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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정신사는 '아니다' 라고 말한 사람들, 오서독스(정론)와 맞붙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씩씩하게 패러독스(이론)을 부르짖는 사람들, 모듬살이가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승인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사상의 광야로 나서는 사람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호전되어 왔다.
작가 겸 번역가 '이윤기'가 <문화칼럼>이라는 제목으로 잡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이다. 회색분자이지만 앞서가는 사람으로서 이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픽션보다는 넌픽션류를 즐겨 읽는다. 남의 생각을 읽는것이 무엇이 좋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 넓지 않은 내 경험 및 행동 반경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기 위한 대안이었던것 같다. 글을 통한 대리경험. 소설이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이다. 그렇다면 넌픽션은 진실일까? 정확히 말하면 한 부분만을 드러낸 주관적인 진실인것 같다. 작가들이 부럽다.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고, 그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고작 그 글을 통해서 내 생각을 확인할 뿐이다. 그나마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글로 만날 수 있는건 큰 행운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세화'가 있다는 것이, '이윤기'가 있다는 것이 내게는 다행인것 같다.
'이윤기'와 '필립 얀시'의 책들을 몇권 더 주문했다. 올해 연말은 그래서 행복할것 같다. |
| 세상에는 지 어미를 잃고 사는 것들이 꽤 많다. 간단히 말하자면 샌드위치나 박카스, 옴파로스 등속이다. 이제 이것들은 먹거리, 자양강장제, 의류명으로만 전달되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무식한 나를 탓할 일이기도 하겠지만, 가끔 지 어미는 사라지고 엉뚱한 부산물만 덩그러니 살아 남은 것 같을 때도 있다. 사과가 열리려면 사과 나무가 있어야 한다. 사과 나무에는 사과가 달릴 가지가 있어야 하고, 그 가지들을 이어주는 줄기가 있어야 하고, 그 줄기를 한데 받칠 것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지탱해 줄 뿌리가 있어야 한다.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것들도 필요하다. 그뿐일까. 태양과 달, 하늘과 땅, 바람과 구름과 비, 모든 것이 필요하다. 사과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온세계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달랑 사과 하나만을 바라본다.그 사과가 있기까지의 모든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사과를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온세계를 생각해야만 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의 생각에 동조하거나, 고개 갸웃하는 시간 보다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언젠가 종로 3가의 한 카페에서 이철수 판화와 함께 쓰여진 문구를 읽었다. '쓴 차 한 잔이 저 혼자 식었다, 그도 마음!'(느낌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에게는 참 아득해지는 경험이었다. 이 책도 사람을 참 아득하게 만든다. 소설도 아닌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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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꽤 신세대를 이해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신세대들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느낌 따로 생각 따로였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어른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신세대를 이해하는 척 했지만 실상은 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은 외국문화에 대하여 상당히 배타적인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낯선 것을 참 두려워하며 낯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에 대해 쉽게 수긍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다가 내 속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 이 작가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의 청소년들에 대한 열린 시각,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진 미국에 대한 진정한 이해-그것은 일방적인 친미의식이나 무조건적인 반미의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정, 나는 이 책을 통해 정말 모르고 있었던 내 속의 자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내 의식 세계가 꽤나 고급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그게 여지없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촌스럽다고 했다. 난 정말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당장 내가 촌스러움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정신적 촌스러움에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쳐서 느낄 수 있는 기회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세상과 사람과 문화에 대해 남보다 넓은 안목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래서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쳐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가끔은 자신보다 훨씬 똑똑하고 진실한 사람들의 글과 생각을 만나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적어도 자신이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는. [인상깊은구절]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들의 체형은 우리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서양형이라서 뼈대가 굵고 다리가 유난히 길다. 더 이상 민속촌 세대의 체형이 아니다. 몸피가 커진 이들의 식성과 식량의 질과 양에도 주의를 기울여볼 만하다. 구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신세대의 낭비벽을 한탄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들의 몸피는 자장면 한 그릇, 막걸리 한 사발로 유지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먹을 거리에다 돈을 쓰는 것을 두고 낭비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들에게 새로운 음식 문화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뼈대가 굵고 다리가 긴 이들의 앉음새가 구세대의 앉음새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책상다리를 하고는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이들에게, 앉음새에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나무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이들에게 새로운 앉음새 문화를 마련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새세대에게 새 문화를 마련해주지도 않고 대뜸 나무라기부터 하는 짓거리야말로 민속촌에나 처넣어야 할 촌스러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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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는 소설가 이윤기님의 문화비평서이다. 이윤기님의 글은 한마디로 유익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의 글은 재미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뭔가를 배워가는 듯한 뿌듯함을 준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심코 지나쳤을 혹은 오해하거나 왜곡되게 생각하고 있었들 싶은 일상속의 우리네 문화에 대한 친절한 비평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이중에 '백인유아이사'라고 하는 말을 풀이하면서 이야기한 내용이 아주 흥미롭다. 옛 중국의 진 나라에 백인이라는 사람과 친구 왕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왕도가 곤경에 빠졌을때 백인이 도와주어 목숨을 건졌는데, 후에 백인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을때 왕도는 구해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구해주지 않아서 결국은 백인이 죽게 되었다. 백인이 죽은 다음 그가 자기를 위해 쓰고 올린 글을 읽고 크게 뉘우쳐 결국 자신으로 말미암아 백인이 죽었다고 후회하며 한탄하는 내용이다.
