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조너선 프랜즌의 작품들은 <인생 수정>, <순수>, <크로스로드>, <자유> 모두 분량의 압박이 상당한 편이라 매번 읽으려다가 놓쳤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은행잎 2기 마지막 책이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시리즈 중에 고르는 거라고 해서 고민없이 그의 작품을 골랐다. <인생 수정>은 '단절과 해체로 얼룩진 어느 가정의 가족사를 통해 사회 전체의 문제를 투명하게 드러낸 대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현대 버전의 디킨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8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지만,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이 내세우는 빽빽하게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의 밀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파킨슨병에 걸린 남편과 아내, 그리고 세 자녀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자 자신만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아마 21세기 대부분의 가족사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소통의 단절, 가부장적 독재, 우울증, 현실 도피.. 등 가족의 해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이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모습으로 비춰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2층에서 아들이나 딸을 품에 안고 앉아 있던 밤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블랙 뷰티>나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주는 동안 아이들은 비누 냄새를 풍기는 축축한 머리를 그의 가슴에 푹 기대곤 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만으로도 아이들은 잠이 들었다. 흉터를 남길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이 핵가족에게 벌어지지 않은 저녁은 수백, 아니 어쩌면 수천 번은 되었다. 그의 검은 가죽 의자에서 꾸밈없는 친밀감을 누리던 저녁들, 암울한 확실성의 저녁들 사이에 낀 달콤한 불확실성의 저녁들. p.494 자녀들이 모두 독립해서 집을 나가고, 이제 앨프리드와 이니드 드 사람만 남았다. 앨프리드는 파킨슨병에 걸린 노인이 되었고, 이니드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5분마다 걱정하며 지내고 있다. 몸이 떨리던 건 많이 나아졌지만, 종종 환각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앨프리드는 자식들에게 가부장적인 집안의 독재자였던 시절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이니드는 남편에게 시달리며 1년 내내 크리스마스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중이다. 큰 아들 개리는 은행 중역이자 세 아이의 아빠지만 가정불화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인 칩은 <월 스트리트 저널>에 글을 쓰지만, 여전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도망을 거듭하는 중이다. 막내인 딸 데니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계속 억누르고 부정하고 있다. 이들 가족들은 앨프리드의 병을 계기 삼아 모이게 되는데, 이니드가 1년 내내 기다렸던 크리스마스 파티는 과연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살면서 실수를 하고, 잘못을 깨달으며 그것을 고쳐 나가려고 애쓴다. 물론 누군가는 오점투성이의 인생을 내버려둔 채 살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주변을 둘러 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 한 램버트 가족의 삶은 사실적인 만큼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인생 수정'이라는 제목처럼, 이들은 살아 가며 계속 삶을 '수정'해 나간다. 그 과정이 인생이라는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작가의 가차 없는 풍자와 냉소 속에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 에세 시리즈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작품들을 보니 여타의 고전 문학 시리즈에 비해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서구 남성 작가 중심의 정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서구와 비서구, 남성과 여성, 순수문학과 장르문학 등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들 선정해왔기 때문이다. 찬쉐, 엘리자베스 개스켈, 다와다 요코, 이디스 워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저메이카 킨케이드 등 라인업도 매우 휼륭하다. 판형이 작고 디자인이 깔끔해 손에 잡히는 그립감도 좋다. 작가들의 사진을 표지 전면에 내세운 디자인도 예쁘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신간 <죔레가 사라지다>도 출간 예정에 있다고 하니 매우 기대가 된다. |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겨우 7살 나이에 치퍼는 이러한 공허감이 그의 삶을 평생 따라다니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루한 기다림과 깨어진 약속, 너무 늦었다는 끔찍한 깨달음.