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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다 " 내용보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다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 저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옮긴이 : 안문영 ▶ 출판사 : 을유문화사● 독일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연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는 단순한 시집을 넘어 인간 존재의 의미와 운명, 예술의 본질을 깊이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번 을유문화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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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다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

▲ 저자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옮긴이 : 안문영 
▶ 출판사 : 을유문화사

● 독일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연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의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는 단순한 시집을 넘어 인간 존재의 의미와 운명, 예술의 본질을 깊이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번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개정판은 릴케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정교한 번역과 부록을 포함해 완성도를 높였다고 하네요! 📖✨  

★ 『두이노의 비가』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는 1912년부터 1922년까지 10년에 걸쳐 완성된 연작 시집입니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덧없는 존재이지만, 이를 예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  
릴케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두이노 성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후작부인의 초청으로 머물던 그곳에서 들려온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제1비가」의 첫 문장을 이끌어냈다고 하죠. 이후 10년 동안 유럽을 떠돌며 여러 도시에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 릴케와 두이노 성의 인연  
‘두이노’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교에 위치한 성입니다. 릴케는 1912년 1월경 이곳에서 첫 비가를 완성했으며, 이후 다른 비가들의 일부도 여기서 탄생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성이 완전히 파괴되었음에도 릴케가 문학적으로 그 이름을 보존하고 싶어 *『두이노의 비가』*라는 제목을 붙였다는 것입니다.이처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도와 그것을 영원한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릴케의 정신은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  

◉ 『두이노의 비가』의 주요 내용  
이 시집은 총 10편의 비가(哀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 실존의 고통과 예술을 통한 초월을 주제로 합니다.  

◉ 『두이노의 비가』의 문학적 의미  
릴케의 작품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와 결합된 예술 작품입니다.『두이노의 비가』는 마르틴 하이데거, T. S. 엘리엇, 안젤름 키퍼 등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하이데거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며 릴케의 시를 자주 인용했으며, 엘리엇의 『황무지』에서도 릴케와 유사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한 직후 릴케는 불과 3주 만에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써냈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를 통해 예술의 힘과 불멸성을 노래합니다.  
릴케는 오르페우스를 ‘죽어서도 자연 속에 노래로 존재하는 신’으로 해석하며, 예술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  
◇ 현대 예술가들에게 미친 영향  
릴케의 작품은 문학을 넘어 회화, 조각,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는 그의 그림 속에서 릴케의 신화적 상징을 자주 활용했습니다.  
현대 작곡가들도 릴케의 시를 바탕으로 여러 곡을 작곡했으며,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연극과 영화의 대사로 사용됩니다.  

◆ 릴케의 철학과 메시지  
릴케는 우리가 ‘덧없는 삶’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과정 속에서 예술과 사랑을 통해 삶을 변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는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 여러분이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무엇인가요?  
✔ 삶과 예술, 그리고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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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사락 k********8 2025.03.22.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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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읽을수록 감동
"여러번 읽을수록 감동" 내용보기
성모 마리아가 내린 은총으로 여겨 릴케를 “마리아의 자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참고로 릴케는 남성이다. 혹시나 ^^; 마리아 이름 때문인지, 가끔 여자라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다.)본 판본에는 이 작품 외에 또 다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와 몇 편의 중요한 부록이 실려 있으니,최고의 선물임에 분명했다.릴케의 본 작품들은 삶과 죽음, 사랑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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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가 내린 은총으로 여겨 

릴케를 “마리아의 자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릴케는 남성이다.

 혹시나 ^^; 

마리아 이름 때문인지, 가끔 여자라 오해하는 분들이 계시다.)


본 판본에는 이 작품 외에

 또 다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와

 몇 편의 중요한 부록이 실려 있으니,

최고의 선물임에 분명했다.


릴케의 본 작품들은

 삶과 죽음, 사랑과 예술,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며

 현대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깊이 있는 시어와 보편적 주제로

 동서양을 아우르는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현대 고전이라 하지만,

여러번 읽어도

내겐 아직 작품들이 꽤나쉽지 않다.


나의 견문은

그의 시를 완벽히 받아들이기에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이유는

이 책을 여러번 정독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긍정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e******w 2025.03.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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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독에 관한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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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안문영 역자가 첫 번역 이후 수정 보완하여 나온 독일 최고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필생의 역작을 만나 본다독일작가 그리고 필생의 역작 그리고 윤동주가 탐독해서 읽었다던 릴케의 시역시나 어렵군…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이번 기회에 을유문화사에서 제공해준 덕분에 대작을 접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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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안문영 역자가 첫 번역 이후 수정 보완하여 나온 독일 최고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필생의 역작을 만나 본다

독일작가 그리고 필생의 역작 그리고 윤동주가 탐독해서 읽었다던 릴케의 시

역시나 어렵군…
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번 기회에 을유문화사에서 제공해준 덕분에 대작을 접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k*******7 2025.04.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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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용맹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두이노의 비가』
"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용맹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두이노의 비가』" 내용보기
1. 고전문학 중에서도 시는 처음이라 사실 조금은 긴장하면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중에서도 제일 번역 맛집인 을유문화사의 책이라 그런가 현대시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혔다.2. 처음에는 해설 없이 읽었고, 한번 더 읽을 때는 해설을 읽고 읽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이다. 하지만 책을 덮은 후의 감상은 아무것도 모른 백지 상태에서 느꼈던 것이 더 생생했다.배
"가장 연약하지만 가장 용맹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두이노의 비가』" 내용보기
1. 고전문학 중에서도 시는 처음이라 사실 조금은 긴장하면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세계문학전집 중에서도 제일 번역 맛집인 을유문화사의 책이라 그런가 현대시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혔다.

2. 처음에는 해설 없이 읽었고, 한번 더 읽을 때는 해설을 읽고 읽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이다. 하지만 책을 덮은 후의 감상은 아무것도 모른 백지 상태에서 느꼈던 것이 더 생생했다.
배경 지식 없이 읽은 『두이노의 비가』는 가장 진중했고 우울했으며 생각이 많았던 학창 시절의 제가 계속 떠올랐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그 사람에 대해 엄청나게 고뇌하며 마음의 변화에 번뇌하고 삶이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던 제 인생에서 가장 영민했던 소녀 시절. 자살을 생각하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던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용맹하던 그 시절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3. 고전시가 궁금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두이노의 비가』로 시작해 보는 것도 추천드린다.
t*******1 2025.03.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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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의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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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이노의 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은이), 안문영 (옮긴이)   을유문화사   2025-02-25>♡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은 #젊은시인에게보내는편지 로 시작했다.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대단했다. 본질을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시인이기에 시를 읽어보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헤헷두이노의 비가를 읽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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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이노의 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은이), 안문영 (옮긴이)   을유문화사   2025-02-25>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은 #젊은시인에게보내는편지 로 시작했다. 그 글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대단했다. 본질을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시인이기에 시를 읽어보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헤헷
두이노의 비가를 읽다가 #말테의수기 를 함께 읽고 있었다.(완독 전이지만) 말테의 수기는 너무 재밌는데(뭔데 재밌는 거야…!) 두이노의 비가는 확실히 문학의 정수답게 어려웠다. 어렵지만 읽으면서도 좋다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평소라면 몇번을 읽고 해설을 읽거나, 해설은 아예 안 읽는데, 조금 읽다가 바로 해설부터 읽었다. 
두이노의 비가는 모두 10편 864행으로 이루어진 연작시로, 다양한 표현 방식과 주제가 방대하다.그러나 읽다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난 좀 좋았다. 
본질을 파헤치려는 글들, 자연에 대한 예찬, 삶과 죽음, 고독, 예술, 내면의 변화를 꿰하는 글들, 서정적이면서도 깊은 감수성이 느껴지는 글들…
리뷰를 적으면서 다시 읽으니, 주석에 얽매여 읽었는데 주석을 차라리 보지 말고 그대로 느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이 작가의 글들을 파헤쳐봐야지💕
이달의 사락 k********4 2025.03.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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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 두이노의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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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 두이노의 비가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드디어 <두이노의 비가>를 출간했다.릴케 시의 정수로 일컬어지며, 비교적 현대에 쓰여진 시집이 이토록 고전으로 열렬한 사랑을 받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두이노의 비가>는 그 명성만큼이나 어렵고 난해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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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드디어 <두이노의 비가>를 출간했다.

