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남자 정말 대단하다. 이 남자의 한달간의, 거의 미쳤다고 볼수있는 실험정신이 이 영화를 만들었고 나와 남편의 식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 이후 우리가 먹는 햄버거나 피자의 양은 예전에 10개를 먹었다면 지금은 반개나 되려나. 사실 거의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의 결과가 나오게 되지만 실제로 한사람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본다는것, 충격이 크다. 모두 보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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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불을 붙이고 있다. 드럼통을 반을 잘라서 철근을 용접해서 다리를 만들어 붙인 DIY제품이다. 마트에서 파는 숯에 불을 붙이고 장작으로 쓸만한 나무를 얹어서 화력을 높인다. 평소에 애용하던 돌판을 잘 닦아서 위에 얹어 놓으면 곧 반들반들한 돌판위가 허옅게 습기를 내뱉는다. 고기를 올릴때다.
우선 고기중의 일부를 떼어낸 ‘비계’로 돌판을 잘 닦는다. 반들반들하게 기름기가 뭍어 지글거린다. 돌판 면적의 전부를 기름칠하고 나면 웬지 안전한기분이 된다. 더러운 것에서 벗어난 느낌이랄까. 비계에 뭍어 나오는 땟자국을 확인할때엔 지금껏 해온 ‘밑작업’에 대한 보람과 긍지가 느껴질 지경이다.
본격적으로 고깃덩이가 올리는 순간 입에는 벌써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장작타는 냄새에 더해지는 고기의 살타는 향기는 불을 발명하여 고기를 구워먹는 것을 창안한 고대의 조상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벌써 상위에는 갖가지 야채들이 큰 접시에 가득 담겨서 나왔다. 씀바귀, 쑥, 냉이등의 야생초까지 더해서 풍미를 한껏 더한다. 집에서 담근 된장에 과일과 간장, 들기름 등을 섞어서 만든 쌈장까지 더해졌으니 이제 고기가 어서 노릇하게 익기만 기다리는 손과 젓가락들이 불판위에 대기중이다. 대여섯명을 먹이기엔 불판이 너무 적었다. 잘 숙성된 김치가 있으면 더 좋다. 불판에 살짝 구워도 좋고 익은 고기와 함께 싸먹어도 그만이다. 풋고추와 야채를 함께 싸서 먹으면 고기 고유의 향은 덜하지만 입안 가득 풍부한 촉감과 함께 느껴지는 맵고 쓰고 달고 신 다양한 쌉싸름함이 혀를 자극해 식욕을 한껏 돗구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이 있다. 잘 알고 지내는 터라 더 놀랐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잘 피는 이가 고기를 안먹는다니 좀 의외였다. “왜 안드세요” “아,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입이 하나 줄었으니 경쟁은 덜 심하고 쉬는 시간 없이 고기를 연속해서 입으로 집어넣을 수 있겠다는 행복이 더 가까이 있었다. 사실 나도 고기를 먹는것에 대한 거부감은 꾸준히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외식만 하면 가던 햄버거는 패티에 대한 이미지가 몸을 지배하기 시작해 끊을수 있었다. 축사를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수 있는 그 비인간적인(동물권?) 양육시스템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웬 약품은 그리도 많이 섭취하게 되는지 그것들이 고스란히 삼겹살, 안창살, 목살, 뒷다리살속에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면 고기먹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고기를 즐기는 나에게 작은 가르침을 주었다. 육식의 해로움을 드러내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을 충분히 즐기는 사람으로서 지금 인간의 육식이전에 생겼을 일들을 추적해 직접 경험하고 그 느낌을 공유하던 저자의 여행이 떠올랐다. 결국 나는 완전히 교화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좀 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경험한 나’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아우성이 있을 뿐이다.
그 부드럽던, 혀와 같던 입속의 고기가 갑자기 질기게 느껴졌다. 갑자기 너른 들판에 구획된 구간 가득 들어찬 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에서 보았던 실재의 이미지다. 그 영화와 더불어 봤던 원작의 책에 나온 내용은 미국의 패스트푸드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기엔 딱이었다. 미숙련공이 다듬는 고깃덩이와 이미 스트레스와 약물,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키워진 소들의 이미지, 정수리를 때려 기절한 소의 목을 따서 피를 빼고 전기톱으로 가른 소들의 내장을 걸러내는 일, 적당한 크기로 썰린 고깃덩이를 줄지어서 칼을 들고 잘게 토막내는 사람들의 손놀림, 이곳저곳에서 들어온 고기들이 한데 섞여서 만들어진 햄버거 패티.
