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두렁 옆으로 난 사람 둘이 겨우 드나들 법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솔바람 맞으며 나무 아래 기대어 서면 저 아래 마을에선 밥 짓는 연기가 벌건 저녁노을을 뚫고 하얀 명주실처럼 하늘거리며 올라가고, 구수한 밥 냄새가 그만 놀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려준다. 성석제 작가의 『아름다운 날들』은 우리의 어릴 적 어머니,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추억을 반추하게 한다. 성석제가 표현하고 있는 시골 마을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방학이면 엄마 손을 잡고 들뜬 맘으로 찾아가던 외할머니댁의 그 풍경과 닮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도시의 문명을 슬쩍 비껴선 그 곳에선, 냇가에서 고기 잡고, 비료 포대로 썰매를 탔다. 외할머니가 쥐어준 감자, 고구마를 코찔찔이 동무들과 놀다 지쳐 구워먹기도 했다. 요즘은 TV, 영화, 게임 등의 산업이 발달하여 시골에서의 그런 아날로그적인 놀이문화가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당시엔 해지는 줄 모르고 놀다가 “철수야~”, “영희야~” 하는 할머니,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옷에 묻은 검정과 먼지를 톡톡 털어내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련한 향수가 이 책 속에 모두 담겨있다. 이 책은 마을에서 소문난 부잣집의 장난꾸러기 아이 장원두의 눈으로 60~70년대 변혁기의 시골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엔 그 당시의 놀이, 음식, 풍경이 녹아들어 있다. 그 중에서 원두와 친구인 바보 진용이가 곰을 잡는 방법을 설명하는 구절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타를 잘 치고 외국 팝송을 부르는 기타 리의 등장과 마을 양아치 깡다구와 불미스런 대면, 첫 사랑 명주 누나, 두번 째 사랑 운영과의 어긋나 버린 사랑이야기, 원두의 꼬붕이면서 절친인 한주와 동네 최고 주먹 한주의 형 만주, 동네 바보 진용과 주정뱅이 아버지, 마을의 유지이자 원두가 가장 존경하고 또 어려워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과 죽음. 원두의 성장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질곡진 근현대사가 펼쳐지고, 그 가운데 격랑 속 소시민의 삶의 이야기를 우리들의 오래전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있다. 어릴 적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니던 이발소에 걸린 그림이 기억난다. 한적한 마을의 우물가에서 아낙들이 삼삼오오 빨래를 하고, 뒷산엔 새들이 날아다니던 그 그림. 그 그림 속 마을이 활자가 되어 뛰쳐나온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바로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시대』이다. 성석제의 『아름다운 날들』은 『소년시대』와 이야기 구조와 배경 등이 매우 흡사하다. 굳이 다른 점이라면 미국과 한국이라는 지리적 배경과 『소년시대』에는 약간의 환타지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시간적 배경도 거의 흡사하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시대』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30대 이상 남자들이 공감할 만한, 추억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두 책 모두 독자를 [소년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책이다.
|
|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 부터이다. 고(故) 리영희 교수님의 「반세기의 신화」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이전까지 세계문학류와 기독교서적만을 위주로 읽던 독서생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로 줄곧 사회과학 서적만 찾아 읽었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창피할 정도로 엉망진창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그런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전에는 학과와 기독동아리에서 밝고 유머 있는 사람으로 통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 후로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웃을 일이 없었다. 학과 활동과 동아리 활동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개판인 사회를 살면서 그저 취직걱정 하고 기독 동아리에 가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는 일 따위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대학1학년 때 풍물패를 하며 잠시나마 운동권에 몸담기도 했으나 학기 초 열렸던 대동제에 단대 깃발을 들고 참석한 후로 ‘이런 80년대 운동 방식을 그대로 하다간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었다. 그 큰 노천강당에서 열린 대동제에 참석한 학생수가 20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길로 운동권(?)에서 몸을 뺐다. 그리고 그 때 선배들이 들려주던 얘기와 책 내용이 구태의연했다. 차라리 혼자서 찾아 읽는 편이 나았다.
그런 나를 걱정해 주던 친구 하나가 성석제의 책을 선물해 줬다. 그 책은「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사회과학 서적을 파고들고 나서부터는 문학류의 서적은 손도 대지 않았었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딱딱하고 무거운 예의 사회과학 책들과는 달랐다.
시대의 고민을 혼자서 짊어진 척하며 두껍고 어려운 책들에 코를 박아온 날들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한번 손을 댄 뒤로는 누가 뭐라 그럴 것도 아닌데 ‘맑스니 촘스키니 리영희니 읽다가 소설 읽고 있으면... 누가 보면... 뭐라 할까....’ 혼자 생쑈를 한 것이었다. 누가 상을 준 것도 아닌데 혼자 잘난 맛이었다. 여튼 성석제의 책은 단비 같았다. 이후로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즐겁게 춤을 추다가」읽었다. 성석제 특유의 익살과 위트, 시골에 사는 사촌 형이나 막내 삼촌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이번에 읽은 「아름다운 날들」또한 그랬다. 주인공 원두가 겪는 성장통을 그린 성장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한 눈에 그려지는 시골 동네와 집들, 너른 들녘을 뛰어다니는 시골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실제로 내가 어린 시절 겪었고 보았던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의 경험들이 그대로 중첩되었다.