릴케 시의 정수로 일컬어지며, 비교적 현대에 쓰여진 시집이 이토록 고전으로 열렬한 사랑을 받는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두이노의 비가>는 그 명성만큼이나 어렵고 난해한 시로도 유명하다. 이 시집을 읽으며 어느 순간부터 죽어있던 나의 지력이 생생히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고 무엇보다 문학, 철학, 과학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공부했던 릴케의 삶이 압축되어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각 시마다 친절한 주석은 물론이고 역자 안문영 교수님의 해설도 함께 한다. 또한, 릴케가 훌레비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작가 자신이 직접 <두이노의 비가>의 해설을 언급하는 부분도 읽어볼 수 있다. 그러나 릴케는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 스스로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능청을 떨며, 시집의 해설은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있음을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결단코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소재 속에서 릴케는 부단히 노력하여 모순을 깨닫고 그 모순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해낸다.

너는 풍요로움 속에서 마치 한 겹 한 겹 광채만으로 이루어진 몸에 두른 옷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의 꽃잎 하나하나는 모든 의상의 회피요 또한 거부다.

장미의 아름다운 꽃잎을 두고, 그것은 몸에 두른 옷처럼 보이나 모든 희상의 회피이자 거부라는 말, 결단코 평상시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시상이다.

기계는 생명, - 자기가 가장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기계는 똑같은 결단으로 정돈하고 만들어 내고 파괴한다.

릴케가 이 시집을 썼을 때의 기계 역시 인간의 삶(직업 과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 중 하나였겠지만, AI 시대를 맞이하는 현대인에겐 이 시야말로 천리안을 바라보는 릴케의 능력이었음이 드러난다.

릴케의 지성, 문학과 과학과 철학 그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경이로운 모험을 함께 할 수 있는 중요한 시집 <두이노의 비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시집이다.
d*******0 2025.03.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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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의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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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제공 )사실 책을 받고 두번을 읽었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지만 솔직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책을 잡고 앞뒤로 오가며 주석을 읽으며 처음에 천천히 읽었고 다음엔 그냥 후룩 다시 읽어내려가봤어요. 릴케가 인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절규하듯 써내려간 이 글들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문장들이었습니다. 을유문화사에서 구성을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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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제공 )

사실 책을 받고 두번을 읽었습니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꽤 들었지만 솔직히 어려웠어요. 그래서 책을 잡고 앞뒤로 오가며 주석을 읽으며 처음에 천천히 읽었고 다음엔 그냥 후룩 다시 읽어내려가봤어요. 

릴케가 인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절규하듯 써내려간 이 글들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문장들이었습니다. 을유문화사에서 구성을 근데 굉장히 잘 꾸려주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아무래도 부록에 '홀로비츠에게 보내는 편지'로 해석을 달아주셨가는 점에서 뭔가 뒤에 물론 해석이 있지만 이것으로 작가의 해설을 읽어볼 수 있게 해주셨다는 점에서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두이노의 비가 제2부 인 셈이었던 두이노의 비가 단장으로 그 다음을 읽어 볼 수 있어 뜻깊었습니다. 
YES마니아 : 로얄 b***a 2025.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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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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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의 비가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내용을 담은 시는 다소 어렵다 여겨지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위로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존재들이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 말하는 릴케에게 위로받고 싶으시다면 추천합니다. #을유문화사 #라이너마리아릴케 #두이노의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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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의 비가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내용을 담은 시는 다소 어렵다 여겨지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위로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존재들이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 말하는 릴케에게 위로받고 싶으시다면 추천합니다.
#을유문화사 #라이너마리아릴케 #두이노의비가
YES마니아 : 골드 b********3 2025.03.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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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재의 순간에도 그 순간 지나면 다시 고통의 순간이 온다.
"현존재의 순간에도 그 순간 지나면 다시 고통의 순간이 온다. " 내용보기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두이노의 비가 서평“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파우스트에서 나온 문장이다. 인간은 영원을 꿈꾸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리고 정망하며 탄식한다. 아무리 좋은 순간이 있더라도 지나가고 붙잡지 못한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 변용하는 것이다. 존재자인 천사와 나와 보는 자인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코 천사에게 영원을 가지고
"현존재의 순간에도 그 순간 지나면 다시 고통의 순간이 온다. " 내용보기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을유문화사_서평단



두이노의 비가 서평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파우스트에서 나온 문장이다.
인간은 영원을 꿈꾸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리고 정망하며 탄식한다. 아무리 좋은 순간이 있더라도 지나가고 붙잡지 못한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 변용하는 것이다. 존재자인 천사와 나와 보는 자인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코 천사에게 영원을 가지고는 게임이 안된다. 그러나 이토록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무엇을 보여줘도 이미 우리보다 많이 아는 존재인 천사에게 소박한 사물을 보여주면 놀랄 것이다. 사물에게는 신비함이 숨겨져있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지나가고 사라진다. 인간은 이를 내면에서 변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하고 애써 회피하지만.

비가라는 것. 인간의 고통에 대한 슬픔의 노래다. 인간은 영원을 꿈꾸지만 순간순간의 사라져가는 존재이기에 자꾸 절망하고 꿈은 불가능하다. 죽지 않고서야 영원한 천사의 세계를 누릴 수 없으니 말이다. 연인들도 영원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딱 지나가버리며 비껴나가고, 그 성욕은 태곳적부터 있던 것으로 합일에의 갈망은 그토록 인간의 몸에 깊숙히 박혀있건만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속에서 고통은 인간을 장난감처럼 갖고 논다. 인간은 사물을 응시하며 존재의 진정한 무게를 느끼려 하지만 그마저도 완성적이지 않다.
시인은 그러나, 이렇듯 순간순간 취하고 망각하는 것은 지양할 자세로 판단하고 대신에 순간순간 그 가치를 누리며 충일함으로 넘쳐한다. 비록 그가 살던 시대가 점점 더 존재자들이 존재망각에 빠지게되었지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지 않으며 핏속에서 무수한 현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천사는 모르는 일상의 사물들을 내면에서 변용시킨 인간은 천사가 보기에 그야말로 놀라운 존재다. 그리고 한번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런 충일의 순간에서도 이로써 극복될 줄 알았던 고통이 결코 극복되지 않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슬픔의 세계로 가 슬픔 자체가 인간의 고향이며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탄식의 어머니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한다. 또한 인간이 갈망하는 그 합일은 죽음에 가서야 이루어지기에 그 합일의 대상, 인간이 찾아해매던 것 역시 탄식에 다름아니다. 영원은 죽음이며 영원으로 가 기쁜 동시에 삶이 끝나기에 다 이상 순간을 살아갈 수 없어 슬픈 것이다. 그래서 성취의 순간에도 비가다. 그리고 이 모순으로 비가는 끝을 맺는다. 이 메세지는 망자들이 주는 메세지다. 천사는 결코 인간이었던 적이 없지만 망자는 한때 인간이었고 이제는 천사들과 함께하는 자들이다.

내가 이 시를 읽고 인생에 적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불가능한 영원을 갈망하고싶은 마음이 들때마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지나가는 단 한번뿐인 순간들이 도리어 천사들에게는 갈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도 미래도 그 순간들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은 없어질 수 있을지언정 그 순간들은 이 우주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태어남으로써 가능성이 열리고 인류 역사의 자랑스러운 멤버가 된 셈이다.
그리고 고통스러울때의 마음가짐이다. 두이노의 비가에 달린 평중 기억에 남는 것이 ‘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영원을 갈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누가 나를 드디어 이해해주고 드디어 외롭지 않은 순간, 정말 나의 사랑이 외면받는게 아니라 함께 미소지을 수 있는 순간들 기대하고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때에나 가능해지고(그때야 비로소 탄식으로부터 진정한 포옹을 받고 고독하게 홀로 슬픔의 근원 산으로 올라가야한다. 그래서 죽음이 슬픈 동시에 행벅할 수 있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이 같은 행복으로 빛난다.) 그 외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인간은 누가됐든 죽기에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슬픔야말로 인간의 고향이기에, 가장가까운 인간관계가 적대관계이고 모든 영원성을 향한 몸짓은 실패할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언젠가 끝날 그 삶을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에 희망을 걸고싶다. 영원은 죽을때 되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때 일로 미루며 최대한 산다는 것 자체에 집중하고 싶다.

20세기 초 당시 사람들은 전쟁과 억압에 어지간히 신음했나보다. 말러와 예이츠, T.S. 엘리엇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 사이에 껴 실존 앞에서 고통스러운 개인이 부르짖는 것인데 다 조금씩 달라서 다채롭다.