그 이미지를 떠올리면 싱그럽게 웃고 있는 광대의 손짓이나 화려하게 번쩍이는 사인아래서 맛볼수 있는 달콤한 햄버거의 어두운 이면이 중첩되어 견딜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끊어버렸다. 속 시원하게. 여전히 불판위에서 구워지는 돼지와 소는 맛있게 먹으면서 말이다. <PD수첩>에서 보았던 넘어지는 소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래, 나는 돼지를 먹고 있어. 소가 아냐’ 되뇌인다. 여러번 다짐하듯. 소에 대한 거부감이 돼지를 넓게 포용하는 돈육주의자(?)를 낳는 것이 아닐까? 삼겹살이 비싸면 목살, 목살이 비싸면 안창살을 선택하더라도 말이다. 돼지는 젖을 제대로 못먹고 어미와 떨어진다. 태어나자마자 꼬리를 잘린 잘록한 꼬리를 흔들며 울부짖는다. 항생제에 중독된, 6개월만에 인간들에게 먹히기 위해 살을 찌우는, 0.3평의 공간에서 평생을 살다 가는 운명이다. 이런 사육환경은 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전국에 깔린 후라이드 치킨집들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닭들이 매일 죽고 태어나고 길러지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몸뚱아리 뿐 아니라 그네들의 알도 주워먹고 있지 않은가. 꿩먹고 알먹고라고 하더니 딱 지금 ‘육계’들이 그 꼴이다. 나는 위선적인가? 실컷 고기 잘 먹으면서 새삼스럽게 뒷말이나 하고, 그래서 남들이나 불편하게 만든다. “혼자 다 먹으면서 새삼스럽게” 항상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듣고 있다. 내가 그들의 육식만찬에서 기껏 상추쪼가리에 밥알을 씹으면서 한껏 만족해하는 모습으로 뻐기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엔 나의 욕구가 너무 크다. 내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이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기를 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과 나는 분명이 다른 삶에 있지만 결국 그 고기들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을 차지하는 일은 그러므로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닐까.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에 등장하는 유르기스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하층민들 또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아마 고기를 먹기 힘들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이 경험한 <4천원 인생>에 등장하는 마트의 정육코너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강도 높고 비인간적인 굴종의 노동에 있었으니까. 그것도 고기를 자르고 고기의 피냄새와 미끌거리는 감촉, 하루종일 칼을 들고 찌르고 자르고 썰고 하는 행위들에 매몰되어서. 동정은 불가능하다. 하루라도 그 삶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저 동정하는 것일 뿐이다. 깊이 우러난 것이 아니라 겉핧기의 그것. <수퍼사이즈 미>의 감독겸 주인공인 모간스퍼록은 1달을 맥도널드만 먹고 살려고 했다. 결국 실패했다. 몸이 도무지 받아주지 않았고 의사가 생명의 위협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한 물질은 도대체 왜 버젓이 팔고 있는 것인가. 포장지에 ‘연속으로 섭취할 경우 주의가 필요함. 의사와 상담할 것’이라고 써야 하지 않을까. 쌈을 싸고 소주를 한잔 마시면서 다시 생각했다(이미 고기 맛은 잃어버렸다). ‘고기를 끊을까?’ 이와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추억이며 올여름에 당장 계곡에서 집 앞에서 친구들을 맞으며 즐길 바비큐파티의 현장을 상상했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아냐’ 아직 멀었다. 육식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나도, 인간의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힘든 생을 살아야 할 수 많은 닭, 오리, 개, 돼지, 소 들도... 생각을 전환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습성을 버리는 것, 습관을 바꾸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담배를 피우기는 쉬어도 끊는 것을 힘듯것과 마찬가지로 고기를 먹기 시작한 사람은 완전한 채식으로 전향하는 것이 힘들다. 나를 대상으로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다. 더워지는 날씨가 지구 온난화로 인한 것이라는 것에서 그치치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순전히 인간의 밥상에 오르기 위한 삶을 사는 소들, 그들이 내뿜는 메탄가스와 방귀들, 그들의 입으로 사라지는 수 많은 풀들, 옥수수들을 위해 뿌려지는 농약과 스트레스를 억제하기 위한 항생제, 밀도 높은 농장에서 필연적인 똥들(보통 발목 높이는 예사고 어떤 곳은 산을 이루었다)은 재활용도 되지 않고 주변 토양을 오염시키고 지하수에 강에 흘러들어서 마실물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런 ‘상상의 고리’는 꽤 효과가 좋다. 외식때 꼭 한입의 감촉을 위해 맥도널드, 버거킹, 롯데리아를 서성거렸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없어졌으니 말이다.
