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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한국 영화계의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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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에 강한섭의 영화 이야기라는 책을 집어들고 하룻밤 만에 읽은 기억이 있다. 어렵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명쾌하게 단호하게 설득하는 문체와 각각의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흥미롭게 읽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강한섭의 책을 10년도 더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국의 영화학을 만들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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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에 강한섭의 영화 이야기라는 책을 집어들고 하룻밤 만에 읽은 기억이 있다. 어렵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명쾌하게 단호하게 설득하는 문체와 각각의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흥미롭게 읽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강한섭의 책을 10년도 더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한국의 영화학을 만들어라'는 책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이 책은 오늘 날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철학,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을 비롯한 다양한 인접 학문을 인용, 언급하며 그 동안 영화, 아니 세상을 보는 저자의 시각이 깊이와 너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문화진화론자라고 언급하며 기본적으로 정책에 의해서 영화를 진흥하다는 정치논리를 '문화 산업의 정부 주도에 의한 계획경제'라고 비웃고 있다. 그리고, 서유럽 예술영화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를 지적하며, 예술영화란 '서유럽이 아니라 1950년대 말이라는 특정한 시대와 미국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고유명사'임을 주장한다. 최근 관객 천만 시대를 맞이하여 들떠 있는 한국의 영화판에 대해서도 오히려 전체적인 시장규모는 작아졌으며, 한국 영화가 붐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2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와이드 릴리스 상영방식, 융단폭격식 마케팅, 극장 요금의 덤핑이라는 3대 거품전술'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진단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2005년 한국의 영화계가 위치한 전체적인 지형도와, 산업으로서의 영화가 사회 속에서 차지하는 현황과 전망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책을 읽고 몇 가지 든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의 영화학을 만들어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한국의 영화학의 실체가 책을 덮은 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저자는 서양영화사 중심의 대학의 커리큘럼과 '예술영화=유럽 영화= 롱테이크= 좋은 영화'의 등식을 '가치 평가의 식민화'라고 비웃으며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건강한 문화 자주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동양 사상과 모바일 카메라폰의 관련'속에서 그 미학을 찾고 있을 뿐이다. 완벽한 틀은 아니더라도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의 영화학의 틀을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둘째, 한국 영화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분석이 같이 이루어 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더라면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의 영화학에 대한 내용이 좀 더 내실있고,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와 닿았을 것이다. 저자가 최근에 평론가보다는 학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사고하기 때문일까? 세째, 이 책은 한국의 영화학이라는 주제로 일관성 있게 써 내려간 책이 아니다. 시차를 달리해서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묶고, 몇 편의 글들을 나중에 앞 뒤로 추가하기도 해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이 이 글, 저 글에 반복되기도 하고, 글이 쓰인 시점이 오락가락하여 독자로 하여금 다소 혼란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글이 쓰인 시점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든가, 아니면 논의를 일관성 있게 조금 손을 보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이 읽기에 다소 까다로운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영화판에 이만한 깊이로 영화와 업계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는 영화학자가 있음이 반갑다. 저자의 다음 저서를 기대한다.
YES마니아 : 로얄 k**2 2005.01.2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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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학을 만들어라>(2004, 강한섭)_네 그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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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소개     2000년 3월 문화관광부 장관과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 영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박정희 소장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그대로 빼다 박은 김대중 정부의 이 영상산업 정책은 현실을 무시한 환상이다. 이렇게 한국 영화계에는 국가 계획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  국가 영화 계획 담론은 크게 두 가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영상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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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소개

  

 2000년 3월 문화관광부 장관과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 영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박정희 소장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그대로 빼다 박은 김대중 정부의 이 영상산업 정책은 현실을 무시한 환상이다. 이렇게 한국 영화계에는 국가 계획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

 국가 영화 계획 담론은 크게 두 가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영상산업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가 첫 번째고, ‘한국 영화의 수준은 낮다. 우리도 예술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예술영화 콤플렉스가 두 번째다. 첫 번째 강박관념인 영상산업 강대국론의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이 스크린 쿼터제 사수를 외치던 사람들과 많은 부분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 (자국의 시장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시장의 ‘교환’법칙을 무시하는 정책으로는 강대국을 이룰 수는 없다.) 두 번째 강박관념은 예술영화 콤플렉스다. 예술영화란 상업적인 고려 없이 순수한 창의성을 표현하는 영화가 아니라 서유럽의 일종의 민족영화이며, 할리우드의 코스모몰리턴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 진흥되고 선전되는 산업적 전략의 소산이다. 한국에서는 신파 멜로드라마와 엽기 코미디 영화들도 한국적인 예술영화가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영상산업 강대국론과 예술영화론이 모두 한국인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기인한다. 그리고 그 콤플렉스의 근저에는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방법론으로 기술하지 못하고 서구의 발전주의적 역사주의로 해석하는 부끄러움이 숨어 있다.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은 크게 직선과 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인의 시간관은 원래 원이지만 우리는 역사를 직선의 관점에서만 보기를 원한다. 발전 단계설은 원래 기독교의 시간관이다. 헤브라이즘은 21세기 한국의 국가 영화 계획 담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의 영화학도들이 보는 외국의 책들은 서양의 영화 문제를 철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하고, 서양의 유토피아 개념으로 영화미학을 논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우리의 청년들이 서구 철학의 범주와 용어들로 영화를 이해하도록 길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영화학도들은 이렇게 처음부터 ‘지금-여기’의 영화 문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칸 영화제가 한국 영화 2편을 경쟁부문에 선정하면 열광하고, 초대장이 안 오면 한국 영화의 예술적 질이 떨어졌다고 자학한다. 그러나 칸은 영화 예술의 심판자가 아니다. ‘예술영화’는 원칙적으로 보통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다. 미국에 서부극이 있다면, 일본은 사무라이 영화다. 같은 맥락에서 서유럽의 민족영화(national cinema)로서 예술영화가 있는 것이다. ‘지금-여기’의 세상을 ‘경험’하고 ‘추측’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이 세상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방법이다.