의사, 성직자, 기자등의 실예를 들면서 자신의 역할의 중요성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때 엄청난 불행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어찌 이들 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때때로 자신의 위치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등한시하여 발생하는 과실이 상대방에게는 일생이 걸린 문제가 되거나 죽음으로까지 가게 하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코 반갑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들이라니 씁슬하다.
이윤기님은 고전에서 현대물에 대한 박식한 지식과, 미국을 주로한 오랜 해외 생활의 풍부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인 문화차이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엮었다. 번역가이기도 한 탓에 말과 글에 대한 애착도 남달라 글과 말에 대한 비평도 옥의 티 말의 티라는 장에 묶어 놓았다. 읽는 동안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백인유아이사 - 옛 중국의 진 나라에 백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왕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왕도가 곤경에 빠졌을 때 백인이 변호해 목숨을 건졌다. 그 뒤 백인이 목숨을 잃을 지경에 되었을 때 왕도는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구해줄 마음을 먹지 않았다. 왕도는 뒤에 이렇게 뉘우친다. '아, 내가 백인을 죽인 것을 아니지만, 결국 나로 말미암아 죽었구나.'잎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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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소설가 (이윤기)의 문화기행'이다. 여기저기 연재하던 문화칼럼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었다. 다만 직업상, 관심분야상 말과 글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많다.
깝깝한 일 겪을 때마다 외면하고 잊고자 하는 편이다. 이윤기의 이유있는 불만들은 평소에 내가 가졌던 불만들이라 이 책이 씌여진 2000년 전 몇년전에 비해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속은 좀 후련했다. 글 중에 '개인 거리의 에토스' 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개인거리(사생활)을 무시하는 우리나라 문화를 보여주는 글이다. 이유는 있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상부상조하고 동조하는 성향이 매우 강한 동조문화권이라고 불리운다. 이런 모둠살이의 개개인은, 동아리와 동떨어지는 경험을 지극히 기피하고 동아리 역시 개개인이 중뿔나게 구는 행위를 참지 못한다. 개인도 참지 못하고 동아리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과의 개인거리를 고집하는 사람은 돌림쟁이가 되고 만다.' ... '우리가 농경민으로 살고 있다면 당연히 개인거리 무시하기를 에토스( 공생윤리) 로 승인해야 할 것이다. 중뿔나게 나대지도 말고 눈치껏 동아리의 집단 무의식과 에토스를 따라 흐르면 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이제 더 이상 농업국이 아니다.'