영원, 고대, 도시가 나온다는 점에서 이 시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였다. 그러나 예에츠의 비잔티움 주인공은 자기파괴욕구가 너무 강하다. 순간순간의 쾌락과 망각에 도취된 젊은이들의 세계에서 영원과 지혜가 설 자리는 아예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은 비잔티움으로 항해하고 그 꼴은 누더기에 백발 수염이 날리는 거지꼴이다. 그는 비잔티움 모자이크를 보며 욕망으로 병든 자신의 몸을 부숴 필연에서 벗어나 저 영원한 황금 모자이크로 다시 빚어져 영원한 예술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 자기 자신을 없애고 영원이 되려고 한다. 또 비잔티움은 고대도시인 동시에 비교적 최군에 망해 현재는 가볼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결국 흙에 묻혀버리리라는 운명이 예정되어있다.

릴케라는 시인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번에 깊이 읽으면서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철학자들의 시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존재와 순간, 영원에 대해 다루면서 인간을 탐구하는 한편 그가 쓰는 시어들이 단순히 미사여구가 아니라 본질적인 탐색의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일견 비유나 장식처럼 보이는 형용사와 명사들이 사실은 그런 시적 언어외에는 일상언어로는 접근도 되지 않는 것들이다. 현존재, 보기놀이, 천사, 포옹 등등이 그렇다.
릴케의 좋은 점은 독자를 묵시록적 분위기에서 독자를 독촉하지도(엘리엇이 황무지에서 하는 방법이다) 않고 기독교처럼 누군가에게 감사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메멘토 모리라는 로마시대 경구처럼 늘상 기억해야할 압박도 없고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카뮈처럼 생명력 넘쳐서 순간순간의 축복을 누리지도, 니체처럼 의연하게 아모르파티! 를 외치지도 않는다. 난 그럴 힘이 없다. 그저 함께 감정을 느낀다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공감하고 인간에 대해 생각해번다는 점에서 사색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것이 정말 극명하게 잘 나타난 것이 릴케의 시가 아닐까. 그의 비가 자체가 그가 추구한 변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음절들로 테마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향시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떠한 문장도 직설적이지 않아서 신기하고 그가 감각이 아닌 영혼으로 느낀 것들을 변용시킨 것 같아서 (보들레르 생각도 났다. 둘 다 뭔가를-문학적 절대? 이상?-말함에 있어서 보들레르가 육체적이라면 릴케는 영혼적이다.) 비록 읽기는 매우 어려웠지만 꼼꼼히 원문과 대조하며 3번 읽으니 어느정도 감이 왔다. 릴케가 대단하다고 느낀다.

책 자체를 평가하면 오르페우스 송가와 릴케의 편지, 소네트 등이 실려서 작품의 이해를 약간이나마 돕는다.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를 해설하며 쓴 편지에 언급된 작품이 다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석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데 자세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덕분에 시를 교수가 강독해주는 것만 같아서 좋다. 친절하고 전문적인 주석이 없었으면 이 시의 방향도 못잡고 반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오히려 미주라서 더 세세하게 시를 분럭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피카소의 그림이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그림이 실려있지 않아 직접 찾아봐야했다는 것과 번역 문제다. 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다. 최대한 독일어 원문의 운문에 맞추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독일어 단어의 가까운 한국어 단어들을 고심한 것, 번역시임에도 원어의 문단설정을 최대한 존중한 점 등이 너무 좋았다. 원어와 다조하며 읽기에 꽤 편해서 깊게 공부하고 싶은 독자들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표지 디자인은 디아나 여신이 있는데 소재상에서 두이노 비가와의 관련은 애매하지만 그 분위기와 느낌이 잘 살고 세련되어 좋았다.

(두이노의 비가 전체를 해석하면서 읽어봤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전문을 읽어 녹음하고 계속 틀어놓기도 하고 원문과 대조하면서 읽었다. 스스로 읽고 싶었다.)(5비가에 등장하는 피카소 그림)

제 1 비가.

주인공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존재들인 천사들 앞에서 절망한다. 이미 변용을 완수한 존재들인데 인간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현존재를 추구하지만 원천적으로 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막연하게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마도 사물들이 있다는 것이리라. 한번뿐인 것들은 영원한 천사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루하다. 주인공은 그러한 사물들인 길, 습관, 나무들을 떠올리다가 밤을 떠올리는데 밤은 고통의 순간이다. 왜 고통의 순간인가? 과거와 달리 더이상 밤은 뭔가의 예감을 충족시키는 공간이 아니고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밤의 쓸쓸함은 물질적인 밤이 아니더라도 때때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갑자기 압박감과 우울, 외로움, 우울함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두이노의 비가 자체가 고통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이렇게 1가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주인공은 뭔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은 주인공에게 그동안 말을 걸어온 밤의 영원함에 대한 동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뭔가를 원하며 부탁하듯 다가왔을 봄, 바이올린소리 등등 영원한것들. 그 부탁들에 대해 주인공의 반응은 동경과 예감이었다. 마치 애인을 가져다주기라도 할 것처럼 느꼈다.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리움에 사무칠때면 동경하는 러브스토리를 생각하라고. 가스파라 스탐파는 짝사랑하다가 죽은 여인이다. 시인은 그녀가 결코 불멸의 전설이 되었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사례를 통해 ㄱ역시 막연하게나마 변용의 당위가 꿈틀거린다. 변용은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변용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어딘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이미 자각되는 “머무름은 없다”는 깨달음에서 비롯한다.
그 속삼임 사이에 망자들, 인간의 죽음도 껴있다. 죽은 사람들은 어떨까? 지상에서 떠나니 어색해할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뭘까? 그러나 단정적으로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과 영원과 관련된 비밀 없이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1 비가는 마무리된다.

제2비가
2비가에서는 두가지가 대비되는 요소 두개가 등장한다. 마치 음악의 대위법처럼 선율들이 연주되고 서로 얽힌다. 첫째는 천사와 인간, 둘째는 현대와 과거다. 시작은 천사와 인간으로 시작하는데 과거 인간들은 토빗시대때 천사와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천사들은 그들의 가장 아름답고 영원한 순간들을 자기들끼리 누리면서 마치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를 담는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고 좌절하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순간들이라도 지나가기 때문이다. 아마 혹자는 연인들이라면 다를 수 있을거라고 한다. 아마 연인이 가장 천상에 상태에 근접할 것이다. 계속 껴안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한 연인임에도 처음 지나간 정원, 첫키스 등등은 한번 딱 지나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연인들은 서로를 탐하지만 결코 서로에게 이르지 못하며 갈증만 증폭시킨다. 그런데 순간은 지나갈지라도 그 순간을 지나온 존재인 나는 아직 있다. 그리고 순간의 존재인 인간은 신의 영역과는 다른 곳에서 위대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변용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목표를 추구하는지가 이제 등장한다. 시인은 자신의 시선을 인간들로부터 돌려 위대한 예술에 초점을 맞춘다. 릴케가 언젠가 본 로마시대 부조의 그 섬세한 모션. 인간은 손으로 이런 위대한 것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 안에 신적인게 아니라 인간적인 것들이 들어가 있다. 2비가를 마치며 이러한 과거인들과는 달리 그러한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대인의 질박함에 대한 한탄이 등장한다. 정말 슬픈 것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대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같은 울렁이는 가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꼭 고대그리스가 아니라 예컨대 릴케를 봐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찌보면 예술로 자신의 고통을 변용해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과거의 예술들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자체가 얼마나 먼 것인지 눈앞이 깜깜하다.

제 3비가
3비가는 성에 대해서 다룬다. 왜 성에 대해 이야기했을까? 시인은 애인에대해 말하면서 성욕을 “죄 많은 피의 하신”으로 일컫는데 이에 대해 노래 하는 감정은 괴로움이다. 아마도 서양의 이원론적인 태도-천상과 지상 도식-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시인이 두이노의 비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순간과 영원에 대한 인간존재의 탄식과 변용이다. 이런 전체적 맥락에서 볼때 시인은 천사들이 갖지 않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래서 순간, 사물, 인간이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성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말그대로 발가벗기는 것이기 때문에 추함과 욕망, 쾌락의 영역까지도 포괄해야만 한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또한 역설적이기도 한데, 여성에게 남성이 이끌린 것은 별들에 대한 동경과 궤를 같이하는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옥과 천국이 함께 있는 것이다. 릴케가 바라보는 남성의 성욕은 운명적인 것이기에 남성의 컨트롤에서 꽤 벗어나있다. 시인이 3비가에서 이야기하는 대상은 처녀다. 처녀는 남성의 성욕을 조절할 수 없으며 남자를 흥분시킨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시인은 그게 아니라 원초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 원초적인 것은 남자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그러나 이중적인 존재로, 모순적이다. 남성을 이 세상에 낳아주었지만 성욕의 세계인 어둠을 아들로부터 철저히 은폐시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성공적일 수 없다. 그의 내면은 ‘덩굴처럼 자주 뻗어가’ ‘짐승처럼‘ 된다. 이는 조상에게까지 소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야성성을 사랑하는 소년은 조상이 있는 곳까지 내려가 원초적인 욕망을 받아들이게 되고 남성이 된다. 여성보다 남성이 사랑한 것은 이것이었던 것이다. 이 논리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여성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원초적 욕망이 먼저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어머니로, 조상으로,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와 족보는 그렇게 대대손손 이어졌다.
 이 이어짐이 릴케가 강조하고 싶었던 뭔가다. ’태곳적의 수액이 팔을 따라 흐르는‘ 것이 인간 존재인 것이다. 처녀보다 더 먼저 왔으며 처녀보다 더 사랑받는 것의 정체인 셈이다. 여성은 그것을 꾀어낼 뿐이다. 그 수많은 존재들을. 그러나 여성은 그 야성적인 남성의 성욕을 인지한채 절제시키고 잘 이끄려는 역할이 있다.

