교도들처럼 모든 이상적인 가치들을 이 세계로부터 피안의 세계로 변이시키는 민족도 아니다. 중국의 공식 명칭이 된 "중국"이라는 이름은 바로 천지의 중을 받아서 세워졌다는 뜻이다. 중국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몸을 세우고 일체의 가치가 모두 이 천지 사이에 있는 인류의 생명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음을 자각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에는 결코 허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가득 채워진 생명의 미경이 "태화"의 경계이다. 이른바 중국이란, 그 근본적인 뜻은 맹자가 말한 것과 같이 "군자가 지나가는 곳은 감화되고 머무는 곳은 신비롭게 된다. 상하가 천지와 함께 흐르는" 생명 정신의 영역이다. (219쪽)

 


 

 

 

중화제국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는 문장이다. 서구사상뿐만 아니라 인도사상도 부정한다. 실제로 저자는 수당에서부터 송 이전까지의 중국 사상을 부정한다. 송대 신유학이 불교의 심오한 형이상 체계에 대한 반정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팡둥메이의 '외래 것'에 대한 반감은 조금 지나치다고 할 만다.

 

어쨌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중국 사상의 위대함은 생명을 촉진시킨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유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철학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스피노자는 서구 사상에서 주류가 아닌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이 책이 가진 맹점을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라는 책 제목과 본문이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인이라고 했을 때, 보통의 중국 사람을 생각하고 이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사람은 죄다 사상가다. 보통 중국인이 아니다. 물론 상부구조는 일반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18세기 독일인의 사유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적절한 제목은 '중국 사상이 보는 삶의 세계'가 더 적당하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상을 조명하려는 시도도 부족하다)

 

원문이 후주로 충실히 실려 있는 점, 중국 사상을 거시적으로 보기엔 썩 괜찮은 책인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딴지 걸 만한 거리가 꽤 있는 『중국인이 보는 삶의 세계』였다.

 

마지막 구절은 그냥 인상 깊어서 남긴다. '생명'이 중국 사상에 핵심이라는 점은 이해하겠는데, 왠지 도킨슨의 『이기적인 유전자』와 뭐가 다른가 하는 씁쓸함도 남는다. 도킨슨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거대서사로써 너무 밋밋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유가는 하늘이 저한 운명(천명)을 추구함으로써 근본적인 중용의 원리에 따라 본성을 발휘하려고 애썼다. 도가는 도의 원초적인 뿌리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로 모든 만물을 감싸려고 하였다. 묵자는 하늘의 뜻(天志)에 복종함으로써 겸애를 실천하여 생명을 온전히 하려고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정한 운명, 도, 그리고 하늘의 뜻이 모두 보편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생명을 너무도 열렬히 사랑하기 때문에 중국인은 생명의 가치를 지극히 존중하고, 생명에 대하여 언제나 그것이 충분히 발휘되어 궁극적으로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추구한다. (136쪽) 

 


 

 



YES마니아 : 플래티넘 l****i 2011.12.2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