농경사회의 모둠살이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더러 직업상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다보니 그들의 PC( politically correctness) 가 몸에 배서 플러스 날 때부터 참견을 참지 못하는 까칠한 성격도 한몫해서 참 살기 불편하다. 처음 보면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나요? 어디 사세요? 회사는 어디? 고향은요? 등등 호구조사부터 들어가는 것도 어이 없고, 회사에서 살이 좀 찐 것 같으니 운동좀 하라고 회식때마다 얘기하는 윗사람도 껄끄러우며, 미팅 나갔는데, 앉으면서 첫마디가 연봉이 얼마세요 하는 삼성전자 띨빵한 인간도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다. 지하철 탈때도 유난히 붙어서 서 있는 인간들서부터 시작해서 다리 쫙 벌리고 앉는 인간, 신문 쫙펴고 지네집 안 방인냥 보는 인간. 어느 모임 가거나 꼭 있는 패거리들. 남들 하는대로는 다 하고 살아야 한다며 제 나이에(도대체 누가 정한?!) 결혼 해야 한다며 푸쉬하는 부모님, 이미 짜증내며, 화내며 댓거리 하기엔 돌림쟁이가 되는건 둘째치고라도 내가 피곤해서 못하겠고, 그저 외면하고 잊어버리고자 한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이런 식의 불만을 분명 작가도 가지고 있다. 나누어서 쓴 글 여기저기에 몰이해와 무리짓기에 대한 불만이 드러나 있는걸 보면. 언젠가는 작가도 '나비 넥타이'를 거리낌 없이 하고 외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외에는 바른 언어 쓰기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다. 맛갈쓰런 글 재주를 가지고 있는 작가는 분명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처음 보는, 그러나 내용은 와닿는, 아마도 고민이 많았을듯한 단어들을 많이 쓰고 있다. '돌림쟁이' 나 '개인거리' , '앉음새' 등등. 써클을 밀어낸 '동아리' 의 승리에 대해서 그리고 '도우미'란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해서 순수하게 감탄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신화, 역사에 대한 전문가 답게 터키, 그리스 여행중의 이야기도 그 특유의 박식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야 소피아 성당' 에 대한 이야기는 별 생각 없이 주황빛 황토의 도시에서 주황빛 황토의 그 성당에 다녀왔던 나를 반성하게 했다. |
| 이 나라 안에서의 삶과 이 나라 밖인 외국에서의 삶과 여행과 많은 독서를 통해 형성된 저자의 열린 마음이 어떤 사건,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데 여러 개의 눈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시각이 편견으로 협소해지지 않았으며, 열려진 만큼 더 넓게 더 멀리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거기서 오는 시대의 상황 진단과 해결책은 명쾌하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고,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를 동시에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도 유니버설 컨버터로 바꾸도록 하자는 것이나, 늘 역사는 새 세대의 다른 생각을 통해 발전해왔음을 잊지 않는다. 신화에서도 그렇듯이 아버지의 세대는 아들 세대에게 찬탈 당하고,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면 또다시 그 아들에게 찬탈 당했던 것처럼, 역사도 세월의 흐름도 그렇게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초스피드로 전력 질주해 가는 현대에서는 닫혀진 마음, 어느 한 코드만을 받아들이는 콘센트으로는 삶 자체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겹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을 느긋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열린 마음, 열린 생각을 갖고 많은 정보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
| 나는 이윤기씨의 글 외에 우리나라 작가의 글을 요즘은 거의 읽지 않는다. 사실 별로 재미가 없다. 감칠맛이 없다고나 할까... 물론 그만큼 연륜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연 그만큼 열심히 읽고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글은 티가 난다. 본책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은 그가 이런 저런 곳(주로 신동아)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인데, 말했던 것처럼 워낙 글을 재미있게 쓰는데다가, 내용 자체도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재미있게 읽힌다. 나의 아버지 또래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최근의 경향에 대해 밝히는 그의 의견은 너무나도 합리적이다. 다만 '하늘의 문'을 비롯 그의 저서 대부분을 읽다보니 이 책에서도 겹치는 내용이 많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한가지 옥의 티라면 야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제리 맥과이어와 새미소사..."운운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제리 맥과이어는 스포츠 에이전트로 분한 톰 크루즈의 극중 인물명이 아니었던가? 그가 말하고자 했던 메이저리그 강타자는 '마크 맥과이어' 였겠지만, 그래도 좋다. 그게 제리 맥과이어든 마크 맥과이어든 그의 글은 언제나 감칠맛이 난다. 나는 오늘도 무엇인가 읽을 거리를 찾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를 권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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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등의 번역으로 익히 알던 이윤기씨의 글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단순히 무언가 읽을거리를 찾기위함이었으나, 읽을거리 그 이상 생각의 거리를 던져주었고, 글 잘쓰는 사람의 감칠맛 나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상당한 분이라 그런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는데 많은 부분 할애한 것이 특이할 점이요, 혹자에 따라서는 그 부분이 재미없다면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은 후 전체적인 만족도를 볼 때 신경쓸 부분은 아니다.