제 4비가
합일에 대한 비가다. 시인은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합일을 꿈꾸지만 합일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리짓는 철새도, 혼자 자족하는 사자도 아니다. 합일될 수 없음을 극복하려는 몸짓들은 스러질 뿐이다. 하나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있다. 다시 연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하나라고 생각되는 순간에서조차 누군가를 필요로하는 것은 아주 그로테스크하지만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릴케가 이렇게 냉소적이었나 싶은 정도의 돌직구를 던지는데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는 적대관계라고 말한다. 슬프기 그지없다. 그래서 비가인 듯 싶다. 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대한 그런 비가. 그러면서 연인들은 줄곧 언저리 혹은 여백만 밟는다고 한다. 넓은 세계, 고향, 사냥을 약속한다지만 말이다. 연인들은 그런 원대한 꿈을 꾸지만 결코 거기에 이를 수 없다는 말 같다. 함께 모험을 하고 더 넓은 세계를 보거나 드디어 안정감을 찾거나 하는 것은 늘 꿈꾸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연인들은 환상속에서 살며 결코 이르지 못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가까운 관계는 적대관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계속 생각나고 의식하는 것이 적대관계일 테니 말이다. 조금만 더 릴케가 말하지 않은 것, 행간을 읽어보도록 하자. 연인관계가 비현실적이라면 적대관계는 적어도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실질적으로 끈끈히 맺어진 관계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서로를 싫어하는것, 그 감정이 사랑보다 진정 더 강렬한 것이라면 이 인간의 한계는 그야말로 탄식할 만한 것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심상은 흔들거리는 종이위에 그려진 연극이다. 이 연극에서는 멜로드라마가 상영되는데 날아갈것처럼 위태롭고 가벼우며 진실되지 못하다.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시인에게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가면과 연극은 허위와 위선,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속이 꽉 차있는 사물인 인형을 더 좋게 쳐준다. 여기서 릴케는 schauen이라는 동사를 이용해 장난을 치는데, 번역을 보게되면 바라봄이라는 것은 연극배우들인 schau-spiel과 같은 단어이지만 다르게 쓰이는데 schauen은 진지한 사물에 대한 응시라면 schau-spiel은 쇼라는 것이다. 보여지는 것, 그리고 보여지는 것에 맞춰 진행되는 거짓된 연극인 것이다. 시인은 응시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이에 그려진 모든 게 사라지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인 친구들과 죽은 형이 사라져 혼자 남더라도 남아서 응시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응시라는 것은 용캐도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응시는 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 같다. 혹은 눈이 없어도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바라봄,응시의 체험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조감하며 평가하지 않으며 막 수단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응시를 통해서 인간존재에게 지워진 필연의 한계, 즉 관계를 추구하지만 어떠한 관계에서도 합일을 이룰 수 없는 그 조건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뭔가가 열릴 것이다. 그 전에 시인은 아버지에게 대화를 건낸다. 시인의 아버지는 죽은 모양이며, 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낀 것 같다. 어느정도냐하면 아들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보다도 더 사랑한 듯한 느낌이다. 시인이 아버지를 이야기한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것이 사랑을 통한, 죽어서까지도 응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독자를 부르면서 자기 자신도 아버지가 자기를 응시했듯 독자를 보고자 했음을 말한다. 그러한 사랑의 응시로써 시인이 보고싶었던 것은 그 맞대응하는 대응시로써 ‘천사가 인형-아까 연극배우보다 더 좋다고 한 그 사물인 인형-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풍경이었다. 시인은 비로소 응시를 통한 현존재의 실현을 시어를 통해서 가닿도록 드러낸다. schau-shpiel에 대비되는 schauspiel(진정한 응시의 보기 놀이)인 것이다. 이로써 연극의 허위는 극복되고 존재 그 자체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때가 되면 합일의 욕망이 아니라 항상 합쳐지는 것이 되리라고 예언자의 목소리로 시인은 말한다. 그때 생각나는 것은 어린시절이다. 어린시절은 ‘형상들 뒤에 지나간 것 이상이 있었고 우리 앞에는 미래도 없던 시절’이며, 빨리 성인이되고자 하며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성장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형상들 뒤에 지나간 것 이상이 있었다는 말은 그때는 현존재였다는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어린시절을 자연, 세계와 통합된 이상적인 시기로 기억하고 이상화한다. 비록 실제 어린아이들의 세계와는 차이가 크겠지만 말이다. 시인의 논리에 따르면 어린시절에 마주친 형상들은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항상 뭔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나이가 드니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앞에는 미래도 없던 시절이라는 것은 현재 그 자체로 풍만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이 불안정하니 미래를 생각하게 되고 미래에만 푹 빠지는 어른들은 결국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게 된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 간략하게만 정리하면 대충 우리는 결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떠올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현재가 살 가치가 충만하고 미래때문에 현재를 날려버리는 어른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인은 이어서 어린이라는 과정도 순수한 인간의 과정 중에 하나이며 애초부터 죽음을 필연적으로 품고 있다는 비극을 언급하면서 죽음과 어린시절을 하나로 묶어낸다. 그리고 여기서 태연스럽게 분노하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은 다시금 성공한 줄 알았던 합일의 경지로부터 분리시키며 원점의 좌절로 돌아오는 것 같다. 인간은 아무리 어린시절의 영원의 기억을 품어도 영원할 수 없다. 그 순간에도 죽음은 함께이기 때문이다.