 동양 사상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소박하고 겸손한 생활의 자세를 요구하는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립된 개체로서의 ‘실체’(substance)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실험과학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때문에 애당초 동양은 자연을 분석적으로 설명하여 정복하려는 계획이 없었으며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목표였다. 결국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영화라는 기계 장치를 만들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에 반해 서양 사상은 해양 문화로서 해상 교역을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형식논리와 실험과학이 발달했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는 근대 서구의 주인인 절대적 개인이 세상을 보고 소유하며, 그리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계 장치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고 이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서양이 산업생산력에서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서양의 동양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그 오랜 세월의 무게 안에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유럽의 철학과 미학이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영화학’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구 영화미학의 두 가지 종파인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의 허구와 특수성을 폭로하는 작업이 급선무다.)


 영화라는 문화상품의 중요성은 그 시장의 크기에 있는 게 아니라 한 국가가 자국의 국가 정체성을 이미지로 시각화 하고 이야기로 재구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자원을 동원할 수 있고 그것을 운용하는 효과적인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한다는 데 있다.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의 퇴보와 주체적 영화담론의 부재는 잘못된 영화 정책 때문만은 아니라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단단하게 입력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떠한 특성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해 보게 된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비춰진 조선의 국가 이미지에서 보듯이 우리는 국제 문제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가장 이상적인 유교적 도덕과 윤리를 논하며 평화를 추구했던 순박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전략적 사고라는 것이 부족하다. 그러나 영화산업의 강대국들은 저마다 영화산업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체계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꿈꾸며 바다를 건넌 개척민들이 이룩한 땅이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기본적으로 ‘관객이 원하는 것을 준다’라는 자유주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 인구 분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서부의 보수적인 백인 중산층이 선호하는 이야기 장르와 스타일을 선택하게 되었고, 다시 세계의 가장 많은 인구층이 즐겨 하는 영화의 공통분모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장르적으로는 정의를 추구하는 액션 스펙터클 영화와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드라마 영화를 전략적으로 채택하고, 이를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생산 시스템으로 수직 통합의 구조를 가지는 거대 스튜디오 시스템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는 ‘작가에게 자유를 주어라!’라는 엘리트주의 문화 이데올로기를 채택했으며 그 엘리트 작가들이 만든 영화를 ‘예술영화’로 개념화하여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 칸, 베니스, 그리고 베를린 영화제는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하기 위하여 유럽 예술영화를 마케팅하는 국제적인 이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영화 강대국들의 20세기 영화전략이었다. 한국 역시 할리우드 영화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충무로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유럽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위해 ‘예술영화’도 팍팍 밀어 주고, 일본이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하면서 애니메이션 강국을 꿈꾸는 것은 대한민국 영화계가 가지고 있는 특유한 역동적인 에너지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 전략의 부재 때문이다. 성공적인 전략은 현실을 해석하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영화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화시장을 둘러싼 현실을 해석하는 이론적 틀과 개념적 바탕이 중요하다.