의지를 돕는 <노임팩트 맨>의 실험은 꽤 본받을 만 하다. 나처럼 시골에 살지도 않으면서 한평의 땅덩어리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뉴욕도심의 아파트에서 ‘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사는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는 것에 위안을 받으면서 내 의지를 불태워보는 일은 웬지 멋지게 느껴진다. 그럼으로서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더한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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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간 슈퍼 사이즈 햄버거만 먹으며 임상적인 폐해의 정도를 실험하고자 한 다큐멘터리 영화~~ 합법적인 살인???~~ 맥도날드의 광란을 통해 점점 잠식되어가는 건강~~ 그것도 작고 발랄하고 귀여운 맥도날드에게~~ 만약, 패스트푸드를 즐겨먹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할 건강보험같은 영화다 |
| 제목 :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 2004 감독 : 모간 스퍼록 출연 : 모간 스퍼록, 브리짓 베네트, 닥터 리사 간주 등 등급 : 12세 관람가 작성 : 2006.04.29. “살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구나!! 크핫핫핫핫!!” -즉흥 감상- 어제, 오후 3시경 아이스크림만 3개를 먹고, 그것도 고 칼로리랍시고 저녁을 안 먹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동생 생일이라고 마트로 쇼핑가자고 하셔서 돌아다니다가 식품 매장에 갔더니 이거 배고파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길!! 집에 와서 이번 작품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식욕이 싹 가시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럼 웬만한 잔인무도하고 엽기적인 공포영화들 보다 더욱 속을 뒤집는 것 같았던 이번 작품을 조금 소개해 볼까합니다. 작품은 맥도날드, 피자 헛, KFC 등의 패스트푸드 이름으로 짜깁기 한 듯한 아이들의 노래로 문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는 특히나 ‘맥도날드’를 중심으로 사회를 잠식하고 있는 비만의 실태와 법정소송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군요. 그리고는 감독이 주인공이 되어 한 달 동안 맥도날드의 햄버거, 특히 ‘슈퍼 사이즈’등급을 하루 세끼 꼬박 먹기를 선언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신의 건상상태를 각자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체변화를 비교 분석, 공식적으로 기록해주는 네 명의 전문가와 한 달 동안의 실험 중 만나 인터뷰 하게 여러 분야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지게 됩니다. 한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감독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하는데……. “크학학학!! 토할 것 같아!!(우욱)” 방금 것이 무엇인고 하니, 언제인지 잊어버렸지만 이 작품을 처음 친구와 함께 봤을 때의 ‘즉흥 감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DVD의 부록으로 들어있는 또 다른 실험 기록 필름 때문이었는데요, 바로 여러 재품들의 부패속도를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제일 좋아하던 감자튀김이-다른 것들은 곰팡이와 악취를 동반해 마치 녹아내리는 것 같은 형상을 취하기 시작해도-아무런 부패의 조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과체중인 저와 친구는 벌벌 떨고 있었다지요. 도대체 저것들이 배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세상을 보니, 저도 그렇지만 이 세상에 과체중인 분들이 너무 많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패스트푸드, 아니 ‘정크 푸드junk food-직역하면 쓰레기 음식?-’ 식당들을 무의식이 먼저 피하는 것인지 보이지 않게 되더군요. 시작은 순수했지만, 그것이 대규모화 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하는 문제들. 자신을 건강식품이라 말하면서도 식중독과 비만의 원인이 되는, 거기에 사실상 공정 과정 자체가 의심될 수밖에 없는 정크 푸드의 실체를 감독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증명해내려 합니다. 주위에서는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싶었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되고 죽기 실으면 당장 그 실험을 중지하라하기에 이르지요. 양심을 버린 사업시스템으로 병들어가는 식생활의 모습을 너무나도 기가 막힌 발상으로 고발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 영화라니.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한국에서도 한 적이 있던 ‘한국판 슈퍼 사이즈 미’라는 타이틀의 프로그램 때문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중고 서적에서 노란색 표지의 DVD가 발견되어 충동적으로 구입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휴우. 일하는 토요일이라 사무실에 앉아 이번 감상기록을 열심히 타이핑 해봤습니다. 그럼 조금 남은 시간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하며 기록을 마치는 바입니다. Ps.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항상 중얼거립니다. ‘길은 느낌을 따라 걸으라. 그곳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퇴근을 할 때 무일푼인데도 헌책방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드는 겁니다. 그래서 갔고, 저는 구매를 포기했던 스티븐 킹 님의 소설 ‘쿠죠Cujo, 1981’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아아, 이 행복감의 절정을 이 감상기록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나눠 드리고 싶습니다!! 무한감상의 영광을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