제 5 비가
제 5 비가는 쾨니히 부인에게 바치는 시인데 쾨니히 부인의 집에 릴케가 방문해 감상한 피카소 그림 <family of saltimbanques>에 온전히 몰입된 시다.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라는 것을 모른 채로 이 시를 읽으면 무조건 길을 잃게 되며, 주석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릴케가 스스로 떠올린 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피카소 그림중에서 그렇게 유명한 그림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인터넷에 검색해서 찾아봤다. 작가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마를 날이 없는데 피카소의 그림 한장에서 릴케가 끌어낸 심상과 느낌은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게 분명하다. 내가 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과 많이 차이나서다. 내가 먼저 그림을 보고 느낀 점을 써야지 이 시가 더 잘 이해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일단 이 그림만 놓고 이야기를 해보자면 왼쪽에 있는 도형 무늬 가득한 옷을 입은 가장 키 큰 남자가 있다. 손에 뒷짐을 지고 있는듯 등에 손을 붙이며 옆이 여자아이와 악수하는듯 손을 크게 펼치고 있다. 약간 어색해보이기도 한다. 다리힘이 센 듯 다리 근육이 많이 보이고 긴 신발을 신고있다. 얼굴 표정은 약간 웃는 듯 아닌듯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우울해보인다. 바로 옆에 있는 붉은 광대 옷의 남자는 지쳐보이고 광대일에 흥를 못 느끼는 것 같다. 아저씨로 보이기도 하고 청년으로 보이기도 하다. 자루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다. 배가 많이 튀어나오고 풍만한 체형이다. 표정은 광대옷과 상당히 안 어울리는 것 같다. 광대옷의 익살스러움과 대비되는 그의 표정은 즐거움도 웃음도 없이 불만족 스럽다. 그 옆의 비쩍 마른 상의탈의 남자는 일꾼처럼 보인다. 드럼통같은 것을 들고 서 있고 눈은 고통스럽게 그림자에 가려져있다. 노동하는 인간의 표정이 이런 것 같다. 꽤 젊어보이고 굳게 닫은 입은 거친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 옆의 소년은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온전히 홀로 가장 밝은 빛을 맞고 있다. 입으로 미소를 짓고있다. 이것도 같이 있으니 미소를 짓는 것이지 만약 소년만따로 있었다면 아주 희미한 미소라고 여겨졌을 듯 싶다. 밝은 파란옷을 입고 키가 가장 작다. 소년은 어머니를 바라보는데 어머니와 얼굴은 매우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무관심하며 오직 자기 자신에만 관심이 있는 듯 하다. 한편 처음 사내의 오른손을 잡고있는 여자아이는 얼굴이 안보이는데 새침해보이기도 하고 슬퍼보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사막같아보이는 이상한 공간에 있으며 인물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게 배치되어있어서 그림을 콜라주한 것 같기도 하다. 비현실적인 느낌과 현실적인 느낌이 공존한다.
릴케는 이 시를 “그들은 누구인가? 이 나그네들은”으로 시작한다. 잘 시작한 것 같은데 그야말로 이들은 특이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비루해보이는 이들에게 나그네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그림에서 진정으로 이들은 웃긴 옷을 입고 존재가 제거당한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듯 싶다. 릴케는 이들이 구부러지고 망가져 반창꼬처럼 놓였다고 한다. 마치 곡예사들이 던지는 물건들처럼 이들 자체가 세상에 의해 던지고 찢긴 듯 시적 이미지가 연상된다. 릴케의 눈에 이들은 세상에 의해 망가지고 아픈 인간들이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던지면서 릴케는, 버림빋은 우주의 양탄자 위에 놓였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들은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내려진 사람들이다. 그들 존재도, 그들이 있는 양탄잗도 그렇다. 아마도 이들은 지금까지 시에서 언급된 것처럼 영원을 꿈꾸다가 필연에 좌절하기를 몇번 한 것 같다. 장난삼아 이들을 굴리는 것의 정체는 이후에 밝혀지다시피 “고통”이다. 이들은 dasein 현존재가 되지 못하고 dastehn이 된 자들이다. 이들이 곡예사라서 영원의 순간들을 때때로 맛보다가 추락하기도 할 것이지만 일반적인 인간적 삶에 대한 은유이다.
관중들의 응시가 아닌 바라봄 속에 첫번째 남자는 불만어린 미소를 띄고 있고, 북을 든 남자는 늙고 쭈그러들어 보잘것없어졌다. 광대옷의 젊은이만 단순하고 근육질이다. 시인은 연민어린 동시에 매정하도록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이들은 고통의 장난감들이라고 했다. 인간이 어떻게 고통의 장난감일까? 릴케의 이 엄청난 표현 재능에 대한 찬사는 치차하더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고통이 아무이유없이 재미로 갖고노는 것이 인간 운명과 인생의 본질이라면 정말로 잔인하고 씁쓸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지금껏 인생에서 겪은 고통들이 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통이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거라고 생각한다면 단순하게 절망적이다.
한편, 파란옷을 입은 소년은 시인에 의하면 계속 곡예 연습을 하다가 넘어지고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 고통가운데서 어머니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어머니는 아주 매정하게 지워버린다. 아이는 고된 훈련으로 인해 마음이 아픈것보다 발바닥 아픈게 더 크다. 그러나 그 미소만은 천사들이 가져갈만한 것이다. 소년 곡에사의 웃음은 천사의, 영원한 순간이다. 비록 어머니에게 대답받지는 못했지만 찬미받을 순간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등 돌린 소녀는 시인에 따르면 행복과 기쁨의 소녀인데 그마저도 ‘무관심의 시장 과일’ 이라고 칭해진다. 과일은 식물이 그 생명력을 응고시켜 인고의 과정을 지나 얻은 축복의 과실이기에 기쁨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시장의 과일에대해 모두 무관심할뿐이다. 사물도 이런데 인간은 더 무관심의 대상이다. 시인은 이 그림의 장소를 불완전한 곳, 힘겨운 ’장소 없는 무소‘이다. 아마 현대의 공간일 것이다. 20세기 현대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공간으로 개인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게 되고 존재로서 온전히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한다. 21세기도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파리의 광장으로 비유한다. 모두 싸구려와 가짜가 넘쳐나는 공간이다. 말테의 수기에서 주된 배경으로 등장한 파리와 동일한 의미에서의 파리다. 사람들이 죽으러 오는 곳. 생명력을 소진하고 존재를 잃어버리는 곳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변용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다. 시인은 희망해본다. 천사들에게 매달리면서 희망을 부르짖느다고 하는 편이 더 올바를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들이 모르는 광장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썩은 미소, 응답받지 못하는 미소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 마주보며 미소짓는 곳이 있는 곳이. 아마 그곳은 영원한 세계일 것이다. 서구문명이 그토록 꿈꿔 왔고 결코 도달하지 못한 천국일 것이다. 아마 시인은 메시아적인 탄식을 바치는 게 아닐까? 가장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메시아적인 비가인 것 같다. 고통스러운 소년의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의 미소를 보고 연민에 불타 슬퍼하며 그 소년의 미소가 응답되고 성취된 그런 장소를 꿈꾸고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비루한 인간들의 슬픔을 보여준 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구원과 천국을 애타게 갈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이 소년의 미소를 천사들이 가져가면 이 미소가 영원해질 수 있는가? 어차피 순간이지 않을까? 시간. 눈 감았다가 뜨면 끝나버리는.(독일어로 순간은 augenblick인데, 눈 감는다는 말이다.) 진정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마 사라져버릴 것이다. 오히려 성취되지 않아 아름다울 수도 있다.

6 비가

이 장은 영웅에 대한 장이다. 지금껏 우리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영원을 향한 열망 및 노력과 좌절을 보았다. 가장 근접했던 사람들은 아마 연인이나 어린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7장에서 나타날 태도변화 전 마지막으로 갈망하며 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영웅은? 영웅은 다르지 않을까?’ 꽃보다 열매가 먼저피며 시간을 앞지르고, 자기가 피고싶을때를 정하는 무화과는 진정 영웅의 성격과 비슷하다. 이 피어남은 많은 영웅들을 유혹하고 영웅은 계속 상승한다. 시인은 이렇게 무화과같은 영웅들이 어릴때 죽은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 말뜻은 어릴때 죽은 아이들은 현존재로, 세계가 일치할때 죽은 자들이기때문에 영웅과 비슷한 것이다. 영웅은 현존재다라는 것이다. 영웅은 기본적으로 범인과는 구분되는, 범인보다 뛰어난 존재를 지칭한다. 이 영웅은 스스로 선택하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힘에 눌려 시인은 ‘그리움을 피하여 숨고싶다.’며 어릴적 소년이 되어 삼손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고 한다. 길가메쉬, 오디세이아 등등 수많은 인류의 영웅들 중 시인이 대표로 가져온 영웅은 놀랍게도 삼손인 것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머리에서 힘이 나왔으며 신실한 자였다. 영웅적으로 고결하고 능력도 있었지만 델릴라에게 유혹을 당해 머리를 잃고 기둥에 묶여 눈도 잃는다. 그러나 결국 기둥을 모두 무너뜨리는 초인적 힘을 보여준다. 시인은 아마 삼손의 최후가 비참하고 완결이 난 영웅이라 그를 데려온 게 아닐까 한다. 시인에 의해 삼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삼손을 낳은 것은 어머니었지만 이미 자신의 힘으로 선택하기 시작하고 영웅적인 업적이 나온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이미 몸을 돌려 웃음의 끝머리에 선 그는-다른 모습이었으니.’로 끝맺으며 그의 비참한 최후를 암시한다. 그렇다. 이 비가에서는 영웅마저도 인간의 한계에 굴복하며 죽는다는 것을 애통하게 표현한다.