이전 책들처럼 히죽히죽 거릴 정도의 웃음은 없었지만 남동생이 의경 생활을 해 면회하러 가본 성석제의 고향 상주의 고즈넉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에도 상주는 시였는데 시내 전체에 신호등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인상 깊었었다. 동생 말로는 참 조용하고 범죄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고장이라 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기타리는 내 시골 할아버지 댁에 큰 전축을 틀어 놓고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맞춰 춤을 가르쳐 주던 막내 삼촌 같고, 동네 바보 진용이는 할아버지 동네 산 밑 감나무 집에 살았던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형 같다. 그도 진용이처럼 나와 친구들보다 두세 살 위였으나 약간 모자란 탓에 늘 우리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물놀이 가고 미꾸라지 잡으러 가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 밤 주워 먹고 겨울이며 썰매 타던 추억을 함께 한 형이었다. 융통성 없는 당숙 어른은 할아버지 동네 이장님이었던 큰 아버지 같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정겨웠다. 지금은 모습이 많이 바뀐 할아버지 댁과 그 동네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설 속 진용이가 축산업으로 큰 부자가 되어 고향땅에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 속 그들도 그들의 곳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 속 내용들이 작가 성석제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과거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날들을 추억하게 해주어 고마웠다.
“원두는 고민과 고민의 새끼와 손자와 증손자를 데리고 결국은 기타리를 찾아갔습니다.” (p.62)
오후 내내 물놀이를 하고 난 뒤 시골집에 뛰어 들어가면 금세 부엌에서 고슬고슬 맛난 비빔밤을 해주시고, 뒷산으로 저 멀리 개울로 데리고 다니시며 나무이름, 풀이름, 고기 이름 가르쳐 주시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추시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기타리’, 내 막내삼촌이 서럽도록 그립다.
|
|
성장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설이다. 그러나 원두의 시간을 함께 할수록 이건 청소년을 위한 성장 소설이 아니었다. 이미 거뭇거뭇 수염이 나고 이 시절을 다 보내버린 진용이같은 사람의 추억을 함께 해주는 성장 소설이었다.
스스로 대견할 정도로 의젓한 모습과 훌륭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원두처럼. 나도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말들과 행동. 생각들이지만 그 때는 그게 세상의 다인줄로만 알았었다.
6살 때던가 7살 때던가. 이리저리 도로가 나 있는 미로같은 인천의 거리를 큰 마음 먹고 내 영역을 넘어 여행하는 도전을 감행했던 기억이 난다. 집과 한걸음 두걸음 멀어질수록 그대로 되짚어 돌아가기만 하면 되라고 위안삼으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은 더욱 쿵쾅거렸고 막연한 두려움을 애써 씻어내며 조금 더 가다가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새로운 광경을 보고 돌아섰었다.
진용이처럼 수염이 거뭇거뭇 날 때쯤 돌아본 그 곳은 그 때의 내가 한심하리만치 짧고 작은 곳이었고 그나마도 기억과 다른 곳이었다..
아이의 공간은 어른의 그것과 다르지만. 그 공간을 거쳐 왔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일게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며 그 행동을 못견디게 귀여워 하는 것일게다. 원두의 이상한 행동과 생각들이 때로 미련스럽게 보이다가도, 못된 악동처럼 보이다가도 어쩔 수 없이 원두와 함께 수박을 서리하고, 바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고, 장난을 치고 때로 어른들의 작당이 싫어 바른 소리도 하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이유가 바로 먼 기억속의 그 한 때를 담아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
|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다. 절제되고,따뜻하고,황당한 유머.성석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가득 담겨 있는 소설이다.읽으면서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성석제의 단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을 읽으면서도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하지만 그냥 웃고 넘어 가기에는 무거운 주제와 소재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한 소년의 성장기가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져 깔끔하게 전개된다. 나의 어린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 사소한 일 들이 하나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심각하면서도 즐겁고,때론 슬프고.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떤날은 행복하고, 또 어떤날은 슬프고,우울하고,걱정되고,무섭고,재미있고,허전하고,모자라고,가슴 아프고. 항상이 아닌 때때로.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불행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도 화이팅. |
|
6,70년대의 전형적인 농촌다운 확고한 질서와 실용의 세계에서 살았던 주인공 원두. 마을에서 이름 높은 할아버지를 두었고 마을에서 가장 똑똑한 초등학생이었던 원두는 여러 사람을 만난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기타 리와 그의 어머니, 원두와는 반대로 바보취급을 받던 말더듬이 진용이, 선견지명이 있었던 할아버지 친구 유봉어르신, 꼬봉 한주, 미래의 색시로 점찍어 놓은 명주누나,새침한 여우 운용이...
지금 원두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 알 수 없었던 말들을 조금씩 곱씹으며 추억한다.
2007/03/05 15:01
|
|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다.
절제되고,따뜻하고,황당한 유머.성석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 가득 담겨 있는 소설이다.읽으면서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성석제의 단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을 읽으면서도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하지만 그냥 웃고 넘어 가기에는 무거운 이야기와 소재가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한 소년의 성장기가 주변 인물들과 어우러져 깔끔하게 전개된다.
나의 어린시절을 되돌아 보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 사소한 일 들이 하나의 혁명이 아니었을까. 심각하면서도 즐겁고,때론 슬프고.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어떤날은 행복하고, 또 어떤날은 슬프고,우울하고,걱정되고,무섭고,재미있고,허전하고,모자라고,가슴 아프고. 항상이 아닌 때때로.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불행한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도 화이팅. [인상깊은구절] 학교를 한 해 빨리 들어가서 중학생은 중학생이야.그리고 우리 이모가 교복가게를 하거든. 집에 있는 게 교복밖에 없어서 집에서도 교복을 입는대. 잠잘 때도 교복 입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