최악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생을 마칠 때 즈음이 되어서야 악 중에 악을 가리지 않기에 현재 처한 상황에서의 가장 악질인 대상이 줄곧 ‘최악’이라 일컬어지곤 한다. 각 장에서 가족 구성원의 심상을 들여다볼 때마다 최악이 바뀌어 나갔다. 그 속성은 크게 과거와 현재, 낭만과 산수 사이에서 나뉘었다. 앨프리드와 이니드 부부는 과거에 만연했던 가부장적 가족주의 관점에서 머무르고 있다. 언뜻 비슷한 속성으로 분류되지만 앨프리드의 고압적인 속성을 보노라면 이니드와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느껴질 것이다.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가족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 앨프리드의 주된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앨프리드와 이니드 사이에서 늘 앨프리드가 최악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니드는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억지로나마 자신에게 씌우기 위해 주변인들에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개리, 칩, 데니즈 삼 남매는 이러한 부모의 관점을 모멸하며 살아갔다. 장남인 개리는 부모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모토로 삼았고 나머지 두 남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품었다. 메마른 부패가 기쁨에서 기쁨으로 퍼져간 결과, 부모의 어리석은 생각에 대한 개리의 저항에 긴 세월 연료가 되어주었던 사치와 여유의 기쁨이 곰팡이로 뒤덮여버린 것이었다.개리의 야심과는 다르게도, 그는 앨프리드와 이니드의 단점을 고루 닮은 인물이다. 앨프리드의 고질적인 우울증과 이니드의 속물적 속성이 더욱 극대화되어 그에게로 넘겨졌다. 세 인물셋 모두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 단점은 또다시 다른 속성을 띈다. 개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 초점을 맞추며 경계 태세를 갖춰 주변 사람과 갈등을 빚어온 반면, 부부는 가족들을 우선순위에 두며 살아갔기에 동일한 속성의 단점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개리의 관점으로는 자신이 삼 형제 중 가장 출세하였으므로 부모의 총애를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앨프리드와 이니드는 개리에게 좀처럼 애정을 비추지 않았으니 그의 우울증과 열등감은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치퍼에게는 그 누구도 위조할 수 없는 상냥함이 있었다.데니즈와 칩은 앨프리드와 몸과 정신이 망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진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소 거칠고 무뚝뚝한 그였지만 내면에는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평생 자신이 몸 바쳐 일궈온 회사와 명예를 딸을 위해 조금의 원망도 비치지 않은 채 단숨에 내려놓았을 리 없으니 말이다. 강철 같은 그에게 애정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지만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사랑이 존재했다. 가족 중 가장 엉뚱한 성격의 둘째 아들 칩에게만은 그 철옹성도 무너졌던 것이다. 칩이 앨프리드와 가장 다른 유형의 사람처럼 느껴졌기에 그의 애정에 쉬이 이해가 가진 않았다. 쇼펜하우어식 철학이 정신에 깃든 앨프리드는 칩의 철학에 대한 학문적인 순수함을 높게 샀을 수 있다. 앨프리드 또한 평생 철도 기술을 탐닉하며 순수한 흥미를 즐겼으니 말이다. 독자에게 탕아로 비치는 칩의 면모가 은퇴 후 모험을 꿈꾸었던 앨프리드에게는 대리 만족을 선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앨프리드의 이미지와는 상반되지만 칩에게 깃든 낭만을 가장 높게 산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죽음이 유한성의 집행자이기를 멈추고, 극단적 변화의 마지막 기회이자 무한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논리적 입구처럼 보이게 되는 시기가 왔다. 흙속에서 밀알이 싹을 틔우듯 세상은 생장점에 세포를 더하고 더하며 순간을 축적하고 축적하면서 시간을 헤처 앞으로 나아가기에, 가장 싱싱한 순간의 세상을 붙잡는다 해도 다음번에 이를 다시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었다.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주인공에게 인생이 수정될 기회가 주어지리라 예견했다. 이니드와 데니즈, 칩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고 그들은 이를 통해 인생을 개선해나갔다. 평생을 위선 속에서 살아간 이니드는 그토록 사랑했던, 그러나 그 사랑을 돌려주지 않았던 앨프리드가 떠나자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사랑과 자아가 병존하지 못했던 그녀의 삶이 비로소 자아를 찾는 여정으로 전환되었으리라 예측되는 바이다. 이미 고장 나버린 앨프리드에게는 스스로 인생을 수정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에게 인생을 수정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그를 떠올리며 매 순간 인생 수정의 기회를 도모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조너선프랜즌 #인생수정 #은행나무 #세계문학 #미국소설 #소설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