7비가

그동안 인간의 한계와 가닿지 못함에 대한 시인의 울부짖음, 그 본질은 뭐였을까? 이제는 성찰이 들어간다. 6가까지 시인은 일종의 구애를 했던 샘이다. 영원에 대한 것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애를 했던 것이다. 영원을 추구하고 희망했다. 하지만 그동안 영원에 성공적으로 이른 비가가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 아니었다. 영원에 대한 희망은 무참히 실패하며 가라앉았다. 오히려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 울부짖음의 본질이 구애가 아니라고 시인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비록 여자친구에게 정말 순수하게 구애하는 것에서는 다르다고 하지만. 영원, 천사와 달리 여자친구도 나와 같은 사람이고 따라서 같은 것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느끼지 않냐고 깨닫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짝이 될 수 있다. 구애는 무엇인가? 계속 달라붙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알리는 형식을 취하며 결국 말그대로 사랑을 얻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구애한다. 구애도 어느정도 필요한 연애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구애가 실패하면 어떤가? 남자는 운다. 자기는 주체할 수 없을정도로 사랑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봤음에도 달라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그 울부짖음의 본질은 자신의 마음처럼 되지 않음에 대한 슬픔이고 비탄이다. 그런데도 사람이기에 원칙상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 남녀와 다르게 천사 혹은 영원과의 관계는 다르기에 이제는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속박과 유한함은 그야말로 운명인 것이고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제는 구애가 아니어야 한다’ 혹은 ‘구애는 그만’(원어로는 Werbung nicht mehr, nicht Werbung)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오는 시상은 봄과 여름이다. 솟아오르지만 떨어지는 분수가 있는 봄, 잊을 수 없는 별들이 있는 여름. 그때 시인은 연인을 부르고 무덤에서 소녀들이 함께 나온다. 그 소녀들은 연약했지만 시인은 그 연약한 존재들에게서 현세에 존재함은 훌륭하다는 문장을 담담히 내뱉는다. 누구나 한 시간은 이 세상에서 현존재로 핏줄까지 충만했고 그 자체로 가치있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아모르파티이기 때문이다.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아무리 자신의 삶이 반복될지라도, 아플지라도 결연히 기꺼이 자신의 삶을 한번 더 살겠다고 하며 운명을 끌어안고 긍정하는 것이다. 소녀들은 겉보기에는 함몰되고 쓰레기 사이에서 쓰러진 이들이다. 하지만 그저 존재했다는 것만 해도 그 자체로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속인들을 비춰봤을때 시인은 절망한다. 속인들은 그런 현존재의 순간들을 놓치고 잊는다. 오직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확인해주거나 눈에 보여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문이 든다. 그러면 어떤 것이 현재를 충실히 누리는 것일까? 다양한 답변이 제시될 수 있는 질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질문하고 답을 찾은 문제도 이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순간순간을 누리며 충실히 살아가라고 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메멘토 모리를 상기하며 살아갈 수도 있고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일상에 존재하는 순간순간의 신들을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 릴케의 대답은 어떨까?
릴케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1비가에서 암시된 변용이라는 주제를 꺼낸다. 릴케는 내면으로의 변용이 가장 확실한 행복이라고 한다. 요지는 ‘내면’이다. 마치 릴케가 이 비가에서 봄과 여름의 수많은 기억과 요소, 심상과 이미지를 떠올린 것처럼 그것을 내면으로 끌어와 변용시키는 것이다. 자신이 지나보낸 세월들을 죽기전에 8권의 책으로 퍼내며 잃어버린 시간들을 주워담고자 했던 프루스트가 생각난다. 그리고 과거에는 부조나 석상 등으로 외부 공간에 만들었다면 이제는 세계가 줄어들었기 때문에(’한때는 지속적인 집이 있던 곳에 가공에 형체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외부는 거의 불가능하다. 나아가 성스러움도 사라져서 더이상 성물앞에서 사람ㄷㄹ은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내면으로 변용시키는 것이 방법이다. 릴케의 상상력과 해결법이 놀랍다.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외부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면에서 변용시킴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의 감수성과 상상력, 내면세계에 대한 릴케의 믿음과 아낌이 솔솔 묻어나오는 것 같다. 거창하게는 예술을 만들고 작게는 내면을 가꾼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더 탐구가 필요하다. 어찌되었건 시인은 이렇게 내면적인 변용에 대한 전망을 긍정적으로 제시한다. 인류가 위대하게 쌓아올린 사르트르 대성당 피라미드, 음악이 인간의 능력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알고보니 기적이었다. 이들은 모두 하루살이같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이 만든 이 위대한 흔적들은 아직까지도 찬탄받고 그 감동 역시 아직 모두 채워지지 않았다. 이것들은 영원한 천사들은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인간의 위대한 약동과 거대한 힘을 토대로 삼아 천사에게 맞설 용기를 얻었다. 마치 여자에게 차인 남자가 더 강해진 내면과 힘, 이미 가진 것을 발견하고 자존감을 회복해 더 이상 그 여자에게 구애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천사에게 외친다. (심지어 시인은 사랑하는 여인까지도 구애한다고 여기지 말라고 선포한다.) 자신이 구애한다고 여기지 말라고. 이제 구애는 없다고 말이다. 영원을 바라지만 영원할 수 없어서 절망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영원하지 않기에 오히려 위대할 수가 있다. 변용할 수가 있다. 천사는 잡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애해도 절대로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로써 ‘저리 가라’며 팔을 뻗히고 이제 그 동작은 잡으려는 동작이 아니라 잡지 못함을 아는 동작이다. 경고이자 열림의 동작이다.

8 비가

8비가는 생뚱맞게도 짐승의 시야로 시작한다. 친구의 집에서 모기에 대해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영감받아서 쓴 것이다. 모기와 같은 짐승들은 시인에 따르면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인간은 닫힌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피조물을 향하며 일방향으로 걸어다니는 것이다. 인간은 형체와 미래만을 보지만 동물은 자기 자신을 보고 더 자유롭다. 인간의 어린 시절에는 영원에 대한 동경을 갖지만 어른들이 이내 그 시선을 돌려놓고 결국 아이는 죽어서나 영원으로 향한다. 인간은 계속 수많은 것들에 정신이 빼앗긴다. 그래서 계속 떠나가는 자의 자세를 갖는다.
다시, 영원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7비가에서 시인은 더이상 영원을 갈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토록 찾았던 장소없음의 유토피아도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응시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곳에도 천사가 나타나지 않음도 알고 있다. 일종의 체념일수도 있지만 내게는 묵묵히 받아들이는 태도와 동시에 일종의 안타까움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자유롭고 태연하기 짝이 없는 짐승도 회상이라는 것이(동물에게 회상이 어떤것인지 궁금한데 릴케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를 처치한다. 릴케에 의하면 동물들의 회상이란 자궁에 있을때인 것이다. 사실 인간도 공유하는 경험이기때문에 보편성을 갖게된다. 즉, 인간 역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체념했다고 해도 자궁에 있을때 세계와 합치된 느낌의 그 잊지못할 추억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몰려오면 다시 영원에 대한 동경에 물밀듯 잠겨 합일, 세계와의 일치를 꿈꾼다고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서 더 나아가 관객처럼 두루뭉술하고 우유부단해서 언제나 작별을 함에도 머뭇거린다. 이는 꽤 어렵지만, 나는 7비가에서의 깨달음 이후의 비가(슬픈 노래)로 이해했다. 더 이상 영원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 투쟁이 인간으로서는 벅찬 것이다. 여기서의 인간의 한계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는 동물의 특성과 비견되는 것으로,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을 꿈꿀 수밖에 없고 사물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다. 동물처럼 열린태도로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피조물, 미래를 보면서 바깥세상의 되비침만을 눈에 집어넣는 것이다. 시인은 다시 절망하며 비가를 부른다.