소설가 복거일씨가 주장한 영어 공용화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 부분처럼 간간히 자신이 분명한 회색분자임을 밝히는 대목은 재미있다. 예리하면서도 사람냄새 물씬한 통찰력을 가진 이윤기씨. 그의 팬이 될 것 같다. 좋은 책이므로 추천~~!! [인상깊은구절] |
| 나는 평소 이윤기씨의 책을 읽을 때 그의 해박한 지식과, 느릿느릿하지만 핵심을 말하는 화법, 그리고 졸깃졸깃한그의 말솜씨에 시간가는줄 모른다. 또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동서양 어느곳이 우월하다고 마구잡이로 손들지 않고 좋은점은 취하고 배우며 나쁜점은 나쁘다고 말하는 그의 솔직함.. 이 점이 그의 책을 읽게만든다. 이 책은 그런 생각때문에 주저없이 산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외국 갔다온 친구들이 너나없이 말하는 그네들의 합리적 사고방식은 우리도 배워야한다고 힘주어가며 말들이 떠올랐다. 이제 무작정 배척하거나 혹은 신봉하는 시대는 지났다. 옳고 편한것은 편한것이고 불편한 것은 불편한것이다. 괜한 아집때문에 불편을 감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좀더 솔직해지고 사실을 사실그대로 볼 수 있는 잣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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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글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이 좋고, 그 지식에 우쭐대는 제스처가 스며들어 있지 않아서 좋다. 그저 이런저런 사실들이 있는데 꽤 재미나는 것들이니 당신도 함께 알았으면 좋겠다, 고 말하는 것 같아서 편하다.
책은 번역가로서 걸출한 작업을 한 이후 쉬지 않고 다시 소설가로서 명성을 쌓는 틈틈이 한 잡지에 기고한 문화비펑(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아 오히려 신뢰감을 주는)의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잡지에 실렸던 글들이라 그 길이가 그리 길지 않고, 간간이 생각의 갈피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거슬리지 않는다.
대략 몇 가지 주제(랄 것도 없지만)로 나눠보자면 국제화 시대 민족주의 팽배의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공정한 시선 갖기의 어려움, 중심과 변두리 중에서 그 변두리를 향하고자 하는 자의 곤란, 말과 글을 업으로 삼는 자의 심란함, 자타가 공인하며 스스로도 자인하는 회색분자로서의 생각의 틀거리 등으로 나눌 수 있겠다.
특히 마지막 즈음에서 말하는 회색분자(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 단어를 통해 작가는 매우 거시적인 화해, 그러니까 인간과 자연, 민족과 세계, 자기와 남, 언어와 사고 등등의 화해를 꿈꾸는 듯하다)라는 부분은 다른 모든 글들에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을 갖는다. 게다가 그 회색분자의 내면을 나 또한 따르고 싶다.
실은 내게는 좌우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땅에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라는 것이다. 이 좌우명은 내가 이십대를 통틀어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 데에 몰두한 것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 작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입구를 내어, 그리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난 다음, 어렵사리 선택한 또다른 생각의 통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좌우명을 삼은 다음부터는 나름의 합리적인 관용을 갖고자 노력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견 중 어느 하나에 침잠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들이 그간의 세월 동안 내 사고방식에 누적된 이분법적인 틀로 인해 예고도 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종종 당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라는 것이 사고를 편하게 만드는 기술의 일종으로서 내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징후라고 생각해 일신을 꾀할 것을 스스로 독려하고는 한다.
이윤기의 회색분자 운운은 바로 이러한 일신이 어느 정도 지극한 선에 도달한 지점에서 쾌척한 것이라 기분이 흐뭇하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가 "...말을 부리는 습관에 관한 한 나는 내 실존적 습관에 어긋나는 것은 결단코 하지 못한다..."라고 말할 수 있게끔 하는 다분히 실증적인 자세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어 믿음직스럽다.
또한 그는 소극적인 회색분자가 아니다. "...대립하면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갈등 사이에서 사유가 발생하고, 이 사유를 통하여 소설은 커진다. 사유는, 갈등이 없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사유가 발생하지 않으면 소설도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는 꽤나 전투적인 회색분자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그가 서른 살에 짰다는 인생의 계획표를 들여다보면 보다 명료하다. "...쉰 살 되기까지 생업에 뜨겁게 매달리되 공부를 계속하고, 쉰 살부터 예순 살까지는 쓰기에 매달려 그동안 해온 공부의 보람이 뒤쪽으로 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예순 살부터는 다시 공부에 들되, 공부로써 삶의 지극한 비밀을 꿰뚫어 죽음을 하찮게 여길 수 있도록 하자..."(비록 칠십오세에 대통령의 직위에 오르는 인물로 인해 스스로 약간의 수정을 가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책을 읽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작품에 몰입하는 경우와 작가에게 몰입하는 경우다. 그리고 난 후자, 그러니까 작품을 넘어서서 작가에 몰입하게 되는 경우를 더 반긴다. 그곳에서는 작품을 뛰어넘는 색다른 사유의 경험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집에서 그것을 경험한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한문과 영어를 꽤 배운 세대에 속한다. 덕분에 조금 해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번역도 하지 않고 한시나 영어 문장을 생짜로 자기 책에다 쓰는 사람, 불필요하게 한자를 병기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부리는 말, 내가 부릴 말은,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이, 되도록이면 숩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