 미국-할리우드는 초대형 스펙터클과 코미디영화를 ‘좋은 영화’ 즉 ‘예술영화’라고 생각한다. 홍콩 영화산업은 중국의 경극과 무협지의 전통을 기반으로 갱 영화와 쿵푸 영화를 특화했다.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전통과 오래된 왕가와 귀족 사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의상극’으로 불리우는 시대극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진 영화 장르로 발전시켰다. 프랑스 누벨바그 작가군 중에서도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영화가 프랑스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표현해서다. 이런 영화들은 ‘바게트 영화’라 불린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전 세계에서 오직 자신들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적 소재와 스타일을 독자적으로 채택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갈고 닦은 결과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비교 우위론에 입각한 실용주의 전략의 승리이며, 문화적으로는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건강한 문화 자주의식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1995년 라스 폰 트리에를 비롯한 덴마크의 몇몇 영화인들이 모여 ‘도그마 95’라는 이름의 전투적인 영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이 선언한 ‘순결한 서약 10계명’은 영화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진실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지만 저자는 이것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한 마케팅 전술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단은 ‘도그마 95’ 선언에 열광했으며 그 선언을 추종하는 영화들까지 만들어졌다. 정작 도그마 선언을 한 덴마크 영화감독들까지 점차 그 계명을 어기고 부인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도그마 선언을 세계적으로도 가장 진지하고 열심히 믿고 따르는 국가 중 하나였다. 여기에는 한국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 중의 하나인 원조와 순수의 콤플렉스가 숨겨져 있다. 한국 영화의 정체성은 오늘날의 한국 영화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내용과 형식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영화를 보는 문화진화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한국 영화담론은 다른 문화 영역에 비해 스스로 질문하고 독자적으로 해답을 찾는 경험을 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영화라는 기계 장치는 한국과 한국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한 말 서양 함대의 함포 사격과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속에서 전해진 이식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적인 형태를 갖춘 독립 국가를 만들고서도 한국 영화담론의 관심은 항상 러시아의 몽타주 영화, 이탈리아의 네오 레알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독일의 오버하우젠 선언, 그리고 뉴욕의 아메리칸 뉴시네마에 있었지 한국 서울 충무로에는 없었다. 즉 우리는 영화를 하는 이유를 ‘지금-여기’에서 구하지 않고 외국 명작 속에서 또는 외국 영화 서적에서 찾았던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映畵, 비출 영, 그림 화)’로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전영(電影, 번개 전, 그림자 영)으로 쓴다. 시네마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키네인(kinein)'으로 움직임을 뜻한다. 유럽인들이 영화를 처음 보고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했다면, 일본인들은 필름에 있는 상을 막에 ‘비추어 드러내다’라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중국말 ‘전영’은 ‘번개의 기로 움직이는 그림자놀이’라는 뜻인데 중국에는 서구에서 영화가 발명되기 무려 500년 전에 불빛을 사용하여 흰 막 위에 상을 비추는 움직이는 그림자놀이가 존재했었다. 중국은 전통적인 중국 예술 개념을 가지고 연극과 영화 그리고 실사영화와 만화영화를 구분하지 않으며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나 사조를 항상 중국의 전통과 역사 속으로 끌어들여 중국화하는 특질을 보여준다. 시네마토그라프를 ‘전영’이라고 부르는 중국인의 사정에는 이런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용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19세기 시네마토그라프가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라였고 그래서 일본 제국이라는 주인이 가르쳐 주는 대로 시네마토그라프를 ‘에이가(영화)’로 쓰고 발음하게 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은 정치와 경제에서 나날이 확고한 위치를 더해가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아니다. 극장 관객 1,000만 시대이지만 아직 시네마토그라프를 한국의 역사와 전통으로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영상의 시대는 새로운 미학 이론을 필요로 한다. 뉴미디어의 전환이 가장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이제는 서구의 것이 아닌 새로운 영상 미학 이론이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다.



* comment


 이 책은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강한섭 교수님이 2000년 전후에 쓰신 글과 논문을 묶은 책이다.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한국의 영화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과 영화의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특히 저자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모바일 영화에서 찾고자 한다.) 이 책의 내용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자체에 대한 파악이나 이론화 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가 궁극적으로 한국의 영화사와 이론화 작업 영역 내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지향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도록 했다. 또한 저자가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서구 콤플렉스’의 인식론적 기원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역시 설득력 있게 다가왔으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우리만의 인식론을 구성하고 영화 장르를 만들고 그것이 ‘예술영화’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 한국의 영화학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영화학을 수립하는 것과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양에 반대하는 관념과 전통을 가진 동양,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로서의 한국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모방하는 영화 형식을 통해 세계화를 시각화하려 하는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형식의 측면도 할리우드의 것을 뛰어넘지 못할뿐더러 내러티브는 오히려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블록버스터가 만들어지는 산업적 측면의 논리와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의 해석적 상호작용 간에 공감대와 가치의 불일치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추구하는 시각적 스펙터클 구현과 민족적 내러티브의 결합을 통해 나는 자꾸만 역사적 피해의식을 보상받고자 하는 한국인의 폐쇄적인 욕망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체적 특성을 우리 식으로 소비하는 방식이며 이것은 외국의 영화시장과 쉽게 교환되거나 공유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적이며 위험하다. 적어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생산과 소비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의 측면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그 근본적인 인식의 출발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의 역사의 궤적은 할리우드의 뒤를 고스란히 쫓고 있다. 그 안에서 독창성을 확립하느냐 평생 아류로 남느냐의 기로에 들어서고 있지만 나는 영화 제작 현장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여론과 학계의 영화담론 형성 노력이 어떻게 얼만큼 수준있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그 속도와 질이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독창성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 뿐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시도 역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영화 시장의 제1 문제점은 시장이 협소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자꾸 해외시장에 나가서 '팔아야' 한다. 한류스타의 얼굴에 기대서 묻어가는 얄팍한 상업주의가 아니라 스펙터클과 내러티브, 완성도로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보편성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은 '잘 만들어진' 영화, 뻔하더라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면 되는 거다. 작품성은 반복과 차이를 구사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얻어질 것이다.

s*****e 2008.12.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