9 비가

먼 길을 지나 우리는 두이노의 비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9 비가에 도달했다. 9 비가에서 시인은 깨달음을 얻으며 인식의 확장과 변용을 달성하는 것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에서 위로를 구하며 안식이 가능해지는 장면이다. 그렇기에 이전과는 달리 비가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대신 시작은 비가로 시작된다. 시인은 현존재의 마감을 월계수에 은유하며 그 특성인 고통에 대해 질문한다. 월계수는 아폴론과 다프네 이야기에서 얻은 것인데 이야기에서 에로스의 화살에 맞은 아폴론이 다프네를 쫒아다니는데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 다프네는 신들에게 요청해 월계수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 다프네는 아폴론이 끌어안으려는 그 순간에 월계수가 된다. 인간에서 식물이 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피부가 점차 초록색이 되면서 잎사귀가 손끝으로부터 자라나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초록빛보다 조금 더 어둡게”는 미주에 의하면 고통을 의미한다. 다프네 월계수는 아마 다른 월계수보다도 더 어두웠을지 모른다. 아폴론으로부터의 도망침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것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변용이다. 그러나 또한 시인은 ‘작은 물결을 잎사귀마다 지니고 (바람의 미소같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는 안정과 휴식이다. 변용된 다프네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을 맡긴다.이제는 아폴론이 괴롭히지 않는다. 그저 살랑이는 즐거운 기분을 즐길 뿐이다. 이래서 현존재의 마감은 다프네, 월계수, 변용인 것이다. 그러나 첫행의 끝무렵에서 시인은 묻는다. 그렇다면 왜 인간적이어야 하고, 운명을 피하면서도 즐겨야 하느냐고. 내 생각에 시인의 이러한 고뇌는 그 과정이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현존재의 끝은 죽음이다. 그것이 운명이다. 죽으면 영원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더 이상 영원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신적이지 않고 인간적이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약하고 죽음에 의해 살면서는 천사의 세계에 발을 담그지 못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래야 하는 이유가 행운이 있기 때문도, 호기심도, 심장 단련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마지막에 덧붙이길 ‘심장이 월계수 안에도 있을지 몰라’라고 한다. 다프네의 심장이 변용된 그때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일까? 시인은 단정짓지 않는다. 암시에 그친다. 변용된 상태도 심장이 있어 약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강한 심장을 갖고 초인이 된 것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린 월계수에게 심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 여기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온전히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대단하다. 사라져가는 것들과 한번씩. 매 순간이 그러하다. 되풀이 되지 않는 단 한번의 여기 있음. 천사는 알 수 없는 순간이다. 앞선 비가의 소녀들처럼 이 세상에 한번이라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하다. 가장 쉽게 사라지지만 오히려 단 한번이고 그 이후에는 다시 반복되지 않기에 가치가 있다. 시인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글을 쓰는 2025년의 3/12일의 수요일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딱 한번 스치고 넘어가는 여기 이순간이다. 내가 살면서 배운 것은 아무리 좋은 순간도 지나가버리고 정말 힘든 순간들도 언젠가 지나가 버리기에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약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적이고, 인간적이어야만 하다는 것에 대한 첫연의 답이, 포괄적으로 보면 비가의 답이 던져진다. 영원한 것을 가질 수 없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초라해보였고, 닿을 수 없어 절망하는 것이 이전까지의 시인이라면 이제 시인은 순간이 지나감이 안타까움과 절망으로 생각되는게 아니라 인간존재의 핵심이며 대단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인은 우리 인간들이 이 소중한 순간들을 품고 영원히 간직하려고(‘말 없는 심장 속에 그것이 되려고 한다…. (생략)….가장 좋기로는 모든 것을 영원히 간직하는 것’) 한다고 한다. 다시 끈질긴 영원이 나온다. 나도 과거에 그런적이 있다. 일기를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기분 좋았던 날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서 일기에 박제하려고 시도를 했다. 그러나 좋았던 순간이 아니면 다 무시한 것 같다. 일부러 영원을 위해.
시인은 그러나 그렇게 할때 우리가 가져가는 것은 사랑, 고통이며 이전 비가에서 잠정적으로 영원으로 가는 길로 제시된 응시도 사건도 아니라고 하며  ㅅ ㅅ붜ㅇ
그럴수밖에 없는 그 심정이 괴롭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랑, 고통등은 영원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시인의 슬프고 특이한 고찰이 돋보인다. 시인은 그런 말할 수 없는 것들로는 아무리 해봐야 천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니 말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뭘까? 우리가 인간으로써 완벽히 말로 표현 불가눙한 닿을 수 없는 개념들일까?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포기한 그 영역, 신과 선악 같은 추상적인 것들? 혹은 고통과 사랑을 생각해보면 너무 절대적이고 무겁고 귀중해서 기도나 시와 같은 형식으로밖에는 표현되지 않은 것? 그런것들은 영원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남에게 이야기하기 힘들도 이야기할수도 없는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했을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비밀은 시간여행과 사랑인데 시간여행은 초월적이고 사랑은 자기만의 비밀이고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해받기를 갈망하지만 자기 외에는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합일될 수 있을까? 고통속에서 가스파라 스탐파의 전설을 되뇌이던 1비가로부터 우리는 훨씬 멀어져왔다.
시인은 그러므로 인간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별들 앞에서 다시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며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것으로 대비되는 ’말할 수 있는 것‘을 내세운다. 그것은 지나가버리는 사물들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아주 일상적인 사물들을 말이다. 이것들은 숨길 필요도 없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미술로 비유한다면 영원한것이 르네상스기 역사화라고 한다면 일상적인것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하기는 대지에 속하는데 시인은 이것이 대지가 다지위의 사랑하는 자들을 재촉하어 황홀케 만드는 은밀한 전략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이는 간절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라는 질문이 들어가고 그 대답은 ‘문턱’을 넘는 것, 다시말해 변용이다. 그리고 이것이 ‘말할 수 있는 것의 고향’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시인에 따르면 그 변용의 문턱은 요줌 사라지고 있으며 형상없는 행동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고 한다. 형상이 없다는 것은 이제 형상이 만들어지는 시가 사라지고 사유와 의미가 상실되는 그저 행동뿐인 행동이라 생각된다.
변용하는 곳에서 우린 행동이 든 껍질을 깨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찬미한다. 그리고 시인은 천사 앞에서 이 지상의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찬미하라고 한다. 천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보잘것 없다고 무시할까?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점에서는 인간은 풋내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그것은 천사의 것이 아니기에 천사의 영역 밖이다. 릴케는 우아하게 관점을 바꾼 것이다. 천사가 우리를 우러러 본다고. 천사는 마치 우리가 로마와 이집트의 장인들을 보는 것처럼 놀랄 것이라고 한다. 그 단순한 것들에 의미가 있으니. 그 단순한 것들은 사라진다. 그 사물은 시인에 의하면 행복하고, 죄없고, 심지어 “탄식하는 고통조차 순수하게 형상을 갖추려고 결심하고 한개의 사물로서 봉사하거나 한개의 사물 안으로 죽는다.“ 그러면서 1비가에서 나온 바이올린의 영원함에 대한 동경을 비껴간다. 사물들은 인간의 찬양을 받으며 인간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우리 그것들을 우리 자신으로 무한히 변용시키기를 원한다. 대지는 이 트릭을 통해 인간 안에서 되살아난다. 대지가 원하는 것은 변용인 것이다. (여기서 잠깐, 변용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가자. 시인은 사물들이 인간에 의해 인간 자신으로 변용시키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는 일상의 여러가지 사라지는 사물들을 기억해 예술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시인이 엄두해두는 것은 바로 두이노의 비가같은 시다. 시에서 사물들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지니면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시인은 그 가능성과 변용 자체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을 보는 것이다. ) 대지는 봄으로 찾아와 1가에서부터 인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말할 수 있다. 해마다 찾아오지 않아도 단 한번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으며 변용시킬 수 있고 결국 봄의 필요를 단 한번의 봄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다고. 그리고 대지, 지상의 자연적 순리는 영원으로 결국 들어가게 되는 죽음이라는 점도 시인은 잊지 않는다. 9가까지 변용되어 위로 올라온 시인은 비로소 말한다. 현존재의 고백이다. ‘보라, 나는 살고 있다. 무엇으로? 어린 시절도 미래도 줄어드는 것은 없다…….. 무수한 현존재가 내 마음속에서 솟아오른다.’ 현재를 사는 현존재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포용한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줄어들지 않기에 매 순간순간이 현존재적인 순간임을 고백하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10비가

이제 비가를 마치려고 한다. 1비가는 슬픈 밤으로부터 시작했다. 시인은 이제 천사를 감동시킬 수 있다. 변용과 사물, 대지의 기쁨으로. 인간에 대한 찬탄으로.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1비가에서 시작했던 그 슬픈밤이 천사를 기쁘게하는 것으로 덜 고통스러워질까 한다. 우리는 고통을 미리 내려다보면서 고통을 낭비한다. 나도 불안과 걱정으로 그럴때 많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은 자기가 그 슬퍼하던 밤을 더 몸을 낮추어 받아들여야했었다고 말한다. 시인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오히려 쓰다듬는 듯 하다.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그것은 월계수의 짙은 녹색이 말해주듯, 지속되며 필수불가하다. 오히려 시간이자 장소고 정착지다. 릴케의 내공이 드러난다. 현존재를 찾는 듯 해도 기쁘게 끝나지 않는다. 10비가 역시도 비가다.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허망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집트를 토대로 창조된 고통의 도시가 소환된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고통의 도시가 풍경화처럼 보여진다. 폭발과 소음의 건물과 기둥들이 있고 사람들은 돈의 논리 속에서 살아간다. 교회는 내세와 죽음을 통해 위안을 주려는 파렴치한들이기에 천사가 밟아줬으면 하고 바라고 “죽음없음”이라는 맥주는 쓰지만 딜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현실이 아니다. 꽤나 데카당스한 것 같다. 고통의 도시를 통해서 릴케가 보여주고자 한 고통은 어떤 모습인가? 아마도 죽음을 망각하고 소음에 갇힌 모습같다. 하이데거의 세인은 애마함, 호기심, 잡담에 갇혀있다. 아마 그런 맥락이지 않을까? 또 사람들의 제각기 이유로 고통스러운 것을 잊고자 취하고 속이는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상당히 타락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에는 돈이 있다. 현존재로 살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아이들이 노는 고통의 도시 한구석에서 한 소년이 탄식이라는 소녀를 사랑해 따라나선다. 매우 추상적이고 비유적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나는 릴케가 인간 본연의 고통의 핵심에 대한 메세지를 던져주기 위해 만든 우화 정도로 읽었다. 고통에서 더 깊은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시인이 쓰는 고통의 이미지가 참으로 애달프고 아름답다. 쇠락하여 흔적만 남아있는 쇠퇴한 귀족가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고통의 근원이 영원에 대한 동경이어서 그럴까? 회고적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소녀로 나타나면서 에로틱한 밤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그만큼 고통이 멜랑콜리하게 유혹적이라서 그런 것 같다. 탄식은 먼 바깥에 살고있다고 한다. 탄식이란 고통을 마주하며 비로소 나오게 되는 힘든 일 같다. 아마 그래서 특별한 이유로 합일을 이룬자가 아니고서는 고통의 탄식을 기꺼이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것 같다. 소년은 소녀가 아마 고귀한 가문 출신일거라고 생각하고 결국 하나의 탄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하며 발걸음을 멈춰 더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어서 조금 더 나이 든 여자인 다른 탄식이 말해주는 것 처럼 그들은 원래 고귀한 가문 출신이었다. 이집트의 온갖 죽은 파라오와 제후들이 그들의 조상이었고 이들의 조상은 원래 부자였다. 그리고 이들 재산인 고통과 분노는 인간세계에 묻혔다. 때때로 인간은 그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과거 탄식의 조상이 다스리던 슬픔의 식물과 동물들을 보여주고 영원한 별에 걸린 인간의 얼굴 즉 스핑크스도 보여준다. 이것은 추측건대 인간이 고통을 망각하려고, 피하려 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했던 과거를 보여주는 것 같다. 탄식이 인간과 늘 함께 있었고 슬픔 역시도 처연하지만 당당히 있었던 것이다.
탄식은 밤의 고통의 나라의 별들을 보여준다. 말타는 기수, 지팡이, 열매의 화환 등의 별자리다. 아마 인간의 역사이지 않을까? 인간사회문명이 지나온 것들 속에 전사도 있고 예언자도 있고 지도자도 있었을 것이다. 승리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르키는 요람, 길, 불타는 책, 창문이라는 별자리들은 시인의 어린시절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그렇게 점점 태곳적으로 돌아온다. 인간존재의 근원부터 탄식이 함께했기에. 그리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나온다. 그엏다. 첫 연에서 말한대로 이 고통이 바로 고향인 것이다.
고통 자체에서도 시인은 형용할 수 없는 의미를 찾았던 것 같다. 그 점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현존재를 찾는다고 영원으로 진입하여 인간이 신이되고 영웅이 되는게 아니다. 그것도 지나간다. 그 한가운데서 다시 고통을 마주했을때 그는 깨닫는다. 고통은 계속 남아있다. 릴케는 윤동주시인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듯 하다. 고통 자체를 고통 자체로 껴안는 시인이 눈물겹다.
그런데 이 비가의 끝이 10가인 이유가 있다. 아까 탄식을 따라나선 소년이 죽은 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절대 영원에 이루지 못해서 슬펐다. 오직 죽음만이 영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한 소년이 죽는다. 영원으로 들어가는데 왜 그렇게 슬픈 것일까? 이분법적 구분이 사라진다.
소년은 달밤에 그렇게 영원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번역과 원문 모두를 가져와봤다.

<번역: 산기슭에 서서 탄식은 소년을 끌어안는다. 울면서.

혼자가 되어 소년은 올라간다. 근원 슬픔의 산속으로. 그런데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는 운명의 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원문: Stehn am Fuß des Gebirgs.
Und da umarmt sie ihn, weinend.
Einsam steigt er dahin, in die Berge des Ur-Leids.
Und nicht einmal sein Schritt klingt aus dem tonlosen Los.>

<내가 시도해본 발번역:
산기슭 위에 섰다.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그를 안았다, 울면서.

혼자서, 그는 저 너머로 올라갔으니 그곳은 원-슬픔의 산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소리없는 운명에서부터.>

탄식이 마침내 인간을 안고 합일 비슷한 것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합일은 울면서 할 수밖에는 없다. 탄식은 가장 탄식다운 행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홀로 원 슬픔의 산에 오르는데 여기서 원은 Ur로, 원광, 원고향을 말할때 Urlicht, Urheimat 로 쓰는 것과 같다. 태초의 근원이다. 슬픔의 중심이자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보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의 합일을 이룬 것인데 그만큼 슬프다.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순간을 영원하게 하고싶다는 기본 욕구때문에 곧바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는다.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다. 소년은 이제 인간됨을 떠나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기에 발걸음 소리도 안난다. 시 전체에서 영원이 완벽하게 선취되는 순간이지만 시 전체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 삶이 정지해서 ‘소리 없는 운명의 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 그래서 끝까지 비가다. 정말 격조있고 품격있는, 인간존재의 비극과 필연에 대한 고통과 포옹의 슬픔이다.  못이뤄서 그렇게 절망하던 합일이 예상치 못하게 이뤄지는 듯하고 오히려 소년의 순간들이 빼앗긴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다. 그렇게 심지어, 그렇게나 떠나고 싶어하던 고통과도 인간은 작별을 하게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운명의 발자국 소리가 그쳤다. 어찌보면 최종적인 변용인 듯 싶기도 하다.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한때 탄탄한 팔이었을 다프네의 짙은 녹색의 월계수나무처럼.
여기에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주는 깨달음이 있다. 슬픔과 기쁨은 하나라고. 마치 도가나 인도철학과도 통하는 상대성의 원리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죽은 망자들의 교훈이라는 형식으로 재시되는 것은 겨울눈과 봄비다. 상승하는 행복과 내리는 행복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시인의 고통은 극복된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존재의 본질 중 하나일 뿐이다. 좋고 나쁜 이분법은 없다. 이 놀라운 모순, 순간과 영원, 죽음과 인생의 모순은 상대성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b*****2 2025.03.1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두이노의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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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이노의 비가 #라이너마리아릴케 #안문영 #을유문화사 왜 사는가? 난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삶과 죽음... 각 자의 운명은 왜 이런 것인가?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한숨처럼 한탄처럼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고, 갑자기 진지해져서 자신에 대한 성찰 할 여유와 생겼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고 성인이나 이 질문에 오래 고민한 현자의 책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
"두이노의 비가" 내용보기
두이노의 비가 

#라이너마리아릴케 #안문영 #을유문화사 

왜 사는가? 
난 누구인가? 
왜 태어났는가? 
삶과 죽음... 각 자의 운명은 왜 이런 것인가?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한숨처럼 한탄처럼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고, 갑자기 진지해져서 자신에 대한 성찰 할 여유와 생겼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고 성인이나 이 질문에 오래 고민한 현자의 책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멈췄다. 
어려워서... 
우리나라 작가의 현대시를 읽다가 스스로의 이해를 구하고자 멈춘 적은 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나 혼자는 해결이 되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거 같다. 
괜히 두이노 성을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릴케의 성장과정을 찾아보았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전에 번역했던 책을 읽고 이전에 서평이나 요약을 올린 분들의 글을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쓴 비가 와 소네트에 대해 질문한 홀레비츠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읽어보기도 했다. 그 편지가 비가 와 소네트에 대한 자신의 해설 같은 답장이었기에... 

천사 
어둠 
별 
밤 
사랑 
탄식 
.... 

책에 나오는 주로 사용된 단어들이 시를 쓰기 시작해서 마무리 지은 릴케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어느 방향을 일정하게 가르치는 나침반 같은 것이었겠으나 내가 갖고 보고 있는 나침반은 왜 계속 한 방향을 가리키지 않고 시종일관 돌고 도는지... 몰라 답답할 뿐... 


천사를 찾고 
동경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내 목소리에, 내 외침에 반응하여 나를 가슴에 끌어안았을 때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쓰러질 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뎌내는 무서움의 시작, 공포의 시작일 뿐이라는 허무함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슬픈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소네트는 두이노의 비가 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무언가 중첩되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들의 순환이며 그 속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성찰과 사랑과 관계에 대한 고민이지 않을까 싶다.

어렵다. 
헌데 쉬울 리 있겠는가? 
시인도 독일어 사전을 늘 옆에 끼고 시와 글을 적었다는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허투루 쓰인 것이 없을 테고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기 위해 꾹꾹 눌러 적었을까~싶다. 
이 글을 읽고 
백 년 전 쓰인 글임에도 어찌 이리 아름다운가?라고 감탄하며 놀라는 독자들이 부러울 뿐이며, 나 역시 그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 한번 더 천천히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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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사락 c*******e 2025.03.11. 신고 공감 0